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단군] 관련기록-첫번째-두번째-세번째

설레임의 하루 2009. 5. 19. 03:56

*출처:다음블로그-학성산의 행복찿기  글쓴이-운영자  http://blog.daum.net/obk2030/13291991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고대 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금들이 직접 고대 조선의 시조이신 단군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임금들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에 대하여도 제사를 올렸습니다.
아래글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 발췌, 정리한 자료입니다.


[태조 1년]
예조전서 조박 등이 보고하였다.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태조 3년]
도평의사사에서 보고하였다.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태조 6년]
(명나라) 황제가 대화를 하고서 권근(權近)이 학식이 있는 것을 알고는,
제목을 명하여 시 24편(篇)을 짓게 하였다.

권근이 명에 응하여 지었는데...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제목에 대하여,
“듣자하니 머나먼 그 옛날,

단군(檀君)이 단목(박달나무)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가 요임금의 시절.
몇대를 전해왔는지,

햇수는 천년을 지났다 하오.” 라 지었다.

(주:권근(權近)이 중국에 황제를 찾아가 만났는데
황제가 권근에게 24개의 제목을 주고 시를 짓게 하였다.
그중 하나가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 라는 제목이었는데
그 뜻은 '태초에 동이(東夷) 즉 배달민족이 문명을 처음 열었다' 이다.
중국 황제가 이러한 제목을 권근에게 주었다는 자체도 놀라운 일이다.
)


[태종 7년]
평양 부윤 윤목이 보고서를 올렸는데
“평양(平壤)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 지방(西北地方)의 본영(本營)이 되었고..."

[태종 12년]
하윤(河崙)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朝鮮)의 단군(檀君)을 나라에서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건의하기를,
“단군(檀君)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廟]에 제사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 16년 -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내야 한다는 경승부윤 변계량의 상서문]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낼수 있다는 중국의 압력으로 태종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포기하려 하자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변계량(卞季良)이 주장한 글)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천제) 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하늘에 제사지냄을) 폐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하늘에서 내려왔고, 중국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요임금 때 일이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태조 대왕(太祖大王 - 이성계)이 또한 이를 ( 단군(檀君)의 전통을) 따라 엄숙히

하늘에 제사를지내었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임금이)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제천문(祭天文 - 하늘에 제사지내는 글)을 짓게 하고 ...변계량이 지어서 바친 글이 뜻에 맞으니, 상을 주었다.

[세종 7년]
단군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제사하게 하다
(중국의 압력에 의하여 기자 사당(箕子祠堂)에 함께 모셔졌던 단군(檀君) 신위를,
따로 모셔야 한다는 상소)

사온서주부 정척(鄭陟)이 글을 올리기를,
단군은 당(唐)나라 요(堯)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남쪽을 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합당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이행하도록 명하였다.

[세종 9년]
(임금이) 지시하기를,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묘에 관한 제도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의 묘를 세워 제사지내는 일을 모두 옛 제도를 살펴서 상세하게 정하여

보고하라.” 하였다.

[세종 9년]
변계량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음(陰)과 양(陽)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단군(檀君)과 삼국(三國)의 시조도 함께 한 단에 모시고 제사지내는 것도 또한

옳습니다.

[세종 10년]
우의정이었던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저의 본향(本鄕)입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이 산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 - 성스러운 사당이 있는 마을)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못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

[세종 18년]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가 날 때는 보통사람과 달랐으며, 그가 죽어서는 신이 되었으며,
역사상 그의 나라(고대조선)처럼 오래도록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습니다.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도읍했으며,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세종 21년 ]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은 단군 조선(檀君朝鮮)이 (중국) 요임금 때에 시작하였고..."

[세종 128 ]
(나라에서 하는 제사의 내용 중에서)
중춘(봄의 한가운데)과 중추(가을의 한가운데)에 조선 단군(朝鮮檀君)과 기자(箕子)와 고려 시조(高麗始祖)께 제사하고...

단군(檀君)은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위서(魏書)》에,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니, 요임금과 같은 시기이다.” 하였다.】

단군(檀君)·기자(箕子)·고려 시조(高麗始祖)께는 각각 (제사 음식으로) 양·돼지

각기 한 마리를

쓰고... 조선 단군(朝鮮檀君)께 제사지내는 사람과 산, 바다 등의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사람의 등급이 같게 한다.

