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인가?-1~4

설레임의 하루 2011. 9. 3. 04:30

*출처:다음 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글쓴이-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IFOx/27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인가?-1

이번에는 우리 고대사의 핵심 중의 하나인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독자들께서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이 기준 하나만이라도 확실히 알게 된다면,  왜 중국과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그토록 혈안이 되었는지를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20만권의 사서를 불사르고 <조선사 35권>이라는 새로운

역사 이론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을 폭로하는 신문기사

 
식민사학계의 요동.요서의 구분은 현 요녕성 요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요녕성 요하(遼河)로, 요하

서쪽을 요서라 하고 요하 동쪽을 요동으로 한다고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다. 

이 이론은 중국과 일제의 이론을 무조건 추종하는 우리나라 사학계의 정론(正論)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고구려는 현 요하 동쪽 즉 요동(만주)에 있던 나라로, 유리왕 때 도읍인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에 있고, 장수왕이 남진정책으로 대동강 평양에 있는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교과서로부터 배운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민족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의 기본 틀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요동과 요서의 구분을 현 요녕성 요하로 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식민사학계의 이론을 충실히 반영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제와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압록수는 현 압록강이며 서안평은 단동,

그 유명한 안시성과 요동성은 요하 근방, 비사성은 요녕성 대련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명 비정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과연 그런지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의 일부 기록을 보기로 하자.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

西行与之合)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

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誌: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위의 기록과 현재의 지명을 비교하면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차이점을간단히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보았다.


1. 위 기록에 따르면, 대요수나 마자수나 거의 같은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2. 마자수(압록수)가 현 압록강이 되면, 압록강 하구인 단동은 서안평이 되며 안시성과 평양성

국내성이 모두 압록수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재의 안시성은 요하 근처로 압록강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현재의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으로 압록강 북쪽이고, 현재의 평양성은 압록강과 역시 관련이 없는 대동강변에 있다.

결국 이는 무엇을 의미함인가? 한마디로 지명 비정이 잘못되어 있다.

즉 지명조작으로 역사왜곡이 되어있다는 뜻인 것이다.

현 식민사학계의 지리비정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하면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신당서나 한서지리지는 이미 한족 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왜곡이 되어 있어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 중요한 신당서나 한서지리지가 왜곡이 되었다고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어느 사서의 기록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편찬한 <조선사 35권>의 역사만

믿는단 말인가?

모든 사서의 기록은 설사 가필과 왜곡이 되었더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곡이 된 부분이 있다면 무조건 전부를 부정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이 왜곡된 것인지 찾아내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며 도리가 아니겠는가!!!

필자의 견해로는 분명 위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의 기록은 절대 왜곡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압록수를 현 압록강으로 놓고 보면 위 기록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압록수를

산서성 분하로 가져다 놓고 비정하면 희한하게도 위 기록은 100%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대의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이며, 바다는 현 황하이고, 서안평은 황하와

분하가 만나는 산서성 하진시, 안시성은 분하(압록수) 북쪽에 있는 화염산 남단, 평양성은 산서성

임분, 국내성은 산서성 평요나 태원으로 비정하면 위 기록은 100% 정확하게 들어맞게 된다.

▲ 고구려의 핵심강역은 요녕성과 한반도가 아닌 산서성이었다.

▲  고구려의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 바다는 현 황하, 서안평은 산서성 하진시, 안시성은

분하하류 북쪽, 평양성은 산서성 임분, 국내성은 산서성 평요로 비정하면 신당서의 기록과

100% 일치한다.

 
고 임승국교수가 본 요수는 현 하북성 난하

우리나라 사학계의 역사이론이 일제 때 만들어진 엉터리 식민사학을 기본 이론으로 하는 반도사관의

이론이다

보니,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우국지사들이 우리의 자존심이며 민족정신을 쭈그러뜨린  식민사학을

성토하며 제각기 여러 이론을 발표했고 발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표될 것이다.

그 중에 우리는 가장 유명한 민족사학자로 <한단고기> 주해서를 낸 고 임승국교수를 기억하고 있다.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임교수는 국회에서 국사청문회를 하는 등 식민사학을 규탄하는데

앞장을 선 민족사학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임교수에게 불행했던 것은 시대를 조금 일찍 태어나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를 접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 임승국교수는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요수(遼水)를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닌 북경 동쪽 하북성

진황도시 근처의 난하(灤河)로 보았다.

그리고 근처 창려에 있는 갈석산을 고대 갈석산으로 인정해 <한단고기>의 주해를 달게 된다.

그 근본 이유는 <한단고기>에 언급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의 위치비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  민족사학자 고 임승국교수는 고대의 요수를 하북성 현 난하로 보아 요서 10성을

설명했다.

