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우리 역사의 아쉬운 사건

설레임의 하루 2009. 3. 19. 01:12
*출처:다음블로그-만주몽골조선땅임님

 

 

 

 

1.태조 이성계의 명나라 정벌계획 무산

우리가 수봉(受封)을 하기 전에는 명 나라 천자가 거의 베개를 편히 베고 눕지를 못하다가, 우리가 봉공(封貢)한 뒤부터 명 나라

말까지는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다.

 우재(迂齋)의 글조선의 학자 우재도 주원장이 태조이성계가 두려워 잠을 편히 못잤다고 한다.

명사기록에는 고려왕 이성계가 20만 대군으로 침공하면 막을 도리가 없으니 대비책을 세우라고 지시하고 짓던 궁궐마저 취소한다. 

태조는 무려 40만이나 되는 대군을 양성하여 명나라침공을 준비했는데 침공직전 산둥에 보낸 수백명의 조선첩자가 명나라에

발각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때 태조는 오리발을 내밀며 침공계획이 없다고 했다.

주원장은 이때부터 걱정으로 밤을 지샜을 것이다.

태조의 명정벌계획은 미리 발각되어 조금 뒤로 미뤄진것같다.

그런데 태조가 무리하다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

태조의 아들들은 서로 제왕이 되려고 살육전을 벌였으며 동생을 죽이고 형을 내쫓은 태종이방원이 승자가 된다.

이에 격분한 태조는 만주로 돌아가 여진과 타타르군대를 이끌고 아들과 내전을 벌인다.

주원장을 잡기위해 조련한 군대가 내전에 쓰였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2.태종이방원과 영락제의 대결 무산

영락제는 명나라 최고의 황제로 그의 시대가 한족의 최대전성기이다.

영락제가 태종이방원에게 편지하길 여진의 땅을 내놓으라 했다.

태종은 실록에 영락제가 조선을 공격할것 같으면 차라리 선제공격하겠다고 큰소리쳤다.

태종은 영락제의 요구에 상당히 분개했다.

신하들도 야인과 왜인까지 동원해 명과의 일전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태종은 여진땅은 선조의 무덤이 있으니 절대 줄수없다고 버텼다.

태종과 영락제는 서로 일촉즉발전까지 갔다.

태종의 30만 대군과 영락제의 60만대군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을때 명나라에서 조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요구를 철회했다.

 

 

3.숙종의 청나라 원병거부

숙종시대에 청나라는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삼번은 오삼계가 중심이된 한족왕들의 자치구역이다.

이들은 강희제의 삼번철폐에 대항해 난을 일으켰는데 조선에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호응할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강희제또한 조선에 전쟁물자와 군대를 요구했다. 조선내부는 갈등에 휩싸였다.

여진족과 함꼐 한족을 통치하자는 의견과 삼전도의 굴욕을 만회하자는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숙종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실제로 요양과 심양주민들은 조선군이 곧 침공한다는 소문이 돌아 피난을 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밀려 심양으로 천도를 계획했는데 조선군이 오히려 심양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소문에 더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숙종은 태조이래의 유시인 애민정신에 입각하여 생각했는지 대군을 일으키지 않았다.

만일 10만대군을 보내 청을 도왔다면 조선은 청과 대등한 관계를 주문할수 있었는데 숙종은 조선백성의 희생을 원치 않았던 것같다.

 

 

4.태조의 위화도 회군

원나라 말기 고려인 황후의 아들인 원나라 마지막황제는 어머니의 나라에 원병을 요구한다.

40만 원나라 군사중 20만을 지휘하던 나하추가 명에 투항하여 이제 명이 원보다 더 군사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최영은 당시 심양에 주둔중이던 태조이성계에게 10만 정예부대를 이끌고 원을 도와 주원장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태조는 여진과 타타르인까지 함꼐 요하를 건너 위화도에 주둔중이었다.

태조는 이 전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주원장의 60만 대군과 태조가 싸우게 된다면 아마도 양쪽은 거의 재기불능상태에 빠질것이다.

태조의 주력부대인 여진과 타타르인또한 수만명이 죽을것이고 태조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될 것이다.

반면 고려군부를 장악한 최영은 역심을 품은 태조를 쉽게 제거할수 있을것이다.

태조가 만일 최영에게 함꼐 주원장을 토벌하자고 건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최영은 고려 전군을 이끌고 주원장과 대결했어야 했다.

고작 10만 군사만 주고  토벌하라고 하니 태조의 세력약화를 노린 계획임을 태조가 알아차린 것이다.

최영과 이성계가 같이 20만대군을 이끌고 원나라군사20만과 함꼐 주원장의 근거지를 공격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주원장은 양자강을 넘지 못하고 고려와 원은 중원을 양분했을 것이고 태조는 최영이 늙어서 죽길 기다린 후 전권을 잡고 조선을

건국했을 것이다.

 

 

5.고구려의 멸망

배신자 천남생은 한때나마 자신이 다스렸던 조국 고구려를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그의 머리에 있던 고구려군의 성배치도와 군사배치도 작전계획덕분에 당나라는 꿈에 그리던 고구려 멸망을 이뤄냈다. 

만일 천남생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신라군20만과 당나라군 60만이 제아무리 공격해도 고구려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많은 이들이 몽골로 돌궐로 당으로 신라로 넘어갔다.

고구려후국 발해는  비록 고구려의 땅을 많이 수복했지만 인구가 고구려에 비해 1/3수준으로 줄었다. 

비록 발해전성기에 고구려인구의 상당부분을 회복했지만  고구려보다 그 위세가 많이 축소되었다.

 

6.발해황제의 거란동맹제의 거부

야율아보기는 중원을 향해 진군하기전 발해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제의했다.

발해또한 해족과 실위족 거란족 발해족은 모두 같은 민족이니 평화롭게 지낼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부족국가이던 거란이 발해황제국에 동등한 동맹관계를 요구하는 것을 자존심상하는 일로 여긴 발해는 거란과 결국 전쟁을

하게되고 어이없게 패배하고 만다. 

거란은 발해를 함락하고 서쪽으로 아랄해까지 남으로 양자강까지  사실상 중국영토보다 더 넓은 대제국을 건설한다.

 

7.조선의 인조반정

광해군에게 핍박받았던 무능한 인조는 광해군의 실리외교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정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다.

이로인해 후금은 조선을 침공하고 인조는 패배하고 만다.

요하서쪽 4군 1천리를 넘겨주고 만주서북부도 넘겨주었다.

요동반도서해안지방까지 청에 빼앗기고 만다. 인조의 무능함으로 조선은 그땅이 절반으로 줄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누르하치가 광해군에게 같이 명나라를 치자고 편지하자 광해군은 내심 그에 동조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명을 돕는척한다.

아직 왜란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광해군은 백성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동생 영창대군만 안죽였어도 반정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8.백제의 멸망

의자왕말기에 일어난 태자교체는 결국 내란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여효가 부여융을 꺽고 태자가 된것이다. 형제간의 분쟁으로 제국은 약화되었고 이를 틈타 나당연합군은 공격해왔다.

이들은 교묘하게 고구려를 공격하는것처럼 방향을 잡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대릉하 남부의 백제수도로 밀려든다.

의자왕은 이들이 고구려땅 요하로 진격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의자왕은 방어가 힘든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에서 산둥의 한반도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식진장군이 배반함으로써 의자왕이 사로잡혀 백제가 멸망하니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해양대제국 백제가 어이없게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