[세종 148 ]
◎ 문화현(文化縣)
삼성사(三聖祠)가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

【단인(檀因)·단웅

(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 평양부(平壤府)
단군 사당(檀君祠堂)은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
세종 11년에 사당을 (기자와 따로) 세우고
고구려 시조(始祖) 동명왕(東明王)을 같은 사당에 모셨는데,
봄·가을마다 (임금이) 향과 축문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동명왕 묘가 평양부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 지경 용산(龍山)에 있다.

[세조 1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
"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 -

마을이 만개 있는 나라, 또는 넓이가 만리 (약 4천 키로미터)되는 나라) 라

불렸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한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중국과)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역시 (중국과) 달라서 단군(檀君) 이래 독자적인 나라 였으며...

우리 나라는...
수나라·당나라의 창성(昌盛)함으로도 신하로 삼지 못하였으며,
요(遼)나라는 우리를 이웃나라의 예의로 대하였고,
금(金)나라는 우리를 부모의 나라로 일컬었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송(宋)나라는 우리를 손님의 예절로 대하였고..."

[세조 2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 묘향산(妙香山)은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金剛山)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세조 2년]

-임금의 지시-

“평양(平壤)의 단군(檀君)·기자(箕子)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의 사당(祠堂)을 수리하라."

[세조 2년]
조선 단군 신주(朝鮮檀君神主)를 조선 시조 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로,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를 고구려 시조 동명왕지위(高句麗東明王之位)로 고쳐

정하였다.

[세조 6년]
임금이 절하는 자리를 조선 시조(朝鮮始祖) 단군(檀君)과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동명왕(東明王)의 신위(神位)의 사이에 설치하고...

임금이 친히 단군(檀君)·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기자전(箕子殿)에 나아가 제사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묻기를, “고구려 시조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고주몽(高朱蒙)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三國) 중에서 고구려가 강하였다.” 하였다.

[세조 12년]
대사헌 양성지가 상서(上書)하기를,
"우리 나라의 역사기록은 단군(檀君)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沮? 많이 있으니,
요(遼)·금(金)·서하(西夏)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세조 13년]
대사헌 양성지가 상서(上書)하기를,
" 중국(中國)은 요임금 시대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무릇 23번 나라가

바뀌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겨우 7번

바뀌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단군] 관련기록 - 두번째

 

[성종 3년]
황해도 관찰사 이예(李芮)가 보고하기를
단군(檀君)께서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당은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

(三聖)이라 하고...

삼성당의 제사 그릇은 옛날에는 금·은(金銀)을 사용하였는데...

기우제 지내는 제단이 삼성당(三聖堂) 아래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하고.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관서승람(關西勝覽)》에 문화현(文化縣)의 옛 유적을 말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에 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하였습니다."

[성종 19년]
원접사 허종이 중국 사신에게 베푼 일을 보고하다.
" 중국 사신 대표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단군묘(檀君廟)입니다.’ 대답 하니...
중국 사신 대표가 말하기를, ‘(단군에 대하여) 나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고,

사당에 들어가 절했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이 분은 고구려 시조(高句麗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선조 30년]
예조가 아뢰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면
‘삼성사 역시 문화현 구월산(九月山)에 있는데 바로 환인(桓因)·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사당이다.
봄·가을로 임금이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하는데,
홍수,가뭄이 들었을 때 기도를 하면 응험이 있다.’
고 했습니다...

[효종 7년]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글을 올리기를,
"단군(檀君)은 동방에서 맨 먼저 출현했던 임금입니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중국의 요(堯)임금과 함께 왕위에 올라
태백산(太白山)으로 내려와 철옹(鐵甕)에 도읍을 정했다가
패수(浿水) 가로 옮겨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었는데
인문(人文)을 밝게 편 기초가 여기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현종 1년]
윤강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해서(海西) 삼성묘(三聖廟)의 단군(檀君)·환인(桓因)·환웅(桓雄)의 묘를

수리하는 일은 이미 결정됐습니다.