 
<한단고기>에 언급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을 현 지명으로 보면 대부분이 북경과 동쪽 진황도시

사이에 있다.

 그 중에 요동성(遼東城)이 있는데 창려에 있다고 했으므로, 그곳이 요동(遼東)이 되려면 요수를 현

난하로 비정해야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비정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당시로서는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수를 요녕성 요하에서 빼내 서쪽 하북성으로 가져온

것만 해도 대단한 발상이었다. 

▲  한단고기에 기록된 요서 10성을 현재의 지명으로 그린 지도. 모두 북경 동쪽에 있는 하북성 난하

부근이고 요택과 택성을 황하구로 그렸다.  임승국교수의 요수=난하 이론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 비정도 중국의 지명조작을 전혀 모르고 현재의 지명으로 그린 것이다.

 
당시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가 발달되지 않았다보니 임교수는 단지 사서의 기록에만 의거해

식민사학의 잘못을 지적하고 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의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는 것보다 수십 배의 노력이 필요한 엄청난 분량의 작업이었다.

분명 현 사학계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옳았으나, 본인의 그러한 엄청난 노력과

불타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도 역사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지명으로 역사를 해석하다보니 뭔가 역사 흐름의 톱니바퀴가 잘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건 도저히 맞힐 수가 없는 퍼즐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지명이란 중국에서 명나라 때부터 지명

이동을 통해 이미 조작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동이족인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할 때는 왜곡이 많지 않았으나, 다시 한족의 민국(民國)이

결성되면서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조작은 그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동북공정이란 역사왜곡 프로젝트까지 나온 것이다.

인터넷 없이 사서의 기록만으로 지명조작까지 추적해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100%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민족사학의 기둥이었던 고 임승국교수도 결국은 생전에 우리 역사의 진실을 못 밝히게 된

것이다.

사실 임승국교수 사후에 그 분 버금가는 민족사학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을 사칭하는 역사애호가들은 아직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다.

 

역사동호인들의 이상한 요동,요서 이론-2.

 

지금은 역사도 인터넷 세상이다.

많은 사서의 기록 중에서 필요한 것만 인터넷을 통해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세상되었다.

그런데 한글로 네이버나 다움에서 검색을 하면 온통 식민사학의 이론 뿐이다.

간혹 있는 재야의 이론은 근거도 없이 이상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걸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자료로 쓰기에는 미흡한 편이다.

우리 사서는 <한단고기> <고구려사초.략> <삼국사기> <삼국유사> 정도로 몇 권 되지 않는데다가,

식민사학계의 이론인 반도사관은 대륙에 있는 지명과 우리 고대사의 지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사서만 가지고는 언급된 고대지명이 현 지명으로는 어디인지 비정할 수 없게 되어있다.

우리의 역사 강역은 대륙이기 때문에 고대의 역사지명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알아보려면 ‘중국고대지

명대사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사전의 한글 번역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중국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만 하면 고대 지명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산서성에 있는 분하를 검색하면 하남성에 있는 강으로 나온다.

즉 현 분하의 원래 이름은 압록수이다.

 
그러나 중국 인터넷에서 검색하려면 먼저 간자체로 된 중국어를 알아야 하고 검색하는 방법도

알아야 하는데 과연 한국의 역사동호인들 중 몇 명이나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을 중국 인터넷에서

자유자재로 검색해 읽을 줄 알겠는가? 솔직히 많지 않다고 봐야 한다. 

현재와 같은 인터넷 세상에서 역사 네티즌들이 자주 방문하는 싸이트가 2개 있다. 

하나는 강단사학계의 수장격인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싸이트이고, 하나는 스스로

재야사학의 선두주자임을 사칭하는 한 역사동호인의 개인 싸이트(www.cooX.XXX)가 있다.

이 개인 싸이트의 클릭 수는 일일 약 1,500회 이상으로 국사편찬위원회를 능가하며 가히 한국의

역사관련 싸이트를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챔피언 싸이트이다.

그곳을 방문한 많은 네티즌들은 그 방대한 자료에 놀라며 그 곳의 애호가가 되기도 한다.

특히 강단사학계가 터부시하는 상고사 부분의 자료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싸이트도 역시 지명 비정에 큰 맹점을 보이고 있다.

즉 관리자가 중국어를 모르다 보니 고대의 지명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정확히 밝히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현 지도의 지명이나 민국 시대의 군사지도 또는 청나라 때의 대청광여도 등의

지명으로 우리 역사를 해석하는 엄청난 우를 범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 임승국교수는 중국어에 능통했어도 당시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가 없었으므로 지명 비정에

허점이 있었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나, 지금의 대명천지 인터넷 세상에 아직도 고대 지명이 현재

어디인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필시 관리자가 중국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지명조작이 되어 있는 중국지도에 그려진 지명으로 우리의 역사를 해석하려다보니 역사의

톱니바퀴가 전혀 안 맞고 있다.

