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돈으로 평화를 산 중국

설레임의 하루 2011. 9. 3. 01:49

*글쓴이-미래영웅 | 

 
 

 

돈으로 평화를 산 중국

 

((있지도 않은 허구의 종족 한족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이다. 하물며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 그리고 수와

 

당은 흉노계 선비족 왕조 기타등등)) 
우리는 중국하면 강대국,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이라 생각한다.

 

중국은 넓은 영토, 무한한 자원,
그리고 13억이 넘는 인구를 지닌 대국이다. 하지만 중국이 과연 대단한 나라인가?

 

사실 중국은 넓은 땅 덩이에 비해 그리 대단한 나라는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만큼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은 나라는 없다.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그 솟아오르는 힘으로 북방의 위협인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유방은 초한대전이전부터 각 군벌들간의 전쟁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군사적으로 북방 기마민족과는 근본적으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중국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당나라 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방에서 위세를 떨친 위구르족들에 대해 중국은 갖은 선물을 다 바치고 구걸외교를 했다.

 

황소의 난과 같은 일대 국가위기도 위구르족의 전사들이 아니면 평정할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사서는 당나라 황제가 위구르족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역사왜곡을 한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고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고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고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고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고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겨자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고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고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천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삼천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삼천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고족 입장에서 중국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고의 오이하트 4부의 패자 에센이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황제께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고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고가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황제에게 조공하러 왔을 때 천하의 주인인 황제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중국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고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고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황제가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 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고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황제가 몽고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중국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중국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것은 통일왕조가 들어선 수, 당 시대 때이다. 

 

그런데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왜 책봉국을 그렇게 수백만의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고자 했을까?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 수 당을 진정으로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자 오만한 양제나 당태종이 분노했던 셈이다. 
 
그러나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중국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보면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이 자랑하는 한나라 역시 우리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요택에서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한 후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궁과 궁복을 하사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중국측
기록도 당나라가 고구려에 크게 패해 전쟁배상금

 

을  문 것을 거꾸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중국은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에 잡혀있지 않은가?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지고 역사를 다시 보자. 
그러면 중국을 호령한 북방민족들의 기상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져야 한다. 
 

쥐나와 왜국의 억지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키>
백제에서는 왜왕을 후왕이라 간주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gqEplun4YnI

<타다시 관장>
일본은 철이 없어서 6세기 중반까지 주로 가야,백제,신라로부터의 철에 의존하였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WOuII_2gN7Y

<이노쿠마 교수>
새로운 문화를 가지고 온 백제인에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로 앞다투어 고급관료나 귀족들이 백제의 복장을 따라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7Q4q_QF8uCw

<마메노 교수>
일본에서는 5세기말~6세기 전반에 백제계 칼이 많이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환두대도를 만들수 없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LUEavf7Ik4w

노예종족 허구의 짱골라

한나라를 세운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유방' - 유협(깡패,불량배를 순화시킨 낱말)출신

(+자격지심으로 자신을 도운 공신들 토사구팽)

명나라를 세운 역시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주원장' -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출신

(+역시 자격지심으로 자신을 도운 공신들 토사구팽)

쥐나공산국을 세운 또 역시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모택동' -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인민들을 학살한 놈 (+쥐나의 스탈린)

이런 무식하고 탐욕스러우며 토사구팽을 밥 먹듯이 하는 비천한 출신의 조상을 둔 짱골라이다 보니

상식이 안 통하지!

지금도 짱골라들은 무조건 우기면 다 되는 줄 안다.

한국 전쟁으로 간도와 북한을 말아먹은 못된똥!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며 뒤에서는 뒤통수 치는 것을 좋아하는 등소평!

쥐나공산국이 동북, 서북, 서남, 몽골 탐원공정을 벌이고 있는 이 때에

등소평이 남긴 말 중 다음의 말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등소평왈 "3000번을 거짓말하면 진실이 될 것이다!"

 

등소평의 이 말이 짱골라의 억지를 크게 대변하고 있군....

티베트를 가혹하게 압제한 공로로 쥐나의 지도자가 되어 역사 공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진타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

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

(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유전자로 밝혀보는 뿌리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09/

200411090500015/200411090500015_1.html

중국의 역사는 철저한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역사였습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 이후, 사마씨에 의해서 진나라가 성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나라는

곧 이민족들에게 패퇴하여 남부지역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서 동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동진은 곧 망하고 이민족들에 의해서 5호 16국 시대가 개막됩니다.

동진이 망한 420년부터 오랑케 출신이 세운 수나라가 창건,된 후, 망한 618년까지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당나라가 들어섰으나, 당나라를 세운 이연도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입니다.

