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한겨레의 기원은 어디인가!

설레임의 하루 2009. 3. 21. 02:21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신할머니

 

 

 

 

우리 한민족의 발원지라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수를 깃점으로 지금의 몽골,티벳,시베리아,만주로 이어지는 북방 기마민족(우랄알타이어

계)에 속한다. 한민족의 '韓'은 북방민족의 수장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우선 고조선 이후의 상고사는 접어두고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5000년(반만년)이라고 누구나 말한다.

단군왕검님이 BC 2333년 고조선을 건국 했다고한다.

일반적으로 고조선 역사를 보면 +++고조선(BC 2333~BC1122년)기자조선(BC 1122년~BC194년)위만조선
(BC 194~BC 37년)=>

예맥족인 부여(북부여,동부여)(BC 59년~BC37년)=> 고구려 건국(고조선의 적통국가)

그런데 북부여로부터 나온 고구려는 고조선(약 2300년을 단일국으로 존속한 나라!! 대단하다~)을 폐하고
기원전37년 동명성왕

(고주몽)부터 시작한다.

이때 수도가 만주 집안이다.만주 집안에는 1만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있다.




AD3,4세기때 고구려 중기무렵에 만들어진 장군총


흥미로운 것은 만주에 정체불명의 피라미드가 있다.

현재 밝혀진것만 100개이상이라는데 최고 큰것은 이집트 쿠푸왕 높이146m것보다 크다고한다.

연대도 이집트 조세르 왕조의 계단식 피라미드(기원 전 2560년경)보다 최소 1,2천년 앞선다고한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높이 146.5 m(현재 137 m), 저변 230 m, 사면각도는 51 °52 '이다.
연대도 이집트 조세르 왕조의 계단식 피라미드(기원 전 2560년경)보다 최소 1,2천년 앞선다고한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중국 고고학자들이 1973년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 측정한 결과 中原대륙의 최초의 통일왕조라는 진시왕(BC

3세기)의 무덤보다 수천년은 앞서 있다고 밝혔단다.

고분을 발굴해보니 東夷족의 유물이 왕창 쏟아져나와서 현재는 중국당국이 발굴중단하고 접근 금지 시키고 동북공정(고조선과

고구려는 우리 지나 민족이다~

이에 대응하기는 커녕 한민족 역사의 정통성(지들 꼴리는대로?)을 주장하는 북한의 현실은 인류의 태양이라는 김일성왕조의

개정일은 백두산(허구한날 민족의 영산이니 뭐니 지롤떨면서) 기분좋게 반 뚝잘라(6.25 기습남침 실패로 압록강까지 밀려 자유대한의 한민족 통일 일보직전까지 간것을 중공이 도와줬다고?

김일성이 살려 준거에 대한 보답으로 중공에 갖다 바치고) 통합 한민족 700만이상을 살륙하고,굶겨 죽이면서까지 자기 정권유지에

전전긍긍하고 있고,작금 한국은 한국대로 남남갈등 조장, 인류의 태양 김정일 지령에 의한 빨갱이들의 준동! 21C는 해양시대가 도래

할것인데 근시안적인 사고 방식으로 김대중정권 땐 동해바다 독도 앞뒤바다 뚝잘라 일본과 공유하고,마침내 제주도 남방 이어도

앞바다까지 중국과 공유하고,위대한 한민족의 영웅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부관참시나 하고,숨넘어가는 서민경제 살려달라고 하니

역대 최고의 수출지표 떡하니 발표하고,경제는 잘~돌아가고 있다고 구라나 치고(이정권이 했나? 한국 삼성,현대 어려운 환경의

중소기업이 이룩한 성과지) 코드 안맞다고 조져 될줄이나 알지?
여하간 다시 만주 피라미드의 비밀로 가보면 연대가 최소 BC5000,6000년이 넘어 선다는건데 단군왕검의
고조선 연대를 넘어섰다고

보면 틀림없겠다.

고분(무덤)의 유물은 東夷족 것이고,원래 우리 한민족의 무대였던곳, 반드시 다시 찾아야만 될 우리 한민족의
옛 삶터전이다.

그럼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신씨배달이 실존 했다고 봐도 무리없을 것이다.

(만주 피라미드의 비밀이 풀려지면 한민족의 상고사의 장대한 역사가 풀려 질것이다~)

말머리를 돌려서 東夷란 말이 장케넘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해서 상대 민족을 얍잡아 보는 동쪽오랑캐란
뜻이다.

서융(西戎):서쪽 오랑캐 남만(南蠻):남쪽 오랑캐 ·북적(北狄):북쪽오랑캐 이런씩이다.

(자기들 멋대로 갖다 부친 야만족이란 개념이다.) 통틀어 사이(四夷)라고 불렀다.

북방민족은 역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동이족,흉노족,선비족,숙신족, 예맥족, 동호족, 산융족, 조선족, 발족,
거란,말갈(여진),돌궐 등을

총괄해서 말 하는것이다.(사실 비슷한 언어와 혈통적으로 같은 기마민족이다.)

그런데 가장 주목해야 될 민족이 흉노족이다.

그이유는 한민족의 상고사인 고조선이전의 역사인

-환국시대(BC7197-BC3897 )

-환인시대

-배달국 시대(BC3897-BC2333 한웅천황시대)

-단군조선 시대(BC2333-BC37년 고조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단고기』) 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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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은 자신들의 군장을 하늘에서 내려준 천자라는 뜻으로 ‘선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선우’라는 말에도 ‘단군’의 뜻이 담겨져 있다. 우선 ‘선’은 ‘단’으로도 읽힌다.

‘단檀은 하늘에 제사올릴 선’과 같으며 선禪과도 통하는 글자이다.