결국 잘못된 역사를 마치 진실된 역사인 것처럼 인터넷에서 국민을 상대로 속이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기야 현 국사교과서가 국민들을 공공연히 속이고 있는 판에 그까짓 역사동호인 수준의 개인

싸이트가 네티즌들을 속이는 것 쯤이야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강단사학계의 이론이 잘못되어 있어 역사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우국충정으로 만든 역사 싸이트라면 제대로 해야지 잘못된 지명비정으로 참이 아닌 거짓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려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모르면 지명 비정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필자가 보기에는 챔피언 싸이트의 우리 역사에 대한 열정은 가히 높이 살 만하나, 관리자가 중국어를

전혀 모르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현재 공개되어 있는 지도를 보고 지명 비정을 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결국 그 싸이트도 잘못된 역사를 역사의 진실이라며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과연 그런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자칭 민족사학이라는 역사애호가의 엉터리 요동.요서 이론  

비록 개인이 만든 싸이트지만 클릭수가 많고 특히 역사 이론을 설명할 때는 공공성에 준해야 하므로

잘못 그려진 역사지도를 함부로 게재하면 안 된다.

식민사학계의 이론이 잘못 되었다고 공격하면서 자칭 민족사학임을 표방할 때는 제대로 된 역사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홍보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사명감이 있어야 하거늘 그러지 못하고 있다.

챔피온 싸이트에 게시되어 있는 요동.요서의 이론은 실로 이상한 이론으로 필자는 그런 이론이

어디에 근거를 두었는지 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들의 이론은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산서성 태행산맥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선을 그어, 그 서쪽을 요서(遼西)라 하고 그 동쪽을 요동(遼東)

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을 태행산맥 안에 있는 요라는 지명으로 그 동쪽이 요동, 서쪽이

  요서라는 설명은 정말로 이상한 이론이다.

이런 것들 때문에 강단사학자로 부터 재야사학은 근거없는 엉터리 이론이나 주장한다는 평을 받는다.


어떤 자료를 근거로 그런 희한한 이론을 주장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산서성을 포함한 중국 대륙

서쪽이 요서이며, 하북성을 포함한 중국 대륙 동쪽이 요동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면서 태조대왕의 요서(遼西) 10성의 위치는 대부분을 북경 동쪽 하북성에

그리고 있으며, 당태종이 도망한 경로인 요택(遼澤)은 현황하구(黃河口)로 그리고 있다.

요동(遼東)을 하북성을 포함한 중국 대륙의 동쪽 절반으로 표시하면서, 어떻게 요서(遼西) 10성이

하북성 동쪽 난하 주변이 되며 요택(遼澤)은 황하구가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그 근거를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아마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이상하게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동호인이 함부로 민족사학의 선두주자임을 사칭해서야

되겠는가!!!

 

 

▲  하북성을 요동이라고 해놓고,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을 하북성에 그리면 앞뒤가 전혀 맞지않는 이야기다. 

즉 위 지명 비정도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  원래 태조대왕 때 쌓은 요서 10성은 산서성 최남부인데, 하북성 난하와 현 요녕성 요하 근처로 비정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역사 강역을 다 내주고 있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역사를 잘못 해석하다 보니 다른 역사해석도 같은 우를 범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다.

결국 그 싸이트가 게시한 역사 지도는 상당 부분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

되어 있는지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하나 밝혀보기로 하겠다.

먼저 서안평에 대한 지명비정이다.

중국/일제/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인 서안평을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단동시로 비정하고 있다. 그 근거는 한서지리지에 언급된 기록이다.

한서지리지 : 마자수(압록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誌: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그런데 챔피온 싸이트는 식민사학계의 이론을 질타하며 서안평을 하북성 찬황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북성 찬황에는 큰 강(압록수)과 바다(황하)가 흐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챔피온 싸이트는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아예 한서지리지를 왜곡된 사서로 보고 참조하지도 않았단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비록에 재야사학이지만 학문을 하는 자세가 아니다.

일단 사서의 기록을 충실히 따라야 그 이론의 가치가 있거늘 이렇듯 그 중요한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지명 비정을 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요동.요서의 해석도 그렇고 서안평에 대한 지명비정도 그렇고 챔피온 싸이트는 근거도 없는 이상한

이론을 내놓고 있다.

▲  서안평을 찬황으로 비정하려면 마자수(압록수)와 바다(황하)가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북성 찬황에는 그런 것이 없다.  한서지리지나 신당서도 안보고 임의대로 그린 역사지도이다.

 
물론 그 싸이트의 모든 역사 이론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그 이론 자체가 아니라 엉터리 지명비정인 것이다.

