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블로그-만주몽골조선땅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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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殷)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동방으로 오니, 주(周)의 천자(天子)가 그대로 그곳에 봉(封)하였다. 기자는 성이 자(子)이고 이름이 서여(胥餘)이며, 은 주(紂 주왕)의 친척이다. 기(箕)에 봉하여지고 자작(子爵)을 받았으므로 ‘기자’라고 부른다. 《사기(史記)》주(註)에 “기는 국명이고 자는 작호이다.” 기자가 주에 의하여 풀려 난 것을 부끄러이 여겨 조선으로 달아나니, 무왕이 듣고서 조선을 그에게 봉하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사기>> 일통지(一統志)》에 “서화(西華)는 옛 기 땅이며, 개봉부성(開封府城 : 개봉부는 하남성(河南省)에 있다) 서쪽 90리에 있다. 예전에 성사(聖師 : 자기를 가리킨다)가 기를 식읍(食邑)으로 하였으므로 그를 기자라고 부르며, 지금 읍내(邑內)에 기자대(箕子臺)가 있다.” 하였다
조선땅으로 온 기자의 위치가 어디인가 일통지에 기록하길 하남성 개봉부 서쪽 90리라고 한다. 즉 그곳이 원래 조선땅인데 기자가 와서 그곳을 분봉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황하남쪽에 조선땅이 있었으며 그곳은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의 영역이기도 했는데 이곳이 원래 조선땅이라 하니 은나라가 고조선의 제후국이 맞는 것이다. 주나라가 기자의 나라와 서로 군신관계가 아님은 여러기록에도 보인다. 기자가 평양으로 오기도 하고 주나라에 손님으로 초빙되어 가기도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고대기록에 엿보이는데 이는 기자가 고조선의 수도인 평양에 단군을 만나러 가거나 주나라를 국빈자격으로 방문했다고 보는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평양은 북한의 평양시가 아니라 중국역사지도에 요순 시대의 평양은 황하동쪽지금의 산서성평양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물론 한자는 약간 다르지만 음이 같으니 분명 고조선의 평양은 산서성 평양일것이다. 처음에는 동방에 견이(畎夷)ㆍ방이(方夷)ㆍ간이(干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 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라는 9종(種)의 이(夷)가 있었는데 동사강목중에서 걸(桀 17대)이 음란하매 견이가 빈(邠 지금의 섬서성(峽西省) 순읍현(栒邑縣))ㆍ기(岐 지금의 섬서성 기산현(岐山縣)) 사이 일대에 들어와 살았고, 걸이 포학하여지매 모든 이가 많이 중국 안으로 침입하였다. <동사강목중에서>
동이족의 여러 갈래중 견이라는 부족이 지금의 서안일대에 살았음을 기록을 통해 알수 있다. 즉 동이족이 황하동쪽에만 산것이 아니라 서안일대에도 많이 살았다. 동이족이 누구의 통치를 받았겠는가 바로 고조선의 임금인 단군이다.
무을(武乙 27대) 때에 동이가 차츰차츰 번성하여 드디어 나뉘어서 회대(淮岱 회수(淮水)와 대산(岱山 : 태산일대)로 옮겨 와 점점 중국에 살게 되었는데, 이른바 서이(徐夷)가 이것이다.
동사강목중에서 동이족중 일부는 회수와 태산일대에도 살았다고 하니 동이족이 거주구역이 서안일대에서 황하북쪽 전부와 황하동남쪽 산둥과 강소일대에도 있었음을 알수있다. 실제로 산둥과 강소에서는 동이족의 특징인 고인돌과 편두가 발견된다.
