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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태왕비,누가 왜 옮겼나?

설레임의 하루 2009. 3. 5. 02:56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누가 왜 옮겼나?
출처:다음카페-성훈칼럼 운영자(1311)

 

 

 

 

 

 

(1부) 태왕비 위치에 대한 의혹제기
(2부) 옮긴 이유와 비문위조의 이유 분석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비가 우뚝 서있다.

광개토태왕의 원 시호(諡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고도 한다.

이 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으로,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4면 비(碑)이다.  

▲  1927년 부터는 이층누각을 세워 비문과 위치가 조작된

  비를 보호했다.

비는 1876~80년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당시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지고, 2005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의 높이는 6.34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대석)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15~20cm로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

(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ㄱ국 내력을,

②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  광개토태왕 비의 제원.  

   받침대가 3면으로만 되어있고, 작아서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여러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여하튼 이 광개토태왕 비는 우리 고대사의 숙제를 풀어줄 유물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치가 분명 옮겨진 것 같은 의혹이 있고, 일제가 비문의 내용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부분을 조상의 수치로

여겨 전부 훼손해 버렸고, 이 비문을 일부 위조해 조선 침략의 정당성의 이론이 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한반도에는 백제/신라가 없었고, 일본의 전신인

왜가 있었던 위치도 현 일본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남쪽 광동성이나 가까운 섬이었음이 밝혀짐으로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이 비는 비문 조작뿐만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의문이 있다.

▲  좌측은 일본서기 628~709년의 일식분석으로, 당시 왜는 중국대륙 남단이나 남지나

   해상의 섬에 있었다.

   우측은 1189년 이후의 일식분석으로 정확히 일본열도이다.

   628년 이전은 일본이 아니라 왜였으나 백제의 분국이나 마찬가지로 삼국과 같은

   독자적인 국가로 보기 어렵다.


1) 비에 대한 기록이 왜 없을까?

처음 비가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리의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서에 아래와 같이 압록강 건너 집안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  근처 아불란사 터에 있는 높이3~4m의 이 대석이 우리 기록에서 언급한

대금황제능비로 보인다.

<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

<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만포 삼십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강계읍지 : 1830년 찬 1872년 교정>

<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 在皇城平上一里許 有立碑.

高可十丈.

(금나라 초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는 내용 외에는 위의 기록과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1830년에 편찬되고 1872년에 교정된 강계읍지에도 분명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호태왕 비가 발견된 근처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다. 필자는 이 석주가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생각된다.
물론 10장(丈)의 높이가 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1장을 3m라 했으니 약 30m 정도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10척(尺)의 오기로 본다.

아불란사 터 석주의 높이가 약 10척이고, 호태왕비의 높이는 20척이다.

그렇다면 1872년 이전에 호태왕비는 집안에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  명나라의 기록인 명일통지  의  조선영토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의 주 강역은 분명 하북성이었다.

그런데 태왕묘와 호태왕비가 한참 떨어진 집안에 있었다니 잘 믿기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가 산재해 있다.

원래 대전 현충원과 같은 신성한 소도와 같은 분묘도시이기 때문에 집안에 태왕의 묘를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호태왕비는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거기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의 영토였다.

그렇다면 고려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왜 비문의 기록과 다른 평지에 있나?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 九月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갑인년 9월9일 을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한다.’고 조각되어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은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학계에서 광개토태왕의 릉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 태왕릉은 분명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태왕이라는 칭호를 쓴 다른 왕이 다른 어느 시대인가 있었거나, 누군가가 비를 옮겨다놓고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능에 갖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능이 어느 왕조 누구의 능인지는 필자도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  1900년대 초의 비석.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관석과 대석도 없이 서 있다.

  옆에 민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비문에 나와있는 산릉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듯 민가도 있었는데 왜 1876년 이전에는 발견 안 되었을까?


그렇다면 현 집안에 있는 이 호태왕비는 과연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중국 땅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그 비를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비문에 기록된 산릉과 다른 평지에 비가 서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일 옮겼다면 비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어 불가능했을 것이고

아마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집안이란 압록강변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아, 아마 고구려의 핵심강역이었던 하북성 연산산맥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배를 이용해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김성겸선생이 해석한 남당유고집 고구려사략에 보면 ‘태왕을 황산(黃山: 서안동조양산-西安東朝陽山)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황산의 위치는 현재 알지 못하나, 조양이라는 지명은 북경 근처에 있다.

여하튼 하북성 북부를 흐르는 강은 난하와 조백신하 그리고 영정하가 있다.

