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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에 대한 사료근거> 중국 고서 기록<펌>

설레임의 하루 2009. 3. 22. 03:30

*출처:이우혁홈피에서 펌

 

 

 

 

 

<치우에 대한 사료근거>중국 고서 기록

1.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황제는 소전의 자손으로 성은 공손, 이름은 헌원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어려서는 능히 말하였고 지혜로왔다.

자라면서 행동이 신중하고 민첩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총명하였다.

헌원의 때에 이미 신농이 쇠하여 여러 제후의 침략을 하여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신농씨가 이들을 정벌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헌원은 창과 방패 등 무기의 사용을 익혀서 신농씨에게 조공을 받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모든 제후들은 헌원에게 복종하였으나, 다만 치우만은 가장 포악하였으므로 헌원도 그를 토벌할 수 없었다.

염제가 제후들을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귀순했다.

헌원은 이에 덕을 닦고 병사를 정비했으며, 오기를 다스리고 오량을 심고 만민을 잘 다스렸고 사방의 토지를 측량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곰, 비, 비, 휴, 추, 범 등의 사나운 짐승들을 훈련시켜서 판천의 들에서 염제와 싸웠는데, 여러 번 싸운 후에야 비로소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또다시 난을 일으키며 황제의 명을 듣지 않자, 이에 황제는 제후들로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서 결국은 사로잡아

죽였다.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제이다.

세상에 황제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토벌하고 평정된 뒤에는 바로 군대를 철수시켜서 그곳을 떠났다.
黃帝者,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 生而神靈, 弱而能言, 幼而徇齊, 長而敦敏, 成而聰明. 軒轅之時, 神農氏世衰,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莫能征, 于是軒轅乃藝習用干戈, 以征不亨. 諸侯咸來賓衆,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軒轅乃修德振兵, 治五氣, 藝五種, 撫萬民, 度四方, 敎熊豹虎, 以與炎帝戰于阪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蚩尤作亂, 不用帝命,

于是黃帝乃征수諸侯, 與蚩尤戰于꟔鹿之野, 遂禽殺蚩于,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집해(集解)」
응소는 치우는 옛날 천자의 호라고 하였다.
應劭曰蚩尤古天子之號.

「색은(索隱)」
관자는 치우가 로산의 금을 얻어 5병을 만들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공안국은 구려의 군자의 호를 치우라고 한다고 하였다.
管子曰蚩尤受 盧山之金 而作五兵 明非庶人.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

「봉선서(封禪書)」
병주(兵主)는 치우를 제사 지낸다.

2. 『로사(路史)』 후기4(后紀四) 「치우전(蚩尤傳)」

판천씨 치우는 강씨 성으로 염제의 후예이다. 군사로 난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했다.

제를 따라서 탁록에 살면서 봉선을 하고 호를 염제라 하였다.
阪泉氏蚩于, 姜姓, 炎帝之裔也, 好兵而喜亂, 逐帝而居于꟔鹿, 興封禪, 號炎帝.

3. 『좌전(左傳)』

로나라 희공 25년 대부 호언이 진후를 왕에게 권하였다.

진후가 점을 치자 복언이 말하기를 ꡒ길합니다. 황제가 판천에서 싸운 징조입니다ꡓ라고 하였다.
魯僖公二十五年 大夫狐偃勤晋侯(晋文公重耳)勤王, 晋侯使卜偃卜之, 卜偃曰 : 吉.

遇黃帝戰于阪泉之兆

4. 『대대례(大戴禮)』 「오제덕(五帝德)」

황제는 소전의 아들이다. 헌원이라고도 한다.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워 어려서는 능히 말하였고 지혜로왔다.

자라면서 행동이 신중하고 민첩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총명하였다.

오기를 다스리고 오량을 설하고 만민을 다스려 사방에 이르게 하였다.
곰, 비, 비, 휴, 포, 범을 가르치고 판천의 들에서 있었던 적제와 대전에서 싸우게 하였다.
黃帝, 少典之子也, 曰軒轅. 生而神靈, 弱而能言, 幼而慧齊, 長而敦敏, 成而聰明. 治五氣, 設五量,

撫萬民, 度四方 ; 敎熊豹虎以與赤帝大戰于阪泉之野. 三戰然后得行其志 .

5.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하였다.

황제가 이에 응룡에게 명하여 기주의 들판에서 공격하였다. 응룡은 물을 관장하였다.

치우는 풍백 우사를 청하여 큰바람과 비를 일으키니 이에 황제가 발이라는 천녀에게 명하여 비를 멈추게 하고 이어서 치우를

살해하였다. 응룡은 이미 치우를 살해하고 또 과보를 살해했다.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功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應龍已殺蚩尤, 又殺夸父.

