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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학계의 <고조선 패수 대동강설 >등을 반박한다

설레임의 하루 2014. 7. 11. 20:49

 

사학계에서도 그나마 김운회 같은 경우는 다른 학자들과 달리 고조선의 중심을 북한학자 이지린의 난하설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그의 패수 위치는 수경이 아닌 수경注의 역도원의 말대로 하북성 난하 유역으로 비정하지만 사서 이외에 중국 고지도를 보지못한 책맹과니 수준이다. 

 

패수는 水經의 해설 그대로가 맞다.

 

 

 

1. 진개가 빼앗은 고조선땅 2000여리는 현 압록강이 아니다.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呼沱易水地方二千餘裏帶甲數十萬車六百乘騎六千匹粟支數年南有碣石雁門之饒北有棗栗之利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此所謂天府者也。— 史記 蘇秦列傳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반도,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 남쪽으로 호저와 역수(易水)가 있다."라고 하였다.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 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 기병 6천기()를 낼 수 있었다.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었다.

 

연 소왕(昭王) 때에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古朝鮮)을 침략하여 만번한지역까지 영토을 확장하였고, 기원전 285년에는 장수 악의(樂毅)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제나라를 공격해 수도와 대부분 지역을 함락시켰다.

 

위의 내용은 연이 고조선을 공격하여 2천여리를 빼앗고 난 후의 위치를  기록 한것으로 보여지므로 이를 증명하는 <중국사회과학원>의 역사 지도가 있다. 

 

 

 

 

윗 그림 중앙에서 연나라①은  최초 위치로 하남성 무양 부근에 있었다 추정한며 중국사서의 내용대로 연나라 소왕(召王)때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하여 고조선영역 2천여리를 빼앗아 위치한 지역이 燕②라고 표시하였다.

 

결국  최종 燕②의 위치로 부터 남쪽은 결국 고조선의 영토라는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즉 황하를 사이에 두고 고조선과 연나라가 대치 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사학계에서는 燕②의 위치를 최초의 위치인 燕 ①로 보고 여기서 다시 2천여리를 동으로 빼앗았다고 보고 있으므로 결국 대릉하 이동으로 고조선 강역이 움츠려 들었다고 보고있다. 이보다 앞선시기 기자조선의 위치에 대해 이형구는 객좌현에서 발굴된 기후방정을 보고 기자조선의 유물이라고 보고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유물이 단속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나타남을 이유로 기자조선의 현요동 지역 동래설은 신빙성이 적은 이론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사서의 내용대로 연의 위치는 아직고 불변하고있다 그대로 요동이 현 요하부근으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데 그림처럼 적의 지역에 저렇게 혼자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2. 위만이 넘어온 패수에 대한 논증.

 

 

사학계에서 패수 위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에 대한 근원은 조선말 실학파학자들의 이론들 .. 결국 성호 이익 부터 정약용까지 이나라 학자들의 추정은 고서적류의 문헌고증적 방법으로 실시되었을것이다. 실제 중국고지도나 현지등을 고려하지 않았을것으로 보인다.

 

그 보다 도 서영수 같은 이는 고조선 대동강설이 고려에서 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본 대동강설은 적어도 800여년동안 과학적으로 증빙할 수 있는 방법이 발전되어 왔음에도 요지부동의 학설로 회자되고 있는 꼴이다.   

 

 그 맥이 일제 어용학자들에게 의해서 이용되었고 그 이론이 이땅의 식민적 후학인 현금의 학자들에게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문헌사학에 이론이라는 것은 없다 단지 방법론 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론은 무시할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중국 고대사서 <관자>등에 조선이 등장함을 이유로 기원전 8세기경에 고조선이 실재하였음을 그리고 기원전 4세기경에 칭왕되었으므로 왕조국가로 추정한다.

 

그러면서도 고고학적으로 하가점 하층지역의 유물로 부터 나온 결과를 두고서 고조선 관련설을 부정하기도 한다. 

 

대동강이 패수라는 이병도학설 이후로 좀처럼 그 영역이 변동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주장은 패수가 청천강 혹은 매우 진보적인 학자들이라야 현재의 요하 정도이나 그 이론들도 다수로 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나라 위만이 패수를 건너서 고조선 공지로 들어가 위만조선을 세우게 된 실제 지리학적 루트를 문헌사학적으로 밝히려고한다. 이땅의 사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1988년에 발표한 내용과 2009년에 발표한 내용 즉 20년간 내용의 변화가 없다. 이 무슨 해괴한 현실인가.

