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백제의 요서 진출 배경(2) - 단순 참고용

설레임의 하루 2014. 4. 12. 23:42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2014.01.16. 16:51 http://cafe.daum.net/dobulwonin/MJRw/77 

 

 

 

백제의 요서 진출 배경(2) - 단순 참고용

 

구태왕과 대방고지(仇台王, 帶方故地)

1. 한국 역사에서 사라진 백제 구태왕(仇台王考)

 

190년 요동왕 공손탁(公孫度)이 자립하고, 194년에는 공손강(公孫康; 公孫度)이 요동왕이 되었다.

이 무렵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초고왕(肖古王;166-214)시절인데 중국측 기록으로 보면 백제 구태왕(仇台王)이 백제 요양시

대방왕에 진출하고, 공손탁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때 대방고지에 백제가 세워졌다는 기록을 중국 [북사], [수서] 등에 남기게 되었다.

 

그러면 백제 구태왕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데 먼저 백제 왕 가계를 다시 본다.

 

현재 [삼국사기] 기록에서 고이왕(234-286)은 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인데 개루왕의 39년이나 재위하였으므로 고이왕은 이때

이미 장성하였다고 추정되며, 개루왕 사후에 초고왕이 재위 49, 구수왕이 21년 도합 68년이 지나 고이왕은 나이 90세 가까이 되어

백제 대왕에 등극하였는데, 그 이후에도 고이왕은 무려 53년을 재위하였다고 전하니, 무려 141세경까지 살았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된다.

 

또한 비류왕(304-344)은 구수왕(214-234)의 차자인데 234년 구수왕 사후에, 고이왕 재위 53, 책계왕 13, 분서왕 7년등 도합 70년을 지나서 등극하여 재위 41년을 하였으니 최소한 121세 이상 산 것이 되어 있다. 즉 김부식이 기록한 [삼국사기](서기 1145년 편찬)의 고이왕과 비류왕의 나이는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속일본기 권40](서기 797년 발간)에서 근구수왕(375-384)은 백제 16세왕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에서는 14대왕이고 고주몽 추모왕부터는 15대다. 또한 [신찬성씨록](서기 815년 발간)도 백제 혜왕(598-599)에 대하여서 추모왕의 30세손이라고 하였다. 혜왕은 백제 추모왕 이후 29대왕, [삼국유사]로는 28대왕이다. [속일본기][신찬성씨록]에는 백제왕 한분이 사라진 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6대왕인 구수왕, 즉 추모왕 이후 7대왕인 구수왕은 [속일본기]에서 10대왕이라 하였다. 이는 한자로서 의 착오로서 칠이 맞다.

 

사라진 한분이 서너 분이 될 수는 없으니까...혜왕 기록을 봐도 사라진 분은 오직 한 분이고 고대에는 칠을 십과 비슷하게 썼다. 칠이 맞다면 사라진 한분의 백제왕은 7대 구수왕 이후 16대 근구수왕 이전에 존재한다. 특히 왕의 성과 이름이 밝혀진 15대 근초고왕 여구 이전일 것이다. 구수왕(214-234)이 비류왕의 부왕이라 했는데 여기에 엄청난 무리가 있으므로 비류왕은 7대 구수(仇首)왕이 아닌 10대 구태(仇台)왕의 아들로 추정한다.

 

구태왕과 공손탁의 딸이 통혼한 것은 아무리 늦춰 잡아도 (여자의 결혼 적령 14~5세와 공손탁의 194년 죽음을 고려) 210년 이전이다. 구태왕과 고이왕이 착오하기 쉬우므로 두 왕이 겹친 것으로 본다.

 

여기에 백제의 연호로서 문헌상 최초인 낙초(樂初)[삼국유사]에 우연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서기 239년 기미년, 사비왕 2년이 낙초 2년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사비왕(沙沸王)이 너무 어려서 왕위에 세웠다가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이상은 [삼국사기]와 똑같은데 우리가 통설로 알고 있던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여기에 또다른 기록을 인용하였다. “혹은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239)에 사비왕(沙沸王)이 붕()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사반왕은 붕()하였으므로 제위에 올랐던 것이 사실이며, 무녕왕릉에서도 붕()을 썼다. 여기서 234년에서 238년까지 고이왕, 238년부터 239년까지 사비왕, 239년부터 286년까지 구태왕으로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 5, 238년에 궁문 기둥에 벼락이 떨어지고 황룡이 날아나왔다는데 혁명의 은유적 기록으로 보여진다. 구태왕의 재위는 239-286년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고이왕(234-238)98세까지만 살아도 되고, 141세까지 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구수왕이 아니라 구태왕의 아들이 되는 비류왕도 41년을 통치하지만, 이 비류왕도 [삼국사기]에 짜맞추기 위해 최소한으로 121세를 살지 않아도 된다.

 

구태왕 뒤에 286년 즉위한 책계왕은 웅악성에 있던 대방왕의 딸 보과 부인과 결혼한 바가 있었는데 이 웅악성 대방왕이 구태왕의 뒤를 이은 비류왕이 된다. 343년경에 서거한 비류왕은 대략 250년생은 되어야 하고 93세 정도 살았던 것이 된다.

 

따라서 평양 한성에 고이왕, 그 아들 책계왕, 그 아들 분서왕이 있었고, 대방에 구태왕과 그 아들 비류왕, 근초고왕이 있었다.

 

백제 수도성의 이름이 고마성, 즉 곰성이므로 개주시 웅악현이 구태왕의 새 대방 수도로 고려된다. 훗날 당나라가 백제땅을 신라에 뺏기고서 이곳에 웅진도독부를 두었다. 웅악하 밑에 귀주성, 구롱지九壟地 구채九寨 등 구태 백제를 의미하는 여러 흔적들이 있다. 웅악하의 양운향楊雲鄕에는 큰 산성도 남아 있다. 또한 고이왕기에는 중국식 문물제도의 도입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과 일찍이 교류해온 구태왕이 시행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위나라는 238년 요동국 정벌전에 참전까지 했던 고구려와 약속을 어기고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246년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구태왕은 고구려를 도와서 위나라 낙랑의 변경을 쳐서 유주자사 관구검과 관구검을 따라 종군하던 낙랑태수를 고구려에서 철군시킨다.

 

이때 구태왕이 공격한 위나라 낙랑은 하북성 난하의 영지성으로서 요동국이 존재하던 시대에 밀려났던 위나라의 낙랑현으로 고려된다. 이 당시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 바로 만리장성이 시작되던 곳으로 [진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수성현은 하북성 임유관 부근인 것이다. 현재 산해관은 당시의 만리장성에서 명나라 때 동쪽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즉 백제가 친 낙랑은 임유관 부근이고, 그에 대한 위영지현령魏令支縣領 책봉과 관련이 있다.

 

이때 백제 구태왕은 위나라 낙랑태수의 항의를 받고서 포로였던 낙랑인들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위나라는 구태왕이 거느린 한예 땅을 빼앗아서 진한 팔부辰韓八部로 나누어 직접 통치하려고 낙랑군, 대방군 등의 군대를 내보내는데, 구태왕은 즉시 한나라군을 쳐서 대방태수 궁존을 전사시키고, 낙랑군을 요동반도에서 멸망시킨다. 이후 진나라의 요동과 낙랑, 대방은 다시 하북성 난하 부근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국도인 환도성을 함락당한 고구려보다 백제가 훨씬 강성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구태왕의 화려했던 대방 백제 시절을 기리는 벽화 무덤이 요양에 남아있는 위영지령벽화묘魏令支令壁畵墓인데 그 고분 속에는 둘째부인으로 공손부인까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백제 구태왕이기에 공손탁의 딸을 둘째부인으로 거느리고, 또 위나라에서 영지령으로 책봉되었던 것이다.