그런데 예관이 와서 제사를 지내어 제사의 격을 높였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조의 낭관을 보내 일을 하게 하라.”

[숙종 3년]
우의정 허목(許穆)이 글을 올리기를,
"동방(東方) 역사책 22가지를 지었습니다.
대개 동방 구역(九域)은 상고(上古 - 태초.아주 오래전.) 때부터

임금을 두고 나라를 세워 중국 바깥의 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단군(檀君)은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숙종 5년]
정유악이 아뢰기를,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도 기자의 사당 옆에 있어,
세종(世宗) 때부터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습니다.
여기에도 전부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숙종 21/06/06]
예조(禮曹)에서 황해도(黃海道) 삼성사(三聖祠)에 있는 단군(檀君)의 축문(祝文)을
평양(平壤) 단군사(檀君祠)의 예에 의거하여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 하였다.

[숙종 23년]
이인엽이 해마다 강동(江東)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平壤)의 동명왕묘

(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단군] 관련기록 - 세번째

 

 

 

(영조 15년]
단군(檀君)·기자(箕子) 이하 여러 왕의 능묘(陵墓)를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16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 이후 기성(箕聖)이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폈으므로,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영조 22년]
임금이 말하기를,
“단군(檀君)에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능을 매년 가을에 보수하게
하라.

향(香)을 내려주고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영조 41년]
예조 판서 심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에 대하여 물으니,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
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
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개국한 것이 을유년이었고, 지금 또 삼성묘의
일이 있으니, 마땅히 제사 지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명왕묘(東明王廟)의 제문(祭文)을 몸소 짓고, 향과 축문을 보내며, 삼성묘의 토판(土版)을
나무 독(?)으로 만들어 덮으라 하고는 독제(?制)를 몸소 그려서 그것을 

덮도록 하였다.

[영조 44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도 단군사(檀君祠)·기자전(箕子殿)·삼국의 시조릉(始祖陵)이
있고,

고려에는 숭의전(崇義殿)이 있으니, 아름답고 거룩하다."

[정조 2년]
(서자 차별을 없애자는 집단 상소 중에서)
유생 황경헌(黃景憲) 등 3천 2백 72인이 상소하기를,
" . 이것(서자 차별)은...단군(檀君)·기자(箕子)와 우리 나라 국초(國初 -
조선 초기)의 법도 아닙니다."  

[정조 5년]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고려(高麗)
시조(始祖)의 왕릉 (王陵)들을 보수하는 절차에 대해 지시하였다.

[정조 7년]
단군묘(檀君廟)와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에게 제사하였다.

[정조 10년]
단군(檀君)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 관리인들을 두었다.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서... 단군은 동방에 있어서 사실 세상이 끝나도록 
 잊지 못할 은택이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을 극도로 갖추어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강동(江東)에 벼슬할 때에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誌)》에 기록되어 있으니..."

(편집자주 ; 북한에서 1994년 개건한 단군릉이 혹시 이것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정조 13년]
삼성사(三聖祠)를 수리하고 제사 의식을 다시 정하였다.
삼성사는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제사하는 사당으로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있는데, (임금이) 친히 제문을 지어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제사하였다.

[정조 16년]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책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 - 하늘에 제사 지냄)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정조 19년]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묘이름을 숭렬전(崇烈殿)이라 하였다.

광주 판관(廣州判官) 이시원(李始源)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 백제 시조의 사당이 있는데 아직도 그 이름이 없으니...

현판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컨대 기자(箕子)의 숭인전(崇仁殿)이나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의 숭령전(崇靈殿)이나
신라(新羅) 시조의 숭덕전(崇德殿)이나
고려(高麗) 시조의 숭의전(崇義殿)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백제 시조의 사당에만 아직껏 이름이 없다니...
숭렬전(崇烈殿) 이라는 칭호로...
현판을 거는 날에는 고울 수령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라.
제문(祭文- 제사때 읽는 글)은 내가 직접 짓겠다.” 하였다.

[정조 23년]
지중추부사 홍양호(洪良浩)가 아뢰기를,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檀君)이 맨 먼저 나오시고...군자(君子)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니...
...유구(琉球 - 오키나와)에서  우리 조선에 조공을 바쳐 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