그래서 단군을 선군이라고 호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흉노족의 군장인 선우는 단과 같은 의미인 선이 그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의 뿌리가 조선이며, 상국인 조선의 제왕 호칭을 직접 쓰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단군이 당시 천자, 天帝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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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를 주도한 북방민족(동이족,흉노족)과 허접한 漢족(지나족:남방족)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 역사에서 上古史(BC3000~2033년)라 할수있는 중국의 시조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東夷족이다.

역사서 『사기』(史記)를 보면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삼황오제란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이 삼황(三皇)이며,여왜보천(女?補天),전욱고양(?頊高陽), 제곡고신(帝?高辛),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제순유우(帝舜有虞)<순임금>을 말한다.

중국의 사학자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소호는 황제헌원의 아들이며 전욱은 황제의 차자인 창의의 아들로 황제의 손자이다.

제곡은 소호의 손자로 황제의 증손이라 하였고 제요는 제곡이 제후 진봉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 황제의 고손이라 하였다.

따라서 삼황오제는 모두 한 가족이었으며 동시에 이들은 모두 동이족이었다.(한마디로 중국 시조는 전부 북방민족의 東夷족 출신다.)

<漢족 출신인 사마천(BC2C중엽漢나라 무제 때 역사가)이 쓴 역사서이다.>

특히 황제헌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배달국 제14대 한웅인 치우천황(BC2707-BC2598)과 같은 시대이다.

지금 한국의 붉은악마의 트레이드마크인 전쟁의 신 막강 치우천황이 여기서 나온다.

夏나라(BC2033~BC1562년)<동이족>

은(殷=商)나라(BC1562~BC1066년)갑골문자(한자의 기원)<동이족>

(周나라(BC1066~BC256년)<동이족>

西周(鎬京에 도읍 기원전1066년~기원전770년)여기까지가 중국역사에서 동이족(북방민족)세운 나라다.

(한마디로 기원전 8세기 중엽까지 북방민족이 중원대륙의 주역 이였다는 것이다.)

(東周(洛邑으로 천도 BC770~BC256년)

동주 대부터 漢족의 반란이 시작된다.주나라(동이족)왕실의 힘이 점점 약해지면서 피지배계층인 한족과의
혼란(반란)이 시작된다~

 

이른바 春秋戰國시대
이시기에 지금까지 유명한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온다.공자,맹자,노자 등등(동이족이란 설도있슴)

나누어보면
春秋(기원전770년~기원전476년)

이 무렵부터 주나라 왕실을 대신해 천하를 호령하겠다는 군웅쟁패의 시대가 계속되면서 주나라 초기의
1천여 국가가 통합 병합을

거쳐 100여국으로 정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는 진(秦), 조(趙), 진(晋), 제(齊), 초(楚), 노(魯), 위(魏), 연(燕), 조(曹), 송(宋),

진(陳), 채(蔡), 정(鄭), 오(吳), 월(越)의 15개국입니다.

춘추5패(전쟁에 이긴애들 추스려서^^)

齊: 제환공(齊桓公) 강소백(姜小白) 기원전720년-기원전750년

晋: 진문공(晋文公) 희중이(姬重耳) 기원전760년-기원전510년

秦: 진목공(秦穆公) 영임호(?任好) 기원전750년-기원전770년

楚: 초장왕(楚庄王) 미려(??) 기원전790년-기원전690년

吳: 오왕(吳王) 합려(?閭) 기원전690년

戰國(기원전476년~기원전221년)전국7웅

천자국 周가 명목상의 존재가 됨.

희성국인 晋이 삼분되어 韓(한),魏(위),趙(조), 사실상 천자는 세나라를 제후로 인정한다.

또, 강성국이었던 齊나라가 규성에서 유래한(제순유우씨의 후예) 전씨(田氏)의 손에 들어가 전씨 제나라가 된다.

이리하여 제(齊)·연(燕)·초(楚)·韓(한)·위(魏)·조(趙) 각각의 세력국으로 드러나 천자도 통제가 안되는 전국7웅이라 불리게 된다.

전국7웅의 패자가 진(秦)나라인 漢족(지나족:남방족)출신인 진시왕이 최초의 중원의 패자가 됩니다.)
始皇帝政(221 B.C. -- 210 B.C) -> 二世胡亥(210 B.C -- 207 B.C)-> 秦王子?

206 B.C<또한 유명한 만리장성,아방궁,시황릉 축조등 무리한(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정치등으로 국력을 소비 합니다.

(東夷족)북방민족의 문화,경제,군사등 모든걸 잘 가르쳐줬어도 개판치는 바람에~)만리장성?

사실은:춘추전국시대부터 연(燕) ·조(趙) ·위(魏) ·초(楚)등등이 조금씩 쌓아 놓은것임.

아마 진시왕이 전국7웅을 통일하고 본격적으로 축조하기 시작했다고 보면 맞을겁니다.

10년동안 30만의 군사와 수백만의 농민들이 징발되어 북방민족(흉노족의 두려움)침입을 대비해 쌓아 올린거랍니다.)

이후에도 역대 왕조가 개보수하였고 명나라 때 와서는 200여 년 동안 18차례나 수축되어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된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흉노와 본격적인 대립은 진시황때 부터 시작됩니다.

{감히 동이족의 제후국가인 동주를 멸망 시켰으니 무섭겠죠~}

그래서 저는 동이족과 흉노족은 동일 민족으로 생각합니다.
始皇帝政(221 B.C. -- 210 B.C) -> 二世胡亥(210 B.C -- 207 B.C)-> 秦王子?(206 B.C)

<알고보면 자칭 위대한 지나족의 통일제국의 역사는 20년도 채 안됩니다.

진(秦)나라는,우리도 잘아는 진나라 말기의 반란군 항우와 유방 (고우영의 만화 초한지)에서 서초西楚
(기원전206년~기원전202년)

의 항우에 의해 망한다.

