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산서에서 하북으로 옮겨놓은 孤竹國

설레임의 하루 2010. 10. 6. 16:52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IWCC/138 
 
 
 
 
 

산서에서 하북으로 옮겨놓은 孤竹國

거의 모든 역사서에 기록된 고죽국 그리고 이형구에 의해서 신문에도 자신있게 등장하는 고죽국은 그 위치가 처음부터 비합리적

설정이라는 것이 주나라의 위치,

상나라의 하남에서 부터 돌발적으로 하북에 올라가있는 고죽국을 어찌 해석해야되나?.

 

 

고죽국을 하북성 진황도 부근에 옮겨놓은 중국사가들,하지만 그들 자체의 역사왜곡을 청나라 제작 대청광여도에서 질타하고있다. 

기자의 하북성 진입설을 꿰어 맞추기위해 진행된 고죽국의 하북성 위치설은 모든 측면에서 사실이 아닌것으로 인식 되어진다,   

 

  

 

백이.숙제가 역사적으로 왜 중요한가? 

백이.숙제는 사마천이 쓴 <사기 열전>에 맨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물론 시대적으로 앞서는 인물이라 그럴 수도 있으나, 열전에 가장 먼저 기술된 이유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상이 바로 백이.

숙제와 같이 도덕적으로 깨끗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백이.숙제의 기록으로부터 많은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특히 중국과 일제가 지워버리고 말살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를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사서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영토가 어디였는지 이미 그 기록이 지워졌으나, 백이.숙제는 <사기 열전>에

맨 처음 등장하는 인물인지라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그 백이.숙제의 기록으로부터 우리는 영광스러웠던 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를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이다.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이 바로 조선과 고구려의 남쪽지역이라는 사실과, 특히 중요한 것은 조선과의 경계선이었던 진시황이

쌓았다는 장성의 위치를 백이.숙제의기록으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는 것이다. 

▲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를 밝혀준 백이.숙제의 무덤. 

     진시황의 장성과도 관련이 있다.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백이.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로 백이(伯夷)가 장남이고, 숙제(叔齊)가 셋째
아들이었다.

고죽국의 왕인 고죽군(孤竹君)은 셋째인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아마 숙제가 왕의 재목(材木)으로 두뇌가 명석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고죽군이 세상을 떠나자 숙제는 “비록 부왕께서 저를 후사로 정하셨더라도
형님이 살아계시는데 제가 어찌 그 자리를

잇겠습니까?

형님께서 뒤를 이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맏형인 백이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네가 왕위를 잇는 것이 부왕의 뜻이다.

내가 이어받을 이유가 없다.”하고는 동생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고죽국을 떠나버렸다.

숙제도 끝까지 왕위에 오를 것을 거부하고는 떠나버렸다.

그래서 왕위는 둘째 아들에게 돌아갔다.

고국을 떠나 동해변에 살다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그들은 주(周)나라 서백 창(西伯昌)이 노인을 잘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몸을

의탁하려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막상 주나라에 가보니 이미 서백은 죽었고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 서백을 문왕(文王)으로 추존하고는 그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동쪽으로 진군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무왕의 수레로 달려가 말고삐를 잡고 간언했다.

“아비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터로 떠나시니 그것을 어찌 효(孝)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죽이려하니 그것을 어찌 인(仁)이라 하겠나이까?”

이 말을 듣고 있던 무왕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들의 목을 치려하자 곁에 있던 강태공이 “그들은 의인(義人)이니 살려주어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백이.숙제는 무사히 그 자리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모두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겼으나 오직 백이.숙제만이 무왕이 저지른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저버린 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주나라를 섬기는 것은 수치로다.

의(義)를 지키어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을 수는 없노라.”

이렇게 결심하고는 수양산(首陽山)에 숨어살며 고사리로 연명하며 살게 되었는데, 머지않아 그들은 기아에 굶주려 죽게 되었다.

그 때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리는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로 연명했노라 (登彼西山兮 菜其薇矣)
       폭력으로 폭력을 대한 것을 무왕은 모른다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신농.순.우.성왕의 길을 잃은 (神農.虞.夏忽焉沒兮) 
       우린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我安適歸矣)
       아, 우리의 목숨은 이제 끝나가노라. (于嗟徂兮命之衰矣)

사마천은 사람으로써의 인(仁)과 의(義)를 지킨 백이.숙제가 굶어죽는 비극과 극악했던 도척이라는 자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비교하며 “과연 천도(天道)란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고 자책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의 잘못된 점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사기>에는 문왕이 죽고 12년 되는 해에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러 문왕의 위패를 앞세워 군대를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잘못된 기록으로 본다.