 

사골 곰탕도 3번 끓이면 맛이 없어지는데 결국 <黃牛江湯>  보다도 못한 국을 끓여내는 주방장들인 것이다.  

 

사기 원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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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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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古邑名」。

徐廣曰昌黎有險瀆縣」。

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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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 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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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군(遼東郡)편에 나오는 험독(險瀆)에 대한 설명부분

 

險瀆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응소 왈 조선왕 위만도읍이다)

依水險 故曰 險瀆 (험수에 의지해서 험독이라한다)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신찬 왈 왕검성은 낙량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로서 험독이라 한다)

師古曰 瓚說是也 (신찬의 말이 맞다)

浿音普大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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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지(魏志) - 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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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以盧燕王 朝鮮與燕界於溴水 及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胡服東渡水.

 

()에서 노관을 연왕으로 삼았다.

조선과 연()은 추수(溴水)를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갔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추수(溴水)를 건너 망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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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溴水)- 명일통지(明一統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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溴水在濟源縣 其源有三 一出琮山俗呼白澗水春秋公諸侯于梁此 一出縣西二十里曲陽城西南山

一出陽城南溪俱東南流與瀧水合又東南至溫縣入于黃河

 

추수는 제원현에있고 그 근원이 세곳이다. 

 

하나는 종산 (백간수)에서 다른 하나는 현의 서쪽인 곡양성 서남산에서 나오고 마지막 하나는 양성 남쪽계곡에서 동남으로 흘러 롱수와 합쳐져 온현(하남성)에 이르러 황하로 들어간다. 

 

이 땅의 역사학자들 모두 요동을 현재의 요녕성으로 본다 그리고 그 시각에서 벋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려로 부터 내려온 주장의 연장이라고 말 할 뿐이다. 

 

운영자가 밝히지만 송나라 前期에 작성된 <구당서>에는 한나라 이래로 고려와 발해가 위치한 요동이 당토인적이 없다고 한다. 그 요동이 당나라 초기엔 하북성 서남부 유역이고 고구려가 망한 이후로 7~9세기 사이에 요동이 현재의 요동지역으로 확장되었다 하더라도 좁게는 하북에서 넓게는 현요녕 까지 중국의 속지가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한구절의 글귀가 상대를 궁지로 모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운영자는 이 주장에 대한 자료로 군사지도와 고지도를 보인다.

 

 

 

 

제1도에서 연나라의 위치 제2도에서 위만이 추수를 건너서 도망간 사건을 보면 연은 공히 하남성 지역에있었다는 사실과 북쪽의 고조선 空地로 황하의 지류인 추수를 건너 운장으로 도망간 사실을 사서에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연 소왕시기(bc311-279)에  진개가 고조선을 처들어와 뺏았다는 고조선지는 위만이 연에서 호복으로 갈아 입고 추수를 건너서 고조선으로 들어간 사실(bc194)과 지역적으로는 같을지라도 시간적으로  약 90년간의 차이가 생긴다. 기원 3세기초 연나라가 현 북경지역까지 차지했던 것이 소왕 이후에 고조선 세력에게 다시 빼았겼던지 혹은 그 以南 지역이 연나라 쇠퇴하여 세력이 미치치 못하므로 空地로 남아서 위만이 그 틈새로 도망가 위만조선을 세웠다고 추정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위만이 조선을 세웠을 때에는 하북 한단출신 영정(진시황이름)의 秦이 망하고 前漢이 세워졌을 즈음이므로 부여와 위만조선, 한나라가 황하 이북지역의 패자 자리를 다투고 있었을 것이다. 이즈음에 고조선의 주후예인 부여가 한나라의 창업을 도왔다는 기록이 隋나라 재상 李密은 그가 추모의 자손임을 밝히고 그 진실을 묘지명에 썼기 때문이다.

 

또한 진나라를 망하게할것은 호이다라는 의미인 <亡秦者胡也>를 기록한 도참설이라면 그 도참이 부여를 두고 한예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부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도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명일통지에 같은 위치의 강을 두고 패수와 추수로 달리하는것은 왜 일까?

 

옛 제수의 모습과 풍경 (19세기)

 

浿水가 溴水로...

왜 중국사가들은 개犬을 浿자 받침으로 썼을까?

 

운영자 심제.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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