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반도조선사 이렇게 만들어 졌다

설레임의 하루 2009. 5. 2. 01:35

 *출처:다음블로그-인류시조성전건립회   글쓴이-한얼원     http://blog.daum.net/looktrue/11416681 

 

 

[1] 일제는 한국 땅만 지배할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본래 대륙의 조선 땅과 중국 땅을 분활 통치하고

한반도 속의 대한제국 땅만을 지배할 통치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았다.

일제는 러.일 전쟁 승리와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

(韓日議政書)’를 체결했다.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지금의 한반도 땅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고, 8월에는 제2차 영․일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으로부터도 한국 땅에

대한 식민지배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또 9월에는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마지막으로 러시아로부터도 같은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 왕은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여 하야시

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을 체결하고 1905년 11월 18일 발표하였다.

조선 통감부는 조선의 관헌감독권, 병력 동원권 등 국정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명실 공히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최고 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 일제는 간도 땅을 청국에 팔아 넘겼다.

 

1909(순종3)년 9월 일제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일대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1910년 일제는 대한의 전국 영토를 13도 21부 218군 2도(島) 88읍 2259면으로 확정 발표했다.

1910년 조선 강역을 13도로 확정했다가 간도땅을 청국에 팔아넘긴 후 다시 8도로 축소했던 것이다.

즉 조선의 제 25대 철종 3년(1852년)의 인구는 6,810,206명이었으나 1904년 5,928,802명으로 갑자기 881,404명이 줄어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간도 땅을 청국에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권을 장악한 일제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한반도 땅 만, 식민지로

지배할 통치권을 승인 받은 후 본래 대륙의 광활한 조선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일본의

만행을 영원히 감추어 은폐하기 위한 10개년 계략을 세우고, 중국과 공모하여, 한국의 고대

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도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게 된다.

[2] 반도조선사편수회의 중추원은 어떤 기관인가?

1910년 일황 칙령 제 319호로 초대조선총독에 취임한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는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킬 목적으로 먼저 전통적 민족문화와 고대역사를 말살, 왜곡,

조작한 조선사 교육으로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하여 민족존립자체를 말살하는 과업을

제1 국책으로 삼아 [반도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직속으로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편찬된 조선사와 한반도 속의 지명과 얽어 맞추어 한반도 땅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는 과업이었다.

즉 민족독립사상의 탄압, 역사문화 말살, 왜곡, 찬탈, 황민화 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하는 정책’으로 대한제국 존립 자체를 망치는 악질적인 통치정책기관이

바로 중추원이다.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하여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사

(현행 국사)를 만들었다는 [조선사편수회 회의록]과 [조선사 편찬지침]이 대한민국 정부문서

보관소에 소장돼 있습니다.

한국인은 누구나 일제의 음모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 일제는 무려 20만권의 사서를 불태웠다

조선총독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10개년 계략을 세우고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한국의 국내는

물론 중국 각처를 수색하여 단군조선 삼한의 고사서등 51종 20여만 권의 사료를 색출

수거하여 없애고, 무려 7천여년의 우리역사를 단절하고, 왜곡의 전초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초대조선총독은 1915년『반도조선사 편찬과』를 설치하고 일인 역사학자와 한국 측은 역사학

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 박영효, 이윤용, 권중현 등 역적을 임명하여 한국의 역사 왜곡

작업에 착수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다는 미명으로 조선국민을 일본 사람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총독부는 정무총감이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여 1922년 12월 제64조로

[조선사편찬위원회]의 훈령을 발표했다.

또 1925년 6월 조선총독 훈령보다 일본왕의 명령에 의한 일왕 칙령 제218호로 격상을 높이고

[반도조선사편수회]의 이름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고쳤다.

즉 중국 대륙에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 가야의 대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시키는 노골적인

이름의 [반도조선사편수회]를 [조선사편수회]로 고쳤던 것이다.

[4] 한국의 고대사는 오직 2권 밖에 없습니다.

♦ 일제는 중국 각처에 산재한 한국의 사료를 수거했다.

[1] 일제는 우리국사를 가장 공평하게 편찬한다는 미명으로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한국의 국내 각처에 산재한

단군 조선 삼한의 고대 사료 등 51종 20만권을 불태워 없애거나 일본 왕실로 가져갔다.

[2] 일제는 중국 각처에 산재했던 우리나라의 환인, 환웅, 단군관계의 고사서를 전부 다

색출 수거하기 위해 1922년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 요시다(吉田東伍), 구

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미우라(三浦周行), 와세다대학의 츠다(津田左右吉), 경도제국대학

이마니시(今西龍),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등 8명의

관계자들이 연 122일 동안 중국을 출장가서 장기체류했다.

19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동안 중국을 출장하고,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1925년에는

15명이 연200일 동안 중국 대륙 각처를 누비며 수많은 조선 사료(史料)를 수거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일제는 그 얼마나 많은 한국의 고대 사료를 가져왔는지 도저히 알 수 가 없다.

