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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 -김호림 (조선족 사가)|

설레임의 하루 2014. 4. 12. 23:17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2013.10.28.http://cafe.daum.net/dobulwonin/MJRx/265 

 

 

 

지명을 따라 찾은 전설 같은 고구려의 이야기
 
    북경에는 황제가 살았다고 하는 자금성紫禁城 못지않게 엄청난 호기심을 끄는 게 있다.

바로 북경 근처에 나타나고 있는 ‘고려’ 라는 이름의 지명들이다. 북경의 동쪽 근교에 고려마을이라는 의미의 ‘고려장高麗庄’이

있으며 북쪽 근교에 고려군대의 주둔지라는 의미의 ‘고려영高麗營’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명 ‘고려장’과 ‘고려영’에서 등장하는 ‘고려’는 고구려의 약칭이었다.

고구려가 어찌하여 이역의 수도까지 와서 마을을 짓고 군영을 설치하였을까…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시작한 답사는 나중에 장장 10년의 긴 여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려’ 이름의 지명이 한두 개에 그친 게 아니라 마치 넝쿨에 매달린 열매처럼 연달아 떠올랐던 것이다.

‘고려포高麗浦’, ‘고려동高麗洞’, ‘고려정高麗井’… ‘고려’의 이름은 지어 대륙의 한복판에도 박혀 있었다.

양자강揚子江 일대의 옛 수도 남경南京에 ‘고려산高驪山’이 있었고 진시황秦始皇의 병마용兵馬俑으로 유명한 서안西安에 ‘고려거

高麗渠’라는 마을이 있었다.

    시초에는 산해관 남쪽에서 나타나는 이런 지명을 모두 당나라 때 이주, 유배되었던 고구려 유민과 포로들의 흔적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고려’ 이름의 지명 전부를 그렇게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의 예로 ‘고려성高麗城’을 당나라에 끌려온 고구려 유민이나 포로들의 거주지라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고려성’을 ‘고려인 수용소’로 우기는 이런 황당한 주장은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성城’, 다시 말하면 성城의 영향력 범위를 그 나라의 영토로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지명은 토착 원주민들의 생활의 반영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은 단순한 전설이나 민간설화가 아니라 그 고장의 진실한 역사를 투영投影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은 지명으로

인하여 문헌보다 더 오랫동안 또는 뚜렷하게 남게 된다.

    산해관 남쪽에 잔존한 ‘고려’ 이름의 지명은 백의겨레의 고대사에 얽힌 많은 비밀을 풀어나갈 수 있는 키워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고려’ 이름이 들어 있지 않는 다른 지명도 간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적지 않은 지명이 고구려와 직, 간접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사료史料가 몹시 결여된 상황에서 이런

지명의 역할은 극명하게 두드러지고 있었다.

    옛 지명을 추적하는 현장에는 고구려인은 물론 고구려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전대前代의 상商나라 유민과 후대

後代의 발해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고구려의 적석총이 있었다고 하는 ‘고려성’이 있었으며 기자箕子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 ‘조선성朝鮮城’이 있었고 말갈靺鞨인들이

와서 이뤘다고 하는 마을 ‘발해진渤海鎭’이 있었다. 또 고구려와 같은 시대의 신라인들이 살고 있던 신라채新羅寨가 있었다.

    한편 고구려와 아무런 연줄이 없는 것 같은 지명도 적지 않았다.

하북성河北省 동부의 신나채新挪寨는 새로 옮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실은 당나라 정관貞觀연간(627~649년) 지금의 노룡현盧龍縣

진관향陳官鄕 지역에 살고 있던 고구려인들이 한데 모여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또 하채下寨 마을은 군영을 세운다는 의미로, 당나라 설인귀薛仁貴의 군대가 요동으로 고구려를 치러 갈 때 동쪽의 토이산兎耳山을

공략하기 위해 이곳에 주둔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옛 지명에는 그야말로 전설 같은 고구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당시의 영토는 고정불변한 게 아니었다.

