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스크랩] ☞ 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설레임의 하루 2010. 7. 28. 19:36

본 글은 운영자의 역사관과 부분적으로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운영자 주

 

단군은 백두산에 고조선을 세우지 않았다


하가점에서 요서지방으로 내려온 고조선


기자조선과 낙랑국은 고조선의 거수국


마한은 고조선,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거수국


고조선 문명은 중국 문명보다 먼저 청동기시대 열었다


고조선도 춘추시대 겪으며 붕괴해갔다


문헌 고증주의와 반도사관이라는 족쇄


단조(鍛造)술 개발에서 뒤졌던 고조선

 

중국이 준비해온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면서 ‘그 대책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호 ‘신동아’는 동북공정이 펼쳐진 중국 현지를 취재하며, 중국은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니 단군조선은 실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부터 실존하는데, 기자는 주나라의 무왕이 조선왕에 봉한 인물이니 기자조선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이다. 고구려는 한4군(郡)의 하나인 현도군 고구려현에 일어난 왕국이니, 고구려도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변방정권 중의 하나다’라고 주장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반도 북부를 그들의 역사 영토이고 장차 회복해야 할 정치 영토로 보고 있다. 중국은 한민족을 한반도 남부에서 생겨난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하는 3한의 후예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한민족의 역사와 정치 무대는 한강 이남이어야 한다는 것이 동북공정을 펼치는 중국측 주장의 핵심이다.

 

중국은 한국보다 월등히 많은 사료를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난 호 신동아가 발매된 후 적잖은 독자가 “사료를 갖고 덤벼드는 중국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느냐. 중국 주장을 봉쇄할 방안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깰 비책은 없는 것일까.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고 평양에서 활동했다는 고정관념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단군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역사를 멋지게 복원할 수 있다.

 

유럽 국가 vs 동북아 국가

 

국가란 무엇인가. 학자에 따라 정의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법치(法治)를 할 수 있는 권력체를 가진 공동체를 국가라고 한다. 법치는 혈연공동체보다는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혈연공동체에서는 대체로 서열이 높은 사람이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지역공동체에서는 서열보다는 객관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나 세력이 권력자가 된다. 혈연공동체는 한 가지 산업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지역공동체는 여러 가지 산업을 도모한다. 지역공동체로 대표적인 것이 도시국가인 아테네다. 아테네는 농업을 할 수도, 목축을 할 수도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이 발전한 것은 항구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항구가 되기 위해서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어야 하고, 배에 실을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제공해줄 농부나 목부(牧夫)가 있어야 한다. 배에 실려온 물건을 받아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장사꾼도 있어야 한다. 항구에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만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 갈등을 서열보다는 좀더 객관적인 것, 즉 법으로 해결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법치가 시작되는데, 법치를 할 사람은 모두가 인정할 실력이나 권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

 

1800년대 후반 미국의 루이스 헨리 모건은 인디언 사회를 연구한 후 인디언 사회는 혈연공동체적 요소가 강하고, 그가 살고 있는 백인 사회는 지역공동체적 요소가 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역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사회를 ‘문명사회’로 정의했다.헨리 모건이 말한 문명사회를 ‘국가’로 바꾼 이가 엥겔스다. 엥겔스는 ‘국가 이전 단계’와 ‘국가 단계’라는 말로 ‘문명 이전’과 ‘문명’을 정의하면서, 국가라는 말을 등장시켰다. 따라서 ‘국가라고 하는 문명사회는 법을 가진 사회’로 정의되었다.
 

내몽고 자치구에서 발견된 하가점 유적지 터. 가운데 불룩한 부분이 유적지이다.

법은 추상적인 것이므로 어딘가에 이를 기록해놓아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록이 유실된 경우이다. 실제로는 법이 있었는데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를 국가 이전 단계로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고고학적 발굴을 해보니 지역공동체적 특성이 발견되는 시기는 대체로 청동기가 등장한 시기와 겹쳤다. 그리하여 서양의 학자들은 청동기시대를 법치 국가가 등장한 시기로 본다.

 

일반적으로 인류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를 거쳐 철기시대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를 거의 동시에 맞이한 곳도 있다. 일본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일본은 한반도 등에서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경험한 사람들이 건너갔기에 청동기와 철기시대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면 일본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법으로 다스리는 국가가 없었을까.

 

신석기 후기에도 국가가 있었다

 

아테네의 사례처럼 서양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가 생겨났다. 그러나 동양은 달랐다. 한국 중국 등 동양에서는 법치가 출현한 다음에는 물론이고 산업사회가 열릴 때까지도 농촌에서는 성씨(姓氏)별로 모여 사는 혈연공동체를 유지했다. 하버드대에 봉직했던 고고학의 대가인 중국계 장광즈(張光直·작고) 박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서양 잣대로 하면 동양은 혈연 중심이니 산업사회가 올 때까지 국가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농업은 물을 필요로 하므로 대개 강가에서 이뤄졌다. 강물의 범람은 농업을 위협하니 이들은 공동으로 둑을 쌓았을 것인데, 이러한 일을 하는 데는 경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강가에서는 어업이 이뤄지고 어업과 농업 생산물의 교환에 의해 원시적인 상업이 탄생한다. 배를 비롯한 어업도구를 만드는 산업도 시작된다. 산과 사막과 짐승이 우글거리는 육로보다는 강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게 쉬웠을 터이니, 강가의 취락지는 교통의 요지가 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법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신석기시대 후기 농업이 시작된 동양의 강가에 있는 취락지에서는 이미 국가가 등장한다. 신석기 후기에 나타난 법치는 청동기의 출현으로 가속화한다. 청동기를 가진 사람은 간석기(마제석기)를 가진 사람보다 노동력과 전투력이 강할 수밖에 없으므로 쉽게 지배자가 돼, 그 권력을 대대손손 전하면서 권력을 강화한다. 청동기는 이들의 권력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이므로, 이들은 피지배층에게 청동기 제작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국가를 운영해 나간다.

 

단군은 백두산에서 건국하지 않았다

 

‘한민족을 형성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 ‘단군’이라고 대답한다. 한민족을 형성했다면 단군은 실존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단군이 실존 인물이냐’고 물으면, 단군신화를 이야기하며 ‘신화에 나오는 비실존 인물이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룬다.