 

신생국 백제의 위상이 아직 대단하지 않아서 그가 위나라에서 제수 받은 책봉 작호는 현령급인 위영지령에 그쳤다. 요동국을 세운 공손탁도 스스로 평주목사라고 했지만, 위나라에서 제수받은 작호는 고작 현령급의 영녕향후였으니 위나라의 책봉은 야박했다.

 

구태왕묘인 위영지령벽화묘의 행렬도는 안악3호고분의 성상번 행렬도보다 규모가 약간 작지만 백제 최초의 벽화고분이다. 이 무렵 책계왕의 벽화 고분이 서기 300년 영화永和 13년에 서거한 황해도 안악3호 고분이다. 이제까지 고구려 고분으로 착각해온 고분이다.

 

동진의 영화 연호는 12년에 끝났고, 13년 정월에 승평으로 개원하였으니 동진의 영화 13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 1310월에 세운 안악3호고분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반왕의 낙초에 이어지는 백제 독자연호다.

 

한편 황해도와 요양시에서 원강元康, 태강太康 등의 벽돌 고분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그중 원강元康 5818일 을유乙酉라는 벽돌 명전의 기록으로 인해 252년이 선정되고, 239년에 즉위한 구태왕 10년이 원강 원년 248년이 되니 구태왕 10년에 이르러서 원강원년으로 개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원강 5년인 295년의 818일 병자丙子와는 날자 간지가 9일 정도 차이가 나서 이 벽돌의 연호는 중국 원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요양시에도 많은 태강太康7328일 계축癸丑일 명전이 나왔는데, 중국 동진의 태강 7, 286328일 경진庚辰과는 27일 차이가 나서 역시 백제 독자 연호다. 태강은 332, 백제 비류왕 후기의 독자 연호로 추정된다.

 

일본 칠지도에 기록된 근초고왕의 태화泰和 연호는 태화 4, 362년이고 역시 백제의 독자연호다. 그 외 황해도의 태시泰始는 근초고왕의 즉위 연호, 태녕泰寧은 근초고왕의 대동강 한산성漢山城 천도 연호로 고려된다. 황해도 안악 3호고분은 이제까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 고구려 벽화고분, 또는 선비족 전연국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의 묘로 잘못 선전되었다. 벽화의 성상번聖上幡 기록으로 해서 주인공이 대왕인 것을 나타내니, 선비족 동수 따위가 될 수 없고, 그 복식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3세기 백제왕의 복식이며, 기록된 연호는 백제 책계왕의 독자연호로서 서기 300년에 해당한다. 책계왕이 298년에 죽은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지만 사반왕의 즉위년도도 [삼국유사]의 낙초 연호에 의해 무려 4년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그뒤 구태왕 뒤에 이어지는 책계왕의 즉위, 서거 연도도 2,3년 차이가 나는 것이 가능하다. [삼국사기] 광개토왕 즉위년도도 광개토왕 비문과 1년 차이가 나는 실정이라서 [삼국사기]의 연대는 이렇게 유적, 유물로서 연도를 정확하게 교정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역사 찾기 과정이다.

 

안악 3호고분 책계왕묘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영화1310월무자삭 26일 계축               永和十三年 十月戊子朔 二十六日癸丑

사지절도독제군사                                  使持節都督 諸軍事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相

창려, 현도, 대방태수 도향후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유주, 요동, 평곽 도향경                          幽州 遼東 平郭 都鄕敬

상리 동수 자 안                                  上里 冬壽 字

연 육십구 훙 관                                     年六十九 薨 官

 

69세에 죽은 책계왕 동수의 성은 부여씨지만 왕성이라서 관례대로 성을 기록하지 않았다. 무녕왕릉도 그렇다. 상리는 평안북도 평성군 청룡산성의 상차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유주자사 진도 부여씨진이라고 성을 쓰려다가 본래 왕성이라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성씨 자리를 비우고 제대로 쓰지 않았던 것으로 고려된다. 책계왕 동수는 유주의 요동군 평곽현의 현령과 유주의 창려군, 현도군, 대방군 태수를 지냈고 동진으로부터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낙랑상의 책봉을 받았다.

 

즉 구태왕이 246년 낙랑樂浪 변경을 친 곳이 하북성 임유관 부근인데, 바로 이때 동시거나, 혹은 위나라 낙랑, 대방태수를 물리친 260년 전후에 고이왕의 아들 책계왕은 요동군 평곽성이 있던 의무려산 동남방 태안현台安縣을 공격하여 빼앗아 평곽현령이 되고, 또다시 창려昌黎가 있던 금주시錦州市 의현義縣을 빼앗아 창려昌黎와 현도, 대방 등 3군 태수를 지낸 것이다. 책계왕의 이런 전공은 그를 구태왕의 뒤를 잇는 백제대왕에 오르도록 한다.

 

이 무렵 4년전인 영화 9년에 묻힌 평양의 동리묘고분의 벽돌에는 요동, , 현도 태수령 동리가 고분을 만들었다면서 직함을 기록했다.

 

영화9310일 요동, , 현도 태수령 동리 조

永和九年 三月十日 遼東..玄菟 太守領 佟利 造

 

여기서 백제의 한군韓郡이 역사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고구려가 본래의 요동을 가졌고, 백제가 본래의 요서를 가진 상황에서 요동군, 한군, 현도군은 요서의 요동, 요서의 한, 요서의 현도군으로 고려된다.

 

요서군은 노룡현, 현도군은 무녕현 부근이고, 한군은 발한산發韓山이 있던 적봉시 녕성현 대전자향 흑성黑城으로 고려된다. 이 흑성의 봉니封泥에서 난데없이 우미려좌右美閭左가 출현하는데 이 우미려현은 중국 기록에 전혀 없는 현이름이다. 우미려는 적봉시 동쪽의 노합하변에 있는 지명이며 점장대가 남아있는 고구려 고성 터도 남아있다그외 한귀사인韓貴私印도 나왔다. 즉 한씨고향이다. 훗날 조양시도 한씨가 장악하는데 고구려에 저항한다.

 

영화 9년은 안악3호고분 책계왕 동수묘를 기준으로 서기 296년이며, 이때 백제가 요양시는 물론 난하의 요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증명된다.

 

한편 <고이왕기=구태왕기>에 나타난 우수優壽가 내신좌평, 고수高壽가 위사좌평이었는데 안악3호고분 주인공 동수冬壽도 함께 존재했으니 우수, 고수, 동수는 모두 고이왕의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285년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외가 내몽고 적봉시 나만기의 신개하 상류의 의려 부여를 거의 멸망시켜서 동진의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이 의라를 다시 부여왕으로 세웠지만 계속되는 모용외의 침략으로 의라의 부여마저 일본으로 떠나가서 숭신천황崇神天皇이 되었는데 이는 서기 300년경이다. 이때 의라가 한반도 남해안을 먼저 장악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낙랑, 대방이 신라에 귀복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의라왕은 이후 한반도 남해안을 임나라고 부르고 이 임나를 거점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통일한 것이다. 이 무렵 백제는 의무려산 남북과 대릉하 좌우에 창려, 현도, 요동, 대방, 낙랑 등의 이름으로 백제 군현을 세우고 지켜나갔다.

 

한편 대동강 위례성慰禮城에서 즉위한 책계왕(286-298)은 만주 대방왕인 구태왕의 아들 비류왕(300-343)과 통혼했는데 당시는 근친혼이 많았다.