「대황동경(大荒東經)」
대황의 동북쪽 모퉁이에 산이름이 흉려토구가 있는데 응룡은 남쪽의 끝에 이르러 치우와 과보를 살해하였다.
大荒東北隅中 有山名曰凶犁土丘 應龍處南極, 殺蚩尤與夸父.

「대황남경(大荒南經)」
송산에 적사가 있는데 그 이름을 육사라고 한다. 한 나무가 그 산 위에서 나는데 그 이름을 풍목이라고 한다.

풍목은 치우가 잡혀 있다가 풀고간 나무인데, 그래서 그이름을 풍목이라고 한다.
有宋山者, 有赤蛇, 名曰育蛇, 有木生山上, 名曰楓木. 楓木, 蚩尤所奔其桎梏, 是爲楓木.


6.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옛날 신농은 부수를 벌하였고, 황제는 탁록을 벌하여 치우를 잡았다.
昔者神農伐褓遂, 黃帝伐꟔鹿而禽蚩尤.

「위책(魏策)」
황제는 탁록의 들에서 전쟁을 하였다.
黃帝戰于꟔鹿之野.

7. 『상서(尙書)』
구려는 치우의 무리인데 치우가 죽은 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서 천하에 보이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치우가 죽지 않았다고 알고 사방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복종하였다.
九黎 蚩尤之徒 蚩尤歿後天下擾亂 黃帝遂畵蚩尤形象 以爲天下 天下咸謂蚩尤不崩 四方萬邦 皆爲服.

「여형(呂刑)」
치우는 난을 처음 일으켰다. 공안국전에 ꡐ구려의 군의 호를 치우라고 한다ꡑ 하였다.
蚩尤惟始作亂. 孔安國傳 : ꡒ九黎之君, 號曰蚩尤.ꡓ

8. 『국어(國語)』 「초어(楚語)」
소호의 쇠약한 때에 이르러, 구려는 덕을 어지럽히고... 그 후예는 삼묘가 되니, 이는 구려의 덕을

다시 회복한 것이다. 위소의 주에 구려는 려씨 구인으로 치우의 무리이다.... 삼묘는 구려의 후예이다.
ꡒ及少 之衰也, 九黎亂德... 其後三苗, 復九黎之德.ꡓ 偉昭注 : ꡒ九黎, 黎氏九人, 蚩尤之徒也...

三苗 九黎之后.ꡓ

9. 『한비자(韓非子)』 「십과(十過)」
옛날에 황제는 서태산 위에서 귀신과 합하였는데, 코끼리 수레를 6마리 이무기로 끌게 하여 필방으로 가게 하였는데, 치우는 그 앞에

서고, 풍백은 나아가서 청소하고 우사는 길에 물을 뿌렸다.
ꡒ昔者黃帝合鬼神于西泰山之上, 駕象車而六蛟龍, 華方幷轄, 蚩尤居前, 風伯進掃, 雨師灑道.ꡓ

10. 『관자(管子)』 「오행편(五行篇)」
치우는 천도에 밝았다. 황제는 그래서 당시를 맡겼다.
ꡒ蚩尤明乎天道, 黃帝使爲當時.ꡓ

11. 『술이기(述異記)』
`헌원이 처음 섰을 때, 치우씨 형제 72인이 있었는데 구리머리에 쇠이마를 하였고 돌과 쇠를 먹었다. 헌원은 치우를 탁록의 들에서

죽였다....

치우신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사람의 몸에 소발굽이라고 하고, 4개의 눈에 6개의 손을 가졌다고 한다.

진한간이 말하기를 치우씨는 귀에 검극을 달고 머리에 뿔이 있는데, 헌원과 싸울 때에 뿔로 사람을

맞닥뜨리니, 사람이 제대로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 기주악에는 치우전이 있으니 그곳 사람들은 둘씩 셋씩 소뿔을 쓰고 서로 맞닥뜨린

다.... 한대에 만들어진 각저전은 그 풍속이 남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태원의 촌락에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모시는데 소머리를 쓰지 않는다....

한무제 때 태원에 치우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거북이 다리에 뱀머리였다.
ꡒ軒轅之初位也, 有蚩尤氏兄弟七十二人, 銅頭鐵額, 食鐵石, 軒轅誅之于꟔鹿之野.... 有蚩尤神, 俗云人身牛蹄, 四目六手....

秦漢間說 ; 蚩尤氏耳髮與劍戟, 頭有角, 與軒轅鬪, 以角抵人, 人不能向, 今冀州有樂名蚩尤戰, 其民兩兩三三, 頭戴牛角而相抵.