 

신화 형태로 거론된 인물이라고 하여 실존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주몽과 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갖고 있지만 그들은 고구려와 신라를 건국한 실존 인물이다. 따라서 곰이 변해서 사람이 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신화가 있다고 하여, 그리고 1908년을 통치하다 산신령이 됐다고 하여 단군을 비실존 인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일부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한민족을 형성한 시기의 ‘지도자’ 전부를 단군으로 불렀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단군은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을 이끈 지도자 자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1675년 ‘북애(北厓)노인’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고려 초 발해의 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작성한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규원사화’는 환웅의 아들인 ‘환검(桓儉)’이 최초의 단군이 되고 ‘고열가(古列加)’가 마지막인 47대 단군이 돼 1195년간 나라를 이끌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문헌 고증 과정을 거쳐 작성된 역사책이 아니라 고유신앙의 견지에서 쓴 역사 이야기(史話)인지라 역사학계에서는 사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단군을 거론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나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고 이르렀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한민족은 백두산을 좋아하고 숭상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은 태백산은 틀림없이 백두산을 뜻한다고 해석해왔다. “환웅이 백두산 꼭대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라고.

 

합리적인 상상을 해보기로 하자. 지금도 백두산은 여름에만 올라갈 수 있는 산이다. 9월이면 벌써 눈이 내려 입산이 통제됐다가 5월이 돼야 다시 올라가볼 수가 있다. 물론 전문 산악인이라면 한겨울에도 올라갈 수 있겠지만,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그곳에 도시를 만들 수는 없다. 도시를 만들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필요할 때마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의 얼음을 깨고 물을 확보할 것인가.

 

태백산을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 평양 인근에 있는 묘향산으로 환치해봐도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예루살렘처럼 낮은 산이 있는 곳이 아니면 산꼭대기에 도시를 만든 사례는 없다. 태백산은 눈을 이고 있는 흰 산일 수도 있지만 흰 바위산일 수도 있다. 흰 바위산은 도처에 있기에 태백산을 흰 바위산으로 이해한다면, 환웅과 단군을 백두산에 연결시킬 이유가 사라진다.

 

평양은 만주 땅 여러 곳에 있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는 단군을 거론하지 않고 평양을 ‘선인 왕검의 땅(仙人王儉之宅)’으로 묘사해놓았다. 대체로 단군은 임금, 왕검은 제사장으로 해석해왔으므로, 왕검은 선인(仙人)과 통한다. 그로 인해 단군이 평양에 고조선을 세웠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평양이 있는 대동강 유역에서는 기원전 2000년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그 유물은 국가 단계의 것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어, 고조선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힘을 발휘해왔다.

 

그러나 평양이 대동강가에 있는 평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편평한 땅’을 뜻하는 보통명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평양은 도처에 있을 수 있다. 고대에는 주민이 이주하면 그들이 살던 곳의 지명도 그대로 갖고 가는 경우가 많았으니, 대동강의 평양은 다른 곳에서 옮겨온 지명일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지원(1737~1805)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가 된 집안 형을 따라 북경에 가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열하일기(熱河日記)’란 책을 남겼다. 열하는 북경 북쪽에 있는 난하(欒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를 뜻하기도 하고, 무열하가 난하를 만나는 곳에 있는 도시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했다. 이곳은 도처에 온천이 있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열하’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열하는 지금 승덕(承德)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열하는 북경에서 400여 리 떨어진 곳으로 청나라 황제의 별장이 있었다.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조정은 열하에서 건륭제의 칠순잔치를 치른다고 통보해, 박지원 일행은 급히 열하로 찾아갔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열하일기에는 만주 땅(요동지역)에 평양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평야지대인 요동지역에 평양이 있었다면, 평양은 넓은 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다.

 

강가에서 일어난 문명

 

또 한 번 합리적인 상상으로 세상을 돌아보기로 하자. 지금도 세계사 교과서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로 황하·인더스·유프라테스·나일 강을 꼽는다. 세계 4대 문명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전부 강가의 평지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부산 동삼동의 조개무지처럼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터도 강가나 강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됐다.

 

서울에서도 움집을 비롯해 신석기인의 문명 터가 발견되는 곳은 북한산 꼭대기가 아니라 한강 부근인 석촌동 일대이다. 청동기 문명은 신석기 문명을 누리던 곳에서 나온 것이지,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 청동기를 가진 세력이 이동하더라도 이들이 찾아가는 곳은 대개 신석기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청동기인은 신석기인을 정복하는 형태로 그곳에 정착하니, 청동기 문명은 신석기 문명이 있는 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환웅과 단군은 신석기 후기나 청동기 문명을 가진 세력의 대표였을 것이다. 이들은 근처에 흰 바위산이 있는 강가의 편평한 땅에 살던 신석기인을 정복하는 형태로 이주해 왔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은 기원전 2333년이다. 이 시기 동북아에서는 이미 농업을 하는 신석기 후기 문명이 발달해 있었으므로, 단군이 세운 나라는 이보다 발달한 청동기 문명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한반도 북쪽의 만주지역에서는 기원전 2300여 년에 만들어진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로 유추해본 고조선 세력 범위도.

한국에서는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기원전 1510년쯤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출토됐다는 보고(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2004)가 있으나 이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보다 1000년 정도 후대의 것이다.

 

중국문화와 중국인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황하 중류에서 생겨났다. 이곳에는 농업을 하는 신석기 후기 문명이 있었는데 이 세력을 이끈 것은 전설로 전해오는 3황5제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도전은 황하의 범람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3황5제는 둑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3황5제는 이 지역을 다스린 통치자였지만 그들의 왕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고조선은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시작

 

기원전 2070년쯤 이곳에서 우왕(禹王)이 순(舜)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하(夏)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세습왕조이다.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세습왕조는 그렇지 않은 왕조보다 권력이 강하다. 학자들은 하나라가 순을 비롯한 3황5제가 다스리던 나라와 달리 청동기 문명을 열었기 때문에 세습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한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은 하나라보다 300년 정도 앞서 세워졌으면서 황하의 청동기 문명과 다른 청동기 문명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반도 북쪽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중국 내몽고자치구에서 중국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하가점 하층문화’에 주목하게 된다.

