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吳나라 귀족 무덤, 백제 무령왕릉과 똑같아

설레임의 하루 2009. 3. 9. 17:11

*출처: 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삼국지의 吳나라는 강소성이 그 원지가 아니다.

위,촉,오라는 3국은 현 섬서南,湖北성 關中,漢中이라는 盆地에 있었다. 

魏를 산서성,蜀을 사천성,吳를 강소성으로 비정하고 明시기에 소설을 쓴것인데 ,삼국지연의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보시길...

한국사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병폐는 과장과 거짓을 기본에 두고 작성된 서토의 역사서를 그 근간으로 하고 한국사를 참고 쯤으로

한다는것이다. 본인의 생각으로 이 무덤은 백제 양식으로 보인다.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2005년에 발굴된 무덤을 왜 지금에서야 공개하는것일까?

그곳에서 입 벌리고 놀라는 한국사학계는 무엇인가? (운영자 심제)    

 

백제의 세계화는 이미 삼국지(三國志) 시대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지난달 21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 동남쪽 외곽의 칭룽산(靑龍山) 기슭에서 손오묘(孫吳墓)의 발굴 현장을 찾은

한국 탐방단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새로 닦은 왕복 4차선 고속도로를 막아 놓은 황토 둔덕에서 150m쯤 흙길을 올라간 곳에 슬레이트 가건물이 있었다.

 

▲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오나라 무덤인‘손오묘’
가 지난달 21일 최초로 한국 언론에 공개됐다〈사진 위〉.
백제의 무령왕릉<아래>과 같은 양식의 전축분으로, 백제의
국제적 문화교류가 3세기부터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무덤이다.
 / 이오봉 월간조선 객원기자 oblee@chosun.com
스페인코르도바의 아랍 건물처럼 아치형 문을 지닌 고대의 건축물이 땅 밑에서 그 자취를 드러냈다.

 

위에서 보면 거대한 달걀 모양의 벽돌 지붕 두 개가 천장이 뚫린 채 땅 위로 솟아나 있었고 남쪽 입구인 묘문(墓門)을 통해 이어진

묘도(墓道) 바닥은 진흙으로 축축했다.


2005년 12월 22일 발견된 삼국시대 오(吳)나라 말기 전축분(塼築墳)이 처음 한국 언론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함께 간 일행은 고고학 계간지 '한국의 고고학'(발행인 최병식)이 결성한 '육조(六朝)문화 탐방단'이었다.

육조는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 남쪽의 오·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을 말한다.

이 무덤의 공식 명칭은 '남경 상방 손오묘(南京上坊孫吳墓)'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나 오대십국 시대의 오와 구별하기 위해 삼국시대의 오나라를 '손오(손씨의 오나라)라고 한다.

난징을 처음 도읍지로 건설한 사람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손권(孫權)이다.

그런데 탐방단 모두가 이 무덤을 보자마자 느낀 것은 강한 기시감(旣視感)이었다.

"무령왕릉과 똑같잖아!"

1949년 이래 중국에서 수천 기가 발굴됐다는 육조 시대의 전축분이 충남 공주의 백제왕릉인 무령왕릉
(6세기초) 양식의 원조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무덤은 그 규모면에서 사람을 압도하는 데가 있었다. 

무덤의 총 길이가 20.16m, 폭은 10.17m, 높이는 5m였다.

이것을 무령왕릉의 길이 4.2m, 폭 2.72m, 높이 3.14m와 비교해 보면 길이로만 따져도 5배라는 계산이 나온다.

한마디로 '무령왕릉의 확장판(extended edition)'인 셈이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육조의 전축분 중에서 최대 규모라는 이 무덤은 독특한 형식을 지니고 있었다.

관이 안치된 현실(玄室)의 앞쪽으로 또 하나의 현실처럼 만든 전실(前室)을 약간 작은 규모로 마련했고, 현실과 후실의 양쪽으로 모두

네 개의 방형 방을 또 만들어 놓았다.

이건 도대체 뭘까? 동행한 난징시 박물관의 마타오(馬濤) 연구원은 "이 방들의 명칭은 '이실(耳室)'로, 부장품을 넣어 두는 기능을

했다"고 설명했다.

규모가 큰 대신 무령왕릉에 비하면 투박한 느낌도 들었다. 연꽃과 인동(忍冬) 무늬를 새긴 무령왕릉의
벽돌과는 달리이 무덤의

벽돌에는 문양이 없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등잔을 놓기 위해 복숭아 모양으로 움푹 패인 보주형 등감(寶珠形燈龕)을 만들었는데 무덤에서는 현실과 전실

구석마다 박힌 흰색의 '소 머리' 조각 8개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마 연구원은 그것의 명칭이 '수수형 석등대(獸首形石燈臺)'라고 설명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현지 학자들은 손권의 손자로 '삼국지연의'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오의 4대 황제 손호(孫晧·재위 264~280) 시대의 종실 귀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개 귀족의 무덤 규모가 200여년 뒤 백제 왕의 무덤보다 훨씬 컸던 셈이다.

탐방단을 이끈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무령왕릉 등 백제 문화는 육조의 동진(317~420)이나
양(502~557)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돼 왔는데 이 무덤의 발견으로 인해 시기가 서기 3세기 오나라로까지 올라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출토된 전문도기(錢文陶器·동전 무늬 도기)는 서울 풍납토성에서, 양형청자(羊形靑磁·양 모양 청자)는 강원도
원주

법천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종류라는 얘기다.

결국 이 무덤은 '환(環) 황해 네트워크'로 표현될 수 있는 백제의 국제적 문화교류가 삼국지 시대로까지 1세기 정도
올라가게 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백제는 당시 최고급 문화였던 육조(남조)의 문화를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때 서해는 생각보다 무척 좁았던 것이다.

 

 

출처-위클리 조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