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일제식민반도사관의 '나제통문'은 가짜다.

설레임의 하루 2009. 3. 9. 22:37

*출처: 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소서노   출처: 우리역사의비밀

 

 

 

(나제통문은 가짜다)
무주구천동 33경중 제일먼저 통과하는 곳이 "나제통문"입니다
무주군청 관광안내도에는 "나제통문"이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이다.
석모산의 기암절벽을 뚫고 동서를 통하는길을 내었는데 지금도 양쪽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다르다"하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가짜다.



굴은
"기니미굴"로 일제시대(1910년경) 일본놈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옮겨가기

위하여 뚫은 굴로서 이름이 "기니미굴"이었다

굴을 중심으로 한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마을은 "기니미 마을" 아래쪽은 "이미리 마을"이다
도로개설 기록은 무주군청지인 "적성지"에도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굴이 언제 "나제통문"으로 바뀌었는가 ?
바로 무주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 1963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기니미굴이 "나제통문"으로 둔갑을 하여 교과서에 버젓이 등장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국사교과서 때문에 학생들의 수학여행 단골 메뉴가 되어버렸다

이 나제통문이 진실을 아는 어느 뜻있는 한분에 의해서 강력하게 항의를 받아 어느날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그분이 바로 "오재성 선생님" 이십니다
역사는 우리모두의 것이며 어느 특정부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나제통문"의 사례에서 보듯이 감시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또 황당한 오류의 역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집요한 역사 은폐, 도제식의 역사 조폭문화.  개선할때도 되지 않았는지요 ?

사합니다 !

(참고 : 무주구천동 33경)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제 벽골지를 신라가 건설했다니?)

우리의 역사상식으로는 전북 김제는 330년 당시 백제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기록은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흘해 이사금 21년 즉 330년에 신라가 “벽골지”를 만든다.

이곳은 백제 땅인데 ?
신라가 벽골지를 건설하기 130여년 전, 즉 나해 이사금 8년(203)에는 말갈이 신라를 침범한다.
우리의 역사상식대로라면 북쪽의 고구려는 어찌하고 말갈이 신라를 공격한단 말인가 ?

강단의 경우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있어 이를 "오기"라 일부 주장하는데 박창범 교수의 일식기록  분석에서 보듯이 이미

한중일 삼국중 가장 정확한 정사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므로강단의 이러한 근거없는 주장은 타당성을 상실한다

이제 우리는 삼국사기에 왜 이런 기록이 있는지 합리적으로 따지어 연구를 해 보아야 한다.
(www.coo2.net)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 이사금 21년)
21년(330)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 벽골지가 전북 김제에 있다니 그곳은 백제땅 아닌가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 5년(200))
가을 7월에 금성[太白]이 낮에 나타났고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9월 초하루 경오에 일식이 있었다. 알천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五年 秋七月 太白晝見 隕霜殺草 九月庚午朔 日有食之 大閱於閼川  -> 일식 관측지를 알아보자 (추후보완)


(나해 이사금 6년(201))
봄 2월에 가야국이 화친을 청하였다. 3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크게 가물어 중앙과 지방의 옥에 갇혀 있던 죄수의 정상을 살펴 가벼운 죄는 용서해 주었다.
六年 春二月 加耶國請和 三月丁卯朔 日有食之 大旱 錄內外繫囚 原輕罪

-> 일식 관측지를 알아보자 (추후보완)


(나해 이사금 8년(203))
겨울 10월에 말갈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렸다.
八年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人大疫
-> 말갈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로 왔다는 기록은 없다. 비행기를 타고 왔을까 ?


(나해 이사금 25년(220))
봄 3월에 이벌찬 이음이 죽었으므로 충훤(忠萱)을 이벌찬으로 삼고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양산(楊山)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二十五年 春三月 伊伐利音卒 以忠萱爲伊伐 兼知兵馬事 秋七月 大閱楊山西 -> “양산”을 찾아보자 (추후보완)


(나해 이사금 29년(224))
가을 7월에 이벌찬 연진이 봉산(烽山) 아래에서 백제와 싸워 그들을 깨뜨리고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8월에 봉산성(烽山城)을 쌓았다.
二十九年 秋七月 伊伐 連珍 與百濟戰烽山下 破之 殺獲一千餘級 八月 築烽山城
-> “봉산성”은 어디일까 ? (추후보완)

(기림 이사금 3년(300))

봄 정월에 왜국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2월에 비열홀(比列忽)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몸소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三年 春正月 與倭國交聘 二月 巡幸比列忽 親問高年及貧窮者 賜穀有差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

-> “낙랑”, “대방”은 하북성 태행산맥 유역에 있음을 이미 고증하였다 (본문 검색 요망)



(기존게시글) (오재성) 삼국사기에서 신라땅에 벽골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삼한이라니

김제에 가면 벽골지가 있다. 벽골지는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다고 배웠는가?
국사교과서에서는 삼한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흘해이사금 21년에 벽골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라가 삼한인가? 삼한이 신라인가?

삼국사기에서 신라 흘해왕때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신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김제에 벽골제가 있다면 김제는 신라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제 백제가 김제를 빼앗았단 말인가
왜 우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있는 벽골제 기록을 삼한사람들이 만들었다고 가르치는 것일까 ?

<야후 백과사전 : 김제벽골제비 및 제방 (金堤碧骨堤碑-堤防)>

-> 사적 제111호

전라북도 김제시(金堤市) 부량면(扶梁面) 포교리(浦橋里)와 월승리(月昇里)에 걸쳐 있는 저수지의 중수비(重修碑) 및 그 제방.

이 저수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것으로 벽골제라 불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연혁이 수록되어 있는데 330년(신라 흘해왕 21)에 공사를 시작하여 790년(원성왕 6)에

증축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 현종 및 인종 때와 조선 태종 때 개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방에 부수된 시설로는 경장거(經藏渠), 장생거(長生渠), 석주(石柱) 등이 있다.
1975년에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제방의 높이는 북단이 4.3m, 남단이 3.3m이며, 수문의 구조는 길이 5.5m의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우고 석주의 안쪽에 만든 홈에 목제 둑판을 넣어 상하로 이동시킴으로써 방수량(防水量)을 조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방의 북쪽 기점인 포량리(浦梁里)근처 초혜산(草鞋山;신털뫼) 정상 남단에 벽골제 중수비가 세워져 있는데, 석비의 크기는 높이

6.4척, 나비 3.4척으로 비문은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4세기 무렵 삼국사회의 토목·측량·석공 등의 발달 정도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현행 가짜학교국사책, 고등학교 역사부도에 나오는 벽골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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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가짜학교국사책의 지형도.gif (278kb)     다운로드 폰샷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