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환단고기는 진서 중 진서다.(안창범, 펌)

설레임의 하루 2010. 3. 25. 20:45
*출처:다음카페-한배달돠 동방의 등불   글쓴이-치우천왕     http://cafe.daum.net/hanbaedal/Itsa/7 
 
 
 
 

   다음의 논문은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고,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희귀한 논문이다.

그러나 사학계는 우리 민족을 높게 평가하면 제 나라의 역사와 사상을 무조건 부정하는 식민지적 근성이

있다. 곧, 증거가 있고, 이론이 맞다하더라도 몬논문을 부정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학계의 관행이다. 

그러한 관행을 깨고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대로 칭찬해주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대로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정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본 논문을 부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심사숙고해주기 바란다.

참고문헌 : 졸저<천지인 사상과 한국 본원사상의 탄생>,삼진출판사, 2006년 발간, 보급처, 064-752-4906.

안창범 교수 자택.  

 

 

 

                    환단고기는 진서 중 진서다.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

                                                             

Ⅰ. 문제의 제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를 하나로 모아

묶은 합판본이다.

그 범례(凡例)에 따르면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개천 5808년(서기 1911년) 5월 광개절(廣開節)에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한

직후, 묘향산 단군굴 암자에서 나무판자에 굽은 칼과 굽은 끌로 글자 하나하나를 새겨서 목판(木版)을 만들고, 목판을 찍어서

만든 책이 바로 환단고기의 원본인 필사본인 목판본(木版本)이다.

그 욧점을 간단히 정리하면,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종교를 창설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갈파했다는 내용이다.

종교는 교(敎)자를 현실에 맞게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 통쾌한 원천적 개벽천지(開闢天地)이다. 민족의 이상을 높이고,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우며, 민족의식을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굉장한 발상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진서(眞書)가 바로 [환단고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증사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시대의 감각에 맞지 않고 실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교육계마저 환단고기를 백안시한다.

이에 따라 초중등학교 교사와 대학의 교수 그리고 사회의 저명인사들까지 환단고기를 부정하고, 그 이름마저 모를 정도다.

그와 같이 환단고기는 무시당하고 버림받아 침몰직전 상태다. 민족종교 측과 민족사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애써 구제하려고

노력해도 뾰쪽한 묘책이 없는 실정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책이다.

그러나 그 책은 우리 민족의 원초적 본원종교(本源宗敎)를 모르고, 한문을 경솔히 국역(國譯)하거나, 생각이 깊지 않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難題)들로 가득하다.

이들 난제들을 정리하면,

① 범례(凡例)의 정근선사(精勤繕寫)와 부제기궐(付諸剞劂)이라는 기록,

② 서기 2005년 현재, 9202년 전부터 3301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12연방의 환국(桓國)과 7세 환인(桓仁)이

있었다는 기록,

③ 5901년 전에 배달국의 태조인 환웅천황이 개천입교(開天立敎)하고 이삼신설교(以三神設敎)하였다는 기록,

④ 기독교 측에서 신화적인 가상 인물로 취급하는 고조선의 태조 단군왕검의 실재에 대한 기록,

⑤ 중국의 유학사상으로 배워온 오행사상(五行思想)이 한국사상이라는 기록,

⑥ 청(淸)나라 때의 지명이라는 영고탑(寧古塔)이 단군 때부터 있었다는 기록.

⑦ 서구사상으로 알고 있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三權分立) 사상이 한국사상이라는 기록 등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많다.

 

이들 문제들을 본 논문의 연구대상으로 한다.

 

그밖의 천부경(天符經).삼일신고(三一神誥).참전계경(參佺戒經)의 경전, 삼륜(三倫). 오륜(五倫). 오계(五戒), 팔조(八條). 구서

(九誓)의 계율과 덕목, 녹서(鹿書). 화서(花書). 우서(雨書). 용서(龍書).가 림다(加臨多, 加臨土, 神篆) 등의 문자, 상하무등

(上下無等).남녀평권(男女平權) 등의 민본적인 표현과 순수한 역사문제(고준환 박사 지음, 하나되는 한국사, <한국교육진흥재단, 2002, 7,

개정판, 2쇄>의 머리말에서 실증적 역사문제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위의 문제가 풀리면 자연히 풀릴 것이므로 본 논문의 연구대상에서

제외한다.

이상의 이유로 환단고기 위서론자인 젊은 교수들은 환단고기.단기고사,규원사화를 조작 또는 위조라고 주장한다(단군학회,

「단군학연구」 제2호, 2000. 4. pp.33-50. 조인성의 논문).

곧, 위서론자들은 우리 민족의 태고사와 원초적 본원종교의 실재를 인정치 않는다.

반면에 민족종교 측과 재야의 원로 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우리 민족의 태고사를 밝히는 진서(眞書)라고 고평하고, 본원종교의

실재를 주장한다. 그러한 것이 재야 사학파와 강단 사학파, 민족종교 진영과 기독교 측 사이에 심리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부터 환단고기 내용 중 위서론자(僞書論者)들이 주장하는 문젯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해설하고, 전거와 증거를 제시한다.

아울러 그 근본원인이 위서론자들의 한문오역(漢文誤譯)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Ⅱ. 환단고기의 문젯점과 역사적 사실의 일치


1. 환국은 실재했었다.


1) 문젯점 : 환단고기를 보면,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환국이 있었고, 이를 3301년 동안 무위이화한 7세 환인이 있었다. 이에 대한 논증이다.

