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풍습

석굴암-돌덩어리가 걸어 댕긴데요?

설레임의 하루 2009. 3. 23. 02:15
*출처:다음카페-물의 나라에서

 

 

 

 

석굴암 유래

 

 

 

소 개

 

신라 32대 효소왕 때의 일이다.

이 때는 삼국을 통일한 제 30대 문무왕대로부터 얼마 지나지 아니한 때 였으므로 신라의 국력이 강성하고 문화도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신라의 전성기에는 그 서울이었던 지금의 경주에는 18만호가 있었는데, 초가집이 한 채도 없고 처마가 서로 맞닿아 있었으며,

사람들은 피리를 불고 노래를 부르며 밤을 세웠다고 한다.

효소왕때도 그런 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태평한 성대였지만, 부자로 잘 사는 사람과 가난하여 못사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오늘날과 별로 다름이 없었던 것 같다.

모량리라고 하는 곳에 아주 가난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름은 경조(慶組)라고 하였는데, 마음씨가 착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여, 비록 사는 형편은 어려웠지만 동네사람들이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경조여인에게는 전왕인 신문왕(神文王) 2년(689)에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 아이는 생김새가 좀 남다르게 되어 머리의 정수리가 넓고 평평하여 성(城)과 같았다.

사람들은 아이의 머리모양을 보고 아이의 이름을 대성(大城)이라고 불렀다.

홀로된 몸으로 외아들 대성을 기르며, 가난하고 외롭게 사는 경조여인은 가업(家業)이 없어, 복안(福安)이라고 하는 장안의 부자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살았다.

 

부자 복안은 경조여인이 착실하게 일을 잘 해 주는 것이 고마워, 3묘(3苗=90평)되는 밭뙤기 한 필지를 주고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그까짓 밭뙤기 부치는 것으로 생계가 해결될 리가 없었다.

경조여인은 전과 다름없이 복안의 집에서 일을 했다.

아들 대성 또한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놀고, 차츰 잔심부름도 하다가 커서는 품삯을 받게 되었다.

 

대성의 나이 열 아홉이 되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흥륜사(興輪寺)에서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육륜회(六輪會)라는 법회를 열고자

장안에 나와 권선을 하고 다녔다.

점개 스님은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복안의 집에까지 왔다. 점개스님은 대문에 서서, 요령을 흔들며 안에 대고 말했다.

『육륜회에 보시하시어 복을 늘리시고 선근을 닦으소서.』 집주인 복안이 급히 뛰어들어가 점개스님 앞에 합장하고 절을 했다.

『스님께서 저희 집을 찾아주시고 큰 법회에 인연을 짓도록 저를 인도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거룩하신 법이 세상에 더욱 크게 퍼져 하루속히 불국토가 성취되기 발원하옵니다.』

복안은 스님께 감사드리고 베 50필을 보시하였다. 『신도님께서 보시하시기를 좋아하시니 하늘의 천신이항상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오늘의 이 공덕으로 수명장수 하시고 만복을 누리게 되실 것이옵니다.』

점개 스님은 이렇게 축원하였다.

이때 마당에서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대성은 곧 안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문간에서

보고들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대성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님,제가 생각해 보니, 우리는 전생에서부터 복을 지은 바가 없어 금생(今生)에 이렇게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 복을 지을 수 있는 오늘과 같은 좋은 날에 또 복을 짓지 못하면 다음에는 더 어렵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것이지만, 품팔이해서 얻은 밭뙤기를 지금 육륜법회에 보시하여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린 아들의 이 기특한 생각에 감동하여 경조여인은 기쁜 마음으로 쾌히 승낙했다.

 

밭을 보시하고 난지 몇 달 안되어, 효소왕 9년(700년) 2월 15일에 대성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성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 밤, 당시 나라의 재상이었던 김문량(金文亮<良>)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우람한 소리가 드렸다.

『모량리 대성 아이를 이제 너의 집에 맡기노라!』 밤중에 하늘에서 울려나는 소리를 듣고 재상의 집사람들은 모두 놀라 깨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괴이쩍게 생각한 집안 사람들은 하인들까지도 모두 안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일을 짐작한 김문량은 곧 사람을 시켜 모량리 대성의 집에 가보게 했다.

대성의 집에서는 홀어머니가 애끊는 설음으로 흐느껴 울며 아들 잃은 슬픔을 가누려 애쓰고 있고, 슬픈 소식에 놀란 이웃사람들이

대성의 집에 모여, 아들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었다.

하인의 보고를 들은 재상 김문량은, 어떤 좋은 인연으로 대성이 자기 혈육으로 태어나게 될 것을 짐작했다.

김문량의 부인은 곧 태기가 있어 바로 그 해에 아들을 낳았다. 태어난 아들아이는 왼손을 꼭 쥔 채로 펴지 않았다.

잉태할 때부터 이상한 일이 있었던 터였으므로, 모두 궁금해하면서 아기가 손 펼 날을 기다렸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아이는 슬며시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꽉 펴진 아기의 왼손바닥에는 『大城(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또렷이

새겨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모량리에 살던 가난한 대성이 부처님께 제 전 재산을 시주한 공덕으로 이렇게 재상의 집에 다시 태어난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인

것이다.

김문량은 새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전생에 불렀던 대로 『大城(대성)』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대성의 전생어머니 경조여인을 자기

집으로 모셔 봉양했다. 재상의 집에 다시 태어난 대성은 학문을 배우고 무예와 기예도 익혀 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나, 대성은 그의

뛰어난 재능보다도, 그의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더 알려졌다.