결국 중국에 의해 지명이 조작되었는지를 잘 모르다 보니 식민사학계와 마찬가지로 앉아서 우리의

역사 강역을 중국에게 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단사학계로 하여금 재야를 근거없는 이론이나 주장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현 강단사학계를 매식자(매국식민사학자의 약자)로 표현하며 온라인 상에서 현 사학계를

질타하며 성토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의 주무대는 대륙인데 왜 한반도라는 좁은 울타리로 우리 역사를 가두냐”는 것이

주제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명비정도 비록 대륙이기는 하나 역시 엉터리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겨 뭍은 개가 X 뭍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매식자들보다 낫다 뿐이지 어차피 역사의 진실이 아닌 것은 매 한가지이다.

우리 역사의 참모습은 반도사관이 아니라 대륙사관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하북성의 현 지명으로 고대 지명을 비정하면 역사의 줄거리가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챔피온 싸이트가 진정한 민족사학으로 거듭 나려면 잘못 비정한 역사지명부터 전부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찾을 수 있으며, 국민들에게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역사동호인 수준에서 진정한 민족사학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중국은 명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지명 조작을 통하여 역사왜곡을 했다.

후에 대륙의 주인이 된 한족이 원래 대륙의 주인공이었던 동이의 역사 강역을 대륙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6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지명조작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우리 역사의 정확한 요동.요서는 어디인지는 제3부에서 밝혀보기로 하겠다.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현 산서성 분하"(3)|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로 보인다.

그 이유는 한서지리지에 요동군과 요서군에 대해 분명히 언급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서에 숱하게 등장하는 요동과 요서라는 지명은 바로 한서지리지에 언급된 요동군과

요서군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1. 우선 ‘요동’이란 단어는 어떤 한 지명이 아닌 당시 고구려를 통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즉 수양제나 당태종이 사용한 ‘요동정벌’이란 단어는 ‘고구려정벌’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고구려의 도읍이 바로 이 요동군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서를 읽을 때 고구려 전체를 나타내는 요동이라는 단어와 한 지명을 나타내는 요동을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2. 고구려 때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분명 요수(遼水)가 맞다.

그러나 당시 요수는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니라, 당시 압록수(鴨淥水)나 대요수(大遼水) 또는 시대에

따라 마자수(马訾水)나 당취수(唐就水)로 불렸던 산서성에 있는 현 분하(汾河)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현 분하는 산서성 북부에서 발원해 산서성을 동서로 가르면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산서성의

주요 도시인 태원시와 평요현과 임분시의 서쪽을 지나, 현 후마시 부근에서 다른 강과 합쳐져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염산 남부를 흐르다 하진시에서 황하로 들어가는 산서성의 주 강이다.

결론적으로 요서는 산서성 남부의 서쪽인 운성시 영제시 일대를 의미하고, 요동은

산서성 남부의 동쪽인 임분 분지 일대를 의미한다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원래 기준이 요녕성 요하가 아닌 산서성 분하이므로, 식민사학계가

국내성으로 비정한 현 길림성 집안과 평양성으로 비정한 대동강 평양이 거짓 이론이라는 것이

명확해 진다. 따라서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과 평양성과 환도산성과 안시성도 산서성 남부에서

찾아야 옳을 것이다.

▲  산서성은 고구려와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이었다.


과연 필자의 결론이 맞는지 하나하나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선 ‘한서지리지’와 ‘신당서 동이열전’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한서지리지의 기록
위 고구려의 초기 강역인 유주를 한서지리지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유주는 12개 군으로 형성된 행정구역이었다.

이미 (1부)에서 7개 군에 대한 원문을 언급했으므로 (3부)에서는 요서군과 요동군에 대해서만 다시

한번 언급하기로 한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

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

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

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

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

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

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당취수=마자수=압록수)至徒河入海。

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

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

襄平(양평)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대요수)出塞外,

南至安市(안시)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

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

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

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한서지리지에 언급된 유주의 지명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과 인터넷 자료로 하나하나 검색해

들어가면 아래와 같이 비정할 수 있다. (지명 비정에 있어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다)

거용, 창평, 탁록 등의 (상곡군)은 산서성 운성시 염지 부근의 해주(海州) 일대
대갈석산이 있는 (우북평군)은 운성시 예성(芮城)시 일대
천주가 있는 (어양군)은 연나라의 수도로 하남성 일대
요산, 요수, 대요수, 마자수, 서안평 등이 언급된 (현토군)은 임분시의 서부 
패수, 수성, 대방 등의 지명이 있는 (낙랑군)은 운성시 동부와 심수(沁水) 사이 
 

▲ 현재 지도에 그려져 있는 운성시에 있는 포주진과 해주진. 포주진에는 포주고성 유적지가 아직도 있고,

     해주는 치우천황의 탁록이 있는 상곡군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위 요서군과 요동군의 위치는 아래와 같이 비정할 수 있다.
고죽성, 비여(=노룡) 등이 있는 (요서군)은 운성시 서부 영제(永濟)시 포주(蒲州) 일대 
양평, 대요수, 안시, 요양, 서안평 등이 있는 (요동군)은 분하 동쪽 임분시 일대

위와 같이 지리 비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유주의 1개 군인 요서군(遼西郡)의

 영지(令支)에 고죽성(孤竹城)이 있다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고죽성은 청절지사(淸節志士)인 백이.숙제의 나라였던 고죽국이 있던 성이다. 
 