 

중국 요녕성을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는 요녕성 북부 지역에서 동요하와 서요하로 갈라진다. 이중 서요하의 물줄기가 내몽고자치구로 뻗어 올라가는데, 서요하에 합류되는 한 지류가 ‘노합하(老哈河)’이다. 노합하는 지금 적봉(赤峰)시가 있는 지역에서 ‘영금하(英金河)’를 지류로 받아들인다. 영금하가 노합하로 막 합수되는 지점쯤에 ‘홍산(紅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기원전 3500년쯤에 형성된 신석기 후기 유적이 대량 발굴되었다. 그리고 홍산에서 걸어서 30분쯤 걸리는 곳인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하가점에서는 여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됐는데 기원전 2400여 년경에 제작된 청동기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퇴적작용으로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홍산지역에서 꽃핀 신석기 후기 문명을 ‘홍산문화’, 하가점 하층에 꽃폈던 청동기 문명을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름지었다.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가 발견됨으로써 황하를 비롯한 4대 강가에서만 문명이 일어났다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론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끈 세력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하나라보다 먼저 청동기시대를 열었다. 고고학적 연구를 토대로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를 고조선의 출범과 연결시키고 있다.

 

홍산문화를 환인이 이끄는 신석기 후기의 국가체로 보는 것이다. 이 국가체에서 청동기를 개발한 환웅이 3000여 무리를 이끌고 하가점 지역에서 신석기 후기 문명 단계에 있는 곰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새로운 국가체를 세운다. 환웅은 곰족 여성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단군으로 명명해 왕위를 넘겨줌으로써, 왕위를 세습하는 고조선을 만들게 했다….

 

하가점 지역은 평야지대이니 이곳을 평양으로 명명할 수 있다.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단군은 아사달-평양-백악산 아사달-장단경-아사달로 옮겨갔다가, 아사달에서 산신령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이 도읍지를 여러 번 옮겼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고조선이 도읍지를 옮길 때마다 평양이라는 이름이 따라 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태백산으로 표기한 흰 바위산은 어떤 산일까. 하가점 동쪽으로 150여 km쯤 떨어진 곳엔 산맥에 가까운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 있다. 그리고 그 너머 다시 200여 km 떨어진 곳에 역시 산맥 형태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다. 노노아호산과 의무려산은 해발 500~700m 높이이지만, 평야지대에 있는 까닭에 우뚝해 보인다.

 

이 산은 고대인을 불러들이는 신령스러운 장소였을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를 시작한 세력은 이 산에 올라가 성스러운 나무(神檀樹) 밑에서 청동기 문명을 가진 신시가 열렸음을 선포할 수가 있다.다음으로 남는 것은 환웅이 결혼동맹을 맺은, 곰을 숭상하는 곰족의 실존 여부이다. 일본 사이타마(埼玉)현에는 고구려가 패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인이 세웠다는 ‘고려신사(高麗神祠)’가 있다. 고구려는 종종 고려로 표기됐는데, 일본인은 이 신사를 오래전부터 ‘코마진쟈’로 읽어왔다. 일본식 한자 읽기에 따르면 고려(高麗)는 ‘고우라이’가 돼야 한다.

 

‘곰족은 고구려족, 환인족은 한민족’

 

그런데 이곳에서는 ‘코마’로 읽고 있는데, ‘코마’는 고구려인을 따라 들어간 고대 한국어일 가능성이 높다. 코마진쟈가 있는 곳엔 ‘코마무라(高麗村)’ ‘코마가와(高麗川)’ 등 고려를 코마로 발음하는 지명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곳에 상당히 많은 고구려인이 들어갔기에 이곳에서는 유독 고려를 코마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코마는 일본어로 곰(熊)을 가리키는 ‘쿠마’와 발음이 아주 비슷하다. 그렇다면 高麗는 곰을 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구려인은 곰을 숭배하는 곰족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곰족이라면 고구려족은 기원전 2400년쯤 하가점 부근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시기를 기원전 37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때 주몽은 고구려라는 국호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한4군의 하나인 현도군에는 ‘구려현(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하니 기원전 37년 무렵에 고구려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는 고구려현을 흡수하고 난 다음인 6대 태조왕 때부터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주몽은 고구려족의 후예였기에 그의 후손은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구려족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을 수 있다.

 

황하 중류에 세워진 중국 하나라의 17대 왕인 걸왕(桀王)은 대단한 폭군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상족의 대표인 성탕(成湯)이 걸왕을 몰아내고 기원전 1600년경 상(商)나라를 세웠다. 상나라의 31대왕인 주왕(紂王)도 유명한 폭군이었으므로 기원전 1046년쯤 주족의 대표인 무왕이 그를 쫓아내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주나라는 호경(鎬京)을 첫 도읍지로 삼았는데 호경은 지금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西安)이다. 주나라를 개국한 직후 주왕조는 주변에 있는 종족 대표를 초청해 잔치를 열었던 모양이다. 주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는 기원전 12~11세기(BC 1100~1000년)쯤 호경에서 주나라를 세운 것을 축하하는 ‘성주모임(成周之會)’을 열었는데, 여기에 고구려인인 고이(高夷)가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고구려를 주나라에 복종한 종족인 것처럼 묘사하긴 했지만 일주서는 기원전 1100~1000년에 고구려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에서 가까우려면 고구려족은 요하의 동쪽, 즉 하가점이 있는 요서지역에 포진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환웅 세력과 동맹을 맺으려다 곰족에 밀려난 호랑이족은 어떤 종족이었을까.

 

한민족을 이룬 고대 종족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예(濊)족이다. 예족은 맥(貊)족과 인접해서 난하와 대릉하 사이에서 살았는데 ‘일주서’는 이들의 대표도 성주모임에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족은 고구려족만큼이나 오랜 종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예족은 호랑이를 섬긴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렇다면 호랑이족은 예족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예족은 환웅족과 결혼동맹을 맺지 못했기 때문인지 곰족과 다른 길을 걸었다. 고조선이 힘을 잃은 후 예족은 만주 지역으로 이동해갔으나 그곳에서 일어난 부여족에 밀려 상당수가 사라지고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한다. 이들은 함경도 지역에 옥저와 동예를 세웠으나 곧 고구려의 지배를 받다 사라져버렸다.