최초의 지나(남방족)의 통일제국이 불과 20년도 안되서 다시 분열 된다.진나라를 무너 떠린 西楚의 항우와 한(漢)나라의 고조 유방의

전쟁이다.
결국은 꾀많은? 유방이 초한전쟁의 패권을 잡습니다.西漢(BC202년~AD8년) 한(漢)나라의 고조 유방은
주제도 모르고 넘을수 없는

벽인 동이족(흉노)의 본토을 넘 봅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왕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사마천의『사기』(史記)>

말이 화친이지 사실은 다시 동이족(흉노족)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다시 동이족의 제후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말이 형제맹약이지 한일합방하고
똑같은 것이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漢족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약60년정도)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 역사서에 써여진 내용을 보면 예로부터 이런씩으로 지나족(漢족)을 다스렸다는것을 유추할수 있슴. 일명:관습법)




한나라가 흉노(동이족)로 부터 다시 독립하기 시작한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또 다시 반란의 시작!)

한의 무제는 흉노(東夷족)제국으로 부터 독립 전쟁을 획책한다.

음부터 무제(武帝)는 군사력으론 힘드니 흉노족(동이족)간의 이간질 정책을 쓴다.

좋은 예로 [동호東胡;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

사실 비슷한 언어로 혈통이 같은 북방기마민족이다.

왜냐면 고조선,예맥,부여는 같은 한민족이다.

漢족이 자기들 편한대로 부른것이다.]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진행됨.흉노에게 동호국은 패한다.

이런씩으로 북방기마민족의 힘을 약하 시켰던 것이다.

<사실 한민족(북방기마민족)이 다스린 영토는 워낙 광범위 했으니 지금 경기도,서울,인천,경상도,부산,전주,광주,목포,울산

이런씩으로 지방색이 있었던거로 보면 된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흉노제국 내부의 분열과 한의 이간질 정책이 맞아 떨어져 결국 남,

북흉노로 분열 되었다.북흉노와 연합한 漢나라가 남흉노를 강력하게 밀어 부친것이다.

이때부터 약120년간 동이족과 漢족(지나족)의 기나긴 전쟁이다.

전쟁에 패한 동이족(남흉노)의 대이동이 시작 되었던것이다.

일부는 동진 산동반도,만주,한반도,또 일부는 유럽쪽으로 서진 한다.

고조선의 몰락과도 때를 같이한다.연대를 보면 먼가 삘이 오지않는가?

(한마디로 북방민족 내전으로 망국의 길로 들어 섰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반도에 고구려,백제(마한),신라(진한),가야(변한)가 성립되는 시기이도하다.

간단히 말해서 漢족(지나족)이 중원대륙에 BC 2C초부터 AD3C 말기까지 약400년정도 기반을 잡는 시기로
보면된다.

漢족(지나족)이 중원대륙에 자리잡기 시작한 때이다.

(2300년 역사의 대제국 고조선의 BC 37년 멸망) 동이족의 수난사이다.

예맥족<동이족,흉노족의 일파>=>부여=>북부여=>고구려 건국(BC37년)동명성왕(고주몽)

신라의 건국 (BC 57년) 시조 박혁거세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居西干, 3대 유리왕부터는 尼斯今, 내물왕 시대부터는 麻立干으로 적었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尼斯今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麻立干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백제의 건국 (BC 18년) 온조왕(아버지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이였다.

고주몽의 첫째가 비류,둘째가 온조 이였다.(고구려,백제문화가 상당히 닮아 있다는것도 이해가 됨)

(AD42년) 김수로왕 금관가야 건국(역시 흉노족)

이제부터 기원후로 넘어 갑니다.

新나라(AD8~AD23)

개국자는 왕망(王莽)으로 西漢(漢고조 유방이 세운나라를 패망시키고,新나라를 세운다.(겨우 30년)

東漢(25년~220년)

개국자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망국西漢의 황족이 다시 집권한 보기드문 예.

三國(魏위220년~265년;蜀漢촉한221년~263년;吳오222년~280년)(漢족)전부 지나족

삼국지로 잘 알려진 시대.(동탁,조조,제갈공명,유비,관우,장비,등등

五胡十六國(304년~589년)(기원후4C세기초부터~6세기 말까지 약300년간) 다시 북방민족이 다시 지나족과 중원패자 다툼에

나선다.)

5호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 저(?), 강(羌)을 말하고, 16국은 전량(前凉)、후량(后凉)、남량(南凉)、서량(西凉)、북량(北凉)、

전조(前趙)、후조(后趙)、전진(前秦)、후진(后秦)、서진(西秦)、전연(前燕)、후연(后燕)、남연(南燕)、북연(北燕)、하(夏)、성한

(成漢)을 말한다. 여기에 대국(代國)、염위(?魏)、서연(西燕)、토곡훈(吐谷渾)등도 합세하여 20여국의 혼란시기.

成漢帝國(304-347) -> 파(巴), 저(?)족을 기반으로 하여 이웅(李雄)이 개국하여 뒤에 동진(東晋)에게 멸망.

漢趙帝國(304-329) -> 흉노(匈奴)를 기반으로 유연(劉淵)이 개국하여, 후조(后趙)에게 멸망.
后趙帝國(319-351) -> 흉노의 별종인 갈(?)족을 기반으로 석륵(石勒)이 개국하여, 염위(?魏)에게 멸망.

前凉王國(320-376) -> 한(漢)족을 중심으로 장무(張茂)가 개국한 나라로 뒤에 전진(前秦)에게 멸망.

前燕帝國(337-370) -> 선비(鮮卑)족이 중심이 되어 모용황광(慕容皇光)이 개국한 나라로 역시 전진(前秦)에게 멸망.

?魏帝國(350-352) -> 한(漢)이 중심이 되어 염민(??)이란 자가 개국한 나라로, 전연(前燕)에 의해 멸망됨.

前秦帝國(351-394) -> 저(?)족을 중심으로 부건(符健)이 개국하여, 서진(西秦)에게 멸망됨.