즉, 중국역사 420년부터 당나라가 망하는 907년간 총 487년간 한^족은 이민족의 노예였습니다.

(420년~907년 487년간)

그러나 여기에서 중국의 노예역사는 그치지 않습니다.

당나라가 망하자 5대10국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5대 10국의 주축세력은 돌궐족이었습니다.

다시 907년에서 960년 송나라가 세워지기전까지 53년의 노예 역사가 추가 됩니다.

(907년~960년 53년간)지금까지 총 540년이 중국역사 중 노예역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540년간의 노예역사를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나는 노예이다"라는

정신이 깊숙히 박혀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송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요나라와 금나라에 조공을 받치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거란족인 요나라가 907년에서 1125년까지, 여진족인 금나라가 1115년에서 1234까지 존재했으니,

총 327년의 역사가 노예역사로 중국사에 편입되게 됩니다. (907년~1234년 327년간)

이런 오랜 노예근성을 버리고자 송나라는 새로이 세력을 확장하던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노예근성에 찌들어버린 그들은, 마침내 나라까지 이민족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1234년에서 1368년까지 천한 농민의 자식이 세운 명나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몽골 이민족의

노예로써 총 1001년간 이민족의 노예로써, 충실하게 살아오게 됩니다. (1234년~1368년 134년간)
곧이어 명나라가 나타나지만 명나라 1368년에서 1644년까지 276년간은 노예들에게는 과분한

기간이었습니다.

여진족은 이들 노예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갖는것을 용서치 못하여 곧바로 이들 노예들을 응징하러

 갑니다.

이로 인해서 또다시 이민족 여진족에 의해서 명나라는 멸망하고, 중국에는 청나라가 세워지게 되어 그후, 1644년에서

1911년까지 267년간을 노예로 살게 됩니다. 여기까지 총 1268년간 노예들의 역사가 이어져 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패퇴하고난 뒤 (1644년~1911년 267년간)

20세기초부터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홍콩,까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내륙일부 지역이 일본에게 정렴당하고 1931년에는 일본에

의해서 만주국이 세워지기까지 합니다.

1945년 일본세력이 물러나기까지 34년간의 노예역사가 추가됩니다.

물론 여기서 노예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홍콩은 영국에 의해서 156년간, 마카오는 1999년까지 포르투갈에 의해서 통치되었습니다.

참고로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허구의 종족 짱골라가 아닌 서융계 왕조입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152227

만리장성은 없다!!!

첫번째 오해는 이 모든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모두 진시황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만리장성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시황이 아니다.

 

굳이 만리장성의 기원을 따진다면 지나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가 아닌 그 전의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결국 엄밀히 말하면 진시황은 전국시대 연(燕)·조(趙)·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미 구축했던

장성들을 통일 이후 연결하고 더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진시황의 장성은 만리장성의 서쪽 일부에 불과하다.

(진나라는 원래 서쪽 귀퉁이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니 그 당시 자신의 영토만 지켰으면 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 너머를 침범하려 했으면 타국과 전쟁을 각오하야 했을테니까) 지금의 만리장성은 명나라때 완성됐다.

두 번째 오해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존재가 진시황 때 축조한 장성의 모습 그대로 일 것이라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나라 때 축조된 고대 장성은 세월이 흐르고 여러 왕조의 명멸을 거치는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개·보수 및 방치

등을 거쳐 거의 본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거의 명나라 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명의 영락제 시대 이후부터 진행된 만리장성의 개축은 무려 18차례의 개수를 거쳐서, 16세기 말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압록강

인접)으로부터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연결된 실제거리 1만 2000여리나 되는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특히 만리장성은 강력한 국가의 상징일 것이라는 일반인의 세 번째 오해와는 달리 실제 역사상 비교적 세력이 약한 한족 왕조

때 더 활발하게 축조 되었다.

(실제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이다.)

만리장성의 축조 목적이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므로...

 

실제 문물이 융성했던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대나 유라시아를 통치한 흉노계 몽골족 왕조 원나라대, 고구려발해 후예

예맥부여계 여진(=만주)족 왕조 청나라대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개보수나 증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만리장성과 진시황의 악연. 사실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로서 허구의 종족

짱골라와는 전혀 상관없다.

진시황의 입장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으로 기존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했을 뿐인데, 두고두고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강탈해간 폭군으로 회자되는 점은 안된 일이나 그의 악명으로 후세가 두고두고 먹고 살게 되었으니 참

역설적이다.