 

‘나라 국(國)’자는 고서에서 ‘’ 또는 ‘’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전부터 국사학계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발견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환국(桓)’으로 적혀 있었는데 일본인 학자가 덧칠해 ‘환인(桓因)’으로 바꿔놓았다는 주장이 있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 2005년, 제7장 참조). 만일 삼국유사에 환국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면 홍산문화를 이끈 것은 환국이라고 더욱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민족을 ‘한민족’이라고 자칭한다. 한민족이라고 할 때 ‘한’을 ‘韓’으로 적기 때문에, 국호도 ‘大韓民國’이 되었다. 우리말 ‘한’과 한자 ‘韓’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순 우리말 한은 ‘밝다’ ‘크다’ ‘하늘’ ‘하나’를 뜻하는 단어로 두루 쓰인다. 밝은 것은 아침이고 동쪽과 관련이 있으니, 한은 아침과 해가 뜨는 동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밝은 것은 하늘이고 하늘은 하나이다. 이러한 ‘한’을 이두처럼 발음을 따라 한자로 표기한다면 ‘韓’으로 적을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시민단체.

환국 조선 한국은 하나

 

환인의 환(桓)자 뜻은 ‘푯말’이다. 역과 역 사이의 거리를 가리키는 이정표로 쓰이는 푯말을 桓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환이 나라를 상징하는 이름이 될 수 없다.

 

중국은 이민족에 대해서는 좋은 뜻의 한자를 붙이지 않았다. 그들이 자칭하는 이름에 가까운 한자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桓은 ‘韓’과 마찬가지로 순 우리말 ‘한’을 이두식 한자로 적은 것일 수 있다. 환인국, 또는 환국은 한민족이 이끄는 나라, 한국이다. 이 한국에서 3000여 명을 이끌고 나온 환웅이 곰족 여성과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 단군의 檀자는 ‘박달나무 단’자인데, 박달은 ‘밝다’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단군은 ‘밝은 나라의 군왕’, 즉 ‘한국의 임금’이 된다.

 

‘밝은 나라’를 한자로 옮기면 ‘朝鮮’으로 표기할 수 있다. 환인국(또는 환국)과 환웅, 단군과 조선, 그리고 한국은 맥을 같이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옛날 큰 나무는 하늘과 통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늘과 통하는 나무는 신목(神木)이다. 신목은 밝은 곳인 하늘을 지향하니 ‘밝은 나무’, 즉 박달나무가 된다. 신령스러운 박달나무를 한자로 옮겨 적으면 ‘신단수(神檀樹)’가 된다. 고고학적 발굴과 문화사적 추론을 토대로 삼국유사 등에 있는 고조선을 다시 풀어본다면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멀리 노노아호산이 있는 영금하 부근의 평지에서는 오래전부터 농업과 어업, 상업, 그리고 운수업(江上 물류)이 이뤄지는 신석기 후기 문명의 나라 한국(환국)이 있었다. 이러한 곳에 청동기 문명을 가진 환웅이 3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일어나 곰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이 지역을 장악했다. 노노아호산에 올라간 그는 신령스러운 나무 밑에서 신시(神市)가 열렸음을 선언했다. 그는 왕위를 아들인 단군에게 넘김으로써 왕위 세습제를 만들었는데 단군은 나라 이름을 조선, 즉 한국이라고 했다.’

 

단군이 세운 조선을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표기한다. 황하를 비롯한 네 곳에서만 문명이 발생했다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론은 허구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고고학은 4대 문명권 외에도 독자적으로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60여 개의 문명권이 있었음을 밝혔다. 고조선을 우리 문명의 시원으로 삼는 나라가 교과서에 4대 문명발상지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조선 문명을 부정하는 자가당착이다.

하나라의 출범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의 중국인을 ‘화하족(華夏族)’으로 부른다. 화하족은 황화 문명의 주역이다. 화하족은 기원전 2000년쯤에 청동기시대에 들어갔다. 반면 영금하 부근에 있던 환인족과 곰족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족은 기원전 2400년경 청동기 문명을 열었다.

 

그러나 자연변화로 인해 영금하(하가점) 일대에 있던 고조선족이 남하했다. 고조선족의 이동은 단군이 아사달-백악산아사달-평양-장당경으로 옮겨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대의 종족은 자주 옮겨 다녔다. 중국의 상족도 상나라를 세우기 전 주거지를 8번 옮겼고 상나라를 세운 후에도 도읍을 5번이나 옮겼다. 그러나 고조선족의 이동은 결과론적으로 고조선을 화하족에 뒤처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가점에서 발원한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2000년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난하와 소릉하 대릉하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가점 청동기의 특징을 가진 청동기가 난하~대릉하 일대로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하가점의 청동기 문화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왜 하가점 하층문화는 쇠퇴한 것일까.

 

그 이유로는 기후변화가 거론된다. 하가점 하층문화 위에 쌓인 하가점 상층문화에서는 마구(馬具)가 많이 출토되었다. 하가점 유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 학자는 “기원전 1000년 무렵 지구적인 기후 변화가 일어나 하가점 일대가 추워졌다. 이곳은 농업에 부적당한 초원지역으로 변했다. 그로 인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유목생활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고조선족과 고조선 문화의 동진

 

청동기 문명을 연 세력이 난하~대릉하 지역으로 이동하자 이들이 살던 땅은 퇴적작용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위에 유목문화가 생겨나면서 하가점 상층지역엔 유목문화의 유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난하에서 대릉하 지역은 요하의 서쪽이라 ‘요서지역’으로 통칭된다. 요서지역으로 확산된 청동기 문명에서는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銅劍)이 출토된다. 비파형 동검은 황화 유역의 청동기 문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한민족 특유의 동검이다. 요서에 나타난 비파형 동검은 요동지역에서 확대되다가 기원전 800년쯤 한반도로 전래된다.

 

비파형 동검의 동진(東進)은 영금하 일대에 있던 고조선 세력이 난하~대릉하 지역의 요서지역으로 내려왔다가 요하를 건너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넓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유물 가운데 하나가 고인돌이다. 한반도와 그 북쪽의 만주는 전세계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절반 정도가 몰려 있는 ‘고인돌 천국’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고인돌이 많다는것은 이곳에 대단한 청동기문명이 꽃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 고인돌은 요서·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청동기 문명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고조선족이 중원(中原)이라고 하는 중국의 심장부로 세력을 확대하지 못한 것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이 중원을 포함하는 황하 중하류로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중원은 하남성을 중심으로 산동성 서부와 섬서성 동부를 합한 지역을 가리킨다). 지금 중국의 심장부는 북경인데 북경은 중원이 아니라 중원의 북동쪽에 있다. 기원전 1000년 무렵 화하족과 고조선족은 북경 근처를 경계선으로 삼아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가깝게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에 그 시절에 열린 성주모임에 고구려족과 예족의 대표가 참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주나라는 제국주의적 영토 확대 방법인 ‘봉건제도’를 통해 빠르게 영역을 확대해갔다. 청동기 문명인 만큼 주나라는 ‘당연히’ 장자 상속제를 채택했다. 장자 상속제에서는 똑똑한 차남 이하 자식을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주나라는 권력 분배의 스트레스를 봉건제도로 풀어갔다. 즉 차남 이하는 주나라 인근에 살고 있는 다른 종족의 땅을 쳐들어가 차지하게 했다. 그 전쟁에서 이기면 주나라 왕실은 그를 그곳을 다스릴 제후로 봉(封)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독식하도록 했다. 주나라 주변에는 노(魯)·진(晉)·성·초·괵·형·제·한·조·장 등 이민족이 사는 나라가 많았는데, 주왕실 사람들은 이곳으로 쳐들어가 장악했다. 주왕실은 이민족의 땅을 장악한 제후에게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으로 등급을 나눠 작위를 수여했다.