后燕帝國(384-407) -> 선비(鮮卑)족이 중심이 되어 모용수(慕容垂)가 개국한 나라로, 후연(后燕)에게 멸망됨.

西燕帝國(384-394) -> 역시 선비족(鮮卑族) 모용홍(慕容泓)이 개국하여, 후연(后燕)에게 멸망.

后秦帝國(384-431) -> 강(羌)족이 중심이 되어 요장(姚?)이란 자가 개국하여, 진(晋)에게 멸망당함.

西秦王國(385-431) -> 선비족(鮮卑族) 걸복국인(乞伏國仁)이란 자가 개국하여 하(夏)나라에게 멸망됨.

后凉王國(386-403) -> 저(?)족을 중심으로 여광(呂光)이 개국하여, 후진(后秦)에게 멸망됨.

南凉王國(397-414) -> 선비족(鮮卑族)을 중심으로 독발오고(?發烏孤)가 개국하여, 서진(西秦)에게 멸망됨.

北凉王國(397-439) -> 한(漢)족인 단업(段業)에 이어 흉노(匈奴)인 조거몽손(沮渠蒙遜)이 통치했던 나라로, 
북위(北魏)에게 멸망됨.

南燕帝國(398-410) -> 선비족(鮮卑族)인 모용덕(慕容德)이 개국했던 나라로서, 진(晋)에게 멸망됨.

西凉王國(400-421) -> 한족(漢族)인 이고(李暠)가 개국했던 나라로 북량(北凉)에게 멸망당함.

西蜀王國(405-413) -> 한족(漢族)인 초종(??)이 개국했던 나라로 진(晋)에게 멸망됨.

胡夏帝國(407-431) -> 흉노족(匈奴族)인 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웠던 나라로서 토곡혼(吐谷渾)에게 멸망됨.

北燕帝國(407-439) -> 조선족(朝鮮族)인 고운(高雲)이 개국<고구려 광개토 태왕17대 17년(서기 407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어

종족의 은의를 베풀자 북연왕(北燕王) 고운(高雲)은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보답했다하고>, 한족(漢族)인 풍발(馮跋)이

다시 집권했던 나라로 북위(北魏)에게 멸망됨.

위(선비족)-진(漢족) 남북조시대

이 시대는 남쪽에 새 왕조를 세운 동진왕조와 북쪽의 혼란을 수습한 북위(5호16국의 패자 선비족)가 이어지는 시대를 말합니다.

먼저 북조 (소위 말하자면 양쯔강 이북)북조의 군주는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탁발씨(拓跋氏)로서, 군주권강화를 위하여 지배종족인

선비를 모든 군사담당자로 구성하였으며, 호적을 정비하여 인보제(隣保制)와 삼장제(三長制)에 의해서 체제를 지탱하였다.

또한 균전법(均田法)이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며, 부병제(府兵制)도 채용하였다.

이 북조의 군주권 강화를 위하여 실시된 정치기구가 뒤에 수 당(唐) 두 제국의 정치기구로서 완비되었다.

북위(北魏)(선비족(鮮卑族)386-534 ->(내분 분열<동위와 서위로 나누어짐):동위(東魏) 534-550 -> 북제(北齊) -> 수(隋)

서위(西魏)(선비족) 535-557-> 북주(北周) ->수(隋)

남조는, 한족(漢族) 왕조인 송(宋)나라의 문제(文帝)에서 시작되어 제(齊)·양(梁)·진(陳)의 4왕조가 교체하여
나라를 세웠다가,

589년 진이 수(隋)의 문제(文帝)에게 멸망될 때까지를 가리킨다.

남조(漢족)는 (말하자면 양쯔강 이남) 동진(東晉) 317-420 -> 송(宋) 420-479 -> 제(齊 ;혹은 南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9-> 수(隋)

보시는 바와같이 북방민족(선비족)과 漢족(지나족)의 300년 가까운의 中原대륙의 패권 다툼에서 결국은
수(隋)(선비족출신)의 문제

(文帝)양견(楊堅)이 중원대륙을 석건 합니다.(최후의 승자는 북방민족 승리**)

수(隋)문제(文帝)양견(楊堅)(선비족)(581년~618년)

선비족 출신 양씨는 주나라 희성에서 유래했으며 북주(北周)의 신하였다가 자립. 개국자는 양견(楊堅)

文帝 楊堅 (581-604) -> 隋煬帝 楊? (604-618) -> 隋恭帝 楊侑 (617-618) -> 隋泰帝 楊? (618-619)

중원을 통일한 수의 문제 양견이 고조선의 적통국가인 동북아시아의 초강자 고구려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역시 같은 북방민족간의 골육상쟁) AD598년 수 문제 30만 대군 1차 침공(고구려 26대 영양왕) 수의 패전 완전히 개박살남<300년

가까이 전쟁으로 단련된 최정예 병력 30만대군을 박살낸 고구려군의 전력은세계최강 이었슴이 증명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AD612년 수 문제 100만 대군 2차 침공(고구려 27대 영류왕) 그 유명한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세계최대의
전쟁> 역시 수의 패전

(이 패전으로 수는 6년 후에 당나라漢족(지나족)에게 멸망 당한다.

고구려도 역시 전쟁에선 승리 했지만 엄청난 국력소비로 내리막길을 걷는다.)

"결국은 고조선이 뿌리인 두 북방민족간의 전쟁으로 망쪼의 길로 들어 섰다는거다."

당唐(漢족)(618~907)

盛唐문화, 이씨는 5호16국중 한족인 서량의 이고(李暠)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한족이씨는 전욱고양씨의 후예로 영성(?姓)에서

기출됬다고 한다.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룬다.

당나라의 2대 황제인 이세민(李世民)재위 (626~649)은 漢 무제와 같은 방법으로 한민족의 이간질,분열 그작업으로 신라와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각각 원수가 되어 싸우고 있던 고구려,백제,신라의 민족통합<분쟁>쟁탈전에 당나라가 끼어든다.

