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왕망의 신(新)나라와 관련 있는 국호 ‘신라’ (4~7부)

설레임의 하루 2014. 4. 15. 21:32

*원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36§ion=sc3§ion2 

 

 

 

 

신나라 왕망과 신라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
 
스카이데일리 기사입력  2014/03/23 [14:21]
김일제의 증손자인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에서 핵심 정치실세였던 김씨들은 서기 23년 유씨의 나라인 후한(後漢)이 세워지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탈출을 감행해 흉노 휴도왕의 활동무대였던 요동 땅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김씨들은 DNA가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 요동에 있던 서나벌(徐那伐)에 들어가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실세로

등장하게 된다.

 
신라에서도 정치실세가 되는 김씨 집안
 
서나벌의 탈해 이사금 9년(65년)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는 김알지가 태어난다.

도읍인 금성의 서쪽에 있는 시림(始林)의 숲속에서 새벽녘에 큰 닭울음소리가 나자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금색으로 된 작은 함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린 채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기에 그 함을 가져다 열어보니 얼굴이 잘 생긴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임금이 무척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보내준 선물 아니겠는가?”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알지(閼智)라 이름 짓고 금색 함(金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왕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는 국호로 삼게 된다.

 
▲ 조선왕조 인조 때 조속이 그린 금궤도     © 편집부
 

5대 파사이사금(80~112)의 왕비는 김씨로 갈문왕 허루의 딸이며, 6대 지마이사금(112~134)의 왕비 역시 김씨로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석탈해의 손자인 9대 벌휴이사금(184~196)의 어머니가 김씨이며, 11대 조분이사금(230~247)의 어머니 역시 김씨로 갈문왕

구도의 딸이다.

이렇듯 김씨는 신라로 들어오자마자 갈문왕이 되고 왕비를 배출하는 등 신라에서 정치권력의 실세로 등장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길 “신라 김씨들은 김일제의 후손이 아니라 모두 김알지의 후손”으로 알고 있으나,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파사이사금이 즉위할 때인 80년은 김알지가 15살 때이기 때문에 김알지 이전에 이미 다른 김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다른 김씨들이 바로 신나라에서 난을 피해 건너온 김일제의 후손들이 아니겠는가?

 
김알지의 계통은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이사금(13대 임금)으로 이어져 김알지 탄생 약 200년 후인 262년에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후 14/15/16대는 석(昔)씨가 왕을 하다가,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와 부인이 모두 김씨인 17대 내물이사금 이후는 김씨가 계속

신라의 왕이 된다.  

 
▲ 김알지 존영도 (김산호화백 작품)     © 편집부


이에 대해 <삼국사기>를 찬한 사신(史臣)은 “신라의 경우는 같은 성씨를 취할 뿐 아니라 친사촌이나 고종사촌·이종사촌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으니,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중국의 예법으로 따지면 크게 어긋난 것이다.

저 흉노의 풍속에 어미도 간음하고 자식도 간음하는 행동은 또 이보다 더 심한 것이다”라고 혹평하였다.

 
이는 기마민족의 풍습인 형사취수(兄死娶嫂)제를 모르고 한 말일 것이다. 형사취수제란 아버지/형이 죽은 뒤에 아들/동생이 계모/형수를 취해 함께 사는 제도로 흉노와 고구리 등 북방유목민족에게 있는 풍습이다. 이 제도는 아버지/형이 죽으면 재산을 물려받은 계모/형수가 만일의 경우 다른 혈족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혈족의 재산이 바깥으로 유출됨을 방지하며, 또한 계모/형수에게 재산이 없을 경우 생활능력이 없으므로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가 있는 제도이다.
 
이를 두고 풍습이 중국과 다르다는 이유로 혹평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는 후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사서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중국의 경우에도 수나라 양제가 부왕인 문제의 후궁인 한국부인을 취한 것이나, 당태종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그 부인들을

취했으며, 당 고종이 부왕인 당태종의 후궁인 무씨(측천무후)를 취한 적이 있다.