▲  유주의 7개 군을 지도로 그리면 위와 같다.

이 지리비정은 약간의 오차가 있을 뿐 반론의 여지는 없다고 본다.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어디인가?  

백이.숙제는 고죽국의 두 왕자로 부왕이 죽자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 고죽국을 떠나게 된다. B.C

1122년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은나라의 마지막 "주왕"이 미인 달기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은나라의 서쪽 땅을 지키던 제후였던 "무왕"이 정권전복을 위해 수도를 향해 군사 5만을 동원하여

공격해 들어간다. 즉 군사쿠데타였던 것이다.

이때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와 숙제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을 하려 하니 어찌 효(孝)라 할 수 있으며, 신하가 임금을 죽이려 하니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하며 눈물로 만류를 권유한다.

그러나 무왕은 맹진(하남성 황하 남쪽에 있는 도시)에서 황하를 건너 쳐들어가 은나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다.

백이와 숙제는 인륜을 저버린 주무왕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죽는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백이.숙제를 청절지사(淸節志士)로 높이 칭송하게 된다.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가 그동안 우리 고대사의 최대 미스테리 중의

하나였다.
 

▲   동이족 즉 우리의 조상이었던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와 숙제


사기 권26 봉선서 제6의 주에 따르면,

“(정의) 괄지지에는 고죽 옛 성이 평주 노룡현 남쪽 십리에 있다.

은나라 때의 고죽국이다.

((正義)括地志云 孤竹古城在平州盧龍縣南一十里 殷時孤竹國也”라는 기록이 있고,

수서 권67 열전 배구전(裴矩傳)에는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高麗之地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기록은 고죽국이 있던 곳을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라는

기록인데, 기자는 단군조선과 주나라의 중간지점에 살았다고 보면 되므로 고죽국의

위치가 밝혀지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강역도 저절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죽국이 있던 지역은 과연 어디일까?

중국에서는 이러한 고죽국이 있던 노룡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북경과 심양을 연결하는고속도로 변에는 “하북성 노룡현은 백이.숙제의 고향

 (河北盧龍 夷齊故里)”라는 입간판을 세워놓고 공개적으로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노룡현은 명나라 영락제가 역사 왜곡을 위해 지명을 조작한 도시라는 것이 중국 기록에

엄연히 나와 있다.

▲   북경-심양간 고속도로변에 세워진 역사왜곡용 입간판.

   이 간판은 산서성 영제시에 세워져야 역사적 사실과 맞다

▲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비석. 중국은 이 비석이 있는 산을 수양산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  '이제고향;이라는 비석이 있는 10m 높이의 동네 뒷산. 고사리는 커녕 동네 개들의 개똥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기 권61 백이열전 제1 에 따르면“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길, 수양산은 하동 포판화산의

북에 있으며 하곡지중(강이 꺾이는 곳)에 있다.

 (集解 馬融曰:「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고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다.

옛날 섬서성에서는 산서성을 하동(河東)으로 불렀다. 그리고 물길이 꺾이는 곳은 어디인가?
 

▲   청나라 때 만든 지도인 대청광여도에도 황하 굴곡 지점에 수양산과 백이.숙제의 묘가 그려져 있다.



청나라 때 작성된 대청광여도에도 산서성 최남단 황하 굴곡 지점에 백이.숙제의 묘와 수양산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현재 중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대 지도에도 백이.숙제의 묘와 고죽성(孤竹城)이 있던 포주(蒲州=

蒲阪 포판)가 명확히 명기되어 있다.

현재 유적지로 남아 있는 포주고성(蒲州古城)이 고죽성이 있던 옛 성터로 보인다.

위 한서지리지 요서군의 한 지명인 고죽성이 있던 영지(令支)의 현 지명은 산서성 운성시에

속해 있는 영제시(永濟市)이다.

따라서 황하까지가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백이.숙제의 묘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현재 지도에도 백이.숙제의 묘와 포주가 그려져 있다.

   초록색 글씨로 작게 보이는 것을 크게 타이핑했다.

▲  현재 지도를 보고 찾아가 발견한 백이.숙제의 묘.

