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신할머니
우리 한민족의 발원지라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수를 깃점으로 지금의 몽골,티벳,시베리아,만주로 이어지는 북방 기마민족(우랄알타이어 계)에 속한다. 한민족의 '韓'은 북방민족의 수장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단군왕검님이 BC 2333년 고조선을 건국 했다고한다. 예맥족인 부여(북부여,동부여)(BC 59년~BC37년)=> 고구려 건국(고조선의 적통국가) (고주몽)부터 시작한다. 이때 수도가 만주 집안이다.만주 집안에는 1만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있다. AD3,4세기때 고구려 중기무렵에 만들어진 장군총
현재 밝혀진것만 100개이상이라는데 최고 큰것은 이집트 쿠푸왕 높이146m것보다 크다고한다. 연대도 이집트 조세르 왕조의 계단식 피라미드(기원 전 2560년경)보다 최소 1,2천년 앞선다고한다.
3세기)의 무덤보다 수천년은 앞서 있다고 밝혔단다. 고분을 발굴해보니 東夷족의 유물이 왕창 쏟아져나와서 현재는 중국당국이 발굴중단하고 접근 금지 시키고 동북공정(고조선과 고구려는 우리 지나 민족이다~ 이에 대응하기는 커녕 한민족 역사의 정통성(지들 꼴리는대로?)을 주장하는 북한의 현실은 인류의 태양이라는 김일성왕조의 개정일은 백두산(허구한날 민족의 영산이니 뭐니 지롤떨면서) 기분좋게 반 뚝잘라(6.25 기습남침 실패로 압록강까지 밀려 자유대한의 한민족 통일 일보직전까지 간것을 중공이 도와줬다고? 김일성이 살려 준거에 대한 보답으로 중공에 갖다 바치고) 통합 한민족 700만이상을 살륙하고,굶겨 죽이면서까지 자기 정권유지에 전전긍긍하고 있고,작금 한국은 한국대로 남남갈등 조장, 인류의 태양 김정일 지령에 의한 빨갱이들의 준동! 21C는 해양시대가 도래 할것인데 근시안적인 사고 방식으로 김대중정권 땐 동해바다 독도 앞뒤바다 뚝잘라 일본과 공유하고,마침내 제주도 남방 이어도 앞바다까지 중국과 공유하고,위대한 한민족의 영웅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부관참시나 하고,숨넘어가는 서민경제 살려달라고 하니 역대 최고의 수출지표 떡하니 발표하고,경제는 잘~돌아가고 있다고 구라나 치고(이정권이 했나? 한국 삼성,현대 어려운 환경의 중소기업이 이룩한 성과지) 코드 안맞다고 조져 될줄이나 알지? 보면 틀림없겠다. 그럼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신씨배달이 실존 했다고 봐도 무리없을 것이다. (만주 피라미드의 비밀이 풀려지면 한민족의 상고사의 장대한 역사가 풀려 질것이다~) 서융(西戎):서쪽 오랑캐 남만(南蠻):남쪽 오랑캐 ·북적(北狄):북쪽오랑캐 이런씩이다. (자기들 멋대로 갖다 부친 야만족이란 개념이다.) 통틀어 사이(四夷)라고 불렀다. 총괄해서 말 하는것이다.(사실 비슷한 언어와 혈통적으로 같은 기마민족이다.) 그이유는 한민족의 상고사인 고조선이전의 역사인 -환국시대(BC7197-BC3897 ) -환인시대 -배달국 시대(BC3897-BC2333 한웅천황시대) -단군조선 시대(BC2333-BC37년 고조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단고기』) 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것 같아서이다. 그런데 이 ‘선우’라는 말에도 ‘단군’의 뜻이 담겨져 있다. 우선 ‘선’은 ‘단’으로도 읽힌다. ‘단檀은 하늘에 제사올릴 선’과 같으며 선禪과도 통하는 글자이다. 그래서 단군을 선군이라고 호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흉노족의 군장인 선우는 단과 같은 의미인 선이 그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의 뿌리가 조선이며, 상국인 조선의 제왕 호칭을 직접 쓰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단군이 당시 천자, 天帝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서 『사기』(史記)를 보면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삼황오제란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이 삼황(三皇)이며,여왜보천(女?補天),전욱고양(?頊高陽), 제곡고신(帝?高辛),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제순유우(帝舜有虞)<순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사학자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소호는 황제헌원의 아들이며 전욱은 황제의 차자인 창의의 아들로 황제의 손자이다. 제곡은 소호의 손자로 황제의 증손이라 하였고 제요는 제곡이 제후 진봉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황제의 고손이라 하였다. 따라서 삼황오제는 모두 한 가족이었으며 동시에 이들은 모두 동이족이었다.(한마디로 중국 시조는 전부 북방민족의 東夷족 출신다.) <漢족 출신인 사마천(BC2C중엽漢나라 무제 때 역사가)이 쓴 역사서이다.> 지금 한국의 붉은악마의 트레이드마크인 전쟁의 신 막강 치우천황이 여기서 나온다. (한마디로 기원전 8세기 중엽까지 북방민족이 중원대륙의 주역 이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春秋戰國시대 거쳐 100여국으로 정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는 진(秦), 조(趙), 진(晋), 제(齊), 초(楚), 노(魯), 위(魏), 연(燕), 조(曹), 송(宋), 진(陳), 채(蔡), 정(鄭), 오(吳), 월(越)의 15개국입니다. 