신라,당나라가 한패를 이루었고 고구려,백제,왜(백제의 속국)이 동맹을 맺어 전쟁을 시작함.

백제왜 연합군과 나당 연합군의 전쟁
31대 의자왕(641-660) 윤충과 품석, 유신과 의직, 성충의 간언, 멸망의 징조, 방어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 계백의 황산벌전투, 나당연합군에 멸망 660년 백제의 도성이 무너진후 663년 백제의 속국 왜에서 원정군이 기벌포(군산)에 온다.

강변에는 백제 최정예 기병대와 왜수군400척,역시 반대편에는 신라 최정예 기병대와 당수군170척 이렇게 마지막 전투가 붙었고

결국은 나당연합군이 승리했다고<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전함570척)격돌 그리고 기병대의 격돌 엄청난 육해전 이였다. 663년 백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고구려와 나당 연합군의 전쟁

27대 영류왕(618-642) 천리장성 축조, 연개소문의 반역

28대 보장왕(642-668) 당태종의 침입, 안시성 양만춘의 선전, 연개소문의 죽음과 그의 아들들의 다툼 나당연합의 공격으로

동북아시아 최강의 고구려는 AD668년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한반도 전쟁의 패자 신라와 당나라의 7년전쟁(670~676)

군이 백제,고구려를 패망 시킨후 드뎌 형식적인 동맹관계를 깨고 최종 승자를 가리기 위해 670년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670년에 신라군이 당나라와 부여 융<의자왕의 아들>(餘隆:웅진도독)의 백제군대가 머무른 82개 성을 공격을
깃점으로,671년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675년 매소성전투 당나라 대군20만명을 격파,676년 기물포해전을 마지막으로 신라가 완전히 당나라(漢족)을 제압한다.

결국은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은 북방기마민족과 漢족(지나족)의 전쟁이다. 최후의 승자는 통일신라 였다.

그리고 고구려(AD668년) 패망 30년후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발해(AD698년)를 건국하여 통일신라와 함께 찬란한 민족사인

남북조시대를 열었다.발해(AD698년~926년) 약228년 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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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최강 고구려와 중원대륙의 패자 당나라를 패전시킨 통일신라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훈족왕 아틸라는 한민족”
[속보, 사회] 2003년 12월 31일 (수) 12:10

칭기즈칸보다 800년 앞서 유럽정복 獨ZDF 다큐서“훈족 한민족과 같은 몽골리안”

이종호박사도 몽골반점 증거제시 한국인 주장”

독일 국영 ZDF가 최근‘아틸라’관련 다큐멘터 리를 방송했다.
칭기즈칸보다 800년 앞서 유럽을 침공한 훈족 왕 아틸라가 한반도의 한민족에서 유래됐을지 모른다는 추론이었다.
아틸라는 과연 한 국인인가.
“아틸라(395~453·재위 434?~453)와 훈족은 흉노족 일파다.
그러나 투르크(돌궐)계라는 기존의 견 해는 틀렸다.

한민족과 같은 몽골리안이다.

” 프랑스 페르피냥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 종호 씨가 저 작‘로마제국의 정복자 아 틸라는 한민족’을 통해 주 장한 학설이다.

이 박사는 훈족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 되고, 그들이 특유의 복강궁(혹은 예맥각궁)이라는 활을 사용했으며, 그들의 머리

골상이 편두(偏頭)라는 사실을 들어 아틸라는 한국인이라고 단언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 후예에게서 몽골반점이 발견되듯 한민족도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

훈족은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썼다.

이탈리아 북부 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 코화에는 훈족이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날리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화살촉은 고구려 무 용총 벽화 중 무사들의 것과 똑같다.
편두는 한민족 계열의 특징이다.
진한(신라)·변한(가야)족 역시 편두였기 때문이다.
이박사는“경상도가야고분에서북방기마민족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신라 법흥왕의 골상이 편두인 것과 마찬가지로 훈족의 골상 역시 편두다.
결국 훈족 은의심의여지가없는한민족”이라고밝혔다.
훈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4세기까지 600여년간 중원을 놓고 중국과 건곤일척했다.
아틸라의 훈족 은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서유럽을 장악했다.

ZDF는 또 다른 다큐멘터리‘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잃어버린 고리’편에서 375년 유럽을 강타,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을

추적했다.

훈족의 서 방 이동로에서 발견한 유물과 가야·신라의 것을 비교 검토한 방송은 한민족을 훈족의 원류로 추정했다.
한민족이 훈족의 주류였 다는 것이다.

아틸라는 칭기즈칸, 알렉산더와 더불어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대왕이다.
훈족은 375년부터 469년 까지 거의 100년간 유럽을 지배했다.
당대 최고문명 국 겸 초강대국 로마와 이란을 복속시켰다.
훈족의 영향권은 사실상 지구 전체였다.
북아프 리카, 영국에서도 훈족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박사는“흉노는 중국보다 3배 큰 제국을 건설했고 아틸라는 고구려뿐 아니라 세계를 지배했던 한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고구려사 왜곡’쯤 은 가소로울 정도다.
우리 민족은 이미 세계를 정복 했었다. 지만 기자(manji@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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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속에 흐르는 匈奴의 피

우리 민족사의 주류는 신라통일을 이룩한 金씨들이다.

즉, 통일대왕인 문무왕, 그의 아버지 태종무열왕, 그의 삼촌인 金庾信을 주축으로 한 신라왕족과 귀족들이다.

朴씨, 昔씨에 이어 김씨 왕조를 연 것은 미추 이사금이고 내물 마립간代에 와서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김씨 왕조에서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무열왕, 문무왕 등이 나와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고 통일을 주도했다.

