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백제 기원과 온조 건국지는 어디인가?
*출처: 다음카페-성훈칼럼 1311
(1부) 백제의 기원과 사서로 본 위례성의 위치
(2부) 산동성 곡부의 제왕성은 백제의 왕성인가?
위대한 제국 백제를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 가두어 놓은 식민사학계와 가지마 노보루를 고발한다.
우리는 백제라는 국호는 건국 시조 온조대왕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최초에는 십제(十濟)라는 국호였다가 형인 비류가 죽고 그의 땅과 백성들이 귀의하자 국호를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약자로 백제로
고쳤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백가(百家)가 바다(海)를 건너왔다(濟)."라고 해석을 하여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백가(百家)가 제(濟水, 강 이름)와 해<海, 산동성 동남쪽의 지명)>에 있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 이유는 본시 백제는 래이(萊夷)였고 마한(馬韓)의 종족이며, 래이와 마한은 지금의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인근에 걸쳐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라는 직위가 가능하며 산서성의 요서와 대방군에 관한 설명도 가능하다.”고 백가제해(百家濟海)를
설명한다.
<한단고기>와 <사기>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기원
여하튼 백제라는 단어가 처음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에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遼) 중에 12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년.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이하생략)”
여기서 우(虞)라 함은 3황 5제의 하나인 순임금을 말함이고, 요(遼)라 함은 산서성 태행산맥 내에 있는 요(遼)라는 지명으로 예로부터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그 일대에 12개의 성을 쌓았는데 백제와 관련된 낯익은 지명들인 한성.대방.백제 등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가 백가제해의 준말이 아니라 지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백제도 고구려처럼 지명을 가져와 국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첨언을 하나 하자면,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에 있는 요수가 중국에 의해 점차 동으로 옮겨진다.
즉 동북공정은 수천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최초 요수(遼水)는 황하나 요라는 지방 근처를 흐르는 그 지류였으나, 그것이 하북성 난하로 옮겨가고, 요나라가 들어서서는 현
요하가 요수가 된다. 현 요하와 옛 요동.요서의 중심이 되는 산서성 요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대한민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요동하면 현 요하 동쪽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구려의 안시.요동성이 현 요하 주변이 되고 평양이 대동강 평양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사대주의 매국식민사학계의 엉터리 이론을 국가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아직도 우리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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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44세 구물 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고 3한을 3조선(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꿔 불렀고, 이 중 진조선은 천왕이
직접 다스린다.
그 중 기자의 후손이 6대에 걸쳐 번조선의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은 연나라 출신 정치 망명객 위만에게 패해 왕위를 빼앗긴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해모수의 북부여와 최씨 낙랑국으로 발전한다.
기준은 해대(海岱)의 해(海) 지방으로 남하하여 옛 한나라 땅 아니 옛날에 기자가 살았던 하남성 서화 안휘성 몽성 지역에서
한(삼한)의 왕이 되었는데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유.연.제.노.오.월 지역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50여국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이중 비미국과 구노국은 왜(倭)로 발전되고, 사로(泗盧)-->
사로(斯盧)-->신라(新羅)로 되고, 백제(伯濟)-->백제(百濟)로 발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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泗는 泗水 지역으로 장보고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고, 海 지방은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이다.
참고로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흐르는 회수(淮水)라는 강이름은 기준의 준(準)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민족사학자 오재성선생은 설명한다.
<삼국지>에 회당작준 견전세국전주(淮當作準 見前歲國傳注)라는 주가 있어 회수의 기원이 기준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굳히기 위해 북부여와
낙랑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기자조선의 기준은 위만조선에게 망해 대동강 평양에서 바다를 통해 남하하여 한반도에 삼한을 세웠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는 현 북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든 가짜 역사를 아직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놓고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할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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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인 온조의 건국지는?
백제의 건국에 대해 여러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한단고기>에는 백제국본기가 따로 되어있지 않고 백제에 대한 내용이 <고구려국본기>에 일부 나온다.
(인용)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경인년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도망하여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서 경지를 넓히다 보니 큰 부자가 되었다.
