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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韓 금속활자 모방 의혹 제기?

설레임의 하루 2011. 9. 3. 02:45

*출처:다음 지식창   글쓴이-미래영웅 |

 

 

 

 

 

獨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韓 금속활자 모방 의혹 제기

뉴스엔 | 입력 2010.02.21 12:43 |

 

[뉴스엔 김소희 기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인가? 모방인가?
2월 21일 오전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에서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자 인쇄기술의 혁명으로 불리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우리 나라의 인쇄기술을 모방했다는 의혹에 대해 소개했다.

 

독일의 금속 세공사였던 구텐베르크는 1450년 요한 푸스트의 지원으로 금속활자 인쇄본 제작에 성공했다.

납을 주조해 만든 활자본 290개에다 나사식 압인장치와 특수유성잉크를 고안해 글자 크기 20 포인트 42행 성서를 3년만에 180권

인쇄에 성공해 활자 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영국의 존 홉슨 교수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한국의 금속활자를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제시한 '직지'는 1372년 고려시대 백운화상이 만든 상,하 2권의 금속활자본으로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난 앞선 것이다.

1967년 박병선 교수가 프랑스에 보관중이던 이 활자본에 미세한 금속이 발견된 것을 감지해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주장했으며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소개했다.

이를 토대로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됐다.

또 이규보가 1234-1241년 지은 상정예문에는 고려시대 1200년대 초부터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당시 쓰인 금속활자본이 발견된다면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선다는 의미가 된다.

구텐베르크가 한국의 활자기술을 모방했다는 증거로는 당시 실크로드 등을 통해 동,서양 문물교류가 활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0년도 안되는 짦은 기간에 활자기술을 발명했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됐다.

보통 활자기술은 오랜 시간에 거쳐 전승, 발전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704년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의 목판인쇄부터 시작해 금속활자를 발명하기까지 5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활자 제작 경험이 전무한 구텐베르크가 1400년대 인쇄술이 전무한 상태에서 고도의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은 석연치않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과 독일 외에 중국을 포함한 교역로 인근에는 활자기술이 전해진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 한국과 독일에서 동시에

나타난 유사문명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미국 엘 고어 전 부통령이 2005년 서울 디지털 포럼을 통해 구텐베르크가 교황사절단으로 한국에 온 친구로부터 금속활자

기술을 발견했다는 문헌정보를 소개했다.

이와 함께 한국을 사절단으로 방문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과 구텐베르크의 친분관계가 확인되면서 더욱 모방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김소희 evy@newsen.com

 

 

[Why]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발해 대장경'의 정체는?

조선일보 / 입력 : 2009.12.19 02:42 / 수정 : 2009.12.21 10:01 유석재 기자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고지도인 ‘여지도서’를 가리키며“대화령국이란 지금의 함흥으로 옛 발해 땅”이라고 설 명하고 있다.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북방 불교문화의 역사… 고구려→발해→거란→고려 팔만대장경으로…

中 동북공정 허구 입증

"사상 처음 발해의 대장경이 출현했다."

일본의 서도(書道) 전문 학술지 '수미(修美)'는 최근 출간된 102호와 103호에 '발해 대장경'에 대한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의 저자는 '서체 대백과사전'을 쓴 이지마 다치오(飯島太千雄)다.

이지마는 논문에서 "이 경전이 발해에 당, 신라, 일본과 비견되는 불교문화가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했다.

5년 전 존재가 알려진 '발해 대장경'이 본격적으로 해외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직 교과서와 백과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발해 대장경'이란 도대체 뭘까?

1000년 전 사라진 수수께끼의 왕국 발해가 대장경을 인쇄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1990년대에 일본에서 입수한 '대방광불 화엄경 권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이란 제목의 불경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황마지 위에 먹으로 글자를 쓴 총 길이 8m50㎝의 불경이었다.

서예가인 고(故) 여초 김응현이 이 불경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참 달필이구먼….서도의 어느 경지에 도달한 이가 사심 없이 쓴 게 분명해." 하지만 다른 일부가 일본 교토(京都)국립박물관에도

남아있는 이 불경의 출처는 미지수였다.