 

2) 해설 : 환국은 7세 환인에 의해 무위이화한 신교국가(神敎國家)로서 신정일치(神政一致) 국가였다.

신정일치란 신교(신선도의 고전적 표현)의 원리가 정치의 원리이며, 신교의 영역이 정치영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환국의 영토가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라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의미하는 것이며, 군사적 정치적 영역이

아니다.

또한  환국이 12국으로 되었다 함은 신교의 보급영역을 신선도의 12지에 의한 분류의 표현이다.

7세 환인은 불교의 전7불(前七佛)과 같고, 그 흔적이 신라의 고도 계림(지금의 경주)에 전7불(前七佛)의 절터가 있다.

일본의 <일본서기> 및 <고사기>의 건국신화에도 7세의 신(神)이 있다.

중앙아시아 칼마크인의 전설에 나오는 천산(天山)과 불교의 수미산(須彌山)이 구조상 동일하며, 천교(天敎)와 불교(佛敎)를 연구해

보면, 그 기본사상이 동일하다.

그에 대해서는 졸저 [천지인 사상과 한국 본원사상의 탄생],(삼진출판사, 2006, 전국 유명서점 판매 중) 제2부, 제1편, 제9장 “불교는

천교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환단고기」를 조작이다 위조다 하는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眞書)라는 사실이 제1차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전거 :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환국 12연방 가운데 수밀이국(Sumer)과 우루국(Ur)이 서양사에 나오고, 일부의 이름이 중국인의

사서인 진서(晉書) <비리국등십국전:裨離國等十國傳>에 나온다.

예컨대.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하며 영지의 호수는 2만이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2만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하는데 영지의 호수는 5만여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 가야 한다. 이를 헤아리니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숙신(肅愼)은 고조선의 별칭이라 일컫기도 하며,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가를 지칭한다.

진서는 당 태종이 방현령(房玄齡)과 이연수(李延壽)를 비롯한 20여명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동진(東晋)과 서진(西晉)의

사서로서 25사(史)의 목록에도 올라 있는 중국정사이다.

이러한 책에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12연방의 이름이 실려 있고, 강역까지 5만여리라는 일치된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환국의 실존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론(眞書論)이 제2차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우리 민족의 역사는 2000년에서 9200여년으로 서서히 원시반본한다. 연구의 대상인 것이다.

 

4) 실재적 증거 :

최근에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산(Novosibirok山) 및 아바칸 산맥(abakan山脈)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그곳은 환국의 중심지이다. 또한 19세기 말엽부터 1930년대에 걸쳐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주변의 유적조사 발굴이 성행하였는데,

그 결과 종래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언어와 문자로 된 전적류(典籍類)가 많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론이 제3차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2. 환웅천황의 개통천문(開通天文)과 종교창설


1) 문젯점 : <삼성기전> 하편에 안파견 환인이 홍익인간을 위해 환웅에게 “개천입교(開天立敎)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하라”하고,

환웅이 “천경(天經)을 연(演)하고 신고(神誥)를 강(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

환웅이 이삼신설교(以三神設敎)하고 전계(佺戒)로서 권선징악하는 법을 세웠다”고 하였다. 

문제는 개천입교(開天立敎)와 이삼신설교(以三神設敎)의 해석이다.

이를 오역하여 환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고, 우리 민족은 종교도 사상도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이다.

 

2) 해설 :

첫째, 개천입교(開天立敎)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하늘을 열고 가르침을 세우다”로 해석한다.

그와 같이 말이 안 되는 해석을 한다. 개천(開天)의 개(開)자는 “(문이)열리다. (막히고 닫친 것, 아주 크거나 미세한 것,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드러내다. 관통하다. 개통(開通)하다. 대각(大覺)하다. 대통(大通)하다. (꽃이)피다”의 뜻이다.

천(天)자는 하늘, 땅, 사람의 회의문자로서 “천체의 운행원리, 자연의 이법, 천도(天道), 천리(天理), 천문(天文), 천문(天門),

그밖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곧 개천(開天)은 “천문(天門)이 열리다. 개통천문(開通天文)하다. 천문(天文)을 대통하다(관통하다).

천체의 구조와 운행원리를 깨치다. 인체의 돌고 도는 이치를 깨치다. 자연의 이법을 깨치다.

천도(天道)를 대각하다”는 등등의 뜻이다. 이와 같이 개천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입(立)자는 “서다. 세우다. 일어서다”의 뜻이다. 교(敎)자는 “가르치다. 본받다. 교지. 종교”의 뜻이다.

곧 개천입교는 환웅천황께서 “천문을 대통하여 종교를 세웠다”는 뜻이다. 그 기념행사가 오늘날의 개천절 행사이다.

뒤에 상설한다.

 

둘째, 이삼신설교(以三神設敎)의 해석이다. 이에 대해 보통 “삼신으로 가르침을 설치하다”로 해석한다.

이와 같이 의미도 통하지 않는 해석을 한다.

<삼신오제본기>에 의하면 삼신(三神)은 天一,地一,人一을 의미하며, 일(一)은 천지인의 작용을 의미한다.

만물(萬物)은 天地人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짐으로 삼신(三神)을 서물(庶物)의 원의라 한다. 설교(設敎)의 설(設)자는 “만들다,

창설하다. 설치하다. (물건을)진설하다”의 뜻이다. 곧 이삼신설교는 “天一, 地一. 人一의 삼신으로 종교를 만들다”는 뜻이다.

天一.地一. 人一의 <一>은 작용으로써 <一>을 종교적인 의미로 파악하면, 天一. 地一, 人一은 기(氣). 심(心). 신(身) 내지 명(命).