 

이 무렵 요동인遼東人 장통張統이 낙랑樂浪을 점거하여 낙랑태수를 자칭하면서 맥인을 동원하여 백제를 쳐들어오니 책계왕이 나섰다가 그만 전사한다. 이때 지방왕인 비류왕은 웅악현 구태성의 동쪽 벽류하碧流河에 있어서 비류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것이다. 웅악현 동쪽에서 시작하여 요동반도 동남으로 내려오는 벽류하碧流河에는 백제로만 설명되는 고성이 매우 많다.

 

한편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298-304이 전사한 책계왕의 대를 이어서 백제 대왕이 되어 낙랑樂浪郡 서현西縣을 개척한다. 낙랑 서현은 훗날 서락현西樂縣이라고 부른 소릉하小凌河의 금주시錦州市 서쪽 영락永樂이라는 곳이다. 그러나 분서왕은 갑자기 낙랑태수에게 암살당했다. 낙랑태수는 이미 반란을 일으켰던 요동인遼東人 장통張統일 수도 있다.

 

분서왕汾西王의 고분이 대릉하의 조양시朝陽市 원대자元臺子에서 발굴된 벽화고분으로 추정된다. 책계왕의 황해도 안악3호분과 벽화 인물도가 거의 쌍둥이처럼 비슷하다. 같은 화공이나 같은 화파에서 그린 벽화인 것이다.

 

선비족 전연국을 세운 모용외는 본향에서 283년 쫓겨나서 소릉하小凌河의 요동遼東 서욱가徐郁家로 도망왔다가 의려의 부여를 치고 다시 일어났는데, 모용외는 289년 소릉하에 북쪽에 있던 자몽지야紫蒙之野를 얻어서 도하徒河 청산靑山에 대극성大棘城으로 세워 옮겨갔다. 따라서 조양朝陽市, 의현義縣 등은 위나라 낙랑군, 대방군의 전멸 이후로 이미 부여와 백제 땅이었다. 그러나 304년 요동인 장통이 일어나서 낙랑태수를 칭하였는데, 고구려 미천왕이 313, 314년에 이를 쳐서 낙랑, 대방, 현도를 고구려 땅으로 하였다.

 

이는 요동국의 낙랑, 대방, 현도였던 의무려산 남북을 관구검 이후에 백제가 차지했다가 반란자 장통을 거쳐서 고구려 땅으로 넘어가게 만든 것이다.

 

이때 장통이 전연국 모용외에게 도망쳐서 전연국의 낙랑태수가 되어서 319년말에 고구려 하성河城을 친다. 이 하성은 발해 영주도營州道인 발해 장령부의 하주河州로서 대릉하大凌河의 의현義縣 영녕포성永寧鋪城이다.

 

319년 초반에는 동진의 동이교위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와 함께 모용외의 극성을 치다가 실패했고 최비가 고구려로 망명했었다. 그리하여 장통으로 인해 대릉하를 장악한 모용외는 321년에 동이제군사東夷諸軍事가 되어서 요동성에는 모용한을 두고 평곽성에는 모용인을 둔다. 대릉하가 연나라 물이 되었다. 부여-백제 땅을 선비족 전연국이 차지한 것이다. [진서-모용황전]에서 342년에는 전연국이 조양시朝陽市로 천도하는데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돌아와서 343년에는 조양시에 끌어다가 배치한 고구려, 백제인들이 고향 생각하고 조양시에서 반란할 것을 염려하였다.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爲國家深害...

 

고구려인은 342년에 환도성에서 5만명을 끌어왔지만 백제인들이 아직 끌려온 기록이 없었는데도 이미 조양시에 백제인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니, 이는 300년경 분서왕 때 조양까지 진출해온 백제인들이 319년 이후에 본토와 고립되어서 선비족에게 흡수당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뿐 아니라 3461월에 선비족 모용황은 동쪽으로 기마병 부대를 보내서 부여를 습격하고 그 왕 여현餘玄과 부여인 5만명을 잡아오고 여현을 사위 삼는다.

 

본래 녹산에 살다가 백제에 밀려나 연나라 부근으로 간 부여는 개주시 웅악성 부근으로 고려된다. 346년에 전연의 동쪽에는 백제의 한 지방왕으로서 부여왕이 존재했을 뿐인데 백제도 342년의 고구려처럼 선비족 모용황에게 패전한 것이다.

 

한편 구태왕의 아들 비류왕(304-343)이 죽고 분서왕의 아들 걸왕契王이 백제대왕으로 섰는데 바로 이 모용황과의 전쟁에 패전하여서 부여왕과 5만 백성이 끌려가니 걸왕이 패전의 책임을 져서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80인을 데리고 떠나가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이 되었다.

 

과 경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斯呂, -)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여기서 오()는 오(), ()와 혼용되는데 효안왕의 오()와 마찬가지로 백제 왕가의 성인 여()씨의 우리말 발음에 대한 일본식 차자(借字)이다. 그의 이름 시로(斯呂)는 대()로도 썼지만 백제 계왕의 계()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고 시루시로도 읽는다.

(참고; 일본서기 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인 후엽지계後葉之契시루시=증표로 읽는다.)

 

위덕왕이 된 창왕과 같이 걸왕의 이름은 여걸(餘契) 혹은 여설(餘契)이 되고, 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걸왕이 진작에 백제 대왕위에 있던 343년부터 346년까지는 비류왕의 아들들이 일본으로 쫓겨나서 일본을 정벌했는데 근초고왕이 바로 일본무존日本武存, 왜건명倭建命으로 추정된다.

왜건명의 본명은 오구나男具那였는데 이는 남근, 즉 우리말 좆이다. 이는 男具那 <= 男根 <= <= 照古, 素古, 肖古 에서 나온 이름이다. 일본무존의 검이름 초치검도 본래 초고검肖古劒으로 고려된다. 그리고 일본무존, 초고왕의 일본내 가짜릉 이름이 백조릉이다.

 

일본무존의 일본정벌은 성무천황 때에 백제왕자, 왕족들에 대한 일본 땅의 분봉으로 이어진다.

한편 346년 부여의 패전으로 백제대왕 걸왕이 일본 경행천황이 되고, 대신에 근초고왕자는 백제로 돌아가서 백제대왕이 되었던 것인데 얼마후 근구수 왕자가 또 일본에 건너간다.

 

일본은 당시 근초고왕의 일본 아들인 중애왕이 이어받아 통치하였는데, 그 생모는 신라계였고 왕비는 가야계였다. 이때 근초고왕의 백제 아들인 근구수왕자가 일본 구주九州 구마소熊襲에 백자국百慈國을 세운다. 이에 중애왕이 구주를 치려고 하니 근구수왕자는 주길대신住吉大神(근구수왕)의 이름으로 구주 대신 황금의 나라 신라를 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중애천황은 신라 대신에 기어이 구주를 치러왔다. 이때 주길대신은 구주의 웅습은 려육膐宍의 공국空國이라고 말했다. 려육이란 골육, 혈친을 의미하고 공국이란 실속이 없다는 의미로서 고작해야 골육이 가진 작은 땅이니 뺏으려들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중애천황이 계속 근구수왕자와 골육전을 벌이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고, 그의 왕비였던 기장족희 신공여황은 잡혀서 근구수왕자를 섬기게 된다. 그후 근구수왕자는 백자 태자로 승격하여 신공여황을 데리고 백제 위례성慰禮城으로 돌아갔는데, 백제는 신공여황을 아이부인阿爾夫人이라고 불렀다.

 

그후 신공여황 혼자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도중에 침류왕, 즉 응신천황應神天皇을 출산한다. 중애왕은 근초고왕의 원자,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차자였으므로 침류왕이 누구 아들이든지간에 근초고왕의 손자다.