漢造角抵戰, 盖其遺制也. 太原村落間祭蚩尤神不用牛頭.... 漢武時, 太原有蚩尤神畵見, 龜足蛇首... ꡓ

12. 『태평어람(太平御覽)』
권 79인(卷七十九引) 「용어하도(龍魚河圖)」
황제가 섭정을 하기 전에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고 구리머리에 쇠이마를 하였고 모래와

돌을 먹었다.
ꡒ黃帝攝政前, 有蚩尤兄弟八十一人, 幷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 石子.ꡓ

<권330>
태백음경(太伯陰經)을 보면, 치우는 ꡒ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고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고 …삼병(三兵)의 제도를 두었고 기치를

세웠다ꡓ고 했다.

13. 『몽계필담(夢溪筆談)』 권3(卷三)
해주에는 염택이 있는데, 그 색이 정말로 붉어…세상에서는 치우혈이라고 한다.
ꡒ解州鹽澤, …鹵色正赤, …俚俗稱之蚩尤血.ꡓ

14. 『황람(皇覽)』 「총묘기(塚墓記)」
치우총은 산동성 수장현 감향성에 있는데 높이는 7장이다. 사람들은 10월이면 제사를 모시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필처럼 펼쳐졌다.

세상에서는 이름하여 치우기라고 한다.
ꡒ蚩尤塚, 在東平郡壽張縣鄕城中, 高七丈, 民常十月祀之. 有赤氣出, 如匹絳錦, 民名爲蚩尤旗.ꡓ

15. 『일주서(逸周書)』
「사기편(史記篇)」
치우는 유망에 이어 스스로 황제로 세우니, 호를 염제라 하였는데 역시 판천씨이다.
ꡒ蚩尤逐帝愉罔而自立, 號炎帝, 亦曰阪泉氏.ꡓ

「상맥편(嘗麥篇)」
적제를 추격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우니 사방에 남은 것이 없었다.

적제가 크게 놀라 황제에게 말하여 치우를 잡게 하니, 황제는 치우를 중기에서 죽였다.
乃遂帝 爭于꟔鹿之阿 九隅無遺 赤帝大 乃說于黃帝 執蚩尤 殺之于中冀.

16. 『포박자(抱朴子)』
헌원은 동쪽으로 청구까지 와서 풍산을 지나면서 자부 선생을 만나고 삼황의 내문을 받아서 만신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유방이 풍패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씨에게 제사를 모셨다.
軒轅 東到靑邱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刻召萬神. 劉邦起兵於豊沛 則祀蚩尤氏.

17. 『진 천문지(晋 天文誌)』
치우기는 마치 혜성과 같은 데 뒷부분이 굽어서 마치 깃발과 같다.

이 별이 보이는 곳의 아래에 군사가 있다. 이는 치우천왕을 위로하여 하늘의 별자리로 삼은 것이다.
蚩尤旗 類慧而後曲 象旗主 所見之方 下有兵 云則乃蚩尤天王 上爲列宿也.

18.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청구는 산동 청주부 낙안현 북쪽에 있다.
靑邱在山東靑州府樂安縣北.

19. 『청일통지(淸一統志)』
청수박은 곧 옛날 청구인데, 일명 청구낙이라고도 한다.
淸水泊 卽古靑丘 一名 靑丘. 

20. 『명사(明史)』 「문원전(文苑傳)」
『사기 율서』에 이르기를 옛날 황제는 탁록에서 전쟁을 하며 화염을 정하였고, 전욱은 고공의 진으로 수해를 평정했다.

21. 『황제출군결(黃帝出軍訣)』에서 재인용 『북당서(北堂書)』
옛날 치우가 무도하자, 황제가 그를 탁록의 들판에서 토벌하니 서왕모가 도인을 파견하여 그에게 부를 주었다.

황제가 단에서 기도를 올리고 친히 부를 받았다.

이를 살펴보니 바로 이전에 꿈에서 보았던 것이다. 이에 그날로 치우를 사로잡았다.

22. 중국의 옛 신화에서
황제가 치우와 탁록의 들판에서 싸울 때 항상 오색구름과 금지옥엽이 황제의 머리 위에 감돌았는데 아름다운 꽃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하여 화개(華蓋)를 만들었다.

23. 『제왕세기(帝王世紀)』
신농씨가 쇠퇴하자 치우가 반란을 일으켜 제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황제는 덕으로 다스리고 백성을 어루만지니... 제후들이 모두

신농을 배반하고 황제에게 귀복하여 치우씨를 토벌하자고 하였다. 탁록의 들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았다. (群書治要권11 註 인용)

24. 『神의 起源』 「五方帝와 五方神」에서 인용
... 그러므로 불주풍은 모든 것을 시들어 죽이는 바람이다. 현명은 북방에 살며 불주풍을 주관하였다.

이로써 그가 중국신화 중에 서왕모, 치우, 욕수를 제외한 네 번째 죽음의 신이 된 원인 중 하나이다.

