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독도

어부 안용복의 고독한 투쟁.

설레임의 하루 2009. 4. 25. 07:59

출처:야후블로그-역사의 천존고   http://kr.blog.yahoo.com/shim4ro/2585




 안용복이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것은 숙종19년 1693년 이었다.

당시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을 비롯해 어부 40명과 함께, 봄철 울산(蔚山)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울릉도(鬱陵島)까지 나아가 

배를 대었다.
 그런데 울릉도에는 우리 어선뿐 아니라 일본 어선도 정박해 있었다. 양측간에 구체적으로 어떤일이
벌어졌는지는 나와있지 않은데,

일본인은박어둔·안용복 2인을 꾀어내 잡아서 가버렸다. 

일본은  그 두명을 몇달동안이나 억류하고 있다가 겨울철이 되어서야 대마도(對馬島)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을 통하여 조선에

송환시키고,  아울러  죽도(竹島)가 일본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안용복등의 조업행위를 항의하는 한편 조선인이  고기잡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였다.

 여기에 귤진중은 우리나라의 고유지명인 울릉도를  '죽도'로 산개(刪改-명칭을 변경함)해 줄 것을  수차례나 요청우리 고유 영토임을

분명하게 하였으며, 일본역시 별다른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였지만, 조선은 이러한 귤진중의 요청을 일축하였으며 외교문서를 통해 울릉도가
당시 독도는 울릉도에 소속된 섬으로써, 울릉도가

조선영토인 이상 독도는 거론이 대상조차 될 수 없었


17세기 후반 제작된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 


 이 지도에는 울릉도 독도 제주도 대마도뿐 아니라, 압록강과 두만강 북변의 영토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봉화는 우리 영토가 아닌 곳에는 절대 설치할 수 없는 곳인데, 사진 좌측 상단에 보면 압록강 북쪽에도 봉화지점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독도가 울릉도의 안쪽에 그려져 있는데, 이 당시 지도에는 관념적인 지리개념을 실측과 함께 적용하였기 때문에 왜곡된 것이다.

 따라서 독도가 울릉도의 안쪽에 그려져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토임을 보다 분명하게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1차 외교분쟁은 일본인들의 영해침범 행위에서 비롯되었지만, 여전히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불법조업행위를 일삼았다.
 이에따라 안용복은 흥해(興海) 사람 유일부(劉日夫)·승려[僧] 뇌헌(雷憲)등과 함께 재차 일본을 항의 방문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외교사절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안용복등 11명은 1696년 8월
29일 귀국직후 강원 감사

(江原監司) 심평(沈枰)경옥(京獄)에 나치(拿致)된 후 동래(東萊)부로 인계되었다가 숙종 22년(1696 ) 9월 22일 비변사로 압송된 후

추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용복은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뇌헌(雷憲), 유일부(劉日夫)등과 함께  일본으로 항의
방문해야 되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울릉도에 재차  갔을 때 왜선(倭船)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 

앞장 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는 자산도(子山島- 당시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칭하던 말)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를 만나서,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

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마땅히 백기주(伯耆州 - 시마네현)에 전보(轉報)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완을 금하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울릉 자산 양도 감세(鬱陵子山兩島監稅)라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기주 도주가  들어온 이유를 묻자 ‘전일 두 섬의 일로 서계를 받아낸 것이 명백한데,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서계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 하였더니, 도주가 허락하였습니다


 즉 안용복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대마도주의 외교물품 횡령혐위와 외교문서 위조 행위및 그와 관련한

영해침범방조행위를 고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백기주 도주역시 안용복의 강경입장에 밀려, 상소로써 막부정권에게 알리는 일을 허락해 준 것이다.

  그런데 마침 대마도주의 아버지는 막부정권의 요직을 맏고 있었으며,  만약 그일이 알려지면 그 아들의 목숨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급하게 안용복 일행을 찾아가 아들의 목숨을 구하며, 급한데로  전일 지경을 침범한 왜인 15인을 처벌하는 것으로

어렵사리 사태를 무마 시켰다.

이어서 안용복은 백기주 도주로부터,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양양을 통하여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런데  영의정 유상운, 좌의정(左議政) 윤지선(尹趾善) 등을 비롯한 조종 대신들은 대마도를 통한 전통적인 일본과의 외교교섭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극형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영돈녕부사 남구만은 비록 안용복의 죄는 무겁지만 '대마도의 왜인이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거짓 칭하고, 강호(에도 -

도쿠카와 막부)의 명이라 거짓으로 핑계대어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이 울릉도에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게 한것은' 또 하나의 쾌사(快事)

라며, 정상을 참작하여 안용복에 대한 주살논의는 신중하게 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신여철(申汝哲)도 국가에서 못하는 일을 그가 능히 하였으므로 공로와 죄과가 서로 덮을 만함으로 한가지 죄만으로 결단할 수

없다며 변호해 주었다.
 
 남구만 신여철등의 변호로인하여 안용복은 사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결국 유배형을 떠나야 했다.

물론 안용복에게도 국가의 허락없이 국경을 넘었다는 것과, 고전적인 관념에 비추어 볼 때 외교마찰을 빚었다는 정도로도 충분히

중형을 내릴만한 근거는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안용복이 막부로부터 받았다가 대마도주에게 빼앗겼다는 서계는 공식 인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1697년 일본 막부에서 

울릉도를 조선땅으로 확인한다는 통지가 오고서야 그의 말이 진실임이 드러났다.
 그 뒤 대마도주 역시 동래부를 통해 일본어민이 울릉도 고기잡이를 금지한다는 막부의 결정을
알려왔으며, 조선역시 3년에 한번씩

지방수령으로 하여금 순찰방문하게 한다는 수토제도를 정식화 하였다.

 다만 여기서 일본은 독도 혹은 자산도에 대한 영토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근거삼아, 현재에도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의

빌미로 삼고 있긴 하다. 

그러나 누차 강조하였듯 울릉도는 독도의 주도,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양국간에 확인한 이상, 독도는 울릉도와 별도로 분쟁이나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특히 18세기 조선과 일본에서 발행한 지도에서는 한결같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세계 역사나 영토분쟁사를 보더라도 독도처럼 작은 섬이, 그처럼 수차례 걸쳐 일관되고도 분명하게 어느 한쪽의 영토로 규정한

경우는 찾아 볼 수 조차 없다.

 그럼에도 일본은 여전히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고 조상들을 모욕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았으면 싶다.

 그리고 비록 안용복의 업적은  국제간의 우호관계를 중시하던 조선의 외교방침때문에 당시에는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였지만,

오늘날에는 독도수호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또한 남구만과 신여철등  대신들 중에서도 그의 업적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바로 본 이들이 있었다.

 국가가 하지 못했던 일을 능히 이루어 내었던 어부 안용복, 그의 투쟁은 결코 헛되거나 고독하지
않았다.

독도는 그 이전에도 우리의 영토였고, 미래 언제나 우리영토임이 분명하지만, 어부 안용복의투쟁은 독도가  더욱더 우리영토임을

확인 시켰던 일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