희성국인 晋이 삼분되어 韓(한),魏(위),趙(조), 사실상 천자는 세나라를 제후로 인정한다. 또, 강성국이었던 齊나라가 규성에서 유래한(제순유우씨의 후예) 전씨(田氏)의 손에 들어가 전씨 제나라가 된다. 이리하여 제(齊)·연(燕)·초(楚)·韓(한)·위(魏)·조(趙) 각각의 세력국으로 드러나 천자도 통제가 안되는 전국7웅이라 불리게 된다. 206 B.C<또한 유명한 만리장성,아방궁,시황릉 축조등 무리한(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정치등으로 국력을 소비 합니다. (東夷족)북방민족의 문화,경제,군사등 모든걸 잘 가르쳐줬어도 개판치는 바람에~)만리장성? 사실은:춘추전국시대부터 연(燕) ·조(趙) ·위(魏) ·초(楚)등등이 조금씩 쌓아 놓은것임. 아마 진시왕이 전국7웅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축조하기 시작했다고 보면 맞을겁니다. 10년동안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들이 징발되어 북방민족(흉노족의 두려움)침입을 대비해 쌓아 올린거랍니다.) 이후에도 역대 왕조가 개보수하였고 명나라 때 와서는 200여 년 동안 18차례나 수축되어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된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흉노와 본격적인 대립은 진시황때 부터 시작됩니다. {감히 동이족의 제후국가인 동주를 멸망 시켰으니 무섭겠죠~} 그래서 저는 동이족과 흉노족은 동일 민족으로 생각합니다. <알고보면 자칭 위대한 지나족의 통일제국의 역사는 20년도 채 안됩니다. 의 항우에 의해 망한다. 최초의 지나(남방족)의 통일제국이 불과 20년도 안되서 다시 분열 된다.진나라를 무너 떠린 西楚의 항우와 한(漢)나라의 고조 유방의 전쟁이다. 벽인 동이족(흉노)의 본토을 넘 봅니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왕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사마천의『사기』(史記)> 한마디로 다시 동이족의 제후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약60년정도)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 역사서에 써여진 내용을 보면 예로부터 이런씩으로 지나족(漢족)을 다스렸다는것을 유추할수 있슴. 일명:관습법)
(또 다시 반란의 시작!) 음부터 무제(武帝)는 군사력으론 힘드니 흉노족(동이족)간의 이간질 정책을 쓴다. 좋은 예로 [동호東胡;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 사실 비슷한 언어로 혈통이 같은 북방기마민족이다. 왜냐면 고조선,예맥,부여는 같은 한민족이다. 漢족이 자기들 편한대로 부른것이다.]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진행됨.흉노에게 동호국은 패한다. 이런씩으로 북방기마민족의 힘을 약하 시켰던 것이다. <사실 한민족(북방기마민족)이 다스린 영토는 워낙 광범위 했으니 지금 경기도,서울,인천,경상도,부산,전주,광주,목포,울산 이런씩으로 지방색이 있었던거로 보면 된다.>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흉노제국 내부의 분열과 한의 이간질 정책이 맞아 떨어져 결국 남, 북흉노로 분열 되었다.북흉노와 연합한 漢나라가 남흉노를 강력하게 밀어 부친것이다. 이때부터 약120년간 동이족과 漢족(지나족)의 기나긴 전쟁이다. 일부는 동진 산동반도,만주,한반도,또 일부는 유럽쪽으로 서진 한다. 고조선의 몰락과도 때를 같이한다.연대를 보면 먼가 삘이 오지않는가? (한마디로 북방민족 내전으로 망국의 길로 들어 섰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반도에 고구려,백제(마한),신라(진한),가야(변한)가 성립되는 시기이도하다. 漢족(지나족)이 중원대륙에 자리잡기 시작한 때이다. (2300년 역사의 대제국 고조선의 BC 37년 멸망) 동이족의 수난사이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尼斯今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麻立干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고주몽의 첫째가 비류,둘째가 온조 이였다.(고구려,백제문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것도 이해가 됨) 나선다.) 전조(前趙)、후조(后趙)、전진(前秦)、후진(后秦)、서진(西秦)、전연(前燕)、후연(后燕)、남연(南燕)、북연(北燕)、하(夏)、성한 (成漢)을 말한다. 여기에 대국(代國)、염위(?魏)、서연(西燕)、토곡훈(吐谷渾)등도 합세하여 20여국의 혼란시기. 종족의 은의를 베풀자 북연왕(北燕王) 고운(高雲)은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보답했다하고>, 한족(漢族)인 풍발(馮跋)이 다시 집권했던 나라로 북위(北魏)에게 멸망됨. 선비를 모든 군사담당자로 구성하였으며, 호적을 정비하여 인보제(隣保制)와 삼장제(三長制)에 의해서 체제를 지탱하였다. 또한 균전법(均田法)이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부병제(府兵制)도 채용하였다. 이 북조의 군주권 강화를 위하여 실시된 정치기구가 뒤에 수 당(唐) 두 제국의 정치기구로서 완비되었다. 589년 진이 수(隋)의 문제(文帝)에게 멸망될 때까지를 가리킨다. 