단서는 '대화령국'이라고 쓰여진 제목뿐이었다. '화령국'은 동양 역사 어디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던 조 관장은 무릎을 쳤다. '화령이라? 가만… 이 지명은 어디서 본 일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에 '둘 중에서 국호를 골라 달라'고 요청했을 때 '조선'과 함께 후보로 올렸던 국호가 '화령'이었다.

그곳은 이성계의 고향 함흥의 별칭이었다. 역사에서 화령으로 불린 곳은 함흥뿐이었다.

이번에는 이 불경이 어느 시대 것이냐는 문제가 남았다.

조 관장은 대장경에서 '함차번호'라 불리는 일련번호를 분석해 이 불경에 나오는 '육(育)'이라는 번호가 서기 974년 이후에 중국과

고려에서 사용된 적이 없음을 알아냈다.

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장은 "통일신라시대 후기 경전을 쓸 때 정형화된 서체"라며 그 시기를 "8세기 말에서 9세기"라고 못박았다.

'아, 그럼 통일신라시대 후기 것이로구나'라고 결론을 내릴 무렵 다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함흥이 신라 땅이었나?' 아니었다. 신라의 북쪽 경계는 함남 용흥강까지였고 함흥은 그 위였다.

당시 함흥이 속해 있던 나라는 다름 아닌 발해였다.

역사에 기록돼 있지 않은 '화령국'은 발해 남쪽의 정치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 대장경의 일부로 추정되는 성암고서박물관 소장‘대방광불 화엄경 권제38 대화령국장’. / 조선일보 DB

발해의 5경(京) 중에서 '남경 남해부'는 지금까지 함남 북청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조 관장은 북청이 아니라 함흥이라는 단서를 일본 기록에서 잡아냈다.

일본의 정사(正史)인 '속일본기'는 서기 777년 발해 사신 사도몽(史都蒙)이 남해부 토호포(吐�{浦)에서 출발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정사는 약자를 쓰지 않은 게 불문율인데 호(號) 대신 호(�{)라는 글자가 기록된 것이 의아했다.

'혹시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중국의 '강희자전'과 일본의 '대한화사전'을 조사해 보니 '령(��)자는 비슷한 글자가 많아 잘못 표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령'이 맞다면 '토호포'가 아니라 '토령포'였을 것인데, 함흥 남쪽 연안은 고려시대부터 도련포(都連浦)라고 불렸다.

'화령국'이란 바로 발해 남경 남해부의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지마 다치오도 일본의 역사 기록이 잘못됐다는 조 관장의 논리에 수긍했다. 이 불경이 발해 대장경의

일부가 확실하다면, 최초로 발견된 발해의 서지 유물이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이 된다.

지금까지 발해가 불경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861년 일본에 '불정존승다라니기'를 전해 줬다는 내용뿐이었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은 고려시대인 1006년의 '대보적경 권제32'였다.

'대화령국장'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이었음도 밝혀졌다.

조 관장은 "거란 대장경인 '대방광불 화엄경'의 함차번호가 '대화령국장'과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대장경을 만들면서 사실상 발해 것을 그대로 베꼈다는 얘기가 된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만든 공로자인 수기(守其) 대사는 고려 초조대장경과 북송(北宋)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모두 참고했다.

결국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진 북방 불교문화의 계통이 고려의 팔만대장경에 고스란히 계승된 셈이 되는 것이다.

국내 대표적 불경 전문가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도 여기에 동의했다.

발해 대장경의 발견은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밝히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조 관장은 "독자적인 대장경은 중국과 다른 그들만의 천하관(天下觀)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국내 最古 발해 대장경 나왔다

 

8~9세기 제작… 趙炳舜 박물관장 日서 입수
‘발해는 中國지방정권’ 반박자료로 가치높아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대장경(大藏經) 중 가장 오래된 불경이 발견됐다.