성(性). 정(精)이 되고, 거기에서 도교.불교. 유교가 된다.

단서구결(丹書口訣)에도 “天. 地. 人을 삼재(三才)라 하고, 도. 불. 유를 삼교(三敎)라 하니, 삼재에서 삼교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환웅천황께서 창설한 종교가 도.불.유 삼교일체의 신선도 곧 천교(天敎)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원초적 본원종교이며, 원천적 본원사상이다. 종교성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졸저를 보아주기 바란다.

 

셋째, 문자도, 글도, 종이도 없는 태고시대에 어떻게 종교를 창설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곧 경전과 계율을 어떻게 강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신시에 녹서(鹿書), 자부에 우서(雨書), 치우에 화서(花書), 복희에 용서(龍書), 단군에 신전(神篆)

등 문자가 있었다 하고,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임금(환웅천황)이 <삼일신고>를 최초로 가르치시니(誕訓神誥) 고시

(高矢)는 동햇가에서 푸른 돌을 캐어오고, 신지(神誌)는 돌에 경전을 새겨서 전하였다 하고, 박달나무를 다듬어 은문(殷文)으로

써서 읽었다고도 하였다. 이를 보면, 돌과 나무에 경전과 계율을 새겨서 전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인 것이다.

 

넷째, 환웅천황이 어디에서 종교를 창설했느냐 하는 문제다.

<삼성기전>하편에 환웅이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이 천교(天敎)를 창설한 곳은 태백산이며, 태백산은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다. 그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환웅천황이 천교를 창설한 태백산을 중국의 천산(天山) 또는 삼위산(三危山) 또는 태산(泰山)이라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그 근거로서 그 산의 정상에 못(池)이 있고, 아래에 환웅천황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그것은 환웅천황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상징이며, 근거는 아닌 것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여러 고서(古書)를 검토해보면, 우리 나라의 백두산은 이를 일명 태백산(太白山), 천산(天山, 설산(雪山),

곤륜산(崑崙山), 성산(聖山)이라 칭하고, 뒤에 상술하는 바와 백두산은 지구(세계)의 중앙에 있으며, 산의 정상에 수지영부

(水之靈府)인 천지(天池) 곧 아뇩달지가 있다.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는 중국관영 신화통신(新華通信)을 인용하여 백두산에서 40기의 고대제단 유적과 함께 각종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더욱이 백두산의 주위를 신시(神市)라 부르고, 환웅천황의 자손인 조선족과 한민족이 그 주위에 살고 있다.

따라서 환웅천황이 천교를 창설한 태백산은 곧 우리 나라의 백두산이라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졸저 "천지인 사상과

한국 본원사상의 탄생"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섯째, 환웅천황이 언제 종교를 창설했느냐 하는 문제다.

<단군세기>에 단군왕검이 개천 1565년 10월 3일에 태백산(백두산) 신시 단목 아래에 이르러 천신제(天神祭)를 올리고 국인

(九桓)의 추대를 받아 조선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금년이 단기 4338년이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이 백두산 신시에서 종교를 창설한 때는 지금부터 5901년(1565+4338-2=5901) 전, 음력 10월 3일이다.

이 날이 개천절이다. 그러므로 개천절은 환웅천황의 개통천문과 종교창설, 그리고 단군왕검의 조선국 건국 기념행사인 것이다.

뒤에 상설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환웅천황이 지금부터 5901년 전 10월 3일에 백두산 신시에서 천문을 대통하시고, 도, 불,유 삼교일체의 종교를

창설하여 경전과 계율을 강론하니, 신하들이 돌과 나무에 새겨서 전하고, 3000단부가 모이니, 홍익인간 이화세계 하였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그때는 세계 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이다. 일반적으로 문자도 글도 발달하기 전이다.

그러나 환웅천황이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의 경전과 삼륜(三倫).구서(九誓)의 계율을 강론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일 것이 아닌가? 그것이 홍익인간 이화세계이며 선천개벽이 아닌가?

그래서 수밀이국은 고조선(배달국)을 하느님 나라라 동경하고, 중국에서는 동방예의지국 또는 군자지국이라 칭했던 것이다.

인류사에 유래 없는 대변혁이며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세계 각 처에 고인돌(한국어로서 “고인 돌멩이”이다)이 생기고, 샤마니즘(한국어로서 “진한・마한・변한의

삼한사상”의 변음이다)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후대에 이르면서 환웅천황의 천교(天敎)를 고조선에서는 천신교(天神敎),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敬天敎), 신라에서는 숭천교(崇天敎), 발해에서는 진종교(眞倧敎), 요와 금에서는 배천교(拜天敎), 만주에서 주신교(主神敎),

고려에서는 왕검교(王儉敎), 현재에는 대종교(大倧敎)라 전한다.

여기에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론이 제4차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전거 :

첫째, [천도교창건사]를 보면, 천도교의 제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이 “우리 도(道)의 대운(大運)은 천황(天皇)씨의 근본원리를

회복시킨 무극지운(無極之運)이며, 천황씨는 선천개벽의 시조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도 “우리 대선생(최제우 선생)께서 비로소 무극대도(無極大道)와 대덕(大德)의 근본원리와 접령강화(接靈降話)의 이치를

밝혔다고 하나, 개벽 초의 천황씨로부터 처음 비롯된 운이라 하니 의심하지 말라”하였다.