 

온조 왕모였던 소서노, 구이신 왕모였던 팔수부인은 매우 힘들게 나타나는 백제의 왕모 이름인데 침류왕의 모후가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아이부인阿爾夫人이라 기록되었다. 아이부인, 팔수부인이 일본인이기 때문으로 고려된다. 아이부인은 활팔찌인 아예阿叡를 팔에 차고 다닌 일본의 신공여황과 동일인물로 고려된다.[일본서기-응신천황기]에 신공여황이 병(= 호무다= 혼다)이라는 활팔찌를 팔에 차고 다녀서 그것을 아예阿叡라고 했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응신천황, 즉 침류왕은 신공여황의 뱃속에서 전투를 치러서 태어나자마자 응신천황의 팔에 활팔찌처럼 굳은 살인 륙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침류枕流(, 枕流 枕宍)왕이기도 한 것이다.

근초고왕은 침류왕자에게 칠지도를 만들어 보내서 왜왕倭王으로 임명한다. 침류왕에 대한 왜왕 책봉 임명장인 칠지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태화 4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왕의 세자 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성상은 말씀하시어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보내니 후세에 전하라.

 

泰和 四年 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 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 ○○○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516일 병오일인 근초고왕의 태화 4년은 362년이고, 침류왕은 360-361년경에 태어난 것이다. 침류왕이 일본에서 칠지도를 전해 받은 것이 368년이었다. 백제의 사자들이 왜왕 임명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진주晉州 부근의 탁순국에 붙들려서 신라에 압송되어서 바로 건너오지 못하다가 그제서야 도달하여 전달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해에 왜왕으로 즉위하는데 당시 나이는 8세 정도다. 383년에 사마숙녜가 충성의 거울을 받치니 일본의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계미년 8월일, 즉위 16,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 왜국 신하 사마가 남제왕께 길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개중비치와 예인금주리 2인 등을 보내어 백상동 200관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어 바칩니다.

 

癸未年 八月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 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奉 遣 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위에서 계미년팔월일은 계미년 팔월의 어느 날인데 이어지는 16왕년十六王年은 백제왜왕 남제왕男弟王16년이다. 신공여황은 응신천황의 일본 지배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응신천황을 일본무존 오구나男具那의 아들인 중애왕仲哀天皇과 신공여황의 막내 왕자로 포고하였으므로, 응신천황은 남제왕男弟王으로 불렀고 그의 즉위 16년이 계미년 383년인 것이다.

 

응신천황은 특이하게 신과 이름을 서로 바꾼 기록도 있다. 그래서 칠지도에 기록된 백제왕 여기餘奇와 일본 남제왕男弟王 두 개의 이름을 가진 것이다. 한편 거울에 등장하는 사마가 응신천황의 신하였던 사마숙녜인데 백제의 사마왕인 무녕왕武寧王으로 착각하고 남제왕을 506년 즉위한 계체천황으로 곡해하고 보면, 계미년은 계체천황 즉위 3년전인 503년이라서 맞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침류-남제왕男弟王5대손으로서 계체천황男大邊天皇을 보는 것이 옳다.

 

383년 근구수왕이 서거하고 일본에 있던 침류왕이 백제대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383년 전진前秦과 동진東晋의 비수대전을 전후하여서 시작된 백제의 산동반도 진출은 군사적 모험으로서 백제 내부에 분란을 일으켰다.여화, 여암, 여진(유주자사진묘 주인공) 등의 백제 군대는 하북성河北城으로 상륙했고 벽려혼辟閭渾 등은 산동반도 청주淸州로 상륙했다. 그 뒤를 이어서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가 남아있는 동래東萊로 백제대왕 침류왕이 상륙했을 것이다. 침류왕의 시호인 침류의 어원이 되는 침석소류枕石漱流는 산천을 떠도는 모습의 고사성어다. 그런데 중국으로 원정 나간 침류왕 대신에 백제 본토를 지키던 아들 아신왕이 384년 진사왕에게 쿠데타를 당하여 본토 왕권을 찬탈당했다. 백제 침류왕은 백제 본토로부터 보급이 끊겨서인지 388년에 왜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예전천황譽田天皇이라 하였다.

 

이때 백제 본토와 해외의 균열로 인하여 광개토왕의 백제 침공이 이루어지고 백제 본토에서 패전당한 진사왕은 백제 땅 구원狗原에서 구원군인 왜군을 만나는데 왜군은 배신자인 백제 진사왕을 죽이고 다시 아신왕을 세웠다.

 

[일본서기]의 응신천황 3년 기록에 진사왕辰斯王이 응신천황에게 무례하여 왜국왕이 기각숙녜紀角宿 등 네 명의 일본 장군을 백제에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침류왕의 원자元子인 아신왕阿莘王을 백제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응신천황-침류왕은 394년 일본에서 서거하였다.

 

396년에는 백제 아신왕이 본토 주요 부분인 요동반도와 평안도를 광개토왕에게 잃어버린다. 부왕은 죽고 없고, 삼촌들만 있는 일본에 아신왕은 전지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군사를 요청한다. 이후 왜, 백제 연합군이 필사적으로 고구려에 반격하지만 구토를 회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399년에는 산동반도 벽려혼마저 패퇴하여서 산동반도 청주마저도 선비족 남연南燕에게 잃었다.

 

[북위서-물길전]에서 470년경 백제 개로왕은 대동강 이북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서 동북의 말갈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기로 밀약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472년에 사자 대방태수 사마 장무張茂를 북위국에 보내서 협상하였다.

 

이 대방태수 장무의 부형이 468년에 황해도 봉산에 묻힌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로 고려된다.

장무이의 벽돌 고분이 공주의 무녕왕릉의 벽돌고분으로 형식이 이어진 것이고, 장무이 이전에는 요양시遼陽市나 개주시 등에서 벽돌고분 양식이 퍼져나와서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전해온 것이다. 황해도 봉산의 대방태수묘는 200년경 요동국이 처음 만든 대방군 땅이 아니라 그저 백제 한복판 영토로서 468년경 멀리 밖에 나가 대방태수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묻힌 백제 귀족묘일 뿐이다.

 

또한 백제 개로왕은 동생 곤지왕에게 자신의 왕비를 같이 보내주면서 일본 청녕천황淸寧天皇이 되어 왜국을 다스리게 하였다. 청녕천황은 갈성한원葛城韓媛을 황태부인皇太夫人이라 칭했는데 본래 개로왕의 비였기 때문에 높인 것이다. 개로왕은 태자 문주왕에게 산동반도를 개척하도록 내보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에 부흥을 꿈꾸는 백제 개로왕을 정벌하여 참살하였다.

 

이후 백제 문주왕이 본토로 돌아와서 충청남도 공주에 새로 정도하였다.

 

506년경 무녕왕이 다시 대동강 이북까지 수복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외국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한단고기] 기록에서 502년에 무녕왕은 중국의 산동반도를 고구려에게 다 잃고 말았다. 백제 국력의 엄청난 손실이다. 바로 그때 중국 산동반도를 빼앗은 고구려는 그만큼의 군사력 손실로 인해서 대동강의 평양성을 무녕왕에게 빼앗겼을 수도 있다.

 

<평양성벽각서>에서 고구려는 백제에 평양성을 빼앗긴 사실이 있다.

