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속) 석가탑 ‘묵서지편’ 봉인의 비밀

설레임의 하루 2009. 3. 21. 04:27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道不遠人

 

 

 

 

 

 

(속) 석가탑 ‘묵서지편’ 봉인의 비밀

이전에 발표했던 내용과 다른 후속 유물이 발굴되면 숨기고 발표를 안하며 ,설사 대륙관련 삼국유물들이 나와도 발표하지 않고

수장고에서 수십년을 묵혀두거나 훼손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하는 발언을 근무햇던 관련자로부터 듣습니다.

이게 현실인가 봅니다. (운영자 주)  

 

»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은 석가탑에서 나온 묵서지편(墨書紙片)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은 석가탑에서 나온 묵서지편(墨書紙片)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의 관계에 적실하다.

그 동안 무구정경은 석가탑이 조성된 서기 751년에 탑 안에 넣은 것으로 간주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고

기려져 왔다.

그런데 묵서지편 판독 결과

△석가탑이 고려 초인 1024년과 1038년 두 차례 해체 보수한 사실

△그 당시 무구정경을 새로 넣었다는 의미로 읽히는 문구가 확인되면서 세계 최고의 지위가 위협받게 생겼다.

만일 통일신라때 것을 다시 넣은 게 아니라 고려 때 새로 넣은 거라면 세계 최고(最古)의 자리는 770년께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한테로 넘어간다.

그동안 곁다리로 취급되던 떡진 종이가 국보인 무구정경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셈이다.

 

무구정경 ‘세계 최고’ 논란부를 사료'중앙박물관 수장고에 40년간 방치 박물관쪽 늑장· 무성 의…‘고의성’ 의혹도

 

묵서지편은 1966년 석가탑 해체 복원 당시 2층 탑신부 사리공 사리함에서 무구정경과 함께 발견된 떡처뭉쳐진 종이뭉치다.

무구정경은 1989년 일본의 지류문화재 복원 전문회사인 오카보코도(岡墨光堂)에 맡겨 깔끔하게 수리돼 국내 최고는 물론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는 영광을 독차지해왔다.

반면 묵서지편 은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봉인된 채 40년동안 방치돼 왔다.

물론 1988~89년 무구정경 복원 당시 최소 한의 보존 조처를 했으며(1차 작업) 1997년 종이떡을 하나하나 펴는 2차작업을 했다.

1차, 2차 ‘보존작업’ 을 하는 몇 개월을 빼도 ‘40년’에서 큰 차가 없을 듯하다.

 

» 무구정경의 복원 전(위)과 후(아래).

 

묵서지편이 석가탑을 보수한 기록을 적은 중수기라는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나온 것은 2005년 9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의 이 아무개 학예연구실장은 “고려시대 초·중기에 해당하는 중국 연호가 보이고, 석탑 중수와 관련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 정도를 파악한 상황”이라며 다음해부터 본격 판독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당시 박물관장이었던 이건무 교수는 그해 국정감사에서 늑장핀다는 지적을 받고 판독작업 착수를 지시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정작 조사위원회가 꾸려진 것은 2년 뒤인 올해 5월. 이승재 교수(서울대 언어학과)와 함께 판독작업에 참여한 노명호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는 자료를 한꺼번에 제공받지 못하고 일부는 판독 중에 넘겨 받았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사실 묵서지편은 10년 전인 1997년에 낱장으로 펴는 작업이 완료됐다.

당시 외부인력으로 박지선씨(현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를 도와 이 작업에 참여한 천주현씨(현 박물관 보존과학팀)의 말.

“지하작업실(현 고궁박물관)에서 넉달에 걸쳐 작업을 끝내고 사진촬영도 마무리했다.

또 묵서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가 나와 놀랐다. 당연히 윗선에 보고됐을 거다.

” 당시 수장고 관리 담당 소재국씨(현 고궁박물관장)는 “박물관에서 공식발표하기 전이라 극비사항에 속해 몇 사람밖에 알지 못했다”

고 전했다.

 

 그는 “묵서지편이라는 이름처럼 판독 전부터 묵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 펼침 작업 도중에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박물관 학예실장이었던 이건무 교수는 “문서의 성격을 보고받지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관장이었던 정양모 교수는 “그토록 중요한 사안이면 보고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보고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일선에서는 알았지만 위에까지 보고가 안됐다는 추론.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왜일까?

1997, 1998년이 박물관 이전 준비로 한창 바빴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소재국 관장은 “일이 산더미같았다. 그 일을 맡아서 하라는 지시를 받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기계인가”라고 말했다.

급한 일에 밀렸다는 얘기다. 거기에다 윗선에서는 현장 장악력이 없었던 듯하다.

“박물관은 여러 사업을 하기 때문에 보고받지 못하면 현장에서의 일은 알 수 없다.”(이건무 교수)

 

더 중요한 문제는 보존처리 따로 판독작업 따로였던 점.

당시 펼침작업을 담당한 박지선, 천주현씨는 외부인력이었던데다 맡은 일 자체가 하드웨어 작업에 국한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문서를 판독할 능력이 있는 인력이 따라붙지도 않았다.

보존처리와 판독을 기계적으로 나누어 동시작업 아닌 선후작업 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껏 판독을 위한 기초작업을 다 해놓고는 도로 수장고에 넣어두었다가 10년 뒤 인 올해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판독작업에 나선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일부러 펼침작업과 판독을 미룬 것은 아닐까.

