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고구려 고려 조선초의 압록수는 요하이다.

설레임의 하루 2009. 3. 19. 01:33
*출처:블로그-만주몽골조선땅임님

 

 

 

 

 

고려 때에 와서 패서(浿西)로 국경을 삼았는데 지금의 평안도이다.
서경은 3주 11부에 28군현이며 너비는 1천 리였다.

그 별은 기성(箕星)의 분야(分野)로써 석목(析木)의 자리이다.

서쪽으로는 연(燕)ㆍ제(齊)의 바다에 닿았고 동쪽으로는 여연(閭延 평북 구성(龜城))과 우예(虞芮 평북 강계(江界))와 옛 숙신의 땅에

이어졌으며 북쪽으로는 청하에 이르렀고, 청하 밖은 옛 현도와 부여이며 또 그 서쪽은 옛 요동 땅이다.

 

기언 관서지중에서

조선시대 쓰여진 기언에서 보듯이 고려의 땅을 서쪽으로 연제의 바다 즉 발해만으로 보고 동쪽은 숙신의 땅.

즉 흑수말갈이있는 아무르강북쪽까지북쪽으로는  부여와 현도라고 했다.

부여가 부여성임을 안다면 고려땅이 만주 남부였음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에 김부식은 현도를 요양의 서쪽이라 했다.

즉 고려는 조선시대사람들이 알기로 발해만일대에서  부여성과 아무르강일대의 남쪽에 위치한 큰 나라였다.

여기서 청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다른 기록을 찾아보자

 

《고기(古記)》에 ‘부여성(扶餘城) 북쪽에 청하(靑河)가 있는데 그 하백(何伯)의 딸이 유화(柳花)이다 

부여성 즉 만주의 한가운데에 청하가 있다고 했다. 즉 고려가 만주의 절반정도는 차지했다는 증거이다.

 

 

고구려기에는,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해모수(解慕漱)가 나를 웅심산(熊心山) 밑 압록강 가의 집 속으로 유인하여 간음하였다.’고

하였다

 

또다른 기록에 압록강근처가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살던  곳이다.

그렇다면 청하와 압록강은 그 근처이고 부여성근처라는 것이 밝혀진다. 

 

통전》에는,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鴨綠水)라고도 한다. 그 수원이 동북말갈(東北靺鞨)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 머리 빛깔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과 거리가 5백 리이며,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지나고 또 서쪽으로 한 강과 합하니 곧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크므로 특히 천참(天塹)을 삼는데, 평양 서북쪽 4백 50리, 요수(遼水) 동남쪽 4백 80리에 있다

 

당나라때 쓰여진 통전에 고구려에서 가장큰 강은 압록수라고 했다.

제아무리 매국 국사학계가 난리를 쳐도 고구려에서 제일 큰강은  요하가 아닐까 북한 압록강보다 요하가 훨씬 크다.

그럼 요수는 어디인가 송나라때 제작된 거란지리도에 요수가 난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압록수가 북한 압록강이 아니라 부여성근처에 있는 요하라는 것을 알 수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압록강은 일명 청하이다.”하였고, 《여지승람》에도 그러하였으니

 

고려사지리지에 압록강이 청하라고 했으니 청하가 부여성근처에 있고 고려의 압록강역시 요하임을  알 수 있다.

 

성경지》에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옛 부여(扶餘) 지경에 청하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요하(遼河)에 들어간다.”

이제야 실마리가 모두 풀린다. 청하는 요하의 한지류이다.

청나라때 쓰여진 책에 분명히 요하의 한지류가 청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하를 달리부른 마자수 압록수 청하는 모두 요하이며 요하의 여러지류가 시대별로 장소별로 여러이름으로 불려진 것뿐이다.

 

삼국유사》에는,

“요수(遼水)는 일명 압록강인데,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요수는 압록강이라 불렸으며 일명 마자수라고도 불렸다.

북쪽지류중에 청하가 있다. 청하는 부여성근처이다. 그

렇다면 우리민족의 영역은 고구려 고려시대의 실제요수인 난하근처로 이동시켜야 한다.

조선또한 고구려 고려가 압록수라 부르던 요하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압록강은 의주(義州) 서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청하(靑河), 또는 용만(龍灣)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지리지 

 

조선의 압록강역시 청하혹은 용만이라 불렸다고 한다. 

 

패수 서쪽은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하였으며 특출한 인물이 많았다.
용만(龍灣 의주)과 안삭(安朔 삭녕(朔寧))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며 물화(物貨)가 많이 유통되는
곳이기도 하며,국경이 우공(禹貢)

기북(冀北)의 땅에 닿았으므로 그곳 백성들의 성격이 질박하고 성실하여 대국의 기풍이 있다. 기언관서지중에서

 

용만이 의주를 달리부르는 말임을 알수 있다.

즉 요하지류중에 부여성근처는 청하로 불리웠고 하류의 의주근처는 용만이라 불리웠다는 것이다.

조선은 삭주와 소삭주를 두었는데 삭주는 요하(압록수)의 서북을 말함이고 소삭주는 북한 압록강서북을 말함이다.

그러니 삭녕즉 삭주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 한것이다.

조선의 국경은 우공기북의 땅에 닿았다고 하는데 기북은 기주 북쪽을 뜻하며 현재의 베이징일대를 말함이다.

즉 조선땅은  베이징 근처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