진(陳) 557-589-> 수(隋) (文帝)양견(楊堅)이 중원대륙을 석건 합니다.(최후의 승자는 북방민족 승리**) (역시 같은 북방민족간의 골육상쟁) AD598년 수 문제 30만 대군 1차 침공(고구려 26대 영양왕) 수의 패전 완전히 개박살남<300년 가까이 전쟁으로 단련된 최정예 병력 30만대군을 박살낸 고구려군의 전력은세계최강 이었슴이 증명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패전으로 수는 6년 후에 당나라漢족(지나족)에게 멸망 당한다. 고구려도 역시 전쟁에선 승리 했지만 엄청난 국력소비로 내리막길을 걷는다.) "결국은 고조선이 뿌리인 두 북방민족간의 전쟁으로 망쪼의 길로 들어 섰다는거다." 기출됬다고 한다.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룬다. 맺는다. 그리고...(각각 원수가 되어 싸우고 있던 고구려,백제,신라의 민족통합<분쟁>쟁탈전에 당나라가 끼어든다. 신라,당나라가 한패를 이루었고 고구려,백제,왜(백제의 속국)이 동맹을 맺어 전쟁을 시작함. 백제왜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의 전쟁 강변에는 백제 최정예 기병대와 왜수군400척,역시 반대편에는 신라 최정예 기병대와 당수군170척 이렇게 마지막 전투가 붙었고 결국은 나당연합군이 승리했다고<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전함570척)격돌 그리고 기병대의 격돌 엄청난 육해전 이였다. 663년 백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동북아시아 최강의 고구려는 AD668년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675년 매소성전투 당나라 대군20만명을 격파,676년 기물포해전을 마지막으로 신라가 완전히 당나라(漢족)을 제압한다. 그리고 고구려(AD668년) 패망 30년후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발해(AD698년)를 건국하여 통일신라와 함께 찬란한 민족사인 남북조시대를 열었다.발해(AD698년~926년) 약228년 존속
“훈족왕 아틸라는 한민족” 이종호박사도 몽골반점 증거제시 한국인 주장” ” 프랑스 페르피냥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 종호 씨가 저 작‘로마제국의 정복자 아 틸라는 한민족’을 통해 주 장한 학설이다. 골상이 편두(偏頭)라는 사실을 들어 아틸라는 한국인이라고 단언했다. 추적했다. 즉, 통일대왕인 문무왕,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 그의 삼촌인 金庾信을 주축으로 한 신라왕족과 귀족들이다. 朴씨, 昔씨에 이어 김씨 왕조를 연 것은 미추 이사금이고 내물 마립간代에 와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김씨 왕조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등이 나와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고 통일을 주도했다. 민족문화의 원형이 되는 틀을 굳히게 한 주역이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예술관에 따라 민족문화와 정치의 뼈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신라 김씨 왕족들이야말로 민족사의 창조자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들은 누구인가. 서기 4-6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적석목곽분이라 불린다. 시신을 목곽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봉토를 입힌 무덤이다. 나중에 목곽이 썩어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준다. 황남대총이 적석 목곽분의 전형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초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 무덤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고 중국식 물건은 없다. 이 무덤에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도 많이 있었다. 김씨왕족은 기마군단의 지휘자였다는 이야기이다. 4세기에 갑자기 경주에 나타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요사이 역사, 고고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것은 아니었으며,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문화의 직접 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말,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토착정권을 점령하고 김씨왕조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유목민족의 상징이 金이다. 유목민족은 금제품을 좋아하고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金이란 뜻이다. 