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道不遠人
문제는 본 기사에서 한반도로 국한하고 있지만 원본을 보면 경주,廣平,河濱縣 (하빈은 산동 및 강소성),안동도호부 지명등이 나와 한반도로 지정하기엔 무언가 미심쩍다는 것입니다.(운영자 주)
석가탑의 수난을 담은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지난 25일 공개됐기 때문이다. (重修)를 할 무렵의 상황과 과정을 기록한 문서로 밝혀졌고, 이를 통해 신라시대 창건 이후 도굴 시도로 촉발된 1966년의 완전한 해체, 수리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수리ㆍ보수가 없었다는 신화는 붕괴됐다. 석가탑이 중수될 무렵 고려 왕조는 거란족의 요(遼)나라 연호를 채용해 ’태평’으로써 해를 매겼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시절 고려왕조는 태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건국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 고려 왕조 500년 역사를 각각 기전체와 편년체로 정리한 방대한 정사(正史)류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석가탑이 중수된 현종-정종 시대를 지진의 엄습으로 공포에 떤 시기로 적고있다.예컨대 석가탑이 1차로 중수된 1024년 이전 현종 재위 15년간만 해도, 모두 6차례에 이르는 경주 일대 지진 발생기사가 보인다. 이에 의하면 현종 3년 3월 경오(庚午)와 같은 해 12월 정축(丁丑), 4년 2월 임오(壬午)와 같은 해 12월 병술(丙戌), 5년 8월 병자 (丙子), 그리고 6년 12월 갑신(甲申)에 각각 지진이 발생했다. 따라서 석가탑 창건 ’285년’만인 1024년에 왜 1차 중수를 하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반면, 1차 중수 10여 년만에 2차 중수를 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는 지진, 그것도 거푸 덮친 지진이 원인임을 묵서지편은 분명히 기록해 놓고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정종 시대에 모두 3차에 걸친 지진이 기록됐다. 그 원년 9월 경주를 비롯한 19개 주를 필두로 이듬해(1036) 6월 무진(戊辰.21일),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각각 지진이 경주 일대를 엄습했다고 했다. 더구나 짧은 기간에 자주 덮쳤기에 이런 현상을 중수기는 ’연차’(連次)라고 표현했다. 지진이 연달아 발생했다는 의미다. 이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지척인 첨성대는 무너져 중수했다는 기록이 없을까요? 아이러니 입니다 )
묵서지편 판독에 참가한 고려사 전공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무엇보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 상황이 매우 생생하게 드러나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고려사 등의 기존 문헌에 등장하는 지진 발생과 그 피해 상황을 학계에서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으나, 이번 석가탑 중수기를 보면 이 때의 지진을 고려인들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인식했는지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쪽 대제(大梯.계단의 일종)의 부속시설과 하불문(下佛門.구체적인 시설은 미상)의 시설, 그리고 여러 행랑 시설 등이 붕괴됐으며, 서변(西邊)의 석탑, 즉, 석가탑은 붕괴 일보 직전에 몰린 것으로 나타난다. 놓은 채 1년 6개월을 미적거리다가 정종 3년 12월23일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중수에 착수한다. (義僧)이 없으므로”라고 적었다. 하지만 불국사와 석가탑의 재앙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되었기 때문이다. 을 조립함으로써 2차 중수를 완수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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