 

묵서지편을 펴서 공개하지 않으면 무구정경은 붙박이 세계 최고인데, 괜히 잘못 건들여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나, 혹은

위험부담이 있는 일에 내가 총대를 멜 필요가 있나 하고 판단한 사람은 없었을 까.

당사자들은 펄쩍 뛸 일이지만. 무구정경의 간행시기가 고려로 내려올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비애국적으로 보는 현실에서 그런

혐의를 말끔히 지울 수는 없다.

이름을 밝히기 곤란한 문화계 인사는 묵서지편의 내용분석을 두고 “누구 좋으라고 하는 소리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종이떡을 펼칠 국내인력이 없었다는 박물관쪽의 해명은 사실로 보인다.

97년 박지선 교수의 펼침작업에 조수로 참여한 천주현씨는 종이떡 분리해체는 습도를 일정한 수준으로 맞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 라면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일본에서 그 기술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묵서지편을 둘러싼 해프닝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통이 커 10년 또는 40년 단위로 움직인다는 것.

앞으로 문서의 완전한 해독과 무구정경의 발간연대 확정은 적어도 10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두께 1mm, 숨결에 바스라질까 ‘조심 또 조심’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제작 시기의 비밀을 풀 열쇠로 생각돼 온 묵서지편(·문서 뭉치)이 판독됐으나 다라니경의

제작 시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 제작시기 논란 석가탑 다라니경 “고려보단 통일신라 가능성 커”

 

 

 

다라니경 제작 시기는 영원히 미궁으로 빠져 들까. 단정하긴 아직 이르다.

 

1966년 석가탑에선 다라니경과 묵서지편만 나온 게 아니다.

다라니경이 있던 금동제사리외함과 사리함 밑의 묵서지편 바로 아래 최고급 고대 직물이 숨어 있었으나 지금껏 베일에 가려 있었다.

직물이 흙과 함께 떡처럼 굳어 있어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것. 이 직물은 ‘잡물()’로 분류돼 41년을 수장고에서 숨죽여 기다려

오다가 올 8월 말 보존 처리가 시작되면서 ‘오래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차 보존 처리 결과 흙덩이처럼 보였던 ‘잡물’은 최근 당대 최고급 비단인 나() 능() 주() 등으로 밝혀졌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 천주현(서화류 담당) 연구원은 “석가탑 말고 고대 직물이 이토록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고대 직물의 재질 제작기법 무늬를 분석해 문헌과 비교하면 다라니경 제작 시기의 비밀을 풀 단서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물관은 유물 손상을 우려해 보존 처리 현장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으나 2일 처음 본보에 문을 열었다.

고대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고 있는 은밀한 현장으로 들어갔다.

 

석가탑 유물 보존처리실은 숨 막힐 듯 정적이 흘렀다. 보존과학팀 천 연구원과 박승원(직물류 담당) 연구원은 흙더미에서 떼어낸 데

이어 여러 겹으로 접힌 직물을 반듯이 펴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직물의 두께는 1mm가 채 되지 않는다.

1000년 이상 흙, 빗물과 싸우며 딱딱하게 굳었고 극도로 약해진 섬유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한순간에 부스러진다.

사람의 숨결에 날아갈 정도여서 마스크는 필수.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예민해진 연구원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작업 시간엔 문을 걸어 잠근다.

 

두 달간 연구원들은 ‘손대면 사그라질 듯한’ 유물들을 흙더미에서 하나하나 분리해 냈다.

얇고 기다란 나무 도구로 직물을 흙에서 천천히 들어 올린다.

직물 형태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섬유가 끊어지면 끝장. 직물을 분리하는 손놀림은 조심스럽고 느리다.

천 연구원은 “작업 동안 습도를 60∼65%로 유지하지 않으면 직물이 딱딱해져 부스러져 버린다”고 말했다.

최대한 직물의 원형을 찾기 위해 작은 조각까지 흙에서 일일이 찾아 형태를 맞춘다.

연구원들이 “고대 퍼즐 맞추기 놀이”라고 농담한다. 직물 조각마다. 묵서()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직물에 쓰인 글씨는 묵서지편에 쓰인 봉안품 목록과 비교할 중요한 단서라 놓쳐선 안 된다”는 게 박 연구원의 설명이다.  

 

두 달간 작업 끝에 고대 직물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잡물’은 실상 7겹의 직물이었다.

이 중 묵서지편을 2겹으로 쌌던 직물을 찾아냈다.

금동제사리외함을 쌌던 직물에선 함 테두리 흔적도 선명했다.

이 직물엔 곡선과 원형으로 이뤄진 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무늬는 시대별로 다른 패턴을 나타내므로 무늬를 최종 확인하면 다라니경

 제작 연대에 귀중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묵서지편, 보협인다라니경 재질을 분석해 다라니경과 비교하면 제작 시기의 수수께끼도 쉽게 풀릴 수 있다.

묵서지편의 보존 처리는 이제 시작이다.

박물관은 묵서지편의 두께와 제작 방식, 섬유 조직을 분석한 뒤 현재 낱장으로 분리돼 듬성듬성 구멍 뚫려 있는 묵서지편을 하나의

문서로 이어 복원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