이 金씨들이야말로 신라통일의 주체세력이고 따라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여 한민족이란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이며 그 뒤

민족문화의 원형이 되는 틀을 굳히게 한 주역이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예술관에 따라 민족문화와 정치의 뼈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신라 김씨 왕족들이야말로 민족사의 창조자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들은 누구인가.

신라 김씨 왕들은 내물 마립간, 실성 마립간식으로 불렸다. 麻立干이란 말은 여러 부족들의 대표자란 뜻인데
유목민족의 칸(징기스칸의 칸)과 같은 語源이다. 이 김씨 왕족의 무덤이 경주 고분이다.

서기 4-6세기에 축조된 이 고분은 적석목곽분이라 불린다. 시신을 목곽안에 넣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 봉토를 입힌 무덤이다.

나중에 목곽이 썩어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준다.

이 적석목곽분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의 주인공이었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적석 목곽분의 전형이다. 이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초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 무덤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고 중국식 물건은 없다.

이 무덤에는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 제품도 많이 있었다.

신라 지배층이 몽골고원-중앙아시아-흑해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한다.

이 적석 목곽분에는 馬具와 무기가 특히 많다. 부장품을 들여다보면 중무장한 騎士가 떠오른다.

김씨왕족은 기마군단의 지휘자였다는 이야기이다. 4세기에 갑자기 경주에 나타난 이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요사이 역사,

고고학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숭실대학교 역사학과 崔秉鉉 교수는 [新羅高墳硏究](一志社)에서 이렇게 썼다.

<신라 적석목곽분을 둘러싼 고고학적, 역사적 상황들을 종합하여 볼 때, 신라 적석목곽분은 결코 내부의
先行墓制가 복합되어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며, 기마문화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시아 목곽분문화의 직접 渡來에 의해 돌발적으로 출현한 것이었고, 그것은 3세기말,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흉노께 기마민족의 한 부족이 3-4세기 중국 대륙의 5호16국 시대 북방기마민족 대이동기 때 한반도로
밀고들어와 경주에서

토착정권을 점령하고 김씨왕조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유목민족의 상징이 金이다.

유목민족은 금제품을 좋아하고 금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본거지였던 알타이 산맥의 그 알타이가 金이란 뜻이다.

이들이 성씨를 金이라고 후에 정했다는 것도 퍽 상징적이다.

경기도 박물관장 李鍾宣 박사는 [古新羅王陵硏究](學硏文化社)에서 이렇게 썼다.

<최근 흉노게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따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다.

흥미롭게도 반도 서북부의 소위 낙랑故土에 그러한 유형의 고분들이 모두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오르도스(지금의 내몽골 지역)

와 연결해서 볼 때 매우 주목할 현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도스 철기문화의 주인공들이 漢의 팽창으로 그 일파가 서쪽으로 밀려가서 헝가리 즉 훈족(흉노)의 나라를 세운 주체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 이동한 다른 일파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로 진출하였고, 일부는 일본열도에까지 상륙하였다고 봐야 당시

시베리아 민족들의 대이동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신라 積石木槨墳의 주인공들은 반도 서북부를 거쳐 東南進한 시베리야계 주민의 후예로서,그들은 중국계가 아닌 시베리아-

오르도스계의 대형 적석목곽분과 철기, 繩蓆文토기, 금세공기술을 그대로 갖고 남하한 것이다>

두 학자들이 말하는 흉노계 기마집단의 신라 유입 경로는 차이가 있으나 신라 김씨 왕족들이 흉노계라고
보는데서는 일치하고 있다.

이 흉노계는 지금의 몽골고원에서 유목민 최초의 대제국(흉노)을 만들어 중국의 漢族과 대결하던 용맹무쌍한
유목민 출신

기마군단이었다.

이들이 漢무제의 공격을 받자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4세기 게르만족을 치면서 서양사에 등장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로마제국의 붕괴를 일으킨 훈족의 출현이다.

3세기말 몽골고원과 중국 북방에 남아 있던 흉노계는 晉의 분열을 이용하여 남진하여 중국을 150년간 대혼란에 빠뜨리고 다섯

胡族이 16개국을 만드는 5호16국 시대를 연출한다.

이런 시기를 전후하여 일단의 흉노계 부족이 경주에 나타나 토착정권을 정복하고 고분을 만들고 우두머리를 마립간으로 칭하면서

주변 부족국가를 흡수하여 신라를 강화해갔다는 것이다.

내물왕, 지증왕, 법흥왕, 진흥황, 진평왕, 무열왕, 문무왕 등 우리의 귀에 익은 삼국통일의 주체세력 계보가 바로 흉노계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흉노계 중 일부는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 고대국가의 지배민족이 되었다는 것이 에가미 교수의 유명한 기마민족국가설이다.

이는 바로 지금의 한민족 피에 흉노족의 피가 主流로서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흉노족이 가진 특성은 모든 유목민족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민, 용맹하며 자유분방하고 親자연적이고 오기가 세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섭게 뭉쳤다가도 그런 지도자가 사라지면 집단도 사라지는 경향이 강하다.

지금 우리의 피 속에 흐르고 있을 그런 흉노계의 특성을 점검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민족에게 알맞는 경영방식은 무엇인가,

왜 신라김씨가 삼국통일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등등의 話頭를 세워볼 만하다.

한민족의 정통주류 세력이 흉노족이라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일이 아닌가.

훈, 흉노, 신라는 유라시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을 이어주는 기마민족의 띠이자 말의 길이다.

말이 가진 기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이뤄진 민족이동과 정복국가의 건설, 그리고 민족적 친연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붙박이 농경민족의 눈으로는 눈부시게 기동하는 기마민족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들다. 흉노족에 대한 연구는 한민족에 대한 연구,

신라통일의 비밀에 대한 탐구, 韓中日 삼국에 대한 연구이자 민족사를 세계사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시각의 일대전환이다.

이는 나와 우리를 보는 시각의 전환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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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훈족이고 훈족은 한민족이다!

훈족과 한민족은 같은 뿌리이다!