 

무녕왕 이전 동성왕 때인 490년에 백제는 산동반도에서 북위군北魏軍과 대결전을 치렀다. 이때 백제는 수십만명의 북위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여서 백제장군 사법명沙法名은 정로장군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贊首流는 안국장군 벽중왕辟中王으로, 해례곤解禮昆은 무위장군 불중후弗中侯, 목우나木于那는 광위장군 면중후面中侯로 임명하였다. 동시에 용양장군 낙랑태수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陣明 등도 기록되어 있다. ‘

 

한편 [남제서]에서는 개로왕 혹은 모도왕이 임명했던 건위장군 광양태수 고달高達, 건위장군 조선태수 양무楊茂, 선위장군 회매會邁등이 보인다. 동성왕은 광양태수 고달을 대방태수로, 양무는 광릉태수廣陵太守, 회매는 광무장군 청하태수淸河太守로 바꿔 임명하였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국南濟國에 포고하였다. 역시 동성왕 때에 영삭장군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을 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都漢王으로 임명하였고,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는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용양장군 매려왕邁慮王 여력餘歷, 광무장군 불사후不斯侯 여고餘固 등이 새로 임명되었다. 이런 불세출의 백제 장수들이 바로 백제인 유주자사 진묘 주인공 부여진을 이어받은 백제 영웅들인 것이다.

 

490년 산동에서 북위와의 결전에 이르기까지 그전에 이미 벌써 산동반도를 개척한 백제왕은 동성왕 모대牟大의 조왕祖王인 모도왕牟都王으로 고려하는데, 그는 바로 백제 문주왕汶洲王이다. 문주왕의 문주나 모도왕의 모도나 문등현의 문등이 고대에 비슷한 발음이다. 특히 일본식 발음이 그러한데 일본 발음은 부여와 백제의 발음이다. 문주왕의 문주汶洲라는 지명이 한반도가 아니라 산동반도 문등현文登縣 문성文城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동반도를 개척하던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개로왕의 참변을 듣고 바다를 건너 귀국하여서 공주에서 새로 백제를 일으킨 것이다.

 

유유劉裕의 송나라가 골육간의 살육으로 내분에 쌓인 틈에 문주왕의 약진으로 산동반도를 거의 다 차지한 백제는 북위와의 결전이 당연히 예정된 것인데 백제는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승리하였다.그러나 이 산동반도 백제 땅이 십여년 후, 502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모두 빼앗긴다.

 

문자명왕은 백제의 식민지를 거의 다 빼앗아서 제, , , 이 이제 고구려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때가 고구려의 최전성기다. 이 산동반도는 581년 수나라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이 산동반도 출신의 장수들이 거꾸로 바다를 건너 백제와 고구려를 다시 치러 들어와 결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역사의 부메랑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안에서 싸우지 않았으면 백제, 고구려의 고향 만주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밖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산동반도는 배달인의 앞뜰이고 일본 구주는 그 뒤뜰이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후예가 세운 북제北齊는 백제 위덕왕을 동청주자사라고 책봉했었다. 백제가 다시 산동반도에 들어와서 남쪽 진과 완충하고 진으로부터의 위험을 제어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 위덕왕은 신라와 싸우기 바빠서 다시 산동반도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사이에 북제는 북주에 망하고 북주는 수나라에 망했다. 이후로는 고구려 연태조와 강이식 장군, 연개소문, 발해 장문휴가 간간이 산동반도를 밟아보았다. 결국 부여의 내몽고를 잃고 백제의 산동반도를 잃고 또 뒤에는 백제, 고구려의 만주를 잃었다.

 

참고사항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餘句)345년에 즉위하였는데 368년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기병 2만명으로 백제의 치양(雉壤)에 쳐들어와서 유린하였다.

 

당시 백제 태자 근구수(近仇首)는 반걸양(半乞壤)에서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수곡성(水谷城) 서북쪽까지 고구려군을 추격하였다. 훗날 동성왕 때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살수(薩水)를 쳐서 신라가 패전하고 견아성(犬牙城)에 포위되니 백제가 구원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가 백제 치양을 쳤고 이번에는 신라가 백제를 도와 장군 덕지(德智)를 파견하여 백제를 구원하였다.

 

여기서 신라의 살수(薩水)는 강원도 함흥과 정평군을 흐르는 금진강(金津江)이다. 사수산(泗水山, 1747M) 에서 비롯되며 하류에는 사수리(泗洙里)가 있다. 바로 이 부근에 고구려 장곡현(長谷縣)이 있었는데 백제 수곡성(水谷城)의 후신이다. 현재의 정평군(定平郡) 금진강변(金津江邊)이다. 백제 수곡성은 세류고성(細柳古城)으로 추정되며 토축이고 성둘레는 4228척이었다.

 

부근에 장곡폐현, 여위고성, 봉대고성, 수시리고성 등 고성이 많은 것은 국경지방이었음을 지지하는 것이다. 살수, 즉 금진강에서 패하고 쫓겨간 신라군이 보전한 견아성(犬牙城)은 영흥군 진성봉에 있던 진술성(鎭戌城)이다. ()은 견()을 바꾼 것이다. 북쪽에 이어지는 천앙봉(天仰峰), 또 북쪽의 왕장리(旺場里)도 개짖는 모습을 의미한다.

 

한편 치양(稚壤)은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고구려는 백제가 신라의 견아성을 구원하자 백제의 치양성을 쳤는데, 서로 가까운 곳이다. 이때 백제를 구원한 신라장수의 이름은 덕지(德智)인데 그의 이름을 붙인 덕지강(德池江)이 고원군(高原郡)을 가로지른다.

 

즉 덕지강과 금야강 하구까지가 5세기말의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또 금야강 상류는 백제 땅, 정평군(定平郡) 금진강(金津江)은 고구려 땅이 되는 것이다. 개로왕 아들이 백제 문주왕인데 그의 다른 이름이 모도(牟都)이고 모도봉(毛都峰,1883M)은 치양으로 추정한 요덕군 북쪽에 남아있다.

근초고왕은 368년 겨울 11월에 한수(漢水)에서 열병하였는데 이 한수는 대동강이다.

37010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하(浿河)에 쳐들어왔는데 근초고왕이 패하(浿河)에서 맞아 싸워 고구려를 물리쳤다. [삼국사기]의 패하(浿河)는 태자하(太子河)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고구려본기>에서 370년 전쟁은 패하(浿河), 392년 사건은 패수(浿水)로 각각 달리 구별해 기록한 것이 일치한다. 이는 백제의 요양시 태자하 패하와 고구려의 평양성 패수로 구별된다. 이 직후 근초고왕은 철령시 고구려 평양성을 치도록 하여 태자 근구수가 정병 3만명을 이끌고 철령시 평양성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다. 고국원왕은 태자하를 따라 내려가 요양으로 진출하려다가 실패하고 대신에 양천 성자산성에서 백제군을 맞아 전사한 것이다.

 

372년 백제는 청목령(淸木嶺)에 성을 쌓았는데 청목성(淸木城)이고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고읍성(古邑城)으로 본다. 뒷날에 개로왕이 청목책을 설치한 곳은 희천군의 대추령(大楸嶺)으로 추정한다. 희천군은 본래 청색(淸塞)이라고 하였었고 청목(淸木)은 청물의 의미로서 청천강변을 의미한다. 이는 고구려 집안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을 타고 한반도 옥토로 내려오는 길목에 방어성을 쌓은 것이다. 374년에 소수림왕(小獸林王)이 함경남도의 백제 수곡성(水谷城; 今 定平郡 長原面)을 쳐서 점령하였다. 백제의 치양성(稚壤城; 耀德郡 宣興面)이 위협받게 되었다. 375년에 소수림왕은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듬해인 376년에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餘須)은 정병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철령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물러나왔고,그해 11월에는 고구려가 추격군을 보내어 백제를 침범하여 왔다.