이 강 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들어가는 강이 과연 어느 강일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면,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하고, 수하 장수를 시켜 추격하니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는데, 죽령에 이르러 유유와 밀우장군이 목숨을 바쳐 왕을 지키는 활약이 나온다.

여기서 남옥저는 어디일까? 사학계는 남옥저를 함경도 북청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옥저는 함경도가 아닌 요녕성 일대에 있었다.

<한단고기 대진국본기>에 나와 있기를,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海城縣)이 그것이다.’

해성현은 현 지명 해성시로 요녕성 요양과 가까워 고구려 패망 시에 사비성(沙卑城)으로 여러 사서에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당시 수도였던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하북성이 맞다고 하겠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위나라 유주(북경)자사인 관구검이 북경 일대에서 현 집안으로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로 달아나는

동천왕을 추격한 것이 아니고, 북경 쪽에서 하북성에 있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남옥저(요녕성) 땅으로 도망온 동천왕을

계속 추격해 길림성 집안까지 왔다고 봐야 그 순서가 맞고 행적이 맞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과 환도산성이었으므로 국내성(안시성)과 환도산성으로 추정되는 난하 중류의 현 청룡산성

(한단고기의 태조대왕의 요서 10성 중 개평 동북방 70리에 있는 안시성으로 추정)과 인근의 도산(都山: 丸都山城으로 추정) 부근에

원래 호태왕의 산릉이 있었다고 보는 게 유력하다 하겠다.

▲  좌측은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우측은 호태왕비와 태왕을이 있는 위치.

  누군가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의 위치를 집안으로 위조하기 위해 비석을 몰래 평지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없는 법이다.


3) 받침대(대석)가 없는 비도 있나?

무게가 37톤이나 되고, 높이가 6.34m나 되는 거대한 응회암으로 된 비석을 세우려면 당연히 지반침하를 막아야 하고,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대한 받침대(대석)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  현재 37톤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여 깨어져 있는 받침석.

  20년 정도에 이렇게 깨진 받침석은 원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1900년 초의 비석은 받침대(대석) 없이 그냥 땅위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받침대도 없는 상태에서 지반침하도 없이 1,500년을 버텼다는 것은 솔직히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된다.


현재 가로 세로 2.7m X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가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져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받침대 가운데 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끝에 비가 있다는 것이다(제원사진참조).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즉 받침석이 비에 비해 너무 작고 형편없이 조잡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불과 약 120년 사이에 그 정도 침하되고 훼손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  1900년대 초의 태왕비는 받침석이 없던 것으로 사진에 보인다. 위 사진과 다른 방향에서 찍은 것임.


4) 관석도 없는 묘비가 있나?

▲   조선 5대 문종대왕의 비석.

  관석과 받침석이 크다.

보통 다른 묘비에는 대부분 관석이 씌어져 있다.

일반인의 묘비에도 반드시 관석를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제왕의 공적비인데 관석을 안 세웠을 리가 없다.

호태왕비도 상부는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가공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관석은 엄청 컸을 것으로 추정되어 인력으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이건 개인이 아닌 조직이 동원되어 관석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비가 있던 장소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를 배로 옮긴 다음 집안에다 비를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관석은 그냥 어딘가에 버리고 비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를 세우려면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커서

편의상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그냥 세운 것으로 보인다.

▲   광개토태왕 비의 맨 윗부분은 가공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는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옮겼을까?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

(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고, 중국은 호태왕의 업적을 중국의 수치로 여겨 중국 25사에서 그 기록을 이미 다 지워버렸다.  

또한 중국(청나라)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碑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 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이 선비를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고 자꾸 나아갔다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燕)나라 신하인 풍발이 연왕(燕王)을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나라에서 벼슬하던 고운을 세워 천왕(天王)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

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후략)  

▲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광개토태왕 비의 현재 모습.

    중국해 누각에 갇혀 신음하고 잇다.


위 책의 내용에서와 같이 비를 옮긴 장본인은 중국(청나라)으로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고구려의

강역을 축소왜곡하기 위해 하북성에 있던 비를 집안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있었다는 만주소년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에는 비를 옮겨다가 세우지도 않고 그냥

평지에 버리고 간 것을 나중에 집안사람들이 발견하고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람들이 비를 옮겼기 때문에 당시 비문의 내용 중 자기네와 상관없을 것으로 본 왜와 관련된 내용을 없애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것과 똑같이 고구려와 연나라(선비족)는 동족(同族) 또는 종족(宗族)이었고, 새로 왕이 추대된 고운은

친족(親族)이라는 사실을 단재선생은 말씀하시고 계시다.