진한秦漢 이래 황하黃河 이북 특히 하북성 지역은 삼국三國, 동진東晉과 서진西晉, 5호16국五胡十六國, 남북南北朝 등 여러 시기에

걸쳐 퍼즐처럼 사분오열 되었다.

중원은 쩍하면 군웅이 각축하는 혼란한 국면에 빠졌고 또 북방민족의 정권과 밀고 당기는 쟁투를 빈번하게 벌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귀속은 춘삼월의 날씨처럼 변화무상하였으며 서로의 경계가 톱날처럼 들쭉날쭉하였다.

고구려 역시 여러 시대나 사회에 따라 강역이 동서로 넓어지기도 했고 또 남북으로 좁아지기도 했다.

와중에 산해관 남쪽에 나타나는 유수의 ‘고려성’은 고구려가 분명히 어느 한시기 하북성의 많은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증거물로 된다.

    18세기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던 박지원朴趾源의 여행기록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잠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열하는 지금의 하북성 동부의 승덕承德을 말한다.

이 여행기록에 따르면 열하에 있는 태학 대성문大城門 밖의 동쪽 담에 건륭乾隆 43년(1778년) 황제가 내린 글을 새겨서 액자처럼

박아두었다고 한다.

거기에 이르기를, “열하지방은 고북구古北口 장성의 북쪽이며……

진한秦漢 이래로 이곳은 중국의 판도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魏나라 때 안주安州와 영주營州 두 고을을 세웠으며 당唐나라 때는 영주

도독부를 두었으나 먼 지방에 옛 명칭을 그대로 따서 지방 장관을 둔 것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하북성 동부지역에는 오랜 기간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정권이 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답사를 통해 새롭게 만난 고구려성은 대부분 연산燕山 기슭에 위치, 중원에서 요동으로 통하는 하북성 동부의 요로에 포진되어

있었다.

이런 성곽들은 고구려의 전방방어체계를 이루는 전연지대의 군사 시설물로, 고구려가 중원의 세력을 감시하고 그들의 침입을 맨

먼저 감지하는 ‘촉각觸角’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답사 도중에 고조선의 강이라고 하는 ‘조선하朝鮮河’에 발목을 적실 수 있었고 또 고구려 경계의 비석이나 다름없는 ‘지경바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고구려의 성곽은 지어 유주幽州(지금의 북경) 일대를 지나 하북성의 중남부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실제 고구려는 산해관 남쪽 고조선의 옛 땅에 한때 고토수복의 ‘다물多勿’ 깃발을 꽂았으며 훗날에는 또 그들의 유민과 후손들이

이 고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꿨던 것이다.

    필경 고구려의 강역은 많은 부분이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설을 두고 학계는 지금도 시야비야 논쟁의 열풍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무작정 탓할 수만도 없다.

문헌으로만 증명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부족하고 또 산해관 남쪽의 고구려 유적은 확실하게 알려지고 있는 게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유적의 대부분은 자연과 인위적인 파괴로 소실되었거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이마저 상당 부분의 기록은 근래에 출판된 지명지地名志나 현지縣志 등 지방문헌에서 자의든 타의든 적지 않게 누락되고 있다.

촌락과 성곽, 사찰, 섬, 우물, 나무 등에 담겨있는 옛 이야기는 그렇게 무심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기록이 없고 증거물이 없는 역사는 제 아무리 고집한들 더는 진실이 아니라 허구의 전설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책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글누림」 2012.03 출판)를 쓰면서 고구려의 전모全貌를 밝히는데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다는 마음으로 심혈을 넣었지만, 그래도 본의 아니게 빠뜨린 지명이나 유적이 다소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기억의 저쪽에 소외되어있는 한 단락의 역사를 재량껏 문자와 사진으로 충실하게 기록하고자 한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싶다.

 2012년 봄  북경에서.


http://www.zoglo.net/blog/read/jinhulin/64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