대성은 벼슬길에 나아가 탄탄대로를 승승장구 하였다.

 

대성은 사십대에 벌써 재상급에 올라 그의 나이 마흔 아홉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김대성은 제 33대 성덕왕조에서부터 제 34대 효성왕, 제35대 경덕왕조까지 벼슬을 했다.

그는 경덕왕 5년부터 9년까지 5년간 중시(中侍 :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격) 벼슬에 있었다.

기개가 호방한 김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들과 산으로 달리며 짐승을 사냥하여 그것을 즐겼는데,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큰 곰

한 마리를 잡았다.그 길로 산에서 내려와 그날 밤은 산 밑 마을에서 잤다.

사냥으로 피곤하여 곧 깊은 잠에 들었던 김대성은 꿈을 꾸었다.

무시무시한 곰 귀신이 나타나, 쭈볏쭈볏한 이를 들어내고 떡 벌린 입으로 대성에게 덮쳐들었다. 잡아먹을 기세였다.

대성은 소스라쳐 부들부들 떨었다. 곰 귀신이, 원한에 찬 목소리로 대성에게 꾸짖어 말했다.

 

『나는 곰귀신이다. 네 어찌 죄 없는 나를 죽였느냐? 내가 다시 곰으로 태어나 너를 잡아먹겠다.

이놈!』 대성의 두려움을 모르던 호방한 간이 콩알만큼이나 오그라들었다. 『아니! 아니!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안 그럴께요! 다시는 산목숨 죽이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너,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느냐?』

『네,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원을 풀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너, 나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부처님께 빌어 줄 수 있겠느냐?』

 『네, 제가 정성을 다하여 절을 짓고 평생토록 부처님께 빌겠습니다.』 『좋다! 대성아 신심을 내어라!』

 

곰귀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대성은 이 무서운 꿈에서 깨어나자 긴 한숨을 토했다.

꿈을 꾸면서 얼마나 땀을 흘렸던지 자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앉은 대성은, 곰귀신의 꿈만이 아니고 보다 깊은 어떤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성은 가슴에 차 오르는 그 무엇을 수없이 내쉬는 한숨으로 뿜어냈다. 산야를 누비며 산 짐승을 몰아 활을 쏘고 그것을 잡아 고기를

즐기며 호기를 부려온 지금까지의 생활이 크게 잘못된 것을 대성은 깨달았다.

그리고, 살생유택을 가르치고 있는 화랑 5계와,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함께 떠올라 대성을 더욱 깊이

뉘우치게 했다. 날이 밝자 대성은 어제 잡은 곰을, 산으로 업고 가, 잡은 그 자리에 묻고, 거기에 절을 지어 이름을 웅수사(熊壽寺)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대성은 마음에 크게 느끼는 바 있어 일체 사냥을 금하였다.

 

대성은 웅수사를 세운 이래로 부처님을 받드는 신심이 날로 깊어져갔다.

그는 그의 나이 52세가 되던 신라 제 35대 경덕왕 10년(751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부처님 사업에 몸을 던졌다.

김대성은, 인과응보와 보시공덕을 깨닫게 해주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 곧 부모님 은혜를 갚는 길이라생각하고, 금생의

부모를 위하여는 불국사를 중창하고, 전생부모를 위하여는 석불사(石佛寺: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기 시작했다.

 

땅에 가득차고, 하늘에 사무치는 신심으로 경덕왕 10년에 시작한 이 거룩한 불사는 혜공왕(惠恭旺) 10년(774년)가지 24년간

계속되어, 실로 인류의 영원한 이상과 궁극 도달처를 표현한 위대한 『불국토』를 창출했다.

대성은 그의 설계를 다 이룩하지 못하고, 75세의 나이로, 신라 제 36대 혜공왕 10년(774년) 12월 2일 이 세상을 떠났다.

김대성이 못다 이룬 나머지 일은 나라에서 이어 끝마쳤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가 못다 이룬 대불국사의 한 조각 설계는 토함산

기슭에 묻혀진 채 천 이백년 세월이 꿈같이 흐르고 있다.



(창 2:4) ○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 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
(창 2: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에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위의 내용은 성경의 창세기를 발췌하였읍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것은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사람을 흙으로 만들었으니 흙덩어리겠지요.

다시말해 흙덩어리이니 흙이 굳으면 돌덩어리이겠지요?

 

돌ː―덩이[―떵―][명사] 돌멩이보다 크고 바위보다 작은 돌. 돌덩어리.

석괴(石塊).석굴암 또는 석불,마애불등으로 표현될수 있겠지요?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鶴到庵 磨崖觀音菩薩坐像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본동

 

 

군위 삼존석굴은 경북 군위군 팔공산에 위치한 통일신라 초기의 사원으로 석굴높이는 4.25m,본존상은 2.18m, 오른쪽 보살상은

 1.92m, 왼쪽 보살상은 1.8m이며 국보 제109호이다.

거대한 자연암벽을 뚫어 석굴을 만들었는데 입구는 원형에가깝고 내부 평면은 방형이며, 천장은 궁륭형을 이루었다.

석굴 내부 벽면에 붙여서 독립된 삼존석상을 안치하였다.

별석의 방형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본존상은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높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몸에 비해 큰 얼굴에는 삼국시대

불상에 보이던 친근감 있는 미소가 사라지고 위엄이 서린 모습이다.

 

 

팔공산갓바위

 

경주 남산 칠불암마애석불 삼존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