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고조선은 환국의 문화중심지인 우하량 지역에서 크게 벋어나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흑피옥이 발굴되는 내몽고 오란합달지역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며 같은 문화중심권에 있었다고 지역적 문물발굴의 결과로 비정 할 수 있다.
고조선은 내몽골 요녕을 중심으로 개국하였다가 하북 그리고 산서지방으로 국가 영역을 넓혔다고 사서 기록을 근거로 판단이 됩니다. 요녕하북을 기반으로 하는 진조선 그리고 산서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번조선 , 만주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하는 마조선이 존재했다고 보여지며 중국 사서에 기록된 조선은 진조선보다는 번조선과의 접촉과 대결이 기록된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이 삼조선으로 분리되었다는 한단고기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지만 요하를 중심으로 한 고조선은 진조선으로 보는게 타당하고 비왕체제의 고조선의 기록은 규원사화에도 기록되어 있음을 볼때 고조선의 문화에서 동호와 기타 동이 국가들의 출발이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것이다.
산해경과 사기,전한서에 기록된 조선은 섬서 함양,장안을 중심으로한 지나제국의 영역을 기준으로 볼때 번조선이 산서에 있엇음이 확정적이라는 점입니다. 4천여년 동안 수도의 이동이 발생했고 적어도 아사달에서 왕검성으로 그리고 장당경등 적어도 두군데로 추가 천도 했을것으로 기록됨을 봅니다.
랴오닝성(遼寧省요령성)의 역사도시 차오양(朝陽조양)시에서 아침을 맞는다. 연무가 피는 다링허(大凌河긿대릉하) 너머로 해가 솟는다. 거대한 북탑 남탑이 위용을 드러내고,고도가 서서히 눈을 뜬다. 차오양의 옛 이름은 영주(營州), 별칭은 연도(燕都)다.이름에 역사가 스며들어있다. 5호16국 시대 선비족이 세운 후연(後燕, 384∼409)은 차오양을 수도로 삼아(燕都) 중원을 들락날락 했다. 앞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쳐 함락시킨 장본인이다. 이후, 발해의 대조영이 건국을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 곳도 차오양이니,한국사와 이래저래 인연이 많다. 이 곳의 청동기 유적지를 조사하면 십중팔구 비파형동검이 나온다.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 문화의 표지 유물이다. 이 지역 동검의 제작 연대는 늦어도 기원전 8세기께 춘추전국시대까지 올라간다. 고조선이 왕성하게 움직이던 시기다. 가장 많이 나왔어요. 무려 60여 곳이나 됩니다. 12대영자라는 곳이 대표적 유적지고요. 저는 이 곳의 동검을 요동 및 한반도와의 친연 관계로 보아 고조선 계통이라고 봅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복기대(고고학) 교수의 설명이다. 12대영자 무덤의 주인공을 조선족 계통으로 보면서, 고고학적으로 차오양지방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룬 집단이 요동에 정착하여 고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차오양 일대의 비파형 동검에 대해서는 임운(林澐) 같은 중국인 학자들도 고조선 계통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고대사회에서 청동기 소유는 곧 집권을 뜻하고, 제작기술은 권력자가독점하게 되므로 용범 출토지는 특정 세력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올랐다. 우와, 이런 기운이…. 탄성이 터졌다. 활짝 열린 풍광이 주는 알지못할 기운이 답사단을 압도했다. 답사에 참가한 부산국학원 오현지(42) 홍보국장은 처음인데도 언젠가 밟아본 듯한 땅 같다. 한국의 태백산이나 지리산에 올랐을 때 벅차오르던 그 느낌과 비슷하다릳고 말했다. 카메라는역광을 뚫지 못하고 희미한 영상만 그려냈다. 희미한 영상속에 불현듯 고조선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바깥엔 향불이 타고 있었고, 굴속에는 부처가 평화롭게 누워 있었다. 펑황산은 오래 전부터 숭배 대상이 되어 왔다고해요. 차오양에서 고조선 유물이 쏟아지는걸 보면 고조선과 어떤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복기대 교수) 고구려의 도읍 동쪽에 있다던 국동대혈(國東大穴)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의 중국 기록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러한 큰 굴에서 신을 맞은 것으로 돼 있다.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을 버티려 애쓰던 굴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곳이 곧국동대혈은 아닐까…. 맹랑한 상상을 하며하산을 재촉하는데, 복 교수가 한마디를 툭던진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의무려산이라고 있어요. 명산이죠. 거기에도 큰 동굴이있어요.가 보실까요. 영혼을 치료하는 산
요동과 요서가 만나는 지점인 베이친(北鎭긿북진). 중원세력이 북쪽 진지로 삼았다는 곳에 의무려산 (醫巫閭山)이 솟아 있었다.듣던대로 명산이었다. 면적은 630㎢, 최고봉의 해발고는 866m. 크게 높지는 않지만 산줄기가이어져 산맥을 방불케한다. 오랫동안 만주족의 성산으로 받들어졌고, 지금은 불교와 도교의 도량지로 이용되고 있다. 의무려산은 이름 그대로,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을 갖는다고 한다. 몽골 초원에 닿았다. 서쪽으로는 능하의 대평원이, 남쪽으로는 발해만이가물거렸다. 천지 사방이 트여 절로 통쾌한기분이 들었다. 조선시대때 이곳을 다녀간 사신들이 왜 그냥 지나치지 못했는지 알만했다. 홍대용의 의산문답(醫山問答)릮과 박지원의 북진묘 견문기는 의무려산에 대한 헌정이다. 후일 다산 정약용도 의무려산을 노래했다.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이란 제목의 시다. 나누어 마신 뒤에/ 호기가 한 곡조를 목 놓아 부른다면/ 그 또한 통쾌하지 아니할까.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 부산(富山)이 곧 여기라는 것. 모습이었다. 동굴 속에서 중국인 승려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낯선문화 현장임에도 별로 낯설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이라서 그런가.아니면 이곳이 국동대혈이라는 것인가.