 

주나라의 제후국, 고조선의 거수국

 

노나라와 진나라를 장악한 제후에게는 ‘공’이라는 작위를 주었기 때문에, 노나라와 진나라의 대표는 ‘노공’과 ‘진공’으로 불렸다. 초(楚)나라를 장악한 제후는 ‘자’라는 작위를 받았기에, ‘초자’로 불렸다. 이러한 제후들은 주왕실과 혈통이 같다. 주왕조를 세운 무왕은 성이 ‘희(姬)’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지금 중국과 한국에서는 성(姓)과 씨(氏)를 같은 것으로 사용하나 주나라 때는 성과 씨가 달랐다.

 

주왕실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 제후가 되면 그는 희(姬)라는 성과 별도로 씨를 갖는데, 성보다는 씨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제후도 장자에게 자기 자리를 넘겨준다. 그리고 차남 이하에게는 새로운 영지를 개척케 하고 새 영지를 개척하면 이들을 ‘대부(大夫)’로 임명하고 새로운 ‘씨’를 내렸다. 고조선은 어떤 방법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이 확대된 것을 보면 고조선은 요서와 요동 한반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한 것이 분명하다.

 

이 지역에는 미개한 여러 이민족이 있었다. 이들은 고조선의 통치를 받는 자치국 형태를 유지했는데 고조선 문화권에선 이러한 나라를 ‘거수국(渠帥國)’으로 불렀다. 고조선이 거느린 거수국에는 고구려·부여·기자조선·고죽((孤竹)·예·맥·추(追)·숙신(肅愼)·청구(靑丘)·양이(良夷)·양주(楊州)·발(發)·유(兪)·옥저(沃沮)·진(辰)·비류(沸流)·행인(荇人)·낙랑·임둔·진번·현도·해두(海頭)·개마(蓋馬)·구다(句茶)·조나(藻那)·주나(朱那)·한(韓, 삼한) 등이 있었다.

 

고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낙랑 임둔 진번 현도와 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조선을 멸한 한나라가 고조선 땅에 설치했다는 한4군과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기자조선을 단군조선을 대체한 정권으로 알고 있는데 왜 기자조선을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분류하는가. 이 의문을 풀려면 먼저 중국 사서에 나온 기자(箕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기자는 상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의 작은아버지이다. 걸왕은 학정을 한 폭군으로 유명한데, 기자는 걸왕을 향해 바른말을 했다가 투옥된 저항가였다. 상나라가 주나라 무왕에 의해 망하기 직전 무왕은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줬다. 풀려난 기자는 주 무왕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들려주었으므로 주 무왕은 그를 우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자가 자신은 상나라 사람으로 주나라의 녹을 먹을 수 없다며 조선 땅으로 망명했다. 이를 섭섭하게 여긴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근거이다. 이러한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 등 여러 곳에 나온다.

 

중국은 기록을 근거로 ‘단군이 이끈 고조선은 실체가 없고, 기자가 이끈 조선만 있었다. 그런데 기자가 이끈 조선은 주나라가 임명한 제후국이고 기자도 중국인이니, 고조선은 중국의 일부이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국학운동과 동북공정
“반도사관 벗어나려면 국학 부흥시켜야”

 

한민족 분포지역에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
금남(錦南)이라는 호를 사용한 최부(崔溥·1415~1504)는 제주도에서 추쇄경차관으로 근무하던 1488년 1월, 부친상을 당해 육지로 돌아오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29일 동안 표류해 중국 절강성 영파(寧波)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중국 관리로부터 필담 조사를 받았는데, ‘조선의 관리라고 하는 자가 표류해왔다’는 보고를 받은 명나라 조정은 그를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에 따라 관리는 최부를 데리고 북경으로 올라가면서 많은 필담을 주고받게 되었다. 중국 관리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최부는 성리학을 공부했기에 중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중국 관리가 “당신 나라에도 천자가 있느냐”라고 묻자 최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 있듯이, 천하에도 천자는 한 분뿐이다. 당신이 모시는 천자가 바로 조선의 천자이시다.…”
그해 7월 최부가 조선으로 돌아오자 성종은 그에게 명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게 했다. 그에 따라 최부는 1월30일부터 6월4일까지 겪은 일을 일기체 형식으로 적었는데 이것이 ‘금남선생 표해록(漂海錄)’이란 책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지금의 한국인들도 최부처럼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인은 대륙에 있고 한민족은 반도에 있었다는 인식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헌을 통해 확인한 것이 아니면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 역사학계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중국의 역사 공세에 대항하려면 국학(國學)을 진작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국학은 합리적인 상상력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세워 나가는 것이므로 문헌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다.
국학은 대개 민족 수난기에 주목을 끌었다. 한글은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 자산이지만 언문으로 불리며 조선시대 내내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주시경 선생이 ‘배달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1913년 ‘한글’로 명칭을 바꿔주자, 창제된 때로부터 400여 년 만에 부활하게 되었다.
단군을 주목하게 된 것도 일제 강점과 관련이 있다.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기에 기자조선을 강조했지 단군조선을 내세우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단군을 거론하는 책을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서적으로 보고 몇 차례 ‘수서령(收書令)’을 발동해 거둬들였다. 이렇게 대접받지 못하던 단군이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 대종교로 부활하고 역사로 부활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10월3일이 개천절로 지정되고 홍익인간이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이 지나자 단군은 다시 잊힌 존재가 되었다. 단군은 일부 기독교 세력들로부터 우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기독교와 불교 유교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 사상이고 철학이고 종교이지만, 단군사상은 대한민국에만 있는 사상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부정되고 있다.
남북한은 이념이 달라도 단군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따라서 단군사상을 매개로 이념적인 통일을 해갈 수도 있다. 국학연구소의 김동환 연구원은 “중국의 동북공정이 도발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단군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국학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 공세에 맞서는 에너지를 내기 위해서 국학의 진작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한국인은 고조선이 대동강가의 평양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 기자가 단군에 이어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면, 한국인은 기원전 1000년 무렵 중국이 한반도 북부를 다스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도발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론을 펴온 이가 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중국사)이다. 중국 사료 연구를 통해 고조선사를 연구해온 그는 기자조선은 물론이고 낙랑·진번·임둔이 난하~대릉하 사이인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가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중국 고대 역사서인 ‘한서(漢書) 지리지’와 ‘진서(晉書) 지리지’인데, 두 책에는 ‘기자가 망명해 간 곳은 낙랑군에 있는 (28개 현 가운데 하나인) 조선현이다’”라는 주(註)가 달려 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는 조선현 근처에 수성현이 있다고 기록해놓았고, ‘진서 지리지’는 수성현에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사마천이 쓴 ‘사기’는 갈석산을 ‘발해 서북쪽, 난하 유역에 있다’고 기록해놓았다.