 

3834월에 근구수왕이 서거하여 침류왕이 즉위하였고 11월에는 고구려 소수림왕이 서거하여 고국양왕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384년 백제는 침류왕이 퇴위하고,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384년 고국양왕(故國壤王)은 군사 4만명으로 후연(後燕)을 쳤다. 당시 용성을 지키던 모용수의 부하장수 대방왕 모용좌()가 구원한 요동, 현도 2군을 빼았았는데, 11월에 연의 모용농(慕容農)이 다시 찾아갔다. 이 요동, 현도는 대릉하 주위였다. 훗날의 고구려 요동성이다. 이후로 부신시, 신민시, 흑산현 등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왔고 이는 백제의 개주시(蓋州市) 지역 삼면(三面)에서 포위한 모습이다.

 

385년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설치한 백제의 국경 초소는 관방(關方)이라 하였는데 청목령, 즉 평안북도 희천군에서부터 북으로 팔곤성(八坤城)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임하였다. 팔곤은 토속신에 제사를 지내는 관제(灌際), 팔관회와 관련되는데 팔관수가 그 흔적이다. 팔곤이 팔관과 고대 발음이 같다.

 

단동시 애양현(靉陽縣) 관수진(灌水鎭) 북쪽 관자령(1206m)을 넘어서 환인현 팔리전자(八里甸子)가 팔관 지방의 중심으로 보인다.

 

청천강 북쪽의 희천성, 즉 백제의 청목령에서부터 험한 산맥을 따라 북으로 팔곤성, 즉 노독정자산에 이르렀는데, 서쪽으로 태자하를 따라서 본계, 요양시, 해성시로 이어져 서해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385년에는 고국양왕이 백제를 쳤고 388년에는 백제 진사왕이 고구려를 쳤다. 386년 고구려에 예속된 말갈군이 관미령에서 백제를 이겼다. 당시 백제의 동쪽 관미령은 북청군(北靑郡) 통팔령천(通八嶺川)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의 말갈군이 북청군 영덕산(嶺德山)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387년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쳤다. 특히 389년에는 백제가 고구려 도압성(都鴨城)을 빼앗았다. 고구려쪽에서는 도곤성(都坤城)이라고도 기록하였다. 북청군의 통팔령천의 동쪽 가지는 곤파천, 혹은 압파천이라고도 한다. 즉 당시에 도곤성과 도압성이 각각 양국에 기록된 흔적으로서 지금도 곤파천, 압파천이 병용되는 것이다. 아무튼 도곤성은 대곤호(大困湖), 압해산이 있는 신포시 구남대천(舊南大川) 남안 발해고도비(渤海古都碑)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니망지산성, 홍도동산성, 다탄대고성, 허천평성 등 고성들이 상당히 밀집되어 있다.

 

390년 말갈이 백제 적현성(赤縣城)을 합락시켰다. 여기서 적현은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으로 추정한 바가 있다. 개로왕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 때의 침공으로 한성을 함락당하고 왕의 일가족이 살해당했다.이때 개로왕은 고구려 첩자인 승려 도림의 영향으로 화려한 성을 쌓느라고 국력을 낭비했다.

당시 개로왕이 멸망한 백제 한성(漢城)의 지리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서기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 직전에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충청도 부여땅으로부터 북진하면서 대곡[]한성(大谷[]漢城) 212성을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가 군()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 대곡군이 오늘날의 평산군이었으므로 대곡군에 한성(漢城)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기록은 대곡군 한성과 오곡군(五谷郡; 今 瑞興郡) 쌍현성 등 212성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평산은 백제의 한성이고, 고구려의 대곡 한성이었다.

 

둘째는 [삼국사기]<백제본기> 개로왕(蓋鹵王) 편과 [일본서기] 웅략왕(雄略王) 20년조에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한 기록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는 백제 북성(北城)7일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성(南城)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주살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이 백제 왕도 한성(漢城)을 함락시켰다.

[일본서기]; 백제 개로왕의 을묘년(475)에 맥(, 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쳐서 칠일칠야동안 쳤고 왕성이 마침내 함락당하니 위례성을 잃었다.

 

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貊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 國王及 大后王子等 皆沒敵手

 

즉 칠일주야로 공격하여 함락시킨 북성이자 대성은 대시한성, 즉 평양의 대성산성이고 상대되는 남성이자 위례성은 황해도 대곡한성, 즉 태백산성이며 백제 2차 위례성으로 추정된다. 태백산성 서쪽 라장산(羅將山)은 신라장수 이사부와 관련될 것이다. 북쪽 모니산은 개로왕의 모니부인(일본서기)을 연상하게 한다. 남성은 평산 태백산성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위례성이다. 2차 위례성이다. 백제 아신왕의 새수도로서 [일본서기]에서는 신제도원(新濟都媛)이 떠나온 새 백제도성, 신제도(新濟都). 따라서, 마침내 백제 위례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된 것이다.

 

셋째, [일본서기] 흠명왕 12년 기록에서, 550년 경오년에 백제 성왕(聖王)이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쳐서 회복한 기록이 있다.

 

百濟 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任那, ) 王伐高麗 獲 漢城之地, 又進軍 討平壤, 凡 六郡之地 遂復故地.百濟 棄 漢城 及 平壤 新羅因此 入居漢城 今 新羅之 牛頭方, 尼彌方

 

[삼국사기]에서 529, 성왕(聖王) 710월에 고구려 안장왕이 쳐내려와 백제의 오곡군(五谷郡)을 차지하였는데, 오곡군은 오늘날의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이다. 이어서 550년 성왕(聖王) 28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으며, 이어서 신라가 어부지리로 두 성, 즉 도살성과 금현성을 다 빼앗아 차지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의 기록이 [일본서기] 흠명왕기 기록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평양이 백제 고지인데 한성(漢城; 平山 慰禮城)을 되찾은 성왕이 더 나아가 평양(平壤) 6개 군()을 수복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의 반격에 쫓겨 백제가 평양성 등에서 물러나니, 한성(漢城)에는 신라가 들어갔는데 이곳이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 되었다.

 

신라 우두방은 고구려 우잠군(牛岑郡)이었던 오늘날의 금천군(金川郡)을 가리키는데 평산 한성의 동쪽이다. [일본서기]의 한성 위례성은 바로 평산군 태백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충청남도 부여의 금강처럼 곰나루, 곰강, 고마성은 백제의 수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금현성은 문주왕이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본래 위례성이라는 이름 대신에 부쳐진 태백산성의 새 이름이 된다. 도살성은 북쪽의 남강 아래 도소면 부근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서 평양(平壤)은 분명히 백제의 고지(故地)로서 한산성이었다.

 

대성산 아래 대시한성, 즉 안학궁이 있고, 한성(漢城)은 평산한성으로서 신라 진흥왕의 신주(新州)가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556년 신주를 폐하고 서울에 북한산주(북한산성)를 두었고 다시 북한산주를 567년 남천주로 바꾸었다. 혹시 신주를 남천주로 바꾸었는지도 알 수 없다. 평산에 남천읍이 있다. 물론 경기도에도 남천이라는 이름이 있다. 태백산성의 현재 물이름인 예성강(禮成江)이다. 예성강은 위례성강(慰禮城江)의 준말이다.

 

예성강 상류의 수안군(遂安郡) 위라천(位羅川)도 위례천(慰禮川)을 의미하는데 그 남쪽은 부여면(夫餘面)이다. 백제의 원고향은 졸본부여이므로 백제인은 부여씨를 성으로 삼았는데 위라천의 주변의 부여면(夫餘面)도 그와 관련되는 것이다. 백제 성왕은 사비성 천도후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다. 위례성강을 끼고 건설한 평산군 태백산성과 금강을 낀 부여 사비성의 입지 선택과 건설 유형이 매우 유사한 점이다. 이는 요양시 구성, 석성, 평양의 청암동 토성 등과도 유사하다. 부여 사비성은 본래 부소산성이다.