이는 그들이 북방기마민족인 선비(鮮卑)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당태종/고종 부자와 혼인한 중국 유일의 여황제 무측천     © 편집부


신나라와 관계있는 신라라는 국호
 
<삼국사기>에 초기 신라의 국호는 서나벌 -> 계림 -> 신라로 바뀐다는 기록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국호를 사로

(斯盧) 또는 진한(辰韓)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307년 신라라는 국호로 복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신라라는 국호는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라는 국호는 분명 왕망의 신(新)나라와 뭔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삼국사기> 지증왕 4년(503)의 기록에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 하였는데, ‘신은 덕업을 일신(德業日新)한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四方網羅)한다는 뜻’이 있으니 신라를 국호를 정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생각되옵니다”라고 고한다.

 
또한 “예로부터 국가를 지닌 분은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22대에 이르도록 다만 방언(方言)만을 칭하고

존호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의 모든 의견에 의하여 삼가 ‘신라국왕’이란 존호를 올리시옵소서”라는 기록에서 초기

신라는 왕이 다스리던 나라 즉 왕국(王國)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래 그때까지 신라의 통치자를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방언인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칭한

것으로 보아 전기 신라는 고구리의 영향력 아래 있던 속국이거나 조공을 바치던 작은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근거는 호태왕비의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는 문구로 보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태왕 비문에 따르면 399년 왜가 신라에 쳐들어오자 신라에서 광개토태왕에게 사신을 보내 "노객(奴客=신라왕)이 백성을

위해 태왕께 와서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자 태왕이 은혜를 베풀어 그 충성을 칭찬하고 특별히 사신을 함께 보내 (출병을) 알렸고

원병을 보내 왜구를 격파했다는 후속문구가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도 초기 신라는 고구리와 전쟁을 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신라의 초기도읍은 중국대륙 산서성 남부 (6부)
산서남부 임분시의 금성은 김일제의 후손들이 피난온 곳
 
스카이데일리 기사입력  2014/04/05 [10:43]


신라의 천년고도라는 금성(金城)이 지금의 경상도 경주라는 것은 그야말로 반도사관에 중독된 일제식민사학계의 이론일 뿐이다.

과연 신라가 천년 동안 경주(금성) 한 군데만을 도읍으로 했는지 여러 기록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신라의 초기도읍지에 관한 기록들
 
◆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갑자년(B.C57)에 개국했는데, 왕도의 길이가 3,075보 너비가 3,018보이며 35리(里)

 에 6부가 있었다.

21년(B.C37) 경성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고, 26년(B.C32)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어 남해차차웅 원년(4) 낙랑(국)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금성은 낙랑과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파사이사금 22년(101) 금성의 동남쪽에 주위 1,023보(步)의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月城)이라 하였고, 7월 왕이 월성으로

이거하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어 주위가 1,838보, 또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며 주위가

1,906보, 또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주위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였으며 후세에 와서는 두 월성에 주로 거처하였다.

 
길이의 단위인 보(步)는 통상 어른 남자의 발걸음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시대에 따라 4~8척(尺)을 1보로 했고 도량형을 통일했다는

진시황 때 통상 6척을 1보로 하여 약 150~180cm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인 남자의 보폭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보폭인 50cm 정도 또는 2걸음인 약 1m를 1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후 자비마립간 18년(475)에 명활성(明活城)으로 이거한다.

이때는 장수왕이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창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였다.

그리고 소지마립간 때 다시 월성으로 천도한다. 이와 같이 신라는 도읍도 여러 차례 옮겨지고 국호도 여러 차례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도읍지인 금성과 월성으로 천도 이후 기록에 나타나는 금성이 초기도읍지와 같은 곳인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신라의 초기도읍지인 금성이 있던 산서성 임분시 일대는 서기 55년 전후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고, 장수왕 때(427년)는

아예 그곳으로 도읍(평양성)이 옮겨옴에도 불구하고 계속 금성이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옮겨간 도읍에서 금성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참고로 광개토태왕 비문에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리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신라는 먼 곳으로 옮겨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산서성 임분시에서 발견된 金城이라는 글자가 뚜렷한 토성의 서문     © 편집부


신라의 초기 금성은 산서성 임분시
2008년 산서성 임분시에서 금성(金城)이라는 석판을 단 토성인 금성보유적(金城堡遺蹟)이 발견되었는데, 동쪽 성벽의 길이가 144m,

서쪽 성벽이 126m, 남쪽 성벽이 109m, 북쪽 성벽이 123m로 주위 502m이고, 그 금성보유적 서남쪽 분하의 동북안 구릉지에서는

동서 약 500m 남북 약 300m 주위 총 1,600m의 외성이 발견되었다.