[3]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조선 사료 총목록 종류가 4,950종이라고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사학자이며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씨가 저서하고 1981년 4월 25일

발행한 [역사와 현대]에서, 1923년 7월 조선사편수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했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

(宗伯爵家)에 있는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 라고 밝혀져 있다.

[4]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1908년 장서각 건립계획을 추진했으나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황실령 제34호에 따라 황실이 관장하던 업무를 이관하는 이왕직관제를 새로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1911년 1월 9일 이왕직도서과(李王職圖書課)로, 이관했다.

같은 해 3월 30일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이관하고 같은 해 6월 19일에는

이왕직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

이들 도서는 1915년 창경궁(昌慶宮) 안에 일본식 건물의 장서각을 지었다.

창경궁의 장서각에 이관된 도서 내역은 우리 고대사 도서가 5,355종 10만 137책이었으며,

기록류가 1만 1730책, 주자(鑄字)가 65만 3721개 71분(盆), 판목 7,501장, 기타 부속품이

12종이었다.

그 후 한국의 고대역사를 말살하고 반도조선사(현행국사)를 편찬한 후 왜곡된 국사의 증서를

영원히 감추어 은폐하기 위해 이 도서들은 일본왕실로 옮겨졌다.

한편 한국의 역사적 증서가 될 [광개토호태왕비문, 모두루비문, 점제현신사비] 등 모든 비문을

훼손시키고 돌아왔다.

일본은 고사서는 불태워 없애고, 비문은 훼손하고 심지어 비를 옮겨서까지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했다. 지금 한국의 고대사는 오직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2사서 외에 없는 사유는

일제에 의해 불태워 없애거나 일본으로 가져간 명백한 증거입니다.

♦ 우리나라의 고사서가 일본왕실 문고에 소장돼 있다.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일본 황실문고에서 근무하다 해방직후에 귀국한 박창화(당시 56세 이미

사망)선생은 일본 왕실문고에 우리나라의 고대사 특히 단군관련 사서들이 대량으로 소장돼

있다, 라고 주장하고 해방 후부터 이들 자료를 되찾아야 된다고 정부당국에 수차례 호소했으나

끝내 호응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1998, 9, 26 한겨레 보도]

우리나라의 고사서가 일본황실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면 정부 당국자는 당연히 일제가

수탈해간 우리 고대사를 되돌려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목록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우리나라 고대 사료의 반환을 촉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일본 정부는 조건 없이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하여 세계적 동참을 호소해야 마땅할 것이다.

또한 일본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상기와 같이 일제가 우리사서를 수탈해간 명백한

증서가 있으므로 일본왕실문고에 소장된 [한국의 고대사서를 반환하라]는 제목으로 국제사법

제판소에 제소를 해서라도 되돌려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 일제는 하북성의 점제현신사비를 평양으로

옮기었다.

한국역사 왜곡의 핵심 이병도의 스승 금서룡(今西龍.

1875~1931)은 1903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

한 후 한국에 들어와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다스렸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조선반도사]를 왜곡, 변조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다.

190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조선사편찬위원의 고적조

사위원에 임명되어, 신라 천년의 왕도를 경주로 얽어

맞추기 위해 먼저 경주를 답사하여 각 유적물을 변조

조작하기 시작했다.

1914년 동경제국대학 교수 재직 중에 백제의 도읍지는 한성(漢城:서울)으로 지정하고 신라

천년의 도읍지는 경주(慶州)로 또한 가락국의 도읍지는 김해로 얽어 맞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도록 단군설화(檀君說話)· 백제국도한산고(百濟國都

漢山考), 신라사연구, 백제사연구, 가야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 조선고사의 연구

(朝鮮古史の硏究) 조선사의 간(朝鮮史の栞) 등 가짜 위서(僞書)를 가장 많이 발표했다.

한편 안정복(安鼎福)이 주석을 단 중종본(中宗本)의 삼국사기 원문을 조작 변조한 작업을

주도 했던 인물이며 황국신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1922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중국에 출장가서 중국 각처를 누비며 수많은 조선 사료(史料)를 수거하고 심지어 광개토호태

왕비문, 모두루비문, 점제현신사비(棕蟬縣神祠碑)의 비문을 훼손시킨 장 본인이다.