즉, 최제우,,최시형,,손병희 선생은 선천시대에 개벽의 시조인 천황이 있었고, 그 천황에 의해 성립된 본원종교가 있었으며, 그 종교를

계승한 것이 동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론이 제5차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복희와 문왕이 전한 [주역] <풍지관>에 “하늘의 신비한 법도를 보니 4시(四時)의 운행이 어김없는 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법도로써 종교를 창설하니 천하가 잘 따르더라 하였고, [동문선]에도 “신비한 법도로써 종교를 창설하니 태평이 가득하다”고

하여 [주역]과 [동문선]이 태고시대에 공자나 석가 탄생 이전에 대성인이 있었고, 그 성인이 천도에 의해서 종교를 창설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론이 제6차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의 <최치원난랑비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도⋅불⋅유 일체의 현묘지도인 풍류도(風流道)

가 있었다고 하였다. 곧, 만인이 인정하는 [삼국사기]가 우리나라에 도. 불.유 삼교일체의 본원종교인 천교(天敎)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론이 제7차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고고학적 실증 : ① 환웅천황이 처음 도읍한 곳은 백두산(태백산) 신시였다.

그런데 홍콩의 성도일보(星島日報)는 중국관영 신화통신(新華通信)을 인용하여 백두산에서 40기의 고대제단 유적과 함께 각종

유물을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고학계는 새로운 고대문화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백두산이 천교의 발상지임을 실증하고, 환웅천황의 종교창설이 백두산에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단고기] 위서론을 부정하는 것이며, 진서론이 제8차로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② [환단고기] <신시역대기>에 배달국의 도읍지를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했다. 청구는 지금의 만주 요령이다.

그런데 1983-85년에 걸쳐 중국 요령성 능원현 우하량 유적지를 발굴 조사했는데, 거기에서 제사유적과 신전(神殿), 소조신상

(塑造神像)과 청동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를 방사선 측정한 결과 지금부터 5500년 전으로 나왔다.

이것은 배달국의 존재와 본원종교의 실재를 고고학적으로 실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부정되고, 진서론이 제9차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③ 1970년 압록강 중상류 길림성 집안시 장천지구 제1호 고분 전실에서 고대의 예불도가 발견되었다.

불상의 모습과 의복이 인도풍이 아니라 한국풍이다. 이것 역시 우리나라에 고유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실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단고기] 위서론을 부정하는 것이며, 진서론이 제10차로 입증되는 것이다.

④ 그밖에 종교적 실재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를 들면, 단군릉에서 신선사상을 상징하는 금관조각이 발견되었고,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금관, 사찰 내의 탑과 범종, 대웅전과 한옥형의 사찰건물, 칠성각과 산신각, 그밖에도 사찰 내에 있는 불교관련

 모든 사물이 천교의 실재를 증명한다.

그것은 환단고기  위서론을 부정하는 것이며, 진서론이 제11차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진서 중 진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환웅천황은 아미타불 부처님이시다.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에 환웅천황을 거발환(居發桓)이라 하였다.

거발환은 천지인 일체에 대한 호칭으로서 부처님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설명이다.

첫째, 종교창설은 역사적 실재 인물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환웅천황은 천지인 일체의 천문(天文)을 관통하시어 종교를 창설한 대성인이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은 천지인 일체를 대통한 거발환이며 부처님이시다.

둘째, 환웅천황을 자의로 해석하면, “환웅(桓雄)”은 밝아범을 의미한다. 밝아범은 이를 옛말로 표현하면 곧 박가범이다.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 박가범(薄伽梵)이다. 박가범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환웅천황과 아미타불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환웅천황의 다른 이름이 거발환(居發桓)인데, 거발환은 “빛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뜻으로써 부처님을 의미한다.

아미타의 다른 이름이 무량광불(無量光佛)인데, 무량광불은 “한없는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부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환웅천황, 아미타불은 모두 박가범 부처님이며, 빛으로 세상을 밝게 하는 부처님으로서 동일한 인물이다.

[고려사] 세가 제24대 원종 12년 조에 4월 8일의 행사는 본래 국속(國俗)으로써 관등(觀燈)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음력 4월 8일의 부처님 탄신일은 아미타불인 환웅천황 탄신 기념행사이다. 곧 환웅천황은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인 것이다.

고려 중엽에 선불합작(仙佛合作)되면서 환웅천황 탄신일이 불교화한 것이다. 사찰 내의 대웅전(大雄殿)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면 석가불의 탄신일은 언제인가? 성인의 탄생일은 특이하여 간지(干支)가 모두 같거나, 월일시(月日時)가 같다고 한다.

그런데 [장아함경] <유행경>에 석가모니의 탄신일.출가일.성도일.열반일이 모두 2월 8일이라 하였다.

음력 4월 8일은 석가모니의 탄신일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석가의 탄신일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4월 8일의 존경대상이 환웅천황임을 확연히 알게 된다. 

셋째, 환웅천황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시며 숭배의 대상이시다.

사후에는 국토를 수호하는 호국신 내지 산신이 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오늘날 일본에 건너가서 산악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그

유상이 일본의 북구주(北九州) 영언산(英彦山) 신궁(神宮)에 안치돼있다. 그것은 환웅천황이 부처님이었기 때문에 모신 것이다.