 
신(新)나라 왕망이 망하자 김일제의 후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간 땅은 과거 김일제와 관련 있는 요동(遼東) 땅으로 산서성

임분 일대였던 것이다.

지금도 김일제로부터 시작된 김씨의 종가(宗家)가 산서성 임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고, 산서성 임분에 초기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

(金城)이 발견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에 “B.C 86년 한나라 소제 때 고두막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東明)이라고 나라이름을 붙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부여의 옛 도읍 장당경 = 진한(辰韓) = 신라의 옛 땅’이란 말이다.

김일제 후손들이 한(漢)나라의 난을 피해 옮겨간 요동(遼東)은 바로 신라의 금성(金城)으로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도망간 한(韓)의

땅인 것이다. 이를 유적으로 입증한 것이 산서성 임분에서 발견된 금성유적인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 “신라는 변한의 후예로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 왕이 있는 곳을 금성이라 부르며 둘레가 7~8리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나라 때 1리(里)는 약 530여m 라는 학설이 있어 7~8리면 약 4km로 환산할 수 있을 것이다. 도량형은 시대마다 기준이 달라 정확한 길이는 추정할 수 없다고 본다.

▲ 산서성 임분시에서 김일제 화상을 모시고 살고있는 종손     © 편집부
 
 
신라가 차지한 옥저와 예는 어디인가?
 
<북사>와 <수서> 등 중국의 여러 사서에 “신라는 고구리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낙랑 땅에 있었다.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위치를 추적해보면 초기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던 지역이 산서성 동남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와 예가 언급된 사서는 다음과 같다.

1)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에 “고구리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현)과 예맥에 접하고,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한다. (중략) 동옥저는 고구려(현)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대해(=황하)변에 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이 좁고 서남쪽이 길어 천리가 가능하며, 북으로 읍루와 부여와 접하고,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한나라 초기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해 왕이 되었을 때 옥저가 거기 속했다. (중략) 한무제 원봉 2년(B.C109) 조선을 정벌해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사군으로 나누었는데 옥저성이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맥족이 거기를 침입해 구려(현)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현토 옛 부이고, 옥저는 여전히 낙랑군에 속했다.
 
(원문) <三国志 魏书卷三十 乌丸鲜卑东夷传> 高句丽在辽东之东千里。南与朝鲜·濊貊 东与沃沮 北与夫余接。(중략) 东沃沮在高句丽盖马大山之东,滨大海而居。其地形东北狭,西南长,可千里,北与挹娄、夫余,南与濊貊接。(중략) 汉初,燕亡人卫满王朝鲜,时沃沮皆属焉。汉武帝元封二年,伐朝鲜,杀满孙右渠,分其地为四郡,以沃沮城为玄菟郡。后为夷貊所侵,徙句丽西北,今所谓玄菟故府是也。沃沮还属乐浪。
 
2)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에 “예는 북쪽으로 고구려(현)과 옥저에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으로 대해, 서로는 낙랑에 접한다. 예와 옥저 구려는 본시 조선의 땅이었다. (중략) 한 무제 원봉 3년(B.C108)까지 (번)조선을 없애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어 4군을 설치했다. (중략) 단단대령부터 이미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했다. 이로써 그 땅이 넓고 멀어 고개 동쪽을 7현으로 나누었고,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
 
(원문) <后汉书 卷八十五 东夷列传 第七十五> 濊北与高句骊、沃沮,南与辰韩接,东穷大海,西至乐浪。濊及沃沮、句骊,本皆朝鲜之地也。(중략) 至元封三年,灭朝鲜,分置乐浪、临屯、玄菟、真番四郡。(중략) 自单单大领已东,沃沮、濊貊悉属乐浪。后以境土广远,复分领东七县,置乐浪东部都尉。
 
위 기록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맥은 고구리의 남쪽으로 낙랑군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 역시 낙랑군 땅에 있는데 그 위치가 예맥의 동북쪽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를 알면 예맥과 옥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하겠다.