먼 데 사는 사람들까지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南至帶水)까지 이르고, 동으로 빈.대해(東濱大海)까지 이르고 반천리(半千里, 오백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을 시켜 고주몽 임금에게 글을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고 칭찬하여 소서노에게 어하라(於瑕羅)라는 이름을 내렸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로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이어지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슷하고,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고 칭하는 것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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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 문장이 <한단고기> 번역본마다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남지대수(南至帶水)가 다른 본에는 북(北)지대수로 되어있고, 동빈대해(東濱大海)가 다른 본에는 서(西)빈대해로
되어있다. 경인(庚寅)년 3월은 다른 본에는 기묘(己卯)년으로 되어있다.
즉 동.서.남.북을 고의로 바꾸어 위치비정을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조작되어 있다고 민족사학자 신완순선생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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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남지대수/동빈대해 내용은 이유립선생께서 소장한 진본 영인본 <정본 한단고기> 내용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내용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유립선생이 쓰신 대배달민족사(大倍達民族史)라는 책과 대조해보니 남지대수/동빈대해가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서의 지리지에서 동.서와 남.북을 반대로 조작하면 그 나라의 강역이 전혀 달라진다. 그럼 남지대수/동빈대해를 북지대수/
서빈대해로 조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건 <한단고기>를 일본에서 최초 출판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로 보인다.
그럼 왜 일본은 백제 건국지의 방위를 반대로 하고 년도까지 고쳐야 했을까?
그 의문의 해답은 다음 연재인 “백제의 분국인 왜의 위치는 어디인가?”에서 밝혀진다.
이번엔 지면상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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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이 기록은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의 기록인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양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는 기록과 같다.
해서 위의 가지마노보루의 북지대수/서빈대해는 분명한 조작임이 여기서 밝혀진다.
참고로 而瀛濱海之陽의 陽은 볕, 밝을, 거짓, 봄양으로 풀이하는데, 시경에 의하면 "在南山之陽"이나 "山南水北"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즉 산을 기준으로 할 때는 따뜻한 햇빛이 드는 남쪽을 의미하고, 물을 기준으로 할 때는 햇빛이 먼저 드는 북쪽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주몽의 곁을 떠난 소서노는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어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
태자가 된 비류가 즉위하자 온조가 떠나 새 나라를 세운다. 온조가 처음 이른 곳이 미추골이고, 그 다음에 이른 곳이 한산의 부아악이다.
그리고 뒤에 비류가 죽으니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귀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몽의 부인이며 북부여 6세 고무서단군의 딸인 소서노는 어하라를 세운 초대 여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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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최초 건국지
고주몽에게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열 사람의 신하와 함께 남으로 떠났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을 듣고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10명의 신하가 간하는 말은 “이 하남(河南)의 땅은 北으로 한수를 띠고 東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였으며 南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西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보기 어려운 천험 (天險)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겠습니다.”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이다.
(참고로 대(帶)자는 ‘띠를 두르다’의 뜻인데, 왜 하필 이 글자를 썼는지? 한단고기의 대수(帶水)와 혼돈된다.)
비류는 미추홀이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는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고 고 기록되어 있다.
또는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소서노)를 모시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한다며 <한단고기>와 비슷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미추홀을 식민사학계는 인천으로 비정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이론이며, 민족사학계는 천진 근처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패수(浿水)는 북경과 천진을 잇는 강이고, 미추홀은 고구려와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단고기>에서는 패수를 북경 근처를 흐르는 현 조하(潮河)로 말하고 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해모수편에 보면 “기해 38년 연나라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의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己亥38年 燕盧綰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 浿水今潮河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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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에서 발간한 <한단고기>에는 패수가 조하가 아니라 현 하북성 동부 난하로 적혀 있다.
가지마 노보루는 참으로 나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왜 우리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일본인이라 그의 조상인 왜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북경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유적이 가득한 곳이며, 소서노 일행이 건넌 패수가 조하(潮河)이기 때문에 미추홀은 천진
부근인 것이다. 실제로 천진 부근에는 동양 최대의 염전이 있다.
그래서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 없어서 비류가 잘못을 뉘우친 것이다.
역사의 스토리 전개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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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서노 여왕이 건넜다는 대수(帶水)는 어디인가?
대수는 그 한자로 보아 대방(帶方)의 땅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대방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하북성 석문(石門 현 석가장)과 접하고 있는 대방이 확실하다.