   이곳이 바로 고죽국의 땅이며 유주 요서군이 있던 지역이다.  

▲ 영제시 백이.숙제의 묘 옆의 지명은 수양이다.

이유는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백이.숙제의 무덤이 있는 요서군의 위치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죽국의 두 왕자 백이.숙제의 무덤이 얼마 전 필자에

의해 산서성 영제시에서 발견됨으로서 한서지리지 요서군의 위치가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라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지금까지 동아시아 역사학계의 기존 이론을 깨는 즉 우리 역사의 진실을 찾는

쾌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백이.숙제의 묘가 산서성 황하 굴곡지점인 산서성 영제시에서 발견됨으로서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요서는 현 요녕성 요하 서쪽”이라는 통념은 거짓이라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리고 대부분 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요서는 요하 서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옛날

요하는 하북성 난하”라는 이론도 이제는 접을 때가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민족사학임을 사칭하는 일부 네티즌들의 엉터리 주장인 “요서는 산서성

태행산맥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을 기준으로 그 서쪽의 중국대륙 전부가 요서이다”

라는 근거 없는 엉터리 이론을 폐기처분할 때가 되었다.

요서군은 한서지리지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듯이 76,000호에 인구 약 35만 정도의 1개 군이다.

이런 요서를 일부 네티즌처럼 산서성을 포함한 중국 대륙 전체의 서쪽으로 비정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비정이 아닐 수 없다.
 
누구든 앞으로 역사를 논하면서 지리비정을 할 때 아무렇게나 자기 생각대로

임의대로 주장하지 말고 고대사서의 기록을 차분히 읽어보고 그 근거를 가지고

지리비정을 했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램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일개 개인의 노리개 감이 아니며 역사에는 조상의 혼과 민족정신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영제시 포주진에 아직도 남아있는 포주고성은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성의 유적지로 보인다.

▲  3,000여년 전의 유적으로 보이는 포주고성은 고죽국의 유적 임에 틀림없다.

멀지 않은 곳에 백이.숙제의 묘가 있다.


▲ 산서성 남부에 있어야 할 요서군이 엉뚱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져 왔다.

이제는 역사 강역을 바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안시성, 환도성, 평양성이 있는 요동은 어디인가?(4)

 

 백이.숙제 무덤의 발견으로 요서군의 위치가 산서성 영제시 일대로 명확하게 밝혀짐으로서 그

동쪽에 있는 요동군의 위치도 밝혀질 수 있다.

 위 한서지리지에서 언급된 대요수, 안시, 요양, 서안평 등이 있는 요동군은 임분시의 동부 평지인

임분분지(臨汾盆地) 일대로 볼 수 있다. 이 요동군 안에 고구려의 도읍들이 위치하고 있어

한족들은 고구려를 부를 때 요동이라 부른 것이다.

요서 10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요서군의 위치가 확실히 밝혀짐으로서 태조대왕이 쌓은 요서 10성의 위치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태조대왕3년(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漢兵)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구체적인 지명이 생략되어 있다.

이 요성 10성의 지명에 대해서는 한단고기가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안시(安市)는 개평(開平) 동북 70리,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        
석성은 건안의 서쪽 30리,
건흥은 난하(灤河)의 서쪽,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
요택(遼澤)은 황하 북안 왼쪽
* 요택은 현 하남성 제원시 근방의 현 지명 황하습지로 황하와 심수 사이의 습지이다. 

▲   <한단고기>에 언급된 요서 10성의 지명을 지도에 표시하면 위 지도와 같다. 

▲  모 역사싸이트가 중국 지도를 보고 비정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은 북경과 천진 동쪽 난하 주변에

   있다고 한다.

중국 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의 지명을 비정하는 행위는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그 기준이 되는 지명인 안시의 위치 근거는 바로 (1부)에서 언급한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를 들 수 있다.

이 외 여러 근거가 있으나 나중에 안시성을 다룰 때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신당서 동이열전>

과 <한서지리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하기로 한다.

(신당서 동이열전)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

西行与之合)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

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

(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誌: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여기서의 마자수는 압록수로 당나라에서는 당취수(唐就水) 또는 요동군의 대요수라고도 불린

것으로 보인다.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로 길이는 730 Km인데 이는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2,100리와 거의

일치한다.

고대 압록수의 흐름(서류)과 길이가 현 압록강과 비슷하다 보니 중국과 일제가 강 이름을 조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지도에 비정하고 보면 현 분하의 남북 흐름이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산서성 남부를 동서로 갈라 중심에서 서쪽의 평지를 요서군, 동쪽의 평지를 요동군이라고 했다.

즉 서쪽인 영제시 일대의 평지를 요서군, 요서군의 동북쪽 임분분지와 현 운성시의 동부를 통털어

요동군이라 한 것이다. 