 

태백산성의 조선시대 이름은 성황산성(聖隍山城)이다. 위례성을 바꾼 이름이다. 남쪽에는 부아악(負兒岳)을 의미하는 새로운 자모산성(慈母山城)과 철봉산성(鐵峰山城)이 남아있다.

 

기타, 평양 서쪽에서 발견된 평산군(平山君) 신사비(다른 말로 점재현 신사비)에는 평산군(平山君)이 백제의 수호신(守護神)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위례성이 당시의 백제 수호신이 계셨던 곳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덕왕(景德王) 21년에 오곡(五谷;황해도 서흥군), 휴암(鵂巖;봉산군), 한성(漢城), 장새(獐塞;수안군), 지성(池城;해주), 덕곡(德谷;) 6성을 쌓았는데 여기서의 한성(漢城)도 황해도로 보아야 하며, 그 위치는 사리원과 수안의 사이로서 응당 평산군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평산군의 읍성인 태백산성, 즉 성황산성(城隍山城)이 개로왕의 백제 한성이었고, 주위로 자모산성(慈母山城), 철봉산성(鐵峰山城) 등을 쌓았다. 개로왕의 위례성으로 비정된 성황산성은 둘레 7525척의 석성이었고, 자모산성은 성둘레 2480, 철봉산성은 둘레 213척의 석성이었다. 대현산성은 20238척이었다. 대현산성과 성황산성의 관계는 대동강 대성산성(24300)과 안학궁(5160)의 관계와 같다.

 

5. 낙랑 유물의 허구성(樂浪 遺物 虛構性)

 

1. 낙랑 고분은 백제 고분이다.

 

일본인들이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하여 중국의 낙랑군이 대동강에 있었다고 해석했던 유물과 유적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낙랑 고분, 소위 중국식 고분인데 이 모두가 백제, 또는 고구려 고분이다. 그러한 고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의 부장품에는 왕망시대에 주조된 화천(貨泉)이 출토되었다.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최소한 후한(後漢)시대 이후로서 전한(前漢)시대의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 윤내현(尹乃鉉)의 해석이다.

 

그러니 필자는 백제 구태왕이 중국에 진출하여 중국식으로 제례 의식을 도입한 이후에 백제인의 손으로 건설된 중국식 백제고분으로 추정한다. 큰 특징은 무녕왕릉과 같은 벽돌 고분이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고구려의 수천개 고분, 경주의 신라 고분들에 견주어 그에 상당하는 백제 고분이 기왕의 해석에서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여기 황해도 신천군, 봉산군, 서흥군, 그리고 평양 남쪽에 있는 수많은 낙랑 고분이 사실은 모두 백제 초기, 중기, 그리고 고구려 말기의 고분이다.

 

2. 낙랑 기와는 백제 기와다.

 

대동강 유역 낙랑토성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대진원강(大晉元康),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대진원강은 서진의 혜제의 연호로 보면 서기 291년부터 299년간 사용된 연호이다. 이 시기는 백제 책계왕(責稽王;286-298)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모용외의 선비족 국가가 요령성 조양부터 북경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이 한반도에 들어올 여력이 없다. 따라서 백제가 요동반도 중심 요양시 낙랑까지 확실히 차지하고 있었으며, 평양의 토성에까지 진나라 세력이 있었다면 농담이다.

 

[진서]에는 근초고왕에 대하여 평양 천도 후인 372년에 동진에서 낙랑 태수라고 책봉한 기록도 있다. 동수묘, 걸왕릉도 낙랑상이다. 즉 백제왕이 있는 곳을 낙랑으로 인정해준 것이다.357년에 후연(後燕)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낙랑공이라고 했었고, 이후 장수왕부터 낙랑공이 지속되었다.

 

[양서] 이후부터 백제왕을 가리켜, 중국에서는 대방왕이라고 일컬었다. 광개토왕도 대방왕이라고 칭한 적이 있는데 이는 백제의 요동반도를 광개토왕이 빼앗았기 때문이다.

 

3. 낙랑 봉니는 백제 낙랑군에서 온 것이다.

 

토성 지역에서 출토된 봉니(封泥)로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조선우위(朝鮮右尉)”,“염한장인(言冉邯長印)” 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낙랑군 태수의 봉니와, 낙랑군에 속했던 조선, 염한현 등의 지명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 대동강이 그 지역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그 이유는 봉니의 성격이 발신지를 표시한 것이지만, 발견되는 곳은 발신지가 아니라 수신지, 혹은 경과지이기 때문이다. 즉 이 봉니들은 하북성 낙랑군 지역 여러 곳에서 백제의 대동강 토성으로 보내온 것들이다. 즉 백제 구태왕의 신하 낙랑태수나 조선현령, 염한현령 등이 보내온 공문서이다.

 

4. 낙랑 인장은 백제 인장이다 

 

대동강 여러 고분에서 각각의 인장(印章)이 출토되었는데 왕광묘(王光墓), 왕우묘(王旴墓),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부조장묘(夫租長墓) 등에서 출토된 인장이다. 왕광묘에서는 낙랑태수연 왕광지인(樂浪太守掾 王光之印), 신광(臣光), 왕광사인(王光私印)이 발견되었다. 왕우묘에서는 오관연왕우(五官掾王旴), 왕우인신(王旴印信) 등이 발견되었다. 부조예군묘와 부조장묘예서는 각각 부조예군(夫租薉君), 부조장(夫租長)의 인장이 출토되었다.

 

왕씨는 백제인의 주요성에 포함된다. 다음 동성왕(東城王) 때의 [남제서]에 나타난 백제 관직과 백제인명을 소개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용양장군 낙랑태수 모유(慕遺), 건무장군 성양태수 왕무(王茂),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張塞), 양무장군 진명(陣明)”

 

즉 백제 관직에 낙랑태수도 있고 조선태수도 있다. 또한 성양태수는 바로 왕씨였다. 그러니 왕광은 왕무의 조상으로서 일찌기 중국에 진출하여 낙랑태수연(낙랑태수 보좌역)을 지낸 것이다. 또한 왕우는 왕광의 혈연으로서 오관연을 지내고 돌아왔던 것이다. 한편 보란점시(普蘭店市)에서 발견된 임예태수(臨穢太守)의 인장도 백제의 것이다.

 

5. 효문묘동종은 수집품이다.

 

고분의 부장품으로 효문묘동종(孝文廟銅鐘)이 있다. 동종의 주조 연대는 명문에 의해서 기원전 41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동종은 훨씬 후대의 동경(銅鏡)과 같이 출토되었다. 즉 효문묘동종은 제조하고나서 한참 뒤에 부장된 것이다. 또한 효문묘의 주인인 문제는 한나라 무제의 아버지로서 낙랑군이 한나라에게 속하기 이전에 죽은 사람이다. 즉 효문묘동종과 낙랑군은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이 효문묘동종 역시 우리 백제인이 중국에 가서 봉사하고 돌아오며 습득한 기념품인 것이다. 일본 땅에서 조선의 범종이 발견되었다고 일본을 조선 땅이라고 말한 사람 누가 있겠는가? 그것이 일본에서 발굴된 고려 청자라도 일본이 고려 땅임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신에 일본 땅의 조선의 범종이나 고려 청자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동강 유역의 중국 유물은 장기간 동안 백제가 중국을 경영하였음을 증거할 뿐인 것이다.