넷째, 세계일보 1992년 2월 22일 2면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지리학회가 인공위성을 통해 지구를 촬영한 결과, 세계의 중앙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 하였다. [석가씨보(釋迦氏譜)]에 천지(天地, 세계)의 중앙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백두산에서 역대 부처님이 모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웅천황은 백두산에서 천문을 대통한 아미타불 부처님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환웅천황이 부처님이며 역사적 실존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웅천황을 무조건 신화적 가상 인물로 취급하거나,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매도함은 실증이 실증을 무시하는

모순행위다. 사실을 사실대로 평가하는 것이 학자의 윤리이다.


4. 개천절은 환웅천황의 개통천문(開通天文) 기념행사다.


개천절(開天節)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천(天)은 하늘, 땅, 사람 등 만물의 일체를 의미한다.

개(開)는 막히고 닫히거나, 너무나 커서 까마득하거나, 너무나 작고 미세하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개천(開天)은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 등 천문형상의 구조와 법칙, 인체계의 조직과 기능, 그리고 사물의 성격과 기능 등을

파악하여 그 이법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인체에 천문(天門 : 혼이 들고 나는 곳)이 있고, 하늘에도 천문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인체의 천문과 하늘의 천문을 열고 들어가면, 혜안이 열리고, 대각 대통하여 천문현상과 인체의 오장육부를 두 눈으로 보듯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환웅천황이 설한 <삼일신고>에 “신(神)이 일세계(日世界)에 타이르고, 사자(使者)는 700세계를 거느리니, 너희 땅은 큰 것

같으나 하나의 타원 세계(一丸世界)라”하였다.

주역(周易) 풍지관에도 “하늘의 신비한 이치를 관(觀)하니 봄⋅여름⋅가을⋅겨울이 어김없는지라, 성인이 신비한 이치로서 종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환웅천황께서 천체의 일부와 그 이법을 보인 것이다.

일월화수목금토의 7회제신지역(七回祭神之曆)과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1년으로(현재와 약간 다름) 하는 일력(日曆, 曆法),

천문역법(天文曆法)과 한서기년(寒暑紀年), 그리고 도,불,유 삼교일체의 천교(天敎) 등 모두가 환웅천황과 삼신일체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 기념행사가 개통천문(開通天文) 곧 선천개벽(先天開闢), 개벽천지(開闢天地), 천지개벽(天地開闢) 기념행사다.

요약해서 개천절(開天節)이다.

  그러나 환웅천황이 개통천문 했다하더라도 망원경도 없는 태고시대에 인간으로서 어떻게 700세계와 타원형의 지구까지 파악할 수

있느냐 하고 <삼일신고>를 조작이 아니냐 하고 의심할 수 있다. <민족비전(民族秘傳)>에 시해법(尸解法)이 있다.

인간이 신선(神仙)이 되면, 영혼과 육신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으면, 하늘을 자유로 날듯이, 인간도 신선이 되면, 영혼이 육신을 떠나 대기권 밖에서 우주

공간과 지구 주위를 유람하며, 천문현상과 지구를 망원경으로 보듯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해법이다.

이를 이해하면, 환웅천황이 신선이 되어 그 신(영혼)이 지구를 유람하고, 사자(使者)를 시키어 우주의 형상과 그 구조까지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삼일신고>의 기록이 사실임을 의해할 수 있고, 개천절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상고시대 천문과학과 인문지리학의 발달을

실증하는 것이며, 상고시대의 정치, 종교, 사회의 제도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그와 같이 위대한 환웅천황과 천도인 개천절이 어째서 지금까지 신화 또는 미신으로 취급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첫째의 이유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三國)이 성립된 이후 불교,유교,도교 등 외래종교를 수입하면서 민족의식이 분열되고

동족상잔을 해도 이를 화합하고 통일할 대 성인이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의 이유는 근세조선이 외래사상인 주자학(朱子學)을 국시로 정하면서 지도층이 외래화하고, 주자학이 환웅천황과 개천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쉽게 주자학과 개천사상을 비교 비판한다.

주자학이 인본주의 사상이라면, 개천사상은 天地人일체 사상으로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을 모두 포용한다.

주자학이 현실주의라면, 개천사상은 과거,현재, 미래를 모두 포용하는 이상주의,현실주의,중용주의 일체사상이다.

주자학이 실증주의라면 개천사상은 천문주의(天文主義)다. 공자가 1000년 앞을 내다보는 대 성인이라면, 환웅천황은 우주 전체를

내다보는 아미타불이시다.

따라서 공자가 아무리 훌륭한 대 성인이라 하더라도 아미타불인 환웅천황을 이해할 수 없고, 현실주의가 좋다하더라도 이상주의를

이해할 수 없으며, 실증주의가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우주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주자학과 개천사상이 다르고, 그러한 주자학이 우리나라의 조정과 지도층을 지배해왔다.

따라서 근세조선의 조정(朝廷) 자체가 외래화하여 환웅천황과 개천절을 무시하고 미신 또는 신화로 취급했던 것이며, 아울러 우리

민족의 태고사와 천교의 실재를 부정하고, 그 기록인 환단고기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환단고기에 대한 금서령(禁書令)이다. 이제는 환단고기를 부활시키는 것이 정도이다.


5. 단군왕검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와 <신단민사(神檀民史)> 등 여러 책을 종합해 보면, 단군왕검은 부왕(父王)의 존호(尊號)가 단웅(檀雄) 곧

거불단환웅(居弗檀桓雄)이시고, 모후(母后)는 웅씨(熊氏) 왕녀(王女)인데, 신묘년(辛卯年 : B.C. 2370) 5월 2일 인시(寅時)에 신시

(神市) 단목하(檀木下)에서 태어났다.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황후(皇后)로 맞아 슬하에 부루(扶婁),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 등 사남(四男)을

두었다.