이 불경은 발해(渤海·698~926)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서지(書誌) 유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지학자 조병순(趙炳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6일,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華嚴經) 권제38 대화령국장

(大和寧國藏)’이란 제목의 불경을 공개했다.

총 길이 8m50㎝, 세로 28.6㎝의 이 불경은 황마지 위에 먹으로 글자를 쓴 것이다.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함차번호와 서체로 보아 서기 8세기 후반~9세기 것이 거의 확실하며,

제작된 곳은 불경 제목에서 보듯 발해의 영토 안에 있던 지금의 함흥(화령)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경은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과 관련,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을 반박할

  • 획기적 자료로 보인다.

  • 조 관장은 “역사상 ‘화령(和寧)’으로 불렸던 지명은 오직 함흥뿐이었다”며 “발해의 수준높은 문화 중심지 중의 하나가 지금의

  • 한반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박상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이 대장경의 발견은 발해가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지니고 있던 나라였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지스카 하루미치(石塚睛通) 일본 홋카이도대 대학원 교수도 이 불경을 확인한 후 “주사(朱砂)로 괘선을 긋고 황마지를 사용하는 등의 특징과 서체로 보아 ‘중국 불경’으로는 볼 수 없고, 둔황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은 고려시대인 1006년 제작된 ‘대보적경(大寶積經) 권제32’로 알려져 있었다.

  • ‘대화령국장’의 일부는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도 있지만 그동안 ‘14세기 불경’으로 잘못 해석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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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거란 대장경의 사본을 짚으며“함차번호가 같은 발해 대장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팔만대장경은 발해대장경 계승한것”

     

    발해대장경은 거란대장경의 母本 처음 확인
    北方불교문화 발해→ 거란 →고려로 이어져

     

    최근 발견된 8~9세기의 ‘발해(渤海) 대장경’〈본지 8월 7일자 A2면〉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母本)이었음이 확인됐다.

  •  이로써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발해 것을 그대로 옮긴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거란 대장경을 상당 부분 참고한 13세기의 고려 대장경(팔만대장경)이 사실은 ‘발해 대장경’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아져 발해와 고려의 문화적 계승관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서지학자 조병순(趙炳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거란 대장경인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의 함차(函次)번호가 발해 불경으로 여겨지는 ‘대방광불 화엄경’ 권 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과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 함차번호란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매긴 번호로, 이 순서가 동일하다는 것은 곧 같은 계통의 불경임을 의미한다. 화엄경의 31~40권에 해당하는 현존 ‘대화령국장’의 함차번호는 ‘육(育)’이다. 그 앞에 존재했을 21~30장은 앞 글자인 ‘애(愛)’가 되지만 송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중국 불경은 이 부분이 ‘장(章)’으로 돼 있는 반면, 거란 대장경은 똑같은 ‘애’자였다.

    고려 팔만대장경(1251년 완성)을 만든 결정적 공로자인 승려 수기(守其)는 1087년 완성된 고려의 ‘초조 대장경’과 북송(北宋)의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모두 비교·교감(校勘)했다는 내용이 ‘고려국 신조대장(新雕大藏)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돼 있다. 많은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내용을 근거로 “거란 대장경은 중원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대장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1991년 중국 산시성(山西省) 잉셴안(應縣)에서 거란본의 일부가 발견된 뒤에도 그와 같은 대장경이 없어 ‘북방 불교문화’의 실체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는 “고려 대장경이 참고한 거란본은 거란에 앞선 세력(발해)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까지 그 근거는 없었다.

    ‘동일한 함차번호’라는 것은 거란본이 발해본을 사실상 그대로 베꼈다는 얘기가 된다.

  • 조 관장은 “거란이 발해의 궁중 서고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며 “여기서 고구려-발해-거란으로 이어지는 고대 북방 문화의 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그렇다면 고려 팔만대장경은 이 ‘북방 문화계통’과 당-송으로 이어지는 ‘남방(중원) 문화계통’을 모두 계승·종합한 ‘완정본’이라는 의미이며, ‘북방 문화’는 중원이 아닌 고려로 계승됐다는 것이다.