▲   고대 고구려의 요동군과 요서군의 위치는 위 지도와 같다.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환도산성은 어디인가? 

<한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따르면, “번한의 옛 도읍은 개평부 동북 70리”라 기록되어 있어

 번조선의 도읍이 안시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도 “안시는 곧 환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산상왕 13년(209년)에 환도산성으로 천도했으나 동천왕

 20년(246년)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성이 파괴되어 다시 국내성으로 옮겨서 96년간

머물다가 고국원왕 12년(34)에 환도산성을 수리하고 옮겼으나, 같은 해 10월 모용황의 침략으로

환도산성이 함락되고 파괴되어 더 이상 거주 할 수 없게 되자 고국원왕은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간다.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환도성을 집안(국내성) 근처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위의

기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환도는 안시와 거의 붙어 있어야 맞는데, 안시는 요하 강변에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환도성이 집안시의 산성자산성이란 말인가?

사서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지명비정이 조작된 허구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과 일제는 역사의 지명조작을 위해 관구검기공비를 옮겨 놓는다.

원래 산서성 남부에 있어야 할 관구검기공비와 환도산성이 지명 조작되어 길림성 집안으로

옮겨오게 되는 것인데, 그걸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 하겠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중국은 현 압록강변 집안시에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있다고 조작하고 있다. 


▲   중국은 관구검기공비가 집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집안 지역을 국내성과 환도성으로 비정했으나 이는 역사조작이다.

집안박물관에서 관구검과  모용황의 침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그림.

▲  산서성 남부에 있어야 할 환도산성이 중국의 지명조작으로 집안시에

서 있다.


요서 10성이 예전에 요수로 불렸던 난하 서쪽이라고 주장학는 재야사학과 모 역사싸이트는

고구려의 환도산성(丸都山城)이 진황도시 청룡현에 있는 도산(都山)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도 상으로 보니 요수(난하) 근처에 있는 비슷한 지명이라는 이유로 보이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하겠다.
 
진황도시 청룡현 도산에 가 보면 그곳은 고구려의 도읍이 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하고 도읍이 되기에는 협소한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도산까지 오르는 길도 굉장히 좁다.

과연 대제국고구려가 그런 곳에 도읍을 정했겠는가? 앞으론 가 보고 그런 주장을 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환도산성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진짜 환도산성은 산서성 화염산 남단 안시성과 같은

산 속에 있는현 지명 관왕묘(關王廟)이다.

안시성이 있는 화염산 남단의 산은 말 모양을 하고 있다. 안시성은 말머리처럼 생긴 산(馬首山)에

있으며, 환도산성은 말꼬리(馬尾山)처럼 생긴 산 속 정상에 있다.

즉 화염산 남단에 있는 산의 좌측에 안시성이 있으며 우측 안쪽 정상에 환도산성이 있다. 
 
필자는 환도산성이 있던 이 말꼬리산(중국발음 마이산)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마니산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단군조선의 왕검성인데, 고구려의 평양성은 임분시로 확실시되며 그 근처에

마이산이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필자의 생각이 거의 맞으리라 본다.

이 환도산성의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산 속으로 들어가 아주 가파른 산을 꼬불꼬불 올라야 한다.

산 속 길을 따라가면 도처에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곳이 나타난다.

그래서 외곽 좌측에 있는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고는 산 속에 있는 환도산성을 공격할 수 없는

지리적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나 일단 산 정상에 올라가면 그 근처에 있는 산들의 정상이 모두 평탄한 평지로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 산 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이 도처에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식량 공급을 받지

않아도 자체 농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그래서 안시성이 당태종에게 그토록 장기간 포위된 상태에서도 고구려의 10만 병력이 버틴 것은

이곳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했기 때문이다. 

환도산성에서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임분시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당태종의 요동정벌 때 안시성전투에서 이도종이 말하길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서

왕사를 막으니 평양의 수비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병졸 오천명을 주시어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무리와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는 기록이 성립되는 것이다.

고구려의 전 병력이 모두 안시성에 주력하고 있을 때 수도인 평양성을 습격하자는 이도종의 작전

건의인데, 이러한 작전은 안시성과 평양성이 가깝지 않고는 성립될 수가 없다.

이러한 이도종의 습격작전은 식민사학계의이론인 요녕성 요하변에 있는 안시성과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과 대동강 평양성 사이에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거리적인 문제가 있다.  

▲  환도산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방어진지

▲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새로 쌓은 성이나 성터는 옛날 고구려의 환도산성임에 틀림없다.

 

▲  현 지명 관왕묘에는 현재 관우의 사당이 없다. 고구려 때 추모대제를 모신 주몽사가 있었다.

진왕(秦王)은 당태종 이세민을 말함이다. 환도성은 산 속 정상에 안시성은 산 바깥쪽의 좌측에 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도종이 당태종에게 건의한 작전이 성립되는 것이다.