특히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13년 처음 하북성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고 그의 일당들이

본래 중국 하북성의 산해관 좌측 갈석산에 세워졌던 점제현신사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옮겨 놓고 삼국사기 중요 지명의 열대패 삼수고(洌帶浿三水考) 논문을 발표하여,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한반도 속의 평양에 존재했다는 학설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

1922년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는 중국의 출장에서 돌아온 조선사편찬 실무자들을 독려하여

조선사 편찬 시책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국의 고대 역사, 전통적 문화를 알지 못하게 불태워 말살하면 민족정신

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악행을

과장하게 들추어내서 편찬하라,

그렇게 조선사를 편찬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하므로서 조선인 청소년들은 자국의

선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되는 하나의 기풍이 조성될 것이다.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조선인들이 일본사람으로

동화되는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사를 만들어 주는 목적이며,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 결의에서 [환인, 환웅, 단군의 고조선과 북부여의 해모수까지

무려 7,166년의 역사는 짤라 없애고] 제1편「삼국이전」을 「신라통일이전」으로 정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

제6편 「조선시대후기」로 결정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을때 조선반도사(현행국사) 편찬지침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을 상고 삼한, 삼국, 통일 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7쪽, 47쪽)

1928년 12월 이병도,·신석호, 홍희·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崔南善)도 촉탁위원으

로 참여했다. 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

육당 최남선은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개찬한 사실에

대하여 지적했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또 숙신(肅愼)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는 민족이다.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발해(渤海)의 역사도 우리 조선사에 중요한 나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인가?

일제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금서룡)이 대답하기를 숙신은 연대상 역사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학 민족학의 연구범위에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해 역사는 조선사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발해 역사는 생략하겠다. 또한 심의과정에서

정만조(鄭萬朝)·이능화(李能和)·어윤적(魚允迪) 등이 단군(檀君)·기자(箕子) 등 건국신화는

민족정신 발휘 상 중요하며, 삼국 이전을 고대조선으로 하고 신화는 첫 부분에 넣어야 할 것과,

강문(綱文)에 우리글을 넣을 것 등을 제안했으나 일본인 위원들의 독단으로 원안 그대로

결정되었다.

일제식민지 때의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 결의에서 제1편「삼국이전」을 다시 「신라

통일이전」으로 정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 제6편 「조선시대후기:조선왕조 실록」으로 정했다. '조선사편수회'

에서 본래 7편으로 정했으나 6편으로 줄인 것은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

이전」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라 했다.

▶ 조국을 배신한 이병도의 만행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찬회'에서 편찬된 조선사를 그대로 계승한 이병도는 1963년 5월 국사

교과서 편찬에 관한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28명의 국사학자와 국사담당 교사들은 12차례 회의

를 갖고 다음과 같은 세부지침을 세웠다.

1. 단군 : 단군은 한민족의 신화로 취급하라.

기자·위만조선에 관란 사실(史實)은 고조선에 포함 취급하되 '기자, 한씨, 위만, 위씨 조선 등

용어는 쓰지 않는다. 기자동래(東來) 기자운운은 교과서에 수록하지 않는다.(중략)...

2. 삼국의 건국 및 건국연대 :

① 주몽 ·온조 ·박혁거세는 부족사회의 부족장으로 다루고,

②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건국연대(BC 57,37,18)는 표시하지 않으며,

③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것은 고구려,백제, 신라의 순으로 정하고,

④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때부터 또는 몇 세기부

터라고 편찬 한다.

국사교육내용통일위원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연대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고대국가의 성격을 정의한 사학계에서는 BC 57,37,18년설을 부인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 삼국의 시조를 삭제한 이유는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의 건국 시조가 여러 사람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고 이유를 달았다. [1986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徐 熙乾]

[5] 1938년의 조선사와 현행 국사는 똑 같습니다.

(1) 1938년 일제가 독자적으로 편찬한 조선사] 와

(2),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5년 3월 1일 발행된 현행 고등학교 국사]는 그 구성 형태와

근본적 내용은 똑 같습니다.

또한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의 요결문과 조선사 편찬 지침과 똑같이 현행 국사는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로 곧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사는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을

근간으로 현행 [국사교과서]를 편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유구한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도대체 어찌하여 오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 밖에 없게

되었으며, 일제는 무슨 목적으로 남의 나라 국사를 만들어 주었겠는가?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이케노우치(池內宏), 경도제대 이마니시

(今西龍)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신석호․ 홍희같은

한인역적들이 참여하여 1938년(소화13년) 3월에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인류최초로 개국했던

1, [환인의 환국 BC 7199년)]부터 ⇒

2, [환웅의 배달국시대] ⇒

3, 3황5제의 진단국시대 ⇒

4, [단군왕검의 고조선 삼한시대)] ⇒

5, [해모수의 북부여 후 삼한시대의 마지막 변한왕 계왕(稽王) BC 17년] 까지 무려 7천년의

우리나라 역사는 짤라 없애 버리고, 세계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우리나라를

강탈한 왜적이 남의 나라 역사를 말살, 왜곡, 조작, 유린해서 국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 침략자가 만들어 준 국사를 해방 62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그대로

교육하고 있는 민족이 도대체 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또 있겠는가?

또한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만든 국사교과서에 대하여 오늘날 까지 단

한번의 비평과 검증도 없이 모두 수용하고 청년학도들에게 그대로 교육하고 있는 민족이

도대체 제 정신이 있는 민족인가? 왜독에 중독되어 넋을 잃은 얼빠진 민족인가?

박병역 기자, truelook@hanmail.net  

(인터넷신문의 선두주자 뉴스타운 Newstown / 메디팜뉴스 Medipharm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