  • 조 관장은 또 “당시 대장경은 황제의 칙령이 없이는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대장경을 발간한 세력은 중원의 통치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이 된다”며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불경 전문가인 박상국(朴相國)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불경사(史)를 다시 써야 할 큰 발견”이라며 “그동안 잃어버렸던 북방 문화의 실체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평가했다.

  •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발해는 건국에서 멸망(698~926)에 이르기까지 228년간 15대를 이은 중앙집권적 왕조로서 독자적인 국가운영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였다. 1대인 고왕 대조영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뒤, 2대 무왕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은 문왕은 발해 전체 역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57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리면서 내치에 힘을 모아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후 4대부터 9대까지 25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는 일시적 내분기를 겪고나서는 10대 선왕에 이르러 다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정복활동을 마무리하여 9세기 전반에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여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발해의 건국과 영토확장 및 중흥의 주요 역군은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상무기풍을 물러받은 40만 강군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 49만을 헤아리는 당나라의 군사력과 막상막하였다.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풍속에 말타기와 사냥을 즐긴다’라는 사적의 기록은 무예를 숭상하는 발해인들의 용감한 기상을 전해준다.

    발해와 당이 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당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했던 사건에서 비롯한다.
    대문예는 다음과 같이 당나라 공격을 반대하였다. "흑수가 당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당을 저버리는 것이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몇 배나 되는데,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다만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이다. 지난날 고구려가 강병 30여만으로 당과 맞서 복종하지 않다가,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못되는데,그런데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하다."고 대문예는 만류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참고로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과 말갈(=여진)족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3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위의 기록을 통해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이 330여만명-40만 강군이라면, 멸망시의 고구려는 발해의 인구와 군사력의 몇 배나 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인구를 최소한 발해의 2배로 잡는다 하더라도 660여만명이라 볼 수 있고 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에는 1000여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대국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왕은 결국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732년에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현 山東省 蓬萊)를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또 당나라에 묶고 있던 신라 김사란(金思蘭)에게도 신라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어 전공(戰功)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 왔다."고 전한다.

    무왕은 몰래 동도(東都)에 사신을 보내 자객을 사서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찔러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자객들은 모두 잡혀 죽었다고 한다. 무왕이 당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깊은 원한과 주변의 돌궐과 거란도 당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발해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응징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이렇게 정연한 국가체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발해는 시종 당나라와는 나라 대 나라의 국가관계 차원에서 영활한 화전 양면의 전략전술로 응수해나갔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거란 등 가까운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전대인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데와 교섭하여 가까운 데를 치다) 정책의 일환으로 멀리 서천한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위압당한 당나라 중종은 705년 특사를 보내 과거 고구려와 그 유민들에 대한 잘못을 사과하고 발해의 건국을 축하하는 한편 수교를 제안한다.

     

    <신당서>가 전하는 바와 같이 발해는 자신들의 연호를 줄곧 사용했으며, 시호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명에는 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부를 정도로 발해는 당나라와 동격의 황제국이었다.
    중국 지린성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고, 황제국을 지향했음을 알려주는 발해 황후의 무덤이 발굴됐다. 최근 중국사회과학원이 발간한 ‘고고(考古)’(2009년 제6기)에 실린 ‘발해왕실묘장 발굴 간보’에 따르면 2004~2005년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 마을 룽터우산 고분군에 있는 발해왕실무덤에서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의 전통을 계승한 금제관식이 발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발해국 3대 문왕(재위 737~793년)의 황후 효의왕후와 9대 간왕(재위 817~818년)의 황후 순목황후의 묘지(墓誌)가 출토됐다. 그런데 순목황후의 묘지에는 “발해국 순목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泰)씨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출토된 금제관식은 고구려 조우관(새 깃털모양 관)의 전통을 잇고 있다”면서 “새 날개의 이미지를 세 가닥의 식물 이파리처럼 도안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는 당나라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순수한 발해산이며 고구려 조우관”이라면서 “여백을 끌로 쪼아 문양을 드러내는 ‘물고기알모양(魚字文)’을 활용하면서 발해 특유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절정의 금속공예 문화 수준을 보여준다”고 극찬했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으면서 황제국의 위상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는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뒤엎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참고로 당나라는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왕조가 아닌 흉노계 선비족 왕조다.