전 한국기술원 기계공학과 겸직교수로서 한국 문화 유산의 과학성을 다룬 책을 쓴 적이 있는 이종호씨는
최근호 白山學報에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서기 375년에 홀연히 서유럽에 나타나 게르만족을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으로 로마지역으로 밀어버림으로써 로마 세계를 붕괴시킨

훈족이 신라 가야 종족과 그 뿌리가 같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종호씨는 훈족은 지금 몽골고원에 있던 흉노족이 西進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훈족이 남긴 유물과 가야 신라
지역의 유물을

비교하여 훈족과 가야 신라족의 뿌리가 흉노에 닿는다는 視覺(시각)을 보여준다.

이종호씨가 훈족과 신라 가야족의 연관성을 탐구하게 된 계기는 독일의 ZDF방송의 다큐멘터리가 훈족과 신라 가야족들의 연관성을

맨 첨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독일 방송 프로는 자유베를린 방송사 편집자이자 다큐멘터리 작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 코넬 대학과 베르린 공과대학

교수였던 아이케 슈미트가 훈족을 집중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서기 375년 훈족의 유럽 침공에 의한 게르만 대이동은 로마시대를 마감하고 중세 암흑시대를 연 역사적
대사변이었다.

오늘의 유럽 각국은 게르만족의 여러 종족이 로마지역을 점령하여 세운 나라들을 뿌리로 삼고 있다.

게르만 대이동은 현대 유럽의 모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대사변이 신라 및 가야족(즉 한민족)과 같은 뿌리의 흉노족(훈족)에 의하여

촉발되었다면 한민족을 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가야 신라족이 서쪽으로 가서 훈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한민족과 훈족의 조상이 흉노족으로 불리면서 몽골고원에서

살다가 일족은 서쪽으로 나아가서 훈족이 되고 다른 쪽은 한반도로 들어와 한민족의 뿌리인 신라 가야지배층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흉노족이 중국의 역사에 등장한 뒤 훈족이 서양에 출현하기까지는 약600년이 걸렸다.

이 기간에 몽골고원에서 흉노족으로 살던 유목기마민족의 일부는 한반도로 들어와 가야 신라를 세우고 일부는 서쪽으로 가서

훈족으로 불리면서 게르만족을 서쪽 로마경내로 밀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신라 및 가야족의 선조가 훈족의 선조와 동족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기 전 2세기쯤엔 신라 가야족의 조상들과 훈족의

조상들이 동족으로서 함께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종호씨는 훈족과 가야 신라족의 유사성을 주로 고고학적으로 설명했다.

 

첫째, 서유럽에 지금도 살고 있는 훈족 후예들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

둘째, 훈족이 쓴 예맥각궁이 한반도에서 쓰인 활과 비슷하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偏頭(편두·납작머리)라는 점이다. 三國志 魏志東夷傳에는 辰韓(진한·신라지역) 사람들이 모두 偏頭라는

      기록이 있다.

넷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되는 청동으로 만든 항아리는 북방유목민족의 祭儀용기인데 같은 것이 가야지방에서 발견된다.

다섯째, 훈족은 이 항아리를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1924년 경주 金鈴塚에서 발굴된 기마인물상토기가 항아리 이고 있다.

여섯째, 이 항아리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신라 금관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비슷하다.

이종호씨는 중국의 삼국지 魏志東夷傳과 김부식이 쓴 三國史記가 북방 종족이 신라로 유입한 기록을 더러
남기고 있는 점에도

주의했다.

4세기 무렵부터 신라지역에 거대한 績石木廓墳을 남기면서 등장한 지배민족이 흉노계통의 기마군단일 것이란 說도 인용하고 있다.

요컨대 흉노족들은 중국의 漢제국과 싸우다가 점차 밀리면서 세번 서쪽으로 이동하는데 네번째 이동은 서기
350년경이다.

이 네번째 종족이동의 물결을 탄 흉노족이 먼저 유럽쪽으로 진출해 있던 훈족과 결합하여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 지역으로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흉노족의 일파는 東進을 개시하여 가야나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훈, 흉노, 한민족의 뿌리는 서기 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면 몽골고원 지대를 누비던 기마민족인 흉노와 연결된다는 이야기이다.

크게 보면 흉노의 일파는 서쪽으로 나아가 훈족이 되고 다른 일족은 한반도로 들어와 가야 신라 지역을 차지하여 先住民들을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훈족, 흉노족, 신라 가야인들이 남긴 금관, 항아리, 馬具 등이 거의 같은 모습인 것이 이런 설을 뒷받침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종호씨는 흥미있는 논문에서 이런 논평을 했다.

<훈, 흉노, 한민족의 親緣性을 찾는다는 것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퍼즐을 하나 하나 맞추는 것과 다름없다.

고대사를 다루는 퍼즐을 완벽하게 맞춘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여 새로운 유럽의 질서를 만들게

한 훈족의 지배민족이 한민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한민족은 조그마한 한반도 내에서 外侵(외침)만 받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역할만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민족이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장식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과거사 규명에 도전한다면 보다 많은 새로운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기대한다>

위의 논문이 흥미로운 것은 게르만족 출신인 독일 방송과 흉노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한국인이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고고학자 金秉模 박사는 신라 가야는 흉노계, 고구려 백제는 扶餘계(몽골족)가 지배민족이라고 단정한다.

훈족이 흉노족이라면 당연히 신라 가야족의 뿌리는 흉노 훈족과 이어진다.

다만, 그런 논리를 공개적으로 전개한 사람들이 없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점은 가야를 흡수통합한 뒤 3국 통일을 이룬 신라의 지배층이 『우리는 흉노계통으로서
唐과는 出自가 다르다』

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식과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삼국사기 列傳 金庾信傳과 文武王의 碑文으로 추정되는 글에서도 『우리의 선조는 小昊金天氏』라는 주장이 나온다.