경자(庚子) 단기 94년(B.C. 2239) 3월 15일,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시고, 제위(帝位)에 있은 지 93년이며, 수(壽)는 130세였다.

평안도 강동현 대박산에 단군왕검의 단군릉이 있다. 오늘날 한씨(韓氏), 선우씨(鮮于氏), 기씨(奇氏)가 단군왕검의 직계손이다.

단군조선은 단군왕검이 무진년(개천 1565. B.C. 2333)에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47세를 전하니 역년이 2096년이다.

  이와 같이 단군왕검은 부모처자와 생년월일시와 돌아가신 연월일과 무덤이 있다. 그밖에 고고학적 실증이 있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그래도 단군왕검을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저의가 무엇인가하고 묻고 싶다. 


6. 오행사상은 중국사상이라 하더라도 원래 한국사상이다.


환단고기에 오행(五行), 오행육정(五行六正),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등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사상(五行思想)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행사상을 중국의 유학사상으로 본다. 그래서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한다.

天一,地一,,人一의 "一"을 순환론의 입장에서 파악하면, 天一은 태양계, 地一은 지구계, 人一은 인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번 공전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생기고, 4계를 성격과 기능에 따라 간략히 표현하면, 봄은 木,

여름은 火, 가을은 金, 겨울은 水에 해당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는 지구의 공전에 의해 생김으로 지구인 土가 4계의 중앙에 위치하여 木,火,土,金,水의 5행이 된다. 또한

5행의 성격과 기능을 인체의 성격과 기능에 대입하면, 5행은 5장과 5지의 성격과 기능에 해당한다.

그래서 <소도경전본훈>에 태백진교는 천부(天符)에 근원하여 지전(地轉)에 합하고 인사(人事)에서 모두 끝난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오행사상은 중국의 유교사상이라 하더라도 삼신일체 사상의 표현으로서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7. 삼권분립 사상은 서구사상이라 하더라도 원래 한국사상이다.


1) 문젯점 : <단군세기> 제13세 단제 흘달 조를 보면,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권력분립을 말하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전단조(前檀朝) 제13세 단제 흘달 16년 조와 후단조(後檀朝) 제7세 단제 등을 2년 조에

국가권력을 입법,사법,행정으로 3분하여 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와 단기고사를 위서라고

주장한다.

 

2) 해설 : 天一,人一,地一의 "一"을 민본적인 측면에서 파악하면, 天一,人一,地一의 일체는 천인지의 일체, 상중하의 일체,

대중소의 일체, 곧 인간평등, 남녀평등, 빈부일체, 만민일체, 생명일체가 된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天一은 조화작용, 地一은 교화작용, 人一은 치화작용을 의미한다. "一"의 작용을 정치적 법률적인 용어로

바꾸면, 조화는 입법, 교화는 사법, 치화는 행정의 의미를 지닌다.

곧 天一,地一,人一의 일체는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 합의제가 된다. 따라서 삼권분립 사상은 서구사상 이전의 한국사상인

것이다. 이를 보면, 한국 고대사회는 민본주의 사회였으며, 왕도정치였던 것이다.

 

3) 실증 : <단군세기> 15세 단군 대음 조에 양운(養雲),수밀이(須密雨) 두 나라 사람이 단군조선에 와서 방물을 바쳤다 하고,

27세 단군 두밀 조에도 수밀이국,양운국,구다천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나라는 환국 12국 중의 하나로써 단군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김상일 엮음,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을 보면, S.N. 크레머는 “최초의 의회제도 ; The First Bicameral Congress”라는

논문에서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수밀이국(Sumer국)에 B.C.3000년경에 의회제도와 법원이 있었고, 아시아에서 왔다”는 사실을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 사상은 서구사상이 되기 이전 원래 한국사상인 것이다.

 

8. 영고탑(寧古塔)은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탑”이란 뜻이다.


1) 문젯점 : 이암의 <단군세기> 16세 단군 위나 조에 “영고탑에 모여 삼신상제에 환인, 환웅, 치우, 단군왕검을 모시어 배향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무리와 더불어 오일대연(五日大宴)을 베풀었다”하고, 20세 고홀 조에는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別宮)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범장의 <북부여기>와 이백의 <태백일사>에도 영고탑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후세에 이르러 지명이 되었다하더라도 단군조선 시대에는 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영고탑을 중국 청(淸)나라의 조상 여섯 형제가 이곳 언덕에 자리 잡고 산 데서 생긴 지명이라

주장하면서 환단고기를 청나라 건국 이후의 위작이라 주장한다. 그 전거를 보면,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들고 있다.

 

2) 해설 :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영고탑(寧古塔)에 대한 기록 말미(末尾)를 보면, 만주어(滿洲語)로

‘여섯’을 영고(寧姑)라 하고, ‘자리’는 특(特)으로서 영고탑은 와전된 것이며, 지명이 아니라고 했다.

곧 만주원류고가 영고탑(寧古塔)을 영고특(寧姑特))이라고 와전한 것이다.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영고탑을 영안(寧安)이라 하고, 영안을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영고탑은 오랄(烏剌), 애호(艾滸)를 합하여 동삼성(東三城)의 하나라 하고, 성(城)이 높고 해자(도랑)가

깊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고탑은 해자로 둘러싸인 영안의 옛 성에 있었던 탑인 것이다.