그 대방의 땅을 흐르는 강이 있으면 필시 대수임이 틀림없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면 대방 지역을 흐르는 큰 강은 없다.
작은 강은 있다. 그렇다면 그 작은 강을 대수라 했을까? (대수가 어떤 강인지는 다음 연재에 언급한다.)
여하튼 이 위례성의 위치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분명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이 현 서울 한강 남쪽이라고 한국의 매국식민사학계는 말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10명도 몰랐던 지명인 위례성이 어떻게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한반도 한강 이남에 있었으면 고려시대 사람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모른다는 350여개의 지명은 다 중국 대륙에 있는 지명인 것이다.
주변의 낙랑/말갈/대방으로 본 위례성의 위치 (중략)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한 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하략)”라고 말한다. (소서노의 죽은 나이 61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고구려의 건국년도와 함께 언급할 예정입니다.) 패하(浿河), 남으로 웅천(熊川),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을 한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하 편의상 온조대왕을 존칭을 생략하고 온조라 하니 이해바랍니다.)
참고로 위 낙랑은 최씨의 낙랑국(한반도+만주)이 아니라 한사군 낙랑으로 보아야 한다.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고, 북쪽엔 말갈이 있었다고 온조는 말하고 있다. 이 낙랑군의 위치를 밝히면 백제의 위치가 저절로 밝혀진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한다.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으니 백제는 그 잘난 후손들 때문에 황해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그리고 백제와 낙랑의 기록을 보면 고이왕 13년(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니 백제 고이왕이 낙랑을 습격 한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군의 위치사진을 보면 이 기록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 서부에 있었다면 어떻게 백제가 낙랑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즉. 낙랑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대방은 어디인가? 대방은 백제 패망 후 당과 신라의 전투에서 보듯이 하북성 남부 석문(石門: 현 石家庄)과 접한 곳이다. 9대 책계왕의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대방은 우리와 장인 사위의 관계이니 그 청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즉 대방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황해도 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에 따르면 그 곳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가? 도대체 말갈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온조왕 2년 왕이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있고 (생략) 막고 지킬 계획을 마련하라”라고 말한다. 그 후로도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그래서 온조왕이 말갈을 피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5대 초고왕 49년(214년) 북부(北部)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천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석문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방과 접해 있는 현 하북성 남쪽에 있는 성도(省都) 석가장(石家庄)인 것이다. 이곳은 또 대방과 접해있는 곳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신라와 당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보인다. 마한으로 본 백제의 둘째 도읍지 “왕이 당초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들여 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00리 땅을 갈라주어 안정케 하였소. (이하생략)”라고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3년 후인 온조 27년 마한이 결국 백제에 복속된다. 이로서 마한은 백제 남쪽 경계인 웅천의 서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삼한)의 왕이 된다는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삼한의 하나가 마한이다. 마한은 한수 남쪽에 백제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이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 ‘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 ‘가다’라는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 “Let's go'의 뜻이다. 한문 실력이 없는(?) 식민사학계는 海자만 보이면 전부 바다로만 해석해 전혀 엉뚱한 역사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역사를 도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식민사학계는 이곳을 서울로 비정하고는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보고, 북쪽 패하를 예성강으로, 남쪽 웅천을 안성으로, 동쪽 주양을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백제를 한반도 서부로 비정하는 결정적 근거로 백제의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본 것이다. 