 

6. 평산군 신사비

 

평양 서쪽 용강현에서 발견된 평산군신사비(占蟬平山君神祠碑)가 있다. 비문은 일곱 줄로 기록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4월 무오 점재장 발흥 []和二年 四月戊午 秥蟬長 勃興

[][]건 승속국회 []위거[][] [][]建丞屬國會 []爲擧[][]

[]신사 각석사왈 []神祠 刻石辭曰

[]평산군 덕배대숭 승천출[] []平山君 德配代嵩 丞天出[]

[]우점제 흥감 풍우, 혜윤 토전 []佑占蟬 興甘風雨 惠潤土田

[][]수고 오곡 풍성, 도적 불기 [][]壽考 五穀豊盛 盜賊不起

[][]칩장 출입 길리, 함수 신광 [][]蟄藏 出入吉利 咸受神光

 

이제까지는 낙랑군 점제현이 바로 이 자리 평안남도 서해안으로서, 점재현의 수장이 풍년을 기원한 것으로 해석해오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러나 정인보 선생은 중국 땅에서 굴러들어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설령 점재현장이 자신의 관할 구역에 비를 세울 경우에는 자신의 관직명을 새겨 넣지 않는 것이 한() 시대의 비문 양식이라고 고증하였다. 또한 이 자리가 한사군 중의 낙랑군과 관계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첫행 “[]24월 무오 점재장 발흥.([]和二年四月戊午 秥蟬長勃興)”은 점재현의 수장이 평산군 신사를 세웠다는 뜻이다.

 

둘째 행“[][]건 승속국회 []위거[][] ([][]建丞屬國會 []爲擧[][])”를 해석하면 중국에 나가 있는 하북성, 산동성의 백제 속국 태수나 현령들이 본국 백제에 들어와 회의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세째 행“[]신사 각석사왈 ([]神祠 刻石辭曰)”은 신사를 세워 글을 새겨 말씀을 올린다는 듯인데 하늘의 천신에게 부탁의 말씀을 올리는 것이다.

 

네째 행“[]평산군 덕배대숭 승천출[] ([]平山君 德配 代嵩 丞天出[])”은 백제 온조 한성의 토신인 평산군(平山君)에게 대숭신을 암신(여신)으로서 맞아 짝지우시라는 것이다. 평산군이 평산의 신이라면 황해도 평산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황해도 평산군에는 성황산성(聖隍山城; 今 太白山城)이 있는데 태백산성의 신이 평산군(平山君)이었을 것이다. 대산(代山)과 숭산(崇山)은 중국에도 있고 한반도와 만주에도 각각 있었다.

 

다섯째 행은 “[]우점제 흥감 풍우, 혜윤 토전 ([]佑秥蟬 興甘風雨 惠潤土田)”으로서 한국신과 중국신이 함께 점제 땅을 도와서 제 때에 비를 내려 땅을 윤택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여섯째 행은“[][]수고 오곡 풍성, 도적 불기 ([][]壽考 五穀豊盛 盜賊不起)”으로 앞 행과 마찬가지로 오곡이 풍성하고 중국 도적이 침입하지 않게 보살펴 달라는 것이다.

 

일곱째 행은“[][]칩장 출입 길리, 함수 신광 ([][]蟄藏, 出入 吉利, 咸受 神光)으로서 악귀는 잠자고, 본인의 <들고 남>이 길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들고 남>은 관직에 <들고 남>도 있지만, 황해 바다를 오가는 데에 있어서 뱃길이 편하게 해달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평산군 신사비가 용강현에 세워진 것도 점제장으로 부임하는 백제 사람이 바다가 조용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의 영광을 두루 받고자 기원하는 것이다. 이 점재현장이 된 백제인은, 필경 이 곳에 신사를 세우고 굿을 한바탕 치르고나서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 백제의 낙랑군 점제현 땅에 가서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무사히 돌아왔을 것이다.

 

당시 점제현은 전한시대 [한서지리지]의 설명에 의하면 분려산으로 부터 열수(列水)가 탄열을 거쳐 서쪽의 점재로 오는데 820리였고 그 위치는 태자하로 고려된다. 점재현에서 첨산현과 안산시 천산이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이제까지 평양의 낙랑고분을 소위 중국식 고분으로만 해석하는 안일한 학문적 관행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여러가지 증거 중의 하나가 원강(元康)과 태강(太康)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벽돌 고분인데 주로 황해도에서 발견되었다. 고분 벽돌에는 각각 원강 원년, 원강 3316일 한씨(韓氏), 원강 4320, 원강 5818일 을유일(乙酉日)이 각각 새겨져 있다.

 

이중에서 원강 5818일 을유는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원강 5년은 중국 동진 연호로 보면 295년이 되지만, 295년에는 818일이 을유일이 아니라 병자일로서 9일이 차이가 지므로 원강은 백제 연호이며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다.

 

818일이 을유인 해를 찾으면 252(고이왕 14), 278(고이왕 40), 469(개로왕15) 등이 가능하다. 이중에서 252년 고이왕 14(고이왕 10년이 원강원년)이나 278년의 고이왕 40(고이왕 36년이 원강원년)의 개원이 가능한데 뒤로 보면 동진의 원강(291)과 겨우 10년 차이 지므로 어색하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은 5, 10, 14년 정월에 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다. 한편 고이왕기가,사반왕기, 구태왕기에 의해서 조정되어야 하는데, 5년 기사는 사반왕의 238년 즉위 때였을 수도 있다. 사반왕이 2년을 재위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삼국사기]14년 기사가 고이왕 10, 248년의 기사가 된다.

 

요양시 태자하 주위에서 발견되는 벽화고분으로 또한 태강(太康)년도 고분이 많이 있다. 그중의 하나인 태강 10년은 중국의 연호로 보면 오로지 289년인데, 당시 요양은 백제 땅이어서 중국 사람의 묘를 쓸 수 없다. 필자는 백제 비류왕(比流王)의 후기 연호가 태강인 것으로 추정한다.

 

황해도 여러 곳에도 태강 연호의 고분(소위 낙랑 고분)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태강 7년 고분에서 일간지(日干支)가 밝혀져 있다. 신천군의 한 고분에서 다음과 같은 명전이 발견되었다.

 

태강 73월 계축 작, 태강 7328일 왕 작

이 두 명전은 한 짝이므로 328일 계축일을 의미한다. 중국 동진의 연호인 태강 7년은 서기 286년으로서 31일이 계축일이다. 286328일은 경진일이다. 따라서 황해도의 이 태강 연호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으며 당연히 백제의 연호다.

 

328일이 계축인 병술삭 3월 중에 가능한 것은 오로지 고이왕 37270, 332년 비류왕 29년 뿐이다. 동진(東晋)과 백제의 교류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동진의 태강(280-290)이 백제의 태강 연호를 쫓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비류왕 27년이 더 타당하다.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강(太康) 원년 36, 봉산군에서 태강 원년 38일 왕씨, 태강 37월 오씨, 신천군에서 태강 4327일의 명전이 나왔다. 특히 태강 4년 고분은 백제 제후의 고분 흔적이다.

 

태강 43월 소명왕 장 조 太康 四年三月 昭明王 長 造

 

이 고분에서 소명왕은 백제 제후로 추정한다. 황해도 안악군에서도 태강 9년의 명전이 출토되었다.그런데 태강 2, 10년이 요양시내 북쪽 벽화고분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요양시 진출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이 요양시 벽화 고분들은 주제의 배열에서 안악3호분 백제 걸왕 동수(冬壽)묘와 아주 유사하다. 즉 구태왕,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때에 요양은 백제 땅이었다. 물론 요동왕 공손씨 시대부터 백제가 처음으로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237년에 위나라가 요동왕 공손연(公孫淵)을 정벌하기 위해, 바다 건너 낙랑, 대방 2군을 두었다. 평안남북도 대동강 이북은 광개토왕에 의해 고구려 땅이 되었었다. 이후 황해도마저도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참살당하면서 고구려에게 넘어갔다

 

출처 : http://blog.naver.com/finky081/3001391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