안시성을 점령하지 않고 평양성이 있는 임분시로 진군하면 분지에 갇히는 형국이 된다.

수양제는 여기를 점령하지 않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갔기 때문에 살수대첩에서 전멸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안시를 점령하려다 눈알이 빠져 패해 도망간 것이다.

 

▲  환도산성 근처의 산 정상은 모두 평평하고, 사진으로 보듯이 산 정상이 모두 도로로 연결이 되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 대군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고,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 것이다.

 멀리 산 밑에 평지가 보인다. 수양제와 당태종은 이 산 밑에 진을 쳤다.

 

 

 

 

 


그 유명한 요동성은 어디인가? 

그리고 수양제와 당태종이 하남성 낙양의 북(北)에서 요수(遼水)와 요택(遼澤)을

지나 고구려와 처음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평지에 있는 요동성이다.

요동성은 당태종/수양제가 요수와 요택을 지나면 고구려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이 요동성의 대략적인 위치는 산서성 운성시의 동부와 진성시 사이에 있는 왕옥산

주변으로 추정된다.

<한단고기>에서는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이 요동성의 위치를

창려에 있다고 했다.

조작된 중국 지도로만 역사 지명을 비정하는 재야사학과 모 역사싸이트는 이 창려를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로 비정하고 있으나, 원래 창려는 하북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산서성 최남부에 있었다.

갈석산과 창려와 난하와 노룡이라는 지명은 항상 같이 따라다녀야 한다.

대갈석산이 있는 우북평은 산서성 최남단 중조산의 남쪽으로 볼 수 있다.

난하는 지금의 속수로 비정되고, 노룡은 이미 백이.숙제의 묘와 고죽성(포주고성)의

발견으로 그 일대가 노령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창려도 그 근처가 아니겠는가? 

<한서무제기주 漢書武帝紀注》에는
“文穎曰,碣石在遼西壘縣”라는 기록이 있어

갈석산이 요서군의 루현 지역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래는 한서지리지에서

우북평군을 설명하는 문구이다.

요서군과 우북평군은 산서성 최남단 중조산에 붙어있는 지역이다. 

(右北平郡) 秦置。莽曰北顺。属幽州。户六万六千六百八十九,口三十二万七百八十。

县十六:平刚,无终,故无终子国。浭水西至雍奴入海,过郡二,行六百五十里。石成,延陵,

莽曰铺武。俊靡,氵垒水南至无终东入庚。莽曰俊麻。薋,都尉治。莽曰裒睦。

徐无,莽曰北顺亭。字,榆水出东。土根,白狼,莽曰伏狄。夕阳,有铁官。莽曰夕阴。

昌城,莽曰淑武。骊成,大揭石山在县西南。(대갈석산이 현 서남에 있다) 莽曰揭石。

广成,莽曰平虏。聚阳,莽曰笃睦。平明。莽曰平阳。

중국과 일제가 우리역사를 말살한 이유는? 

필자는 6개월 전 산서성 남부를 역사탐방하고 왔다.

가서 보니 고구려의 역사적 지명이 모두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역사탐방 중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역사가 여기(산서성 남부)까지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20만권의 사서를 불사르면서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 했고 중국도 거기에 동조해 지명을

조작을 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역사의 현장인 산서성 남부를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 역사싸이트에서 얻은

잘못된 지명으로 함부로 우리 역사 지명을 논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역사를 만주와 한반도에 국한하려는 식민사학계와 북경 근처가 고구려의

도읍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역사네티즌들은 반드시 산서성 남부에 가봐야 한다.

그래야 필자의 이론과 논리가 맞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사진 속 기사의 원인은 고구려와 단군조선의 강역이 산서성까지로 실로

어마어마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 이론이야 이미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역사라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북성 북부가 고구려의 핵심 강역이라고 말하는 모 역사 싸이트가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네티즌들은 그곳에 게시된 지명비정이 다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도사관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를 하북성 북부로 끌고 나왔다고 해서 대수가 아니다.

지명에 따른 역사적 사실의 톱니바퀴를 제대로 맞추어야 진정한 민족사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네티즌들이 중국어를 읽지 못하고 중국 인터넷에서 지명을 자유자재로 검색하지 못하다 보니 중국에서 이미 지명조작한 지도만 보고 우리 역사지명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역사를 죽이는 대단히 위험한 행동으로, 오히려 중국의 동북공정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조상의 혼과 민족정신이 담긴 우리 역사를 중국이 역사왜곡을 한 뒤에 만들어진

지도로만 비정하여 역사의 혼을 훼손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의 진실을 올바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역사는 외적에 의해 말살되었고, 재야사학과 역사싸이트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성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