 

기자조선은 북경 부근에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갈석산을 찾아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도 난하 북동쪽에 갈석산이 있기 때문이다. 수성현은 난하 유역에 있는 갈석산을 끼고 있었고, 수성현 옆에 조선현이 있었다니 조선현도 난하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중국 명나라 때 나온 역사책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난하 하류에 영평부가 있는데 영평부에는 기자가 정착했다는 조선성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기자가 있었다는 조선현은 난하 하류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기자조선이 주나라의 제후국이라면 주 무왕은 기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는데, 이는 기자가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땅으로 갔기 때문이다. 기자가 간 곳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이다.

 

기자의 후예가 이끈 조선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이가 위만이다. 한무제는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이끄는 조선(기자조선)을 멸하고 낙랑군 등 4개 군을 설치했으니, 낙랑군도 난하 부근에 있어야 한다. ‘한서 지리지’ 등은 이미 난하 인근에 있는 ‘조선현이 낙랑군 안에 있었다’고 했으니,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 등 4개 군도 난하 부근의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기원전 1100년은 고조선이 주나라에 맞서면서 기세가 등등하던 때였다. 그렇다면 당시의 중국인들은 난하 동쪽을 전부 조선으로 불렀을 것이다. 기자는 조선 땅으로 망명해갔고 무왕은 형식적으로 그를 조선왕에 봉했을 뿐이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고조선은 망명해온 기자에게 변방 지역의 통치를 맡기고, 그가 이끄는 나라(기자조선)를 거수국으로 거느렸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자조선 옆에 있던 낙랑·진번·현도 등 소소한 국가도 모두 고조선의 지배를 받다가 한나라 때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구려도 요서지역에 있었기에 한나라 때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유지된 왕조이다. 봉건제도 덕분에 잘나가던 주나라는 이 봉건제도 때문에 ‘결정적인 한 방’을 맞게 된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주변 제후국이 이민족을 자꾸 공격함으로써 유지되었기에 거꾸로 이민족의 공격을 불러들이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은 주변에 있는 종족이나 나라를 오랑캐로 불러왔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는 동이(東夷), 서쪽에 있으면 서융(西戎), 남쪽은 남만(南蠻), 북쪽은 북적(北狄)으로 표기해왔다.

 

고조선도 춘추시대를 겪었다

 

서융은 유럽대륙에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 또는 흉노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나라는 서융의 대표인 ‘견융(犬戎)족’과 자주 다퉜다. 싸움은 주나라가 먼저 걸었다. 그로 인해 절치부심하던 견융족이 기원전 771년쯤 주나라로 쳐들어와 수도인 호경을 파괴하고, 주나라 12대 왕인 유왕(幽王)을 살해했다.

 

견융족의 침략에 놀란 주왕가는 동쪽으로 도주해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낙양)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고, 평왕(平王)을 새 왕에 앉혔다. 견융족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호경을 수도로 한 주나라를 ‘서주(西周)’라고 하고, 낙읍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의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는 넓은 직할영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동주의 왕은 여기서 나오는 소출로 강력한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서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낙읍으로 쫓겨 온 서주는 직할영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소출을 받지 못하고 제후국의 지원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주왕실을 등에 업은 제후국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수렴청정’을 하듯이 권력을 확보한 제후는 주왕실의 권위를 이용해 다른 제후국에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그로 인해 제후국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을 내걸고 패권을 노리는 전쟁에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갈등이 지속되던 기원전 475년쯤 주나라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진(晉)나라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진공 밑에 있던 한(韓)씨, 위(魏)씨, 조(趙)씨의 3대부 가문이 진공을 쫓아내고 진나라를 3등분해,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른 제후국들도 주왕실이 내린 작위를 버리고 왕을 자처했다. 이로써 유명무실한 주왕실이 해체되고, 자칭 왕을 내세운 국가끼리 싸우는 시대로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전국(戰國)시대’라고 한다. 전국시대는 ‘7웅’이라고 하는 일곱 나라의 힘이 셌다. 7웅 가운데 하나인 연(燕)나라는 지금의 북경 부근에 있었다. 상시적으로 전쟁을 치러온 연과 고조선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마니시와 윤내현

 

고구려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는 많아도 고조선이나 단군을 연구하는 학자는 적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첫째, 단군은 신화 속 인물일 수 있다는 부담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는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무대를 밟아볼 수 없다는 것이 꼽힌다.
그러나 일본 학자는 단군에 대해 연구했다. 단군을 연구한 일본 학자로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 1932)가 대표적이다. 1903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조선사를 연구하고 1914년 교토제국대 조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돼 단군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내용의 논문 ‘단군설화’를 발표했다. 이 논문이 나온 후 한국에서는 단군을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이마니시는 안정복이 주석을 단 중종본 ‘삼국사기’도 발굴했다. 그는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간행한 삼국유사 중종 임신본 고조선 편에 있는 ‘석유환국(昔有桓)’이란 문구를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변조한 혐의도 받고 있다.
석유환국은 ‘옛날(고조선 이전)에 환국(한국)이 있었다’는 뜻이니, 환국의 존재는 보다 명쾌해진다. 그러나 나라 국자를 인할 인(因)자로 바꿔버리면 ‘옛날에 환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로 풀이돼 그 뜻이 확연히 축소된다. 이 때문에 많은 학자가 분노했다.
이마니시 류는 문헌고증을 통한 사학을 이 땅에 전수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의 영향으로 한국 사학계는 문헌고증에 지나치게 경도돼, 문헌에 나오지 않는 것과 위서(僞書) 시비가 있는 사료는 아예 보지 않으려는 전통이 생겼다.