    당나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해를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독립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융성은 14대까지 이어오다가 15대에 와서 거란의 내침으로 마감되고 만다. 그러나 요동반도에 끌려간 발해유민들은 ‘후발해국’이니 ‘대발해국’이니 하는 이름의 후계국들을 세워 부흥운동을 근 2백년 동안이나 벌인다.

     

    신라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던 일본은 발해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 720년에 자진해 사신을 파견한다. 발해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당과 흑수말갈, 신라간의 밀착이 엿보이자 군사적 동맹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7년 후에 무관 출신의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는다. 그 후 양국관계는 신속하게 발전하는데, 전기에는 주로 군사외교이나, 후기에 와서는 경제문화교류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본에 대한 발해의 문화적 영향이 커진다.

    <속일본기>를 비롯한 일본 사적의 기록과 일본에서 발견된 ‘발해사 목간’이나 ‘견(遣)고려사 목간’ 등 유물이 증언하다시피 두 나라간에는 11회의 사신교환이 있었으며, 문물교류도 상당히 빈번하였다. 871년 일본에 간 발해사신들이 첫날 관무역에서 얻은 이익만도 일본화폐로 40만 냥,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6억 6천만엔이나 된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발해사신들은 일본 문인들과 작시를 주고받는데, 오늘까지 남아있는 발해 한시 10수 중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같은 9수는 이들 발해사신들이 지은 것이다. 발해악이 일본 궁중음악의 하나로 된 것도 이무렵이다.

    발해문화는 당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받아들어 융화시킨 독특한 복합문화다. 무덤양식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돌무지 무덤이 위주이지만 당의 벽돌무덤이나 말갈의 흙무덤도 받아들였다. 당삼채를 본받아 삼채도기를 구워냈으며,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는 서역의 누금기법으로 정교한 금속장식품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 고유의 문화상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몇 사람의 뒤를 따라 여러 명이 빙빙 돌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답추(踏鎚) 춤이나, 연꽃잎 무늬에서 3국은 8개 잎을 기본으로 하는데 비해 6개 잎으로 꾸미는 기법을 쓴 것이 그런 사례다. 또 여러 명을 합장하고 그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건축술 등도 발해만의 문화현상이다.

    발해의 유물 중에는 몇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연해주의 옛 발해성인 노브고르데예프성 밖 취락지에서 은화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왕관과 함께 ‘부하라의 군주 짜르’란 소그드 문자가 새겨져있는 점으로 미루어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은화임이 확실하다. 교역수단인 이 은화는 북방 실크로드의 초원로와 연결되는 거란도(일명 ‘담비의 길’)를 따라 발해까지 유입된 것으로서 수만리 떨어진 두 지역간에 교역이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또 한가지 신기한 것은 불교와 고대 동방기독교간의 융합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들의 발견이다. 발해의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동경용원부(현 훈춘)에서는 삼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상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발해의 서변에 자리한 우순(撫順) 지역에서도 수백점의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신라의 경주에서도 석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7세기 중엽 중국에 들어와 약 250년 동안 성행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가 9세기 전반 탄압을 받고 축출될 때, 발해 땅에 파급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경교는 불교와 습합하는 방법으로 전파를 시도하였으니, 그 맥락에서 보면 발해에서 두 종교간의 융합관계는 이해가 될 것이다. 배타가 아닌 어울림의 문화를 꽃피운 발해인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렇게 발해는 완비된 국가체제와 주권국가로서의 확고한 국제성을 지니고 사통팔달한 국제교통망을 통해 세계와 교류하고 문화를 주고받은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발해를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방정권 운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용서못할 거역이고 오만이며, 우러 겨레에 대한 야멸찬 멸시에 다름아니다고 정수일 교수는 말한다.