대해가 황해인지는 잠시 후에 한꺼번에 알아보기로 하겠다. 위례성은 북대한수(北帶漢水)이니 분명 한수의 남쪽이다. 그리고 온조는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고는 그리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온조는 한수의 남쪽에서 왜 굳이 한수의 남쪽을 순시했다고 말했을까? 두 기록 중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면 아무래도 북대한수(北帶漢水)가 수상하다.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南至帶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도읍지가 더 남쪽이라는 근거는 북으로 말갈이 침략하니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야겠다고 온조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았다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 즉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진 그 중간의 큰 섬과 같은 곳에 백제가 위치해야 <삼국사기> 의 기록이 맞는 것이다. 굳이 여의도로 표현을 하자면 한강 남쪽의 여의도에서 한강 남쪽인 영등포로 도읍을 옮겼고, 그런 여의도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그 너머에 낙랑군이 있어야 한다. 즉 섬처럼 보이면서 여의도 같은 작은 섬이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육지여야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한수는 서울의 한강이다. 그런데 한강은 강줄기가 둘로 갈라지지 않아 이 조건에 안 맞고, 동쪽 끝은 주양 (東極走壤)으로 비정한 춘천 동북쪽에 낙랑군이 있어야 하는데 낙랑군은 대동강 평양으로 정북쪽에 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러므로 식민사학계의 백제 도읍지 비정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쪽을 한성이라 했으면 이 조건에 일단은 맞는다. 그러나 양수리도 낙랑군이 춘천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북쪽인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했으므로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상황에 따라 절대로 둘로 갈라질 수가 없다. 그러니 “2,000년 전 백제 때 한강 하류는 두 줄기 이었다”라고 우길 수도 없다. 결국 여러 조건으로 보아 서울은 백제의 도읍지가 아닌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백제는 위례성-->한성(?)-->한산-->웅진-->사비로 천도를 했다. 웅진과 사비에 대해서는 백제 패망 전쟁 기록을 통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밝혔다. 이번에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과 한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백제 도읍지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위례성의 조건인 북대한수(北帶漢水)는 황하(黃河), 동거고악(東據高岳)은 태산(泰山), 남망옥택(南望沃澤)은 평야지대,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는 대야택(大野澤: 독산호)로 보면 조건이 딱 맞아 들어간다. 그리고 한수가 둘로 갈라지기만 하면 된다. 바다처럼 보인다. 120Km이면 충남의 해안선 길이보다 길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오면 호수의 길이와 폭은 더욱 더 커진다. 독산호 바로 밑에 미산호라는 큰 호수가 또 있다. 이 두 호수를 합치면 이곳이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랴!
北海를 발해(渤海), 東海를 황해(黃海), 南海를 산동성 남쪽 청도/연운항 앞바다, 西海를 독산호(獨山湖)라고 했다. 백제의 기록은 백제의 위치인 산동성을 중심으로 쓴 것이지 중국 대륙 전체를 놓고 쓴 것이 아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라 고맙기는 했다. 그렇지 않다. 각자 나라의 중심에서 동서남북의 중요한 지형을 자기네 영토라고 기록에 적는 것이다. 백제를 산동성에 놓고 보면 <삼국사기>의 동서남북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大海)를 바다로만 해석하면 위와 같은 코미디가 생기는 것이다. 큰 호수, 동부 평원과 같은 대평원 등을 모두 바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한족들은 대대로 우리 조상인 동이족에게 밀려 서부 산악지대에만 살았던 산적들이기 때문에 바다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해(海)라는 지명도 있다. 실제로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일대를 고대에 해(海)라 불렀다. 육지에도 X해, X도 라는 지명이 간혹 있지 않은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면서 동부 평야지대로 빠져나온다. 하남성 정주(鄭州)를 지나면서는 대평원을 흐르다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황하는 100년에 한번씩 맑아진다고 했다. 즉 100년에 한번씩 큰 홍수가 나고 그 때마다 물줄기가 바뀐다는 말이다. 흘러간다. 그러나 기원전에는 천진 쪽으로 흘렀던 적도 있고, 산동반도 아래로 빠진 적도 있고, 아예 남쪽에 있는 회수와 만나버린 적이 있을 정도로 물줄기의 변화가 심한 강이다. 그런 황하를 현재의 물줄기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를 분석하면 큰 오류에 빠진다. 당시 황하가 양쪽으로 갈라져 흘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아주 많다. 2,000년 전의 황하 물줄기가 몇 개였는지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주 물줄기가 어느 방향으로 흘렀는지는 사서의 기록과 지질조사로 가능하다.