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
일본 학자가 단군을 연구해 설화 속 인물이라고 단정하자 그 많은 한국 사학자가 이를 뒤집지 못하는 것은 이마니시 류에 의해 도입된 문헌고증학이 끼친 악영향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강단(講壇) 사학계가 이마니시 콤플렉스에 빠져 있을 때 이를 극복하려고 한 대표적인 학자가 단국대의 윤내현 명예교수이다.
그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를 전공했다. 그래서 이마니시 류의 사관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사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를 연구할 수 있었다.
그가 정리한 고조선사는 중국사와 얽혀 있는 관계사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과 숱하게 싸우면서 유지돼왔으니 관계사가 아니고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정리하기 어렵다. 그는 중국 사료에 나오는 자료를 근거로 한국 고대사를 복원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윤교수는 고조선이 요서(遼西)에 있었다는 학설을 내놓았는데, 이마니시의 학설을 따르는 국내 학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그를 이단자로 몰았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내몽고 자치구에 황화 문명과 구분되는 청동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윤 교수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재야 사학계를 중심으로 고조선이 난하 부근에 있었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펼치며 고조선사는 물론이고 만주와 북한까지 삼키려고 하는 지금 윤 교수의 학설은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 되고 있다.

 

고조선 세력에 위협을 느낀 연은, 소왕(昭王·기원전 311~279) 시절인 기원전 300년경 전투 경험이 많은 진개(秦開)를 앞세워 고조선 정벌에 나섰다. 당시 중국인들은 말과 마차를 연결한 전차를 전투에 사용하긴 했어도, 개개의 병사가 말을 타는 기마술(騎馬術)은 익히지 못했다. 기마는 북방 유목민족의 전유물이었는데, 진개는 북방 유목민족을 통해 기마술을 익힌 사람이었다. 기마병을 이끈 진개 군은 요하 부근까지 쳐들어갔다. 그로 인해 요서지역에 있던 고조선이 큰 타격을 입고 동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견융의 공격을 받은 주나라가 동쪽으로 밀려나 ‘동주’가 되듯, 고조선도 진개 군의 공격을 받아 동쪽인 한반도 북부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190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돼 있는데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이 기원전 2333년이라면, 단군이 통치를 끝낸 시기는 기원전 425년이 된다. 기원전 425년경과 진개 군이 쳐들어온 기원전 300년쯤 사이 고조선은 힘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진개 군의 공격으로 고조선은 세력을 더욱 크게 힘을 잃었다. 진개 군의 공격이 끝난 후 고조선은 난하 지역을 회복하지만 그 힘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해졌다. 이 시기 고조선은 춘추시대 같은 혼란기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지배력이 급격히 약해진 데는 철기의 보급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단조(鍛造)술이 끼친 영향

 

하-상-주로 이어지는 중국의 ‘3대’와 한민족의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이끌던 국가이다. 이 시기 지배층은 청동기를 독점했다. 청동기는 권력과 부를 보장해주는 보증수표였으므로 지배층은 청동기 제조술이 피지배층에게 흘러가는 것을 차단했다. 피지배층은 간석기나 나무 등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병장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광석을 녹여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도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광물을 녹여보려고 노력했다.

 

청동기의 재료는 구하기 어렵지만 철광석은 쉽게 구할 수 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중국인과 한민족은 철기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만든 철기는 불순물이 많은 무쇠(鑄鐵)라 단단하지 못했다. 떨어뜨리면 쉽게 깨졌고 청동기처럼 날카롭게 만들 수도 없었으니, 이 철기는 병장기나 땅을 파는 농구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뭔가를 눌러주고 받쳐주거나 마찰력을 견뎌야 하는 곳에는 사용할 수 있었다. 병장기가 되지 못하는 철기는 위협이 아니었으므로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철기 만드는 것을 용인했다.

 

철기가 보급되자 점차 농업의 생산력이 높아졌다. 그로 인해 과거에는 개간하지 못하던 땅을 개간할 수 있게 되면서 땅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졌다. 이러한 소유욕은 새 땅을 확보하려는 전쟁을 낳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봉건제도를 통한 주나라의 확대이다. 확보할 수 있는 땅이 줄어들면 제후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초기 철기 문화가 생기면서 고조선의 거수국 사이에서도 새로운 땅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진개 군의 공격을 받은 후 고조선의 통치력이 상실되자 거수국끼리 패권을 다투는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 경쟁에서 우세를 점한 것이 부여이다. 그러나 부여는 모든 거수국을 장악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과 고조선은 분열기로 접어들었는데, 이 분열은 새로운 병기가 등장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새로운 병기는 바로 ‘단조(鍛造)한 병장기’이다. 단조는 쇳물을 형틀에 부워 식힌 것을, 다시 불에 넣고 시뻘겋게 달군 후 망치로 때리고 물에 넣어 급랭(急冷)하는 것을 반복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면 청동검보다 훨씬 더 강하고 날카로운 철검(鐵劍)을 얻을 수 있다. 철검과 철창으로 무장한 세력은 청동검과 청동과(戈, 창) 그리고 간석기로 무장한 세력을 압도할 수 있다. 철광석은 도처에서 구할 수 있어 단조술을 익힌 세력은 단기간에 세력을 확대한다. 청동기 시절에는 토성이나 깨어진 돌로 성을 쌓았으나 단조 철을 만들면서부터는 돌을 자유자재로 자를 수 있어, 돌로 된 성과 건축물을 쌓았다.