이들이 성씨를 金이라고 후에 정했다는 것도 퍽 상징적이다. <최근 흉노게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 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신라 積石木槨墳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東南進한 시베리야계 주민의 후예로서,그들은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 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繩蓆文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기마군단이었다. 이들이 漢무제의 공격을 받자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서양사에 등장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의 출현이다. 3세기말 몽골고원과 중국 북방에 남아 있던 흉노계는 晉의 분열을 이용하여 남진하여 중국을 150년간 대혼란에 빠뜨리고 다섯 胡族이 16개국을 만드는 5호16국 시대를 연출한다. 이런 시기를 전후하여 일단의 흉노계 부족이 경주에 나타나 토착정권을 정복하고 고분을 만들고 우두머리를 마립간으로 칭하면서 주변 부족국가를 흡수하여 신라를 강화해갔다는 것이다. 내물왕, 지증왕, 법흥왕, 진흥황, 진평왕, 무열왕, 문무왕 등 우리의 귀에 익은 삼국통일의 주체세력 계보가 바로 흉노계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흉노계 중 일부는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 고대국가의 지배민족이 되었다는 것이 에가미 교수의 유명한 기마민족국가설이다. 흉노족이 가진 특성은 모든 유목민족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민, 용맹하며 자유분방하고 親자연적이고 오기가 세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섭게 뭉쳤다가도 그런 지도자가 사라지면 집단도 사라지는 경향이 강하다. 지금 우리의 피 속에 흐르고 있을 그런 흉노계의 특성을 점검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민족에게 알맞는 경영방식은 무엇인가, 왜 신라김씨가 삼국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등등의 話頭를 세워볼 만하다. 한민족의 정통주류 세력이 흉노족이라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일이 아닌가. 말이 가진 기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이뤄진 민족이동과 정복국가의 건설, 그리고 민족적 친연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붙박이 농경민족의 눈으로는 눈부시게 기동하는 기마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들다. 흉노족에 대한 연구는 한민족에 대한 연구, 신라통일의 비밀에 대한 탐구, 韓中日 삼국에 대한 연구이자 민족사를 세계사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각의 일대전환이다. 이는 나와 우리를 보는 시각의 전환이기도 할 것이다.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서기 375년에 홀연히 서유럽에 나타나 게르만족을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으로 로마지역으로 밀어버림으로써 로마 세계를 붕괴시킨 훈족이 신라 가야 종족과 그 뿌리가 같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실려 있는 것이다. 비교하여 훈족과 가야 신라족의 뿌리가 흉노에 닿는다는 視覺(시각)을 보여준다. 이종호씨가 훈족과 신라 가야족의 연관성을 탐구하게 된 계기는 독일의 ZDF방송의 다큐멘터리가 훈족과 신라 가야족들의 연관성을 맨 첨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독일 방송 프로는 자유베를린 방송사 편집자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 코넬 대학과 베르린 공과대학 교수였던 아이케 슈미트가 훈족을 집중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오늘의 유럽 각국은 게르만족의 여러 종족이 로마지역을 점령하여 세운 나라들을 뿌리로 삼고 있다. 게르만 대이동은 현대 유럽의 모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대사변이 신라 및 가야족(즉 한민족)과 같은 뿌리의 흉노족(훈족)에 의하여 촉발되었다면 한민족을 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가야 신라족이 서쪽으로 가서 훈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한민족과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으로 불리면서 몽골고원에서 살다가 일족은 서쪽으로 나아가서 훈족이 되고 다른 쪽은 한반도로 들어와 한민족의 뿌리인 신라 가야지배층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기간에 몽골고원에서 흉노족으로 살던 유목기마민족의 일부는 한반도로 들어와 가야 신라를 세우고 일부는 서쪽으로 가서 훈족으로 불리면서 게르만족을 서쪽 로마경내로 밀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신라 및 가야족의 선조가 훈족의 선조와 동족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기 전 2세기쯤엔 신라 가야족의 조상들과 훈족의 조상들이 동족으로서 함께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첫째, 서유럽에 지금도 살고 있는 훈족 후예들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 둘째, 훈족이 쓴 예맥각궁이 한반도에서 쓰인 활과 비슷하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偏頭(편두·납작머리)라는 점이다. 