연나라에서 신하였던 한족 풍발이 역시 신하였던 고운을 추대했다고 한다.

연나라 전왕(前王)들이 고씨가 아니면 이는 역성혁명이다. 왕의 성이 달라지면 당연히 다른 왕조이나, 같은 나라로 이어진 것을 보면

연나라는 자고로 고(高)씨의 나라가 맞는 것이다.

모용씨는 나중에 바꾼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만주족은 사실상 고구려-->대진국-->요나라-->금나라-->청나라로 이어지는

적장자인데, 청나라가 뭐 하러 조상인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를 옮기겠는가?”맞는 말이다.

그러나 청나라 초기에는 자신들이 동이족의 후예임을 표방했으나, 중원을 지배한 이후로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그러한

의식이 쇠약해진다.

특히 말기로 내려오면서 그런 의식이 희박해졌고, ‘동치중흥’은 중국을 중흥시키자는 정책이지, 중국인에게 만주족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하자는 정책은 아니었다.

▲ 내몽고와 몽고는 민족과 북부여/고구려의 고향

중국은 자신들과 직접 관련된 선비족 정벌의 비문 내용을 없애면서 광개토태왕 6년 북으로

현 내몽고지방의 염수(鹽水)를 정벌하고, 8년 남으로 토곡혼(吐谷渾: 현 티베트)을 순시했다는 내용은 없애지 않았다.

즉 염수와 토곡혼은 자기네 땅이 아니란 이야기이다.

이는 청나라 만주족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긴 것이 아니라, 중원의 한족(명나라)이 주동이

되어 비를 옮겼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와 중국에 의해 비문이 파괴된 상태에서도 광개토태왕 시절 정복한 최대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 유추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중국과 일제는 광개토태왕에게 염수의 상류와 토곡혼만 정벌 당하고 그 사이에 있는 중국땅은 정벌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참으로 웃기는 짜장면과 우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태왕이 군대를 이끌고 토곡혼(티베트) 정벌할 때 공수부대 데리고 비행기라도

타고 갔단 말인가?  

▲  토곡혼(티베트)의 위치.

대륙 서남부까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대륙 동부와 남부를 거쳐 간 것으로

보인다.

하북성에 있던 고구려가 토곡혼(티베트)을 가려면 중원을 가로질러 가던가, 중원에 있던

5호16국을 피하려면 대륙 동부인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을 지나 남부인 복건성과 광동성을

거쳐 운남성으로 가야 한다.

즉 이는 중국 대륙의 동부(백제와 신라)와 남부(왜)가 다 광개토태왕에게 정벌 당했다는

이야기와 같고, 과학적으로 박창범교수의 일식 기록 분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사실은 중국과 일본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태왕비가 중국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있었다.

1913년 일제가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점제현신사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옮긴 것도

이것과 같은 맥락이다.

점제현 신사비는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을 유물로 입증하기 위해

반도사관 정착의 일환으로 일제가 옮긴 것이다.

점제현은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에 소속된 행정단위였다.

그 신사비가 있었던 낙랑군 점제현을 현 평남 온천군으로 조작하기 위해 옮긴 것이다.

▲  일제는 갈석산에 있던 신사비를 평남 온천군으로 옮긴다.

원래 사서에 나오는 갈석산은 진장성이 끝나는  황하 동쪽 산서성 태원 위쪽에 있는

백석산으로 보인다.  

이미 중국은 산 이름과 신사비 위치를 조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제현신사비는 북한에서 과학적인 방법(핵분열 흔적법)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 호태왕비는 현재 중국 땅에 있는 유물이므로 북한이나 우리가 마음대로 조사를 못하고 있다.

만일 조사가 허락된다면, X-Ray 투시로 비가 옮겨졌는지 아닌지 쉽게 판명할 수 있으나, 중국 자신이 옮긴 고구려의

유물이므로 중국정부가 그것을 허락할 리가 없지 않은가!

중국은 광개토태왕비를 하북성 난하 중류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겨다 세워놓았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나중에 좁은 집안의

평지에서 15km2 밖에 안되는 곳을 고구려인 수도인 국내성으로 비정했고, 거기서 얼마 안 떨어진 산 정상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했다.

왜 그랬을까?

광개토태왕비나 점제현신사비나 둘 다 이른바 중국과 일제가 각각 추진한 역사왜곡을 유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음모이며 흉계였던

것이다.