    또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金光錫.62)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발해사 편입 시도는 중화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홍콩에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해외 학계에서 처음 발해사 연구로 인정받은 한국학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에 기여했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여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81&aid=0000090110&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6/10/25/200610250500036/200610250500036_1.html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 현재 북한 평양에 발굴 터와 건물 유구 일부가 보존돼 있는 8만6천여평 규모의 고구려 최대 정궁인 안학궁(安鶴宮)

    안학궁은 427년 장수 태왕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 뒤 축조한 성으로 그 중심이 안학궁이었다. 안학궁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태왕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궁궐로, 우리나라 정궁 역사상 최대 규모다. 근세조선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높이가 34m인데 비해 안학궁의 정전인 중궁은 87m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높이 2m가 넘는 치미(기와장식품)가 발굴되기도 했다. 안학궁은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 최대 왕궁인 대명궁 함원전 67.5m보다 규모가 컸고, 건립시기도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명(明)·청(淸) 시대의 궁전인 자금성 태화전은 60m에 불과하다.

    자금성 태화전은 동서 60m, 남북 33m / 경복궁 근정전은 앞면 30m,·옆면 21m /
    고구려 안학궁 - 남궁은 앞면 62m & 중궁은 앞면 87m, 옆면 27m

    자금성(원래 9999칸이었고, 현재 8800여 칸)은 둘레가 3.52km이다.
    반면 경복궁(원래 7481칸이었지만 현재 700여 칸이다. 경복궁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허물어졌고 현재는 10분의 1정도가 남아있다)은 둘레가 3.26km이다.

    자금성 안에 나무가 없는 것은 자객이 나무에 숨어 성 안의 사람을 공격할까 봐서이고 또 다른 이유는 궁 안의 나무가 황제의 위엄을 가린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나무 없는 자금성은 바람이 쌩쌩~ 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금성의 황제들은 겨울궁전을 따로 만들어 겨울에는 자금성을 떠나 겨울궁전에서 생활하며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 내부가 신하들이 옥좌 앞에 도열해서 국사를 논하기에는 너무 좁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자금성 태화전 역시 신하들이 도열할 내부공간은 별로 없었다. 태화전은 가로로 길게 건설되어 배치되어있고 그 직각 방향으로 문이 있어서 옥좌가 그 방향으로 되어있으니까말이다. 웅장한 태화전도 옥좌 앞에서 출입문까지 별로 공간이 없었다. 둘다 조회나 의식에 쓰였고 신하들은 광장에 도열했던 거였다.

    정치·문화적으로 볼 때 중원을 압도하며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면모와 증거를 안학궁에서 깊게 엿볼 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당시,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중심문명이었다. 당나라의 왕릉, 궁성 유적에도 고구려의 영향은 드러난다.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원인을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이 당나라에 유입되면서 문화선진국이던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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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고구려-백제가 비슷한 의복을 입고, 비슷한 음식에 비슷한 언어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백제토기와 신라의 황금장식도 고구려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또 발해의 상경성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당나라 장안성의 주작대로와 발해의 주작대로는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사신도? 어쨌든 발해는 건축구조에서 온돌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고구려의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역사와 문화’ 펴내

    발해사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발간한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諡號)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皇上)으로 칭하는 ‘황제국’이었음을 밝혔다. 한마디로, 발해가 자주적 왕조였음을 학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위원 등 22명의 관련 분야 전문가를 비롯, 중국·일본·러시아의 학자까지 참여한 책은 발해의 각종 제도 및 외교관계, 사회,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의 주요 논지를 소개한다.

    ◆ 발해는 자주적 왕조국가였다 =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했음을 중국의 정사(正史)인 ‘신(新)당서’에서도 인정하고

  • 있다.

  • 신당서는 이같은 발해의 움직임에 대해 ‘사사로이’ 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하는 한편 발해의 자주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발해는 황상을 자칭하는 황제국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일본에서 스스로를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는 ‘고려국’이었음을 자칭했다.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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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등주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150t의 카라크선(carrack 船)이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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