고조선은 고유의 선도(仙道)문화를 가지고 있었어요. 중국의 도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요동긿요서를 아우르는 엄청난 영역을 통치하려면 그만한 정신문화가 바탕이 돼야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런 면에서 이런 동굴도 고조선 시대엔 수련처거나 제사터로 이용됐을 겁니다.
답사에 동행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정경희(국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정 교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선도 연구자다. 학계 일각에서는 의무려산을 백악산 아사달로 보기도 한다. 지리학자 이형석 씨는 의무려산은 무속과 제천, 선인(仙人)의 산으로서 흰 빛(白山)이 나는데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줄기가 중원세력을 막는 천연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어 백악산 아사달로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무려산은쉽사리 비밀의 문을 열것 같지 않다. 단군왕검이 조선(朝鮮)을 열면서 도읍으로 삼았다는 아사달(阿斯達)….그곳이 바로 차오양, 즉 조양(朝陽)이 아닌가. 아사달은 아침을 뜻하고, 달은 땅 또는산, 양지를 말한다. 그러니까 조양은 릮아침의햇빛이 가장 먼저 드는 땅릫 곧 양달이다. 한국학자들은 일찍부터 조양을 아사달과 결부시켜 고조선의 근원을 좇았다. 문화적 대안으로 내세웠다. 것이 고중국(夏하)입니다. 중국의 요하문명은 고조선 아사달 문명의 일부일 뿐이지요. 나라 아침의 나라라는 뜻으로 아사나 아사달의 한자 표기입니다. 같은 원리로, 밝달 박달은 밝은 산이란 뜻으로 한자 단(檀) 백산(白山) 박산(朴山) 배달(倍達) 등으로 번역되지요.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아사히(朝日)란 말에서 보듯,일본어가 고조선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아사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품고 있을 수 있다. 대륙의 산을 뚫고 벌판을 가르며 힘차게 흐르는 다링허를 보고 있자니, 잃어버린 고국(古國)에 대한 아픔이 불현듯 강렬해졌다. 다링허와 랴오허를 뒤로하고 쫓겨 들어온 반도. 우리의 역사 상상력은 반도에 갇혀 너무 졸아들어 있지 않은가. <3> 다링허에 흐르는 아사달 ■ 고조선의 도읍지는 어디 대동강 요동중심이동설 등 다양 아직 통설이 없다지 아마. 만주(요동)에 있다는 설이 있지만 평양으로 봐야 할 거야. 실제론 아무도 몰라. 그러니 그런 건 시험에 안나와. 솔직히 아이가 고조선에 대해 물으면 뭘 대답할 수 있을까 싶어. 제대로 정리된 것이없으니 말야. 지난 주말 B대학 사학과 동창회 자리에서 오간 대화들이다. 석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 역사교사를 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조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날 분위기를 전해준 K씨(42)는 사학과 출신들이 그 모양이니 일반인들은 오죽할까. 이게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역사지식릳이라며 씁쓸해 했다. 삼국유사에 비교적 많은 정보가 담겨 있으나 아사달 백악산 평양 식으로 언급돼 줄거리가 파악되지 않는다. 평양(平壤)이 북한 대동강변의 평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상식처럼 돼 있다. 식이라 일관된 논리 전개를 어렵게 한다. 150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 뒤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箕子)를조선에 봉하자 장당경(藏唐京,또는 莊莊坪)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되었다… 대표적 학자는 이병도 박사다. 조선후기 정약용과 한치윤 등 실학자들도 고조선의 중심을 한반도로 고증한 바 있다. 북한 학계는 지난 1994년 단군릉 조성을 계기로 그간의 요동 중심설을 포기하고 대동강 중심설로 급선회하고 있다. 통설로 삼았던 학설이다. 중심 이동설은 고조선 초기 중심지는 요동이었으나 후기들어 중국 세력의 확장에 따라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왔다는 절충론이다. 여기엔 기자(箕子)동래설을 어떻게 보느냐가 쟁점이다. 단국대 윤내현 명예교수는 요서(난하)중심설을, 김정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전 고려대 총장)은 예맥조선설 을 내세운다. 이들 논쟁은 고조선 멸망 후 릫한사군릮이 어디에 설치됐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고대사의 뇌관인 한사군 위치가 규명되면 후기 고조선의 도읍지가 저절로 밝혀지게 된다. 중턱의 동굴(가운데), 그리고 차오양시 펑황산 정상의 석굴(오른쪽). 박창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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