소호김천씨는 귀순한 흉노족에게 漢武帝가 내어준 姓이다. 삼국통일의 元勳인 金庾信과 文武王은

『우리는 漢族과는 다른 북방기마민족 출신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때 漢高祖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너희들의 식민지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자부심과 정체성을 근거로 하여 신라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唐을 상대로 7년 전쟁을 벌여 唐세력을
한반도에서

추방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한민족의 보금자리를 확보했을 것이다.

민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존심과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뿌리인 신라통일의 지배층이 가졌을

흉노족(훈족)과의 연대의식이 연구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신라통일 이전, 특히 6세기 이전의 신라 고분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유물은 나오지 않는다.

북방기마민족계통의 유물이 압도적인 가운데 로마지역으로부터 수입한 유리그릇이나 칼, 구슬장식 등이 많다.

신라 지배층은 분명히 중국과 뿌리가 다른 것이다.

이런 출신의 차이에서 우러나온 차별의식이나正體性이 對唐결전을 통해서 민족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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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silk는 신라금(新羅錦)의 준말
바로 신라의 주 강역이었던 항주에는 지금도 어릴적 우리와 똑같은 누에치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출처:<아랍인의 눈에 비친 신라>
 
여기서 부터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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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후 찬란했던 8세기 통일신라의 수도 서라벌!

 

 

그렇습니다.

고려때의 개경도 추정인구 50만에 외국인 타운이 존재할정도로 국제적인 무역도시였습니다만, 신라 서라벌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8세기 전세계 4대도시는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 서라벌이었습니다.

 

아래는 제가 '우리 고구려 바로알기, 해나라 ( http://haenara.net )' 에 올린 신라 인구 관련글입니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적고있습니다.
보통 1호를 5인으로 잡는데 이대로 17만 8936호를 계산하면 90만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의 인구가 100만 정도임을 감안하면 천년 전 경주에 90만명이 살았다는것이
선뜻 믿기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끝자리 수까지 세세하게 밝혀놓은 기록을 쉽게 무시할수도 없습니다.

신라시대에 과연 인구조사를 저렇게 철저하게 했겠냐는 의문이 들겠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문서에는 당시 인구가 연령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심지어 가축의 숫자까지 상세히 적어놨습니다.
이 시대에 이미 치밀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에보면, 영흥사에 화재가 나 민가 350채가 한꺼번에 불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주택 밀도가 매우 높았다는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신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법령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 옥사조에 진골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는 택지 면적을 규제할만큼 인구가 증가했다는 뜻입니다.

집터 규모를 알 수 있는 동천동 지역을 근거로 당시 경주에 몇명정도가 살 수 있는지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가로 14m, 세로 20m 집터에 집 3채가 있었으니 8000평 규모의 방(坊)에 150채 정도의 집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360방으로 환산하면 약 5만 4000가구, 27만 정도의 인구가 살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당시 경주는 360방보다도 넓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해주는것이 고분입니다. 왕릉이 생활공간 안에 있는것이 신라 수도의 특징입니다.

축조될 당시부터 이미 도시 범위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세기 이후 왕릉은 360방의 범위를 벗어나 외곽에 자리 잡게됩니다.

도시가 그만큼 외곽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경주에는 도시의 경계가 되는 나성이 없는 대신 수도 방비를 위해 쌓은 산성이

있습니다.

경주의 산성은 축조시기에 따라 3단계로 나뉩니다.

가장 바깥쪽의 산성들이 후대에 쌓은것입니다.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1킬로미터쯤 가면 울산시와 경계가 되는 관문성이

나옵니다.

722년에 쌓은 이 성은 경주의 3단계 산성 가운데 하나로, 왜군을 차단하고 신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이 관문성을 경주의 동남쪽 경계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신라 경주는 360방을 훨씬 벗어난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그 범위는 시, 군이

통합된 현재의 경주시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렇게 확대된 도시의 외곽지역에도 사람이 살았다는것을 경주 경마장 부지 발굴현장의 집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둥구멍과 보조 아궁이, 무덤과 집터, 숯을 굽던 가마터 20기가 발굴되었는데 전국에서 발견된 가마터가 40기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집중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정도 된다면 기록에서 정확히 밝혀놓은 90만명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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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한양 인구가 20만인것을 볼 때, 그로부터 1000년 전의 도시 인구가

100만이란것은 정말 대단한 수치인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위의 왕경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는 대단한 계획도시였습니다.

우선 천년 전 신라인이 걸었을 길은 집과 집 사이로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또한 골목마나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라벌은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찾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습니다.

 

집터에서는 아궁이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숯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시대의 풍로가 출토된 바로 미루어 실내에선 온돌 대신 풍로를 놓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숯을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에는 집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30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배수시설도 완벽히 되어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개의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신라의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어있었습니다.

그 도로는 규격별로 나뉘어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 마차의 폭도 고구려의

예를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은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되어있었습니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 계획도시의 역사는 이미 1500년이 넘은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역사' 하면 조선을 떠올리며 그 이전의 시대는 조선보다 못했을거라고 넘겨짚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보다 훨씬 번영했고 자유로웠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제가 갖고있는 옛 건축물들의 사진을 첨부하며 이만 끝내겠습니다. 

 

 

고려시대 개경의 거리입니다.

아시겠지만 고려시대 개경에는 알라딘 궁전같은 이슬람 사원과 아라비아 타운도

존재했습니다.

 바둑 두는 고려 귀족들 입니다.

 

5세기 고구려 안학궁성. 대동강에서 발견된 길이 375m 폭 9m의 초대형 다리를

지나면 판석으로 포장된 도로가 안학궁 남문까지 쭈욱 이어져있었습니다.

 

 

백제 미륵사입니다.

 

신라 황룡사입니다. 저 목탑은 높이가 86m쯤으로 추정되며 현대의 아파트 30층 높이에 달합니다.

이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