그것이 후에 지명이 된 것이다. 예컨대, 광화문은 조선조 태조 때에 지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종각은 서울시 종로 1가에 있는 종을

달아매는 누각인데, 오늘날 광화문과 종각은 한편 지명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이 현재는 영고탑이 지명이 되고 있으나, 원래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성이며, 옛 탑이라는 것이다.

곧 영고탑은 단군조선 때부터 있었던 탑인 것이다. 위서론자들이 전거를 확인하지 않고 주장하는 것이다.


Ⅲ. 청동기 출토와 위서론자들의 오류


1. 평양에서 5800년 전후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1) 문제점 : 실증사학계는 국가의 성립을 청동기 사용 이후로 보고, 우리 민족의 청동기 사용은 B.C. 10세기 이상을 올라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위서론자들은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정한다.

 

2) 청동기 출토 : 그러나 최근 평양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역에서 고조선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청동기들과 금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예컨대, 기원전 2500년경에 해당하는 유물로서 상원군 룡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이, 4호 고인돌

무덤에서는 청동단추가 나왔으며,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 무덤에서는 금동귀걸이가 발굴되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5800년 전후의 유물로서 평양 덕천시 남양유적의 집자리들에서 비파형 단검과 좁은 놋단검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실증사학을 근거로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태고사와 천교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2. 환단고기의 목판본과 위서론자들의 한자오역


1) 환단고기 출판내력 : 범례를 보면, 「환단고기」의 원본은 서기 1911년(개천 5808년), 묘향산 단군굴 암자에서 해학 이기(李沂)

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계연수 선생이 줄친 종이에 글을 베끼고(繕寫), 홍범도와 오동진의 두 벗이 돈을 냈으며,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조각칼과 조각끌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새겨 만든 목판본(木版本)이다.

곧 환단고기의 원본은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판각본이라는 것이다. 또한 환단고기의 발문을 보면, 서기 1949년(개천 5846년)에

오형기씨(吳炯基氏)가 이유립씨(李裕岦氏)로부터 위촉을 받고, 환단고기를 정서(正書)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2) 위서론자들의 과오와 목판본 발간 : 그러면 위서론자들이 어디에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가?

문제되는 내용은 환단고기 범례 말미에 기록된 다음의 문장이다.

“桓檀古記 悉經海鶴李先生之監修 而且余精勤繕寫 又因洪範圖 吳東振 兩友之出金 付諸剞劂

(환단고기 실경 해학 이선생지감수 이차 여정근선사 우 인 홍범도 오동진 양우지출금 부제기궐)”이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국역하면, “환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선생의 감수를 거쳤다.

또한 내(桂延壽)가 정성을 다하여 줄친 종이(繕紙)에 (글자를)베끼듯이 붓으로 썼다(繕寫).

홍범도와 오동진 두 벗이 출금하고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자에)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새기었다(剞劂)”는 뜻이다.

그러나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위의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환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오역부분을 지적하면,

선사(繕寫)를 "고쳐 쓰다. 정서하다. 필사하다"로 오역하고, 기궐(剞劂)을 "인쇄 또는 편집"으로 오역하고 있다.

자전에 의하면, 선사(繕寫)의 선(繕)자는 “(실로)깁다. 꿰매다”는 뜻이며, 사(寫)자는 “베끼다. 그리다.

본뜨다”의 뜻으로써 선사는 “원고지 같은 종이(繕紙)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베끼다(寫)”라는 뜻이다.

기궐(剞劂)의 기(剞)자는 끝이 굽은 ‘새김칼(기)’자이며, 궐(劂)자는 끝이 굽은 ‘새김끌(궐)’자로서 기궐은 “새김칼과 새김끌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원본은 인쇄본이 아니라, 목판본인 것이다.

목판본이란 나무판자에 필사본을 부치고, 필사본을 조각칼과 조각끌로 새겨서 목판을 만들고, 목판을 찍어서 만든 책을 의미한다.

그런데 계연수 선생 역시 서기 1911년에 환단고기를 필사하여 목판본으로 30부를 출간하여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도서관에

보관했었으나 분실되어 없으며, 현재 일부가 숙명여자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고 있을 뿐이다.

등록번호 322555, 청구기호 951계연수 환(대출불가)을 찾으면 열람할 수 있다. 또한 환단고기의 발문(跋文)을 보면, 서기 1949년

 

(개천 5846년)에 오형기씨(吳炯基氏)가 이유립씨(李裕岦氏)로부터 위촉을 받고, 환단고기를 정서(正書)하여 출판하였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처음부터 조작이나 위조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의 와중(渦中)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기면서 계연수 선생이 조작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유립 선생이

그 때 태어났다 하더라도 연령으로 볼 때 위조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이 환단고기를 위서라, 조작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제는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를 필사한 목판본이 나왔으니 위서냐 진서냐 하는 문제는 종지부를 찍고, 환단고기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고 새로이 출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3) 환단고기 목판본 작성의 사유 : 그러면 어째서 환단고기를 종이에 인쇄하지 않고, 나무판자에 새겼을까?

그때는 1911년 일제의 한국강점 직후다. 일경(日警)과 일군(日軍)이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들을 마구 체포 구금할 때다.

환단고기를 선사(繕寫)한 계연수 선생과 출금한 홍범도씨와 오동진씨는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로서 시중 출입이 불가능한

체포구금 대상 인물이다. 신변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환단고기를 인쇄하려면 많은 종이를 구입해야 하고, 많은 종이를 구입하려면 신변이 노출되기 쉽다.

그래서 인쇄하지 않고, 사람 출입이 없는 묘향산의 단군굴 암자에 숨어서 나무판자에 환단고기를 새겨서 목판본으로 출간했던

것이다.