고구려 유물 밀반출 조선족 2명 사형
http://news.nate.com/view/20040108n01664

노컷뉴스 기사전송 2004-01-08 11:33

조선족 주민 ''고구려역사 파괴대신 북에 밀반출이 나아''

지난해 여름 중국에서 고구려 유물을 북한으로 몰래 가져가려던 조선족 주민이 적발돼 2명이 사형당하고 2명이 25년 징역형을

받았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오늘 보도했습니다.
문제의 유물은 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린성 지안의 4호고분과 5호고분에 있던 것으로, 사건에연루된 조선족 주민들은

"이대로 가면 우리조상인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에 의해 은폐되고 파괴되기 때문에 북한으로 반출하려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산케이는 중국은 이 사건이 있은 후 고분 등이 있는 현장 일대를 역사적 보존지역으로 지정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면서 중국

당국의 이런 강경한 조치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고구려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과 관련해 중국이 고구려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CBS문체부 권주만기자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3419

후진타오는 고구려사 왜곡 및 침탈을 위한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는 중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 및 지방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헤이허(黑河)에서 간행되는 헤이허일보는 지난 2003년 8월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제3차회의가

헤이허시에서 열린 사실을 보도하면서 “동북공정은 후진타오 동지가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을 통해 비준한 사회과학

연구항목”이라고 소개했다.

또 중국 국무원 산하 중앙문사연구관의 랴오닝성 문사연구관은 홈페이지에서 연혁을 소개하며

“쑨진이(孫進已) 연구관의 고구려 관련 연구를 지도자들이 매우 중시하고 지지했으며, 후진타오, 딩관건(丁關根·당시 공산당

선전부장), 리란칭(李嵐淸·당시 부총리), 첸치천(錢其琛·당시 외교담당부총리), 리톄잉(李鐵映·사회과학원장) 동지 등이 모두

중요한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동북공정은 중앙 정부와 무관하다’는 중국측의 주장은 거짓말로 확인된 바 있다.

지난 2002년부터 5년간 진행된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뿐 아니라 고조선에서 간도 문제까지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문제를 다뤘고, 2004년 한국의 반발에 부딪쳐 일단 축소되는 듯 했으나 은밀히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침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인정못한다’고 밝히며 전선을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07년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백두산이 자신들의 영토임을 강조하는 동영상을 홍보하기

도 했다.

한편, 후진타오는 지난 1989년 티베트 학살 현장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국은 몽골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마저도 중국 사람이라고 교과서에

기술하는 등 몽골 역사를 크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몽골국립대학 잠미얀 바트투르(39)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결코 한국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서 “중국은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공공연히 ‘몽골을 되찾자.’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지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에서 열린 국내 전문가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중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몽골의 중국화’를 중요한 과제로 다루고 있다.

몽골 학계에서 몽골사를 3권으로 정리해 출간하자 중국측은 곧이어 8권짜리 몽골사로 정리했고, 다시 몽골측이 5권을

발간하자 지난해 중국측은 15권을 펴내 물량공세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바트투르 교수는 “당시 중국 학계 및 언론은 몽골 역사의 연구중심이 중국이 됐다고 선전했다.”고 전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중국의 초·중·고 역사교과서에 ‘원나라=중국 국가’라고 기술돼...

그러나 바트투르 교수는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정복한 쿠빌라이칸 이후 명나라 설립 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면서 중국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했다.

그는 “한 사람만으로는 가족을 이룰 수 없다.”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티베트, 카자흐스탄 등

역사왜곡 피해당사국간의 공동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053814

쥐나의 억지스런 궤변...

대학 동창 하나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를 백족(白族) 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분증에는 ‘한족’(漢族)이라고 적혀 있다. 또 다른 회사 동료는 성이 왕씨다.

몽골족인데 호적지와 출생지가 다 (한족 문명의 중심지인) 하남성 남양으로 돼 있다.

산서성과 내몽골자치주를 여행할 때 운전을 맡은 기사는 산서성의 한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가 몽골족이라고 털어놓았다.

…여기 무너져내린 만리장성의 모습을 보면 이곳에서 엄청난 역사극들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를 주름잡던 그 많은 소수민족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중국의 한 네티즌이 쓴 글 ‘한족, 중화민족 그리고 악비정신’ 가운데) “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 2003년 12월

중국은 갑자기 때 아닌 ‘민족영웅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12월9일 <베이징청년보> 등 언론들이 “신판 고등중학교 역사 대강에서 ‘악비(岳飛)와 문천상은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므로 더 이상 ’민족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정의했다”고 보도하면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sohu.com’을 비롯해 중국 유수의 사이트는 이 조처를 비난하는 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우스워 죽을 지경이로다. …이 귀여운 변증법과 중국 역사학자들이여! …이건 정말 중국 역사상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이다.”

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707250129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

(『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

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