▲  중국과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한국의 강단사학계에 의해 고착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

그러나 이 거짓말은 과학에 의해 허구임이 명백하게 밝혀진다.

고구려의 수도는 하북성에 있었다.


일제에 의한 본격적인 비문 조작

▲   신묘년 기사는 글자 자체를 위조했다는 이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나중에 광개토태왕비를 수중에 넣은 일제는 관동군 정보장교 사케오가케

노부(酒句景信)가 가져온 원본 탁본을 보고는 학자들에게 연구를 시킨다.

그리고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훼손하고 조작하고 탁본을 떠서는

만천하에 공개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은 철저히 없애버리고, 신묘년

기사를 위조해 조선 지배의 정통성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임라일본부설을 임의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의 신묘년 기사에 대한 일본

측 해석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가야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고, 우리 해석은 고구려를 주체로 하여 (고구려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파하고, 백제.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 비에 왜가 주체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일제가 신묘년 기사의 글자를 아예 변조했다는 학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해 보니 초기 왜의 위치는 남지나 해상의 섬이었다.

중국 사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일제가 이 신묘년 기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전에 일본의 조상들이 가야 땅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200년간 지배한 적이 있다는 학설로, 조선의 조상들이 옛날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지금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이 이론이 허황된 것인지는 박창범교수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일식기록을

분석하여 일본의 전신인 왜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더 이상 학설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일제의 허구인 임나일본부설로 인하여 조선은 단군 이래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재앙

중의 대재앙을 맞는다.

36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긴 했지만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여러 방면에 많이 남아 있다.

물론 해방 후 올바른 위정자를 만나지 못해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제일

크겠지만, 과학적인 분석으로 임나일본부설이 허황되게 날조된 이론이라는 것을

밝히게 해준 박창범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한단고기>를 엮은 계연수선생은 1895년에 비를 답사하여 비문의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1912년 비를 재답사한 계연수

선생은 비문 중 광개토태왕이 왜를 정벌한 내용이 크게 훼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931년 제자 이유립선생은 계연수선생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세상에 선보이게 된다.

즉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는 1895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는 계연수선생을 여섯 토막을 내는 육시(戮屍) 후 압록강에 던져 버린다.

일제는 독립 운동했다고 이렇게 잔인하게 토막내어 죽인 적이 없다.

당시 일제의 최고 인물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장군도 재판받고 처형당한다.

그런데 이렇게 육시까지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계연수선생이 비문을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일제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비문을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아직도 연구대상이며, 한일 간 동양사학의 첨예한 대립의 장이기도 하다.

아래는 비문징실의 내용으로 빨간색 부분이 왜와 관련된 이야기로 일제가 없애버린 글자이다.

중요한 내용은 왜가 거국적으로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나와 <한단고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   광개토태왕 비에 비가 내리니 석회로 조작한 곳에서 석회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第2面9行)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제적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제적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질렀다는 신문기사

호태왕 비문의 훼손은 일제가 우리의 고대사서 20만권을 불

지르고, 중요한 사서는 일본으로 가져가는 분서갱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시조가 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고, 대륙을

지배했던 천자국의 천손민족(天孫民族)의 후예들을 일개

섬나라가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위대했던 조상의

역사부터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일왕 특명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했던 역사에 대해 항상 열등감이 많았던 섬나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해서도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문화재를

가져가는 등 온갖 역사 만행을 저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호시탐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노리던 일제는

드디어 그 가능성이 보이자 미리 계획한대로 역사말살 음모부터

개시한 것으로 본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반도사관과 임라일본부설은 이미 <한단고기>와 박창범 교수의 <삼국사기> 일식분석으로 허구임이 백일하에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사학계가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준 반도사관에 세뇌되어 위대한 민족사를 밝힌 <한단고기>를 위서(僞書)로 몰아붙이

고 있다는 것이다.

사학계는 과학적 증거와 명백한 사서의 근거를 손에 쥐어줘도

여전히 일제가 만들어준 망국과 치욕의 국사를 숭상하고

고수하고 있다.

해방 6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일제대신 우리 국민들과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얼을 스스로 말살하고 있는 사학계의 이런

행위는 이제는 고쳐져야 하며 국가의 내일을 위해 민족사학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구려 수도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나?’가 게재됩니다.

참고로 광개토태왕 시 고구려의 영토를 상상해 보시도록 중국 지도 하나를 올려 놓습니다.

▲   중국의 주요 성시. 섬서성 주변 몇개 성을 제외하고는 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고구려의

    영토로 봐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