예(濊)의 군(君) 남려(南閭)가 한(漢)에 항복하니, 한이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다. 예도 조선의 땅이다. 한이 팽오(彭吳)를 시켜 길을 열어 예맥(濊貊)ㆍ조선(朝鮮)에 통하게 하였는데, 예의 군 남려가 남녀 28만 구(口)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內屬)하니, 무제(武帝)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
동사강목중에서 한나라가 조선땅 일부를 차지하고 창해군을 두었는데 이 곳을 요동에 속한다고 했다. 滄 海 之 郡 則 燕 齊 之 閒 靡 然 發 動 [史記/書/卷三十 平準書第八] 창해군은 연과 제의 사이에 있다.(사기) 창해군은 연과제의 사이에 있다 즉 한나라가 설치한 창해군은 산둥의 서북에 있다. 아마도 황하 동쪽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요동이 창해군이라 하니 요동역시 한나라때는 황하동쪽일대를 말하는 것임을 알수 있다. 즉 조선의 옛땅은 크게 황하남쪽의 개봉부와 태산일대와 강소성까지 모두 포함했는데 한나라때 조선영토가 줄었다고 봐야한다. 단군이 해부루(解夫婁)에게 위(位)를 전하였는데, 그가 북부여(北扶餘)를 세웠다. 중국의 우(禹) 임금이 수토(水土)를 평정하고 제후들을 도산(塗山)에서 회합할 때 해부루가 도산에 가서 우 임금에게 조회하였다. 기언 관서지중에서
중국의 요임금은 적인 즉 북적출신이고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이는 기록에 나와있는것이다. 순임을 계승한 하나라 우임금시대에 북부여가 건국되었다고 한다. 즉 부여의 건국시기는 중국 하나라때와 동일하다. 즉 황하남쪽에 한족의 하나라가 있었고 북쪽은 고조선인대 고조선왕인 단군이 아들에게 만주지방을 떼어주고 부여를 세우게 했다는 것이다. 즉 고조선이 여러 제후국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시점이 중국하나라초기라는 것이다.
부여국(扶餘國)은 현도(玄菟) 북쪽 천리에 있었다. 그 선대는 알 수 없는데, 혹 “단군의 후손이 북쪽으로 옮겨 부여국이라 하고, 해(解)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처음에 그 왕 해모수(解慕漱)가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일컬었고, 또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며, 아들 부루(夫婁)를 낳았다. 부루가 늙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매 -동사강목중에서
우리는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만주 태백산에 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알았는데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단군은 원래 남쪽에 있다가 북쪽으로 그 아들을 보내서 새로 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즉 고조선의 원래 도읍지는 만주가 아니라 중원지방이다. 즉 만주의 태백산이 원래 단군이 건국한 태백산이 아니며 그 후손이 태백산과 비슷한 산을 골라 태백산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그럼 최초의 단군이 나라를 세운 태백산은 어디인가? 최근 남성의 Y염색체 조사결과 우리민족의 주류는 알타이산에서 몽골을 통해 만주로 온것이 아니라 티벳으로 내려갔다가 동북으로 방향을 틀어 서안과 황하일대를 거쳐 만주로 온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알타이산맥에서 티벳으로 내려간뒤 그곳의 땅이 척박하여 다시 동북으로 이동하여 서안일대에서 최초의 나라를 세운후 계속 동북으로 이동하여 황하동쪽에 평양을 세운뒤 단군의 후손이 만주로 가서 부여를 세운것이다.
실제로 서안에는 태백산이란 지명이 있다. 백산이란 지명은 우리민족 고유의 지명이다. 한족의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서안일대는 동이족이 살았다고 조선시대의 학자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 중국학계도 한자를 최초로 썼으며 황하남쪽에 세운 최초의 국가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것 임을 인정한다. 또한 주나라역시 기록에 서이가 세웠다고 하니 역시 동이족의 갈래가 세운 것이며 진나라의 경우 시황제의 무덤에서 발견된병사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눈이 작고 얼굴이 길다.
즉 모두 동이족이다. 아시아 최초의 국가가 바로 고조선이며 동이족이 아시아의 중심민족이었음을 알수있다. 한족들은 기록을 조작하여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요임금때라고 하였지만 단군의 후손이 부여를 건국한때가 바로 요순임금 바로 다음시기이니 고조선이 요순임금보다 훨씬 오래전에 건국된 최초의 문명국가임을 알수 있다. 아시아 최초의 문명국가 고조선은 서안일대를 최초의 수도로 하여 팽창하여 황하일대를 모두 장악하고 만주와 한반도까지 영역을 넓혔으니 그 땅의 크기가 금나라와 비슷하다. 지나들의 동북공정이 완전히 허구임을 이제 알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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