 

중국에서 단조 기술은 전국시대 말기에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단조 병장기와 농구가 보급될 무렵인 기원전 222년 진(秦)나라가 연(燕)을 멸망시키고 이듬해 중국을 통일했다(기원전 221년). 오랜 분열기를 끝낸 만큼 진시황은 강력한 통일 정책을 펼쳤다. 영토의 통일뿐만 아니라 철학의 통일이 필요했으므로, 진시황은 진나라의 이념이나 사상과 맞지 않는 책과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학자를 없애버리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다. 그러나 지나친 억압정책으로 통일 14년 만인 기원전 207년 진나라가 무너지고,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와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갈등은 기원전 202년 유방이 승리함으로써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한나라는 중간에 신(新)나라가 등장해 잠시 잘리긴 했으나, 기원 220년까지 400여 년 간 존속하며 중국을 하나로 묶었다. 쇠를 단조한 병기에다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술까지 받아들였기에 한나라의 군사력은 매우 강했다. 이를 바탕으로 양자강 이남까지 영토를 넓히고 서쪽으로도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부터 화하족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한족(漢族)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춘추와 전국의 혼란기는 화하족인 지배층과 이민족인 피지배층을 하나로 녹이는 용광로 구실을 했다. 그리고 진과 한이라는 통일왕조가 등장함으로써 주나라의 품안에 있었던 이민족은 형틀에 부어져 굳은 무쇠처럼 한족으로 굳어졌다. 거대 중국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한나라가 동쪽으로 공세를 퍼부어 기자조선을 멸망시켰다(기원전 108년). 기자조선은 연나라가 망하던 기원전 200년쯤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들어온 위만을 받아들였다. 기자조선은 위만에게 서쪽을 지키는 임무를 맡겼는데 위만은 쿠데타를 일으켜 준왕(準王)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것은 중국 사료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우리 사료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나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위를 빼앗긴 준왕은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들어와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기자조선이 대동강 부근에 있었다면 배를 타고 마한 땅으로 갈 이유가 없다. 기자조선이 난하 부근에 있었기에 준왕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청주 한씨 세보(世譜)는 준왕이 우성과 우평 우량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각각 기(奇)씨와 선우(鮮于)씨 그리고 청주한(韓)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준왕이 한반도로 도주한 것은 한반도가 고조선의 강역(彊域)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右渠王)이 통치하던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기자조선 옆에 있던 낙랑·진번·임둔 등 고조선의 거수국도 함께 무너졌다. 이곳은 중국과 가까운 곳이기에 한무제는 이곳을 한나라 영토로 편입시키며 한4군을 설치했다.

 

그러는 사이 고조선 땅에서도 단조술이 확산되면서 거수국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을 이룩하려는 조짐이 일었다. 이 노력의 선봉에 선 것이 부여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부여와 손을 잡음으로써 세력을 급격히 확대했다. 그러나 요서지역을 포함한 고조선의 옛 강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나라의 쇠락을 기다려야 했다.

기원 222년 한나라가 무너지면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는 4세기에 걸친 긴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거수국

 

고구려 5대 왕인 모본왕은 후한 때인 기원 55년경 난하 유역으로 쳐들어가 점령했다. 그리고 광개토태왕 때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다는 것이 평양 덕흥리 고분의 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고조선의 옛 영토를 되찾은 것이다. 그후 고구려는 서진을 멈추고 한반도 남쪽을 공략한다. 장수왕 때 본격적으로 남쪽을 공략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거수국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신라가 왜군의 공격을 받자 왕이 5만명을 보내 왜군을 내쫓았는데 이는 고구려가 신라를 거수국으로 거느렸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국이 수나라와 당나라로 다시 통일되자 과거 고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수나라의 공격은 잘 막아냈으나 이어서 등장한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실패하면서 고구려가 사라졌다.

 

고·당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의 거수국이었던 신라가 대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사라진 만주에서 발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발해는 신라 이상으로 친당(親唐) 정책을 취했기에 신라와 통일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발해는 요하 서쪽으로는 진출을 기도하지 않았으므로 고조선의 무대인 요서지역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발해가 사라진 후 만주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거수국이었던 거란(요)과 여진(금, 청)이 일어났다. 거란과 여진은 고구려에 대한 귀속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거수국이던 신라 땅에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칭하는 고려가 일어났다. 고려와 조선은 차츰차츰 북진을 거듭해 압록-두만강까지 진출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학자들은 “한국사를 한반도에 한정해서 보는 ‘반도사관(史觀)’으로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담아놓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한민족은 절대 단일민족이 아니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이 땅에 살았던 종족, 남방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세력, 그리고 북서쪽에서 이주해온 종족이 합쳐서 한민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장악하고 문화를 이끌어간 세력은 내몽고 쪽에서 이동해온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룬 이들은 하늘을 숭상하는 한민족이었기에 해가 뜨는 동쪽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고, 그중 일부는 철기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민족의 불행은 중국인에 비해 인구가 현저히 적었다는 것과 단조 철기를 만드는 데 한발 뒤처졌다는 데서 비롯됐다. 화하족은 대륙에 자리잡은 탓에 남쪽과 서쪽으로 ‘거의 무한히’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인구를 늘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자(漢字)라는 문자를 갖고 있었던 것도 중국이 가진 큰 힘이었다.

 

 半島史觀(반도사관)을 벗어나야

 

지금은 거란과 여진 등 고조선과 고구려의 거수국 후예가 모두 사라져버렸으므로 한반도에 있는 한민족만이 유일하게 고조선과 고구려의 후예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 요서와 요동 그리고 북만주 전체가 중국의 정치 영토가 되었다는 이유로 중국은 이 땅에 있었던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사를 그들의 역사로 가져가려고 한다.

 

한민족은 주변 민족과 갈등하고 협력하는 관계사(關係史) 속에서 국사를 이어왔다. 국사라고 해서 한국 자료만 보라는 법은 없다. 지금도 한민족의 안보는 여야 정당 간의 권력다툼이나 노사갈등보다는 미국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관계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는다. 한민족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이민족과 엮어온 관계사를 연구하지 않고 내부 권력 다툼만 연구하는 국사로는 제대로 된 사관(史觀)을 만들 수 없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외국인은 ‘북한 정권이 붕괴했을 때 누가 북한지역을 안정시키는 일을 할 것인가’란 질문에 “6자회담을 하기 위해 북한을 제외한 다섯 나라 대표가 모였을 때,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북한을 국제공동관리하기로 약속했다. 한국이 단독으로 북한을 통치하진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한 지역의 치안이 확보되었을 때 북한에 들어온 중국을 떠나게 하고 통일을 이루려면 지금부터라도 중국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동북공정으로 드러난 중국의 속내를 파악하고 그 대책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반도사관을 벗어나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큰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끝)

 

월간동아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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