보인다. 즉 천진 쪽으로 흘렀던 황하(北漢水)는 대방(帶方) 지역을 지나가므로 대수 (帶水) 또는 대한수 (帶漢水)로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남한수(南漢水)는 그냥 한수로 불리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단고기>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소서노와 온조의 이야기의 조건이 산동성에서 모두 일치하는 것이다. 후보지로 보고 있다. 그곳이 위례성인지 한성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온조대왕은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인 제남을 놔두고 다른데 가서 도읍을 정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 유리왕의 유적이 북경 근처에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실제로 제남이라는 도시 명에 백제의 제(濟)가 들어가 있지 않은가! 고금을 막론하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천하의 길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에 도읍을 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중국의 현 수도인 북경, 하북성 석가장, 산동성 제남, 산서성 태원이 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도(石)는 대륙이라고 한다. 물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가 한반도에 아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담로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는 분명 대륙에 있었고 주무대는 산동성인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중국장수전전 흑치상지편에 나오는 백강은 현 상강(湘江)으로 호남성 기양이라는 곳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된 중국장수들의 기록을 보면 전투지가 호남성 동정호 부근으로 추정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
호남성 백제와의 육로 개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이론은 아직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하늘에 천제를 지내던 나라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보면 채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봄 사중월(2월.5월. 8월.11월)에 왕이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께 제사지낸다.” 고기에는 “온조왕 20년 봄 2월 (원구)단을 쌓아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25사를 종합 검토해 보아도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백제를 고구려보다 더 강한 나라로 표기한 기록이 여럿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641년 백제 30대 무왕(의자왕 의 부왕)이 승하하자 당태종 이세민이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 <구당서>와 <만주원류고>에 전한다. <구당서 권199상>에 보면 (十五年璋卒其子義慈遺使奉表告哀太宗素服哭之贈光祿大夫賻物二百叚遺使冊命義慈爲柱國封帶 方郡王百濟王) 고 조서를 내렸다고 되어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제후국이며 백제는 당나라의 부모국이었던 것이다. 근세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자신은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1일간이나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당시엔 입장이 반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는 당나라를 신하국으로 두고 있었음이 분명한 기록인 것이다. 교육하고, 공주를 웅진으로, 부여를 사비로 교과서에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한 매국식민사학계(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건 민족정신을 썩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인양 국민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학계는 이젠 매국노란 소릴 들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은 점차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썩어빠진 이 나라 식민사학계와 정부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는 자기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그런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사학계가 역사의 진실에 대해 침묵하니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을 수 밖에 없고, 또 정부는 외교 문제가 된다는 한심한 논리로 동북공정에 손을 놓고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잘 되리라 보는가! 아직도 단군은 신화로 되어 있으며, 삼국은 한반도에 갇혀 있다. 고려의 만주 영토는 다 어디로 갔는가? 구한말 잃은 간도 땅은 아예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사학은 다른 인문학과 달라 국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들 국익을 포기하지 말기 바란다. 보내주었다. 다음은 필명 심제(心濟) 선생이 제공한 글이다. 전해지는 임치(臨淄 )사실 제나라는 전국시대에 산동에 이르지도 않았다 )와 8세기 고구려 유장 이정기의 제(齊)나라 수도 운주와는 관련이 없는 곳에서 백마하 주위에 산재하는 몇 개의 고성( 古城)이라는 지명과 백마창(白馬廠)이 있으며 그 중심부에 제왕성(齊王城)이 위치한 지도를 발견했다.
삼수변을 떼어버린 제왕성<齊王城> 이라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미군군사지도에도 백마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이 지도에는 馬河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의도적이지 않을까?) 제왕성이라 표기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百濟 수도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인용 끝)
소정방은 협주(莢州-->陜州로 지명 바뀜)를 출발해 황하를 타고 오다, 진공로2와 같이 회수(淮水)로 들어가 덕물도(위치 미상)에서 신라태자를 만나고, 회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독산호)에서 백마하를 타고 도성(사비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현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과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녕(濟寧)이란 도시도 백제와 관련된 도시로 보인다. 왜 유독 산동성에는 백제의 제(濟)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을까?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참고로 독자들을 위해 맨 끝에 사진을 올려 드립니다. 동이의 문명인 홍산문화의 출토물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은 3황5제의 한 사람으로 동이족이었으며, 신라 김유신의 조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문화혁명 때 소호금천이 우리 동이족이라는 이유로 능을 파헤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인근에 있던 공자의 무덤은 멀쩡했다. 자는 옛날에 ‘온’이라 했으며 시조 ‘온조’는 바로 백제를 의미한다고 했다. 다들 민족사를 바로 찾자는 취지로 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아직 있기 때문에 현재 매국식민사학자들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의 이론은 얼마 못 가 반드시 뒤집어질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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