왜냐하면 백이.숙제가 아비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쟁터로 떠나는 무왕의 불효에 대해 비판한 대목이 있어 당시는 문왕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은나라 주왕이 주지육림과 포락지형으로 민심을 크게 잃어 무왕이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기록했는데, 백이.숙제가 말한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 주왕이 어느 정도 포악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임금을 시해하려는 주 무왕을 꾸짖는 것으로 보아 은 주왕의 주지육림과 포락지형은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백이.숙제는 강태공의 고향에서 살았다

백이.숙제가 무왕에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출병(出兵)의 부당함을 고할 때 무왕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려했으나

강태공이 죽이지 말라고 해서 백이.숙제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런데 강태공은 백이.숙제가 의인(義人)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강태공이 백이.숙제와 같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4부)에서 언급했다시피 강태공의 고향은 동해(東海)로, 동해는 지금의 황해가 아니라 산동성과 하남성의 경계에 있는 내륙호수인

대야택(大野澤) 즉 발해(渤海)였다.

크기는 가로 100Km X 세로 300K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였다. 

강태공의 고향인 동해 근처에 백이.숙제도 살았던 것이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21세 소태단군 52년(B.C 1286) 고죽군(孤竹君)의 자손인 백이.숙제가 나라를 버리고 동해(東海)의 해변가에

살며 혼자 살아갔다.”라는 기록이 있어, 백이.숙제가 강태공의 고향 근처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백이.숙제와 강태공 여상은 모두 같은 동이족이었다.

따라서 강태공이 백이.숙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이.숙제와 강태공의 차이점은?


백이.숙제는 무왕의 출병이 인륜을 저버린 일이라며 만류를 하다가 죽임을 당할 지경에 이르게 되고, 이를 본 강태공은 백이.숙제가

의로운 사람이니 살려주라고 해서 목숨을 건지게 된다.

당시 강태공은 무왕의 출병을 기획하고 지휘한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백이.숙제의 말은 곧 강태공이 저지른 패륜을 꾸짖는 말이다.

그런데도 강태공은 “그들은 의인(義人)이니 살려주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강태공 자신도 무왕의 출병이 도덕적으로 의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단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의롭지 않은 일을 나서서 한 것이고, 백이.숙제는 의롭지 않은 일은 아예 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사람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 너무도 원칙주의자인 백이.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죽게 되고,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강태공은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한 후

제나라의 제후로 봉해져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또한 강태공은 정치를 잘하여 제나라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켰고, 춘추.전국 시대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나라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결국 백이.숙제는 천륜과 인륜을 지킨 청절지사(淸節志士)로 이름을 남기게 되고, 강태공은 권모술수의 대가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백이.숙제는 비록 옳은 일을 하였으나 굶어죽는 것은 지나치다는 감이 들고, 강태공은 결과적으로 볼 때 나쁜 일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강태공도 영어로 말하자면 Famous(유명한) 인물이지, Notorious(악명높은) 하지는 않았다.

당시 실제상황과 지금 남아있는 역사기록이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고죽국은 어떤 나라인가?

중국에서는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을 은나라의 제후국으로 말하고 있으나,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

그 근거로는 행촌 이암선생이 쓴 <단군세기>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22세 색불루단군 때인 B.C 1266년 람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니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이에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황제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기록되어 있어 그 근거가 된다. 

또한 36세 매륵단군 때인 "B.C 653년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이를 연(燕)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알리니 제나라가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기록이 있어 고죽국과 연.제나라는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사기>에도 같은 내용이 언급이 되어 있어 <단군세기> 기록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제나라 환공 23년에 북방의 만족(蠻族)인 산융(山戎)이 연나라를 침공하게 되자

연나라는 곧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고 그것을 응낙한 환공은 연나라에 출병하여 멀리 만족을 고죽(孤竹) 땅까지 몰아내고는

군사를 돌렸다.”

여기서의 만족과 산융은 바로 단군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제나라 환공은 여러 나라들의 회맹(會盟)을 주도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남으로 소능(召陵)까지 원정하여 웅산(熊山)을 보았고, 북으로는 산융(山戎).이지(離枝).고죽(孤竹)까지 토벌했다.

서쪽으로는 대하(大夏)를 토벌코자 사막을 넘어간 일도 있었다.”

즉 제나라의 북쪽 경계가 고죽이란 말이다. 

제나라가 남쪽까지 원정한 소능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 밑에 있는 탑하(漯河)시이며, 북쪽인 고죽은 지금의 산서성 남부 운성

(運城)시의 서쪽인 영제(永濟)시이다.

따라서 제나라는 황하변 하남성 주변에 있던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제나라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중국의 주장은 명백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http://www.mytv21.kr/sub_read.html?uid=6664§ion=sc99&

 

성헌식 씨 글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