 

즉 낙랑군은 패수현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졌으므로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 또는 약간 넓게 보아 산서성 동남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 산서성 남부 황하변에서 역사왜곡을 위해 옮겨진 낙랑군     © 편집부


한반도에 있다는 동예·옥저는 황하 이북에 있었다 (7부)
신라가 차지했던 옥저, 불내, 한, 예는 산서성 동남부 황하변
 
스카이데일리 기사입력  2014/04/13 [16:59]
<북사>와 <수서> 등 중국의 여러 사서에 “신라는 고구리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낙랑 땅에 있었다. 옥저(沃沮)·불내(不耐)·한(韓)·

예(濊)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에 “예는 북쪽으로 고구리와

옥저에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으로 대해, 서로는 낙랑에 접한다.”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들에서 신라가 차지한 낙랑과 옥저·불내·한·예는 서로 인접한 지명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불내는 고구리 동천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침략해 고구리의 도읍인 환도성(丸都城)을 불태우고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이라는 기념비를 세우고

돌아간 곳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 불내가 어디인지는 옥저·한·예의 위치를 알면 추정할 수 있다.

불내 즉 환도성은 과연 어디일까?

▲ 길림성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 안내 비석     ©편집부

▲ 국사교과서의 옥저와 동예는 한반도 동해변     © 편집부



1. 예(濊)의 위치는 어디인가?

<수경주 권10 탁장수(水經注 濁漳水)>에 “탁장수는 (산서성 동남부) 상당군 장자현 서쪽 발구산에서 나오고, 장수는 발구산 남쪽

산기슭이 만나는 녹곡산에서 나온다. 탁장수는 동으로 진류현 남쪽을 흘러 그 성 동쪽을 지나면서 꺾여 동북쪽으로 흘러 강수가 있다.

강수는 동북쪽으로 흘러 둔류현 고성 남쪽을 지나고 동북쪽으로 장수로 흘러 들어간다.”는 기록이 있고, 
(원문) 浊漳水出上党。长子县西发鸠山, 漳水出鹿谷山,与发鸠连麓而在南。东迳陈留县南,又屈迳其城东,东北流有绛水注之,

绛水东迳屯留县故城南,东北流入于漳,

“청장수는 장무현 고성 서쪽을 지나니 옛 예읍(濊邑)이다.

여기에서 한 지류가 나오니 곧 예수(濊水)로 동북쪽 참호정을 지나 두 지류로 나뉜다.

<위토지기>에 말하기를, (발해군의) 장무군에서 다스렸으며 옛 장무고성이다. 또 동북쪽에서 두 강으로 나뉜다.

한 물은 우측에서 나와 정이라 했고, 한 물은 북으로 흘러 호라 했다. 소위 예구(濊口)이다.

 청장수는 급하게 흘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있어 청장수가 지나는 곳에 예(濊)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清、漳迳章武县故城西,故濊邑也。枝渎出焉,谓之濊水。东北迳参户亭,分为二渎。《魏土地记》曰:章武郡治。

故世以为章武故城,非也。又东北,分为二水。一水右出为淀,一水北注呼池,谓之濊口。清漳乱流,而东注于海。

이번에는 위 탁장수와 청장수가 어디인지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탁장수: 장하의 상류로 발원지가 두 군데이다.

북쪽 발원지는 산서성 심현 서북쪽 천봉령이고, 남쪽 발원지는 장자현 서남 발구산에서 나와 장치현 동남까지 동류하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로성현과 양원현을 지나 북쪽에서 발원한 물길과 만나고 여성현까지 동북쪽으로 흘러 소장수에 합쳐진다.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흘러 로성과 여성, 평순을 지나 하남성 섭현으로 들어가 청장수와 합쳐진다. (이하생략)”

(원문) 浊漳水: 漳河之上游也,有二源,北源出山西沁县西北千峰岭,南源出长子县西南发鸠山,东至长治县治东南,改北流经潞城、

襄垣二县与北源合,又东北流至黎城县与小漳水合,改东南流经潞城、黎城、平顺入河南涉县,合于清漳。《周礼职方氏》冀州,

川曰漳,浸曰汾潞。《后汉书郡国志注》“上党记曰:潞,浊漳也。” 阚驷曰,潞水为冀州浸,即漳水也。世人亦谓浊漳为潞水。

“청장수 : 장하의 상류로 산서성 평정현 남쪽 대민곡이 발원지이다.