25. 『중국고대사회』 허진웅 저, 홍희역, 동문선
<64~65쪽>
호랑이는 가뭄의 여신인 한발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상대의 그릇들 중에 도철문들이 대부분 호랑이의 모습에서 그 형상을 따오고 있다.

도철은 치우라고 할 때, 도철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호랑이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황제가 한발의 힘을 빌려 치우를 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대의 그릇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상대에 전승된 한발과 호랑이 전설은 황제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는 『사기』나 『산해경』과 다른 계보에서 전승된 것인지도 모른다.

치우가 곰족인지 황제가 곰족인지에 대해서는 기록들마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치우는 웅족, 호족 그리고 신농과 같은 양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상대에 전승된 치우 또는 도철의 형상을 보면 호족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상대의 동기에 흔히 보이는 도철문은 태반이 흉맹한 호랑이에게서 제재를 취하고 있다.

(위덕성, 1974 : 40~44)...

전설에 의하면 가뭄을 내리는 괴수는 한발인데, 호랑이는 그 여무 한발을 즐겨 잡아먹는다고 한다.

<108쪽>
전설 속의 황제는 서쪽 지역을 호령할 수 있는 패권을 얻고 나서 하북의 탁록지방에서 강하고 사나운 웅족 치우를 물리치고 전 중국을

호령하였다.(곽말약 중국사고, 1 : 122~124).

탁록은 서부문화구의 가장자리로 동방의 사람들이 서부의 이익을 침입하여 일으킨 전쟁이었을 것이다.

<158쪽>
치우는 중국에서 금속무기를 발명한 전설 속의 인물이다(周策縱, 1973 : 5~7).

한대의 화상석 중에서 치우의 형상은 항시 머리와 사지에 다섯 가지 병기를 든 인물로 그려져 있다

(水野淸一, 1954 : 162, 168~69).

치우는 비록 진보된 예리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끝내 황제에게 패하였다.

이 전설은 전국시대에 유가의 왕도사상 아래에서 생겨난 것으로, 황제는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킨 성군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상상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근거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산동 호남 경내에는 여전히 동과 아연이 혼합된 광물이 많이 있다(北京鋼鐵學院 1981 : 291). 그 지역 사람들은 비교적

일찌감치 청동을 제련한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전설의 치우는 B.C. 2700년의 인물로 태국과 마가요문화의 청동유적지보다 늦다.

그러므로 그때 청동무기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만일 6000년 전의 앙소문화 사람들이 이미 청동물질을 알았다면, 1천년 이후에 청동으로 별기를 주조할 정도로 발전된 것과 조금

뒤의 황제가 정을 주조했다는 것은 아주 합리적이다.

이전에는 지하 고고자료의 방증이 없었으므로, 치우가 병기를 주조했다는 전설은 역사를 좀더 옛날로 돌이키려는 사람들이

날조했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은 이미 치우의 시대에 청동무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 전설을 흘려 버릴 수가 없으며, 응당 그

가능성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타연구자료

1. 『黃帝的 前說-中國古代神話硏究-』 王孝廉譯, 臺北時報文化出版公司, 1988年初版
2. 『中國古代姜, 羌, 氏羌之硏究』 王明珂, 臺灣師範大學歷史硏究所碩士論文, 1983年
3. 『炎帝氏族文化考』 王獻堂, 齊魯書社出版, 1985年
4. 『中國古代民族神話與文化之然究』 臺北正聞出版社三版, 1991年
5. 『水與水神』 「湛湛姜水-亂神蚩尤與楓木信仰」 王孝廉, 臺北三民書局, 1992年
6. 『炎黃 ꡒ阪泉之戰ꡓ的地理方位』 北京晩報, 1992年11月10日字弟六版
7. 『古史考述』 臺北正中書局出版, 1965年


중국문헌 자료
1.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 대황동경
2. 『서경(書經)』주서(周書)
3. 『여씨춘추(呂氏春秋)』 탕병(蕩兵)
4.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5. 『열자(列子)』 황제편(黃帝篇)
6. 『귀장(歸藏)』
7. 『시자(尸子)』 권하(卷下)
8. 『사기(史記)』 봉선서, 천관서, 한고조본기
9. 『염철론(鹽鐵論)』 결화(結和)
10. 『수경주(水經注)』 탑수
11. 『십삼주지(十三州志)』 치우견비총(蚩尤肩塚)
12. 『황람(皇覽)』 총묘기(塚墓記)
13. 『세본(世本)』 작편(作篇)
14. 『초씨역림(焦氏易林)』 곤지이(坤之二), 몽지사(蒙之四)
15. 『황제사경(黃帝四經)』 십대경(十大經) : 지우(之尤)
16. 상대 갑골문, 상주 금문, 초금문 : 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