三國志 魏志東夷傳에는 辰韓(진한·신라지역) 사람들이 모두 偏頭라는 기록이 있다. 넷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되는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는 북방유목민족의 祭儀용기인데 같은 것이 가야지방에서 발견된다. 다섯째, 훈족은 이 항아리를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1924년 경주 金鈴塚에서 발굴된 기마인물상토기가 항아리 이고 있다. 여섯째, 이 항아리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신라 금관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비슷하다. 주의했다. 4세기 무렵부터 신라지역에 거대한 績石木廓墳을 남기면서 등장한 지배민족이 흉노계통의 기마군단일 것이란 說도 인용하고 있다. 이 네번째 종족이동의 물결을 탄 흉노족이 먼저 유럽쪽으로 진출해 있던 훈족과 결합하여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 지역으로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흉노족의 일파는 東進을 개시하여 가야나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훈, 흉노, 한민족의 뿌리는 서기 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면 몽골고원 지대를 누비던 기마민족인 흉노와 연결된다는 이야기이다. 크게 보면 흉노의 일파는 서쪽으로 나아가 훈족이 되고 다른 일족은 한반도로 들어와 가야 신라 지역을 차지하여 先住民들을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훈족, 흉노족, 신라 가야인들이 남긴 금관, 항아리, 馬具 등이 거의 같은 모습인 것이 이런 설을 뒷받침한다는 이야기이다. <훈, 흉노, 한민족의 親緣性을 찾는다는 것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 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고대사를 다루는 퍼즐을 완벽하게 맞춘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민족이 한민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한민족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外侵(외침)만 받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과거사 규명에 도전한다면 보다 많은 새로운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기대한다> 고고학자 金秉模 박사는 신라 가야는 흉노계, 고구려 백제는 扶餘계(몽골족)가 지배민족이라고 단정한다. 훈족이 흉노족이라면 당연히 신라 가야족의 뿌리는 흉노 훈족과 이어진다. 다만, 그런 논리를 공개적으로 전개한 사람들이 없었을 뿐이다. 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과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삼국사기 列傳 金庾信傳과 文武王의 碑文으로 추정되는 글에서도 『우리의 선조는 小昊金天氏』라는 주장이 나온다. 소호김천씨는 귀순한 흉노족에게 漢武帝가 내어준 姓이다. 삼국통일의 元勳인 金庾信과 文武王은 『우리는 漢族과는 다른 북방기마민족 출신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때 漢高祖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너희들의 식민지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추방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한민족의 보금자리를 확보했을 것이다. 민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존심과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뿌리인 신라통일의 지배층이 가졌을 흉노족(훈족)과의 연대의식이 연구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북방기마민족계통의 유물이 압도적인 가운데 로마지역으로부터 수입한 유리그릇이나 칼, 구슬장식 등이 많다. 신라 지배층은 분명히 중국과 뿌리가 다른 것이다. 이런 출신의 차이에서 우러나온 차별의식이나正體性이 對唐결전을 통해서 민족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면 과장일까?
실크silk는 신라금(新羅錦)의 준말 바로 신라의 주 강역이었던 항주에는 지금도 어릴적 우리와 똑같은 누에치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출처:<아랍인의 눈에 비친 신라>
여기서 부터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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