서남쪽으로 흘러 화순의 경계로 흐르다 꺾여 남쪽으로 흘러 요현을 경유해 서장수와 합쳐져 하남성 섭현으로 들어가 탁장하와 만나

합쳐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清漳水: 漳河之上游也,源出山西平定县南大黾谷,西南流入和顺境,折南流迳辽县,合西漳水入河南涉县,与浊漳河合,

《汉书地理志》沾县大黾谷,清漳水所出。

또한 <수경주 권9 기수(水經注 淇水)>편에 “청하 역시 동북으로 흘러 예수(濊水)가 나오는 예읍(濊邑) 북쪽을 지난다.

동북으로 흘러 향읍 남을 지나고, 청하는 동으로 흘러 두 물길로 갈라진다. 지류는 나룻터 우측에서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한 무제의 옛 대북을 지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물길들은 어디를 흐르는 강일까?
(원문) 清河又东北,濊邑北。濊水出焉。又东北,过乡邑南。清河又东,分为二水,枝津右出焉。东迳汉武帝故台北。

즉 탁장수는 산서성 남부에 있는 장치시 장자현에서 발원해 산서성 남부를 흘러 동남쪽에 있는 하남성 섭현에서 청장수와 합쳐지는

강이고, 청장수는 산서성 중동부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다 하남성 섭현에서 탁장수와 만나는 강이다.

따라서 청장수가 지나는 예읍(濊邑)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다고 하겠다.

더 넓게 보아 산서성 동남부와 황하 북부 하남성의 동부 일대가 바로 예와 맥과 옥저의 땅인 것이다.

▲ 지금도 그 이름 그대로 산서성 동남부에 남아 있는 탁장수와 청장수와 기수     ©

▲ 원래 산서성 동남부에 있던 옥저·예·맥이 역사왜곡을 위해 한반도 동해변으로 지명되었다.     ©편집부



2. 한(韓)은 어디인가?

광개토태왕 비문의 수묘인연호에 한과 예가 같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한과 예는 서로 인접한 가까운 지명임이 틀림없다.

한은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쫓겨 달아나 그곳에서 한을 세우고 왕이 되는 곳이다.

이 한이 나중에 삼한인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뉘게 되고 마한(馬韓)은 백제로 발전하고, 변한(弁韓)은 가야, 진한(辰韓)은 신라로

발전하는 것이다.

예의 땅을 지나는 청장수와 만나는 탁장수의 발원지인 상당군(上黨郡) 장자현은 위만에게 패한 번조선의 기준(箕準) 왕이 달아나

한을 세운 곳이다.

청주 한씨의 상징적 인물인 한명회의 군호가 상당군이다.

기자의 후손인 기준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는 청주 한씨 대부분은 본향을 충북 청주시 상당구로 알고 있으나 이는 조선왕조 때 지명이

옮겨진 것으로, 원래 한씨의 뿌리가 되는 기준 왕의 진짜 상당군은 산서성 동남부 장치시 장자현에 있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상당군에 대한 설명은 “전국시대 한의 땅으로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상당군을 설치했는데, 산서성

동남부 장자현 서쪽에 있다.

후한 말 동탁이 난을 일으킨 치소 호소성은 장치현 동남이고, 진나라 치소인 로는 산서성 로성현 동북이다.

연나라 모용비의 치소가 산서성 양탄현 동북에 있는 안민성이고 후에 호소성으로 옮겼다.(이하 생략)”

(원문) 上党郡 : 战国韩地,秦并天下,置上党郡,其地有今山西之东南部,以其地极高,与天为党,故名。汉治长子,在今山西长子县西,后汉末董卓作乱,治壶关城。在今山西长治县东南,晋治潞。在今山西长治县东南,晋治潞。在今山西潞城县东北,燕慕容备移治安民城。在今山西襄坦县东北,后迁壶关城,卽汉末旧治也,后魏治安民,复迁壶关,北周于郡置潞州,隋置上党县为郡治,卽今山西长治县治,

宋时郡废。

이렇듯 신라가 차지했던 한(韓)과 예(濊)의 정확한 위치가 산서성 동남부로 밝혀졌으므로 나중에 고구리의 도읍이 되는 환도성인

불내(不耐)도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중국은 가로x세로 1자의 작은 관구검기공비를 길림성 집안에다 옮겨놓고 그곳이 고구리의 환도성이라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관구검기공비를 집안에다 옮겨다 놓고 그곳이 고구리 丸都山城이라는

   역사왜곡 중    

▲ 고구리 도읍지로 둔갑한 길림성 집안시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