참으로 비통하고 충성 어린 작업이었던 것이다.


Ⅳ. 욧점 정리와 결론


이상의 연구를 간략히 정리하면,

1) 3301년 동안의 환국과 7세 환인은 역사적 사실로서 연구의 대상이다.

2) 환웅천황은 지금부터(서기 2005년 현재) 5901년 전 음력 10월 3일에 백두산 신시에서 천문을 대통하시고 종교를 창설하여

홍익인간 이화세계 하였다.

그러므로 이달을 상달이라 하고, 이날에 개천절 행사를 한다. 단군왕검도 이 날에 제천의식을 올리고 조선국을 세웠다.

3) 환웅천황은 아미타불이시며 부처님이시다.

4) 석가모니의 탄신일은 2월 8일이며, 음력 4월 8일은 환웅천황의 탄신일이다.

5) 오행사상은 중국의 유학사상 이전의 한국사상이다.

6) 삼권분립 등 민본주의 사상은 서구사상 이전의 한국사상이다.

7)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영안의 옛 탑”이란 뜻이다.

8) 평양에서 5800년 전후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9) 위서론자들의 한자오역을 지적하고 바로 잡았다.

10) 기타의 문제는 본 연구에서 제외했다. 그 이유를 문제의 제기에서 밝혔다.

이상의 욧점을 간략히 정리하면,

첫째, 앞의 “문제의 제기”에서 제시한 문젯점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과 일치했다.

둘째, 문젯점들에 대한 해설과 전거와 증거를 모두 제시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계연수 선생이 서기 1911년에 발간한 환단고기의 원본은 인쇄됐던 것이 아니라, 필사하여 목판본으로 발간한 진서 중

진서이다.

(2) 3301년의 환국역사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로서 연구의 대상이다.

(3) 1565년의 배달국사와 2096년의 단군조선사는 미비한 점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민족의 태고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정도이다.

(4) 도,불,유 삼교일체의 천교(天敎)는 거발환 환웅천황이 설한 종교로서 우리 민족의 원천적 본원종교이다.

(5) 개천절은 환웅천황의 개통천문(개벽천지)과 종교창설 그리고 단군왕검의 조선국 건국기념 행사다.

(6) 환웅천황은 우주와 자연의 이법을 크게 깨치신 아미타 부처님이시다.

(7) 우리 민족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고, 환웅천황의 종교교육을 받은 천민(天民)이시다.

(8) 민족종교의 도교, 불교, 유교 삼교합일 사상은 외래사상이 아니라 정통적 본원사상이다.

(9) 우리 민족은 환단고기를 진서(眞書) 중 진서(眞書)로 받아들고, 교육계와 학계에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인용할 것을 강력히

건의한다.

(10) 환단고기 위서론자는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일부 다른 고서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연구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이유로 환단고기 전체를 부정함은 소수가 다수를 부정하는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위서론자들은 본 논문에 주해가 없다는 것을 빙자하여 본 연구를 일축할지 모른다. 위서론자들에게 몇 가지 질문한다.

1) 환단고기를 부정하기 전에 그 내용을 고전을 통해 철저히 연구하고 검증한 일이 있는가? 없지 않는가?

2) 단군릉이 평양에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기 전에 과학적 실증적 근거를 가지고 검토한 일이 있는가? 없지 않는가?

3) 평양에서 5800년 전후의 청도기가 발견되었고, 만주 요령에서는 B.C 3500년 전에 청동기가 발견되었다는 보도를 본 일이 있다.

그것을 부정할 과학적 실증적 근거가 있는가?

4)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에 나오는 영고탑을 청나라 때에 생긴 지명이라 주장한다면, 영고탑이 단군조선 시대에 생긴 탑인지,

아니면 청나라 때에 생긴 지명인지. 이를 문헌을 통해 연구하고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했는가? 없지 않는가?

5) 환단고기 범례의 한문을 오역하면서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남의 번역판만을 믿고, 오역된 것을 믿는 것이 실증인가? 과오인가?

위서론자들은 실증을 주장하면서 환단고기를 실증에 의해 확인한 일이 없었다.

국사교육자로서 제 민족과 제 나라의 역사교육과 사상교육에 대한 책임의식이 전혀 없었다.

사이비 국사교육자이며 사이비 실증주의자이다.

그러면서 환단고기를 부정한다면, 위서론자들은 내(자신)가 내 나라를 부정하는 근세조선의 모화론자(慕華論者)인 주자학자나

일제(日帝)의 친일파와 무엇이 다른가?

다음과 같은 비애국적 주장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할 것이다.

첫째,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우리 민족의 태고사를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둘째, 환웅천황의 종교창설과 본원종교를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셋째, 환웅천황의 천문대통과 개천절을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넷째,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실재를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다섯째, 이상의 주장은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파서 없애자는 것이며, 민족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식이 분열 혼탁하고, 국가기강과 사회기강이 파괴되어, 사회악과 부정부패가 만연하기 마련이다.

환단고기를 위서로 간주하여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분명히 이상과 같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그러한 민족적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하고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민족의 생존과 행복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관심이 없다는 말인가? 나 개인만 잘 살고 행복하면 그만이다는 말인가?

앞날을 관망하고 깊은 반성이 있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정치 종교 교육 윤리 도덕 문화 예술에는 정도가 없다.

정의에 정의가 없고, 진리에 진리가 없으며, 근거에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좋으면 그것이 정도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庶人不知何之이나 大人知之何之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