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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

설레임의 하루 2014. 3. 23. 10:57

출처:보배드림 자료실 글쓴이 죠쉬 2013.02.15 (금)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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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

(1부) 일제가 조작한 백제의 왕도 부여
(2부) 소정방은 황해를 건너왔을까?
(3부) 백제멸망과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인기가수 주현미가‘쌍쌍파티’로 가요계에 데뷔하면서 불러 히트한 노래가 있는데 제목이 <백마강>이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님은 임 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면 일편단심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닯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위 노래는 나당연합군에게 마지막 수도 사비성에서 패망하는 백제를 그린 노래로 애절함이 서려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항상 심금을 울리게 만든다. 그것이 주현미라는 가수의 노래솜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 잃은 망국의 아픔이 절절이 서려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과연 백제가 패망한 사비성은 과연 충남 부여가 맞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 노래 가사에는 백제 패망시의 중요한 지명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백마강황산벌이다. 그 곳이 어디인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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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의 낙화암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원래 금강의 지류인데 부여 근처에 와서 역사적으로만 백마강으로 둔갑한다.

전 문화재청장과 일본인이 답사한 부여는 백제의 왕도인가?

아래는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의 베스트셀러였던 기행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329쪽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인용) 부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원 세상에, 부여가 이렇게 작을 수 있어요?”
“아니, 부여가 아직까지 읍이었단 말예요?”
“아직도 관광호텔 하나 없다고요?”


부여는 정말로 작은 읍이다. 인구 3만 명에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Km도 안되는 소읍이다.

그래서 가람 이병도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허망부터 말했다. 부여에 대한 이런 허망은 어쩌면 우리 머리 속에 은연중 들어앉은 부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여는 백제의 123년간 도읍지로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 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퇴락한 풍광뿐인 것이다. (인용 끝)

일본인들은 백제가 일본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고도였다고 하는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에 관심이

아주 많다. 그런데 막상 가보면 전부 실망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고도가 너무 형편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 느낌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풍납토성, 공주, 부여가 백제의 왕도로 조작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일제 때인 1937년 일본인이 쓴 기행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용)“정작 부여에 도착하니 시가지라고 하는 것이 함석지붕과 나무판자집들이 두 블럭 정도 줄지어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안쪽으로는 울타리도 없는 초가지붕에 박이 널려있는 평범한 시골풍경뿐이어서 도저히 자신이 생각한 부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여를 다녀온 뒤 그가 다시 친구들을 만나서 부여를 가본 적이 있느냐 물으니 모두들 아직 못 가봤다고 대답해서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부여는 이처럼 가보지 않은 자에게는 환상을, 가본 자게는 실망을 주는 곳으로 어떤 답사객은 “꼭 네다바이 당한 것 같다.”고 까지 했다.”

현재 부여에 가서 백제 유적으로 만나는 것은 오직 정림사 오층석탑 하나뿐이다. 또 있다면 반은 뭉개진 해발 100m의 부소산과 가난한 물줄기의 백마강가의 낙화암이 있을 뿐이다. (중략) 그래서 부여에 오면 우선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고란초라도 봐야 부여에 다녀왔다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소산에 오르는 사람은 또다시 부여를 욕되게 말할 지도 모른다. 엉겹결에 보는 낙화암은 그 스케일이 전설에 어림없고, 고란사는 초라한 암자로 절 맛이 전혀 없으며, 부소산성이라는 것은 말이 산성이지 뒷동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잔망스러워서 무슨 전설과 역사를 여기다 갖다 붙인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인용 끝)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화유적을 관광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꼭 이 책이 들려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전문가의 눈에도 “부여는 과연 백제의 왕도인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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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사관에 의해 철저히 조작되어 있는 부여의 유적지들. 저렇게 좁은 곳이 700년 사직의 수도라니 말이 되는가?

그렇다. 그의 느낌은 정확했다. 그의 느낌대로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도가 아니다. 일제는 고대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정착시키기 위해, 백제의 수도로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조작하고, 논산을 황산벌이라 했고 금강을 백마강으로 조작해 버렸다.

그리고 노랫말로 허구의 삼천궁녀와 낙화암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백제 부흥운동의 주역인 흑치상지가 활동했던 임존성(任存城), 주류성(周留城)도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조작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반도사관의 이론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백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신라는 경상도 일대에 있었다고 사학계는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생겨난 엉터리 사학이론이 정치인들에게 이용되어 전라도 백제, 경상도 신라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지역주의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지역주의가 얼마나 허황되고 창피스럽고 무지한 것인지 사서의 기록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백제가 산동성에 있었다는 증거

현 국사책에 나오는 백제의 줄거리는 백제는 B.C 18년 온조대왕이 하남 위례성(서울)에 개국했고, 전성기인 13대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병합하고 대륙에 진출해 요서/진평에 무역기지를 두었으며, 21대 개로왕 때 한강변에 제방을 쌓았으며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자, 아들 문주왕이 웅진(공주)로 천도하고, 26대 성왕 때 사비(부여)로 천도했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망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교과서 내용은 사실(史實)과 많이 다르다. 백제의 본거지는 대륙의 산동성이고, 패망도 역시 산동성에서 했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던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핵심은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잠시 대륙으로 진출한건지, 아니면 백제는 아예 대륙에 있었는지가 논쟁의 관건이다. 우선 아래는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증거들이다.

(1)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없는데, 이상하게 백제의 역사기록은 대륙이다.
(2) 북위와 5차례 큰 전쟁을 한 백제 동성대왕의 무대는 대륙이고, 동성대왕의 궁전인 임류각은 산동성에 있었고 거기서 죽었다.
(3)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를 멸하려면 중국 땅에서 대륙백제와 먼저 전쟁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고, 황해를 건너왔다면 당나라와 해상강국 백제와의 해전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다.
(5)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최적관측지가 발해만으로 나온다.
(6) 만약 한반도 백제가 본토라면, 본토의 20배 크기의 땅을 수백 년간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7) 인구의 역사로 보아도 백제의 수도는 산동성 일대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8) 백제의 8대 성씨가 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다.
(9) 그 외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가 많다. (향도,조공,제방,기상,특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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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삼국사기, 일본서기, 고려사의 일식기록을 분석한 도표.

 

이 과학적 근거를 반박할 사학자들은 나와보라. 백제의 최적관측지는 분명 발해만 근처 북경지역이다.

북경지역은 백제의 개기일식을 가장 확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상대신라는 201년 이전, 하대신라는 787년 이후, 왜는 628~709년

이다.
나중에 하나하나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지금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한반도에 있었는지 대륙에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부여박물관에 가면 부여에서 발견된 비문 탁본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분명 내지성(奈祗城)으로 되어 있다.

이 탁본만 봐도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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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백제박물관에 전시된 내저성 비문.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다.
경기도 시흥시는 관내의 소래(蘇來)포구를 소정방이 왔기때문에 소래포구라 한다고 시민들에게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의 이름은 소정방이 제주도에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정방폭포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또 부여를 흐르는 강이 백마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호국의 용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엉터리 같은 전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소정방이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바위가 백마강에 조룡대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무지의 소치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약발이 아직까지 듣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소정방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왜냐하면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왔다는 것은 백제 패망지이므로 소정방의 위치를 추적해 보면 백제의 위치를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옆을 휘감아 도는 강 이름을 백마강이라 하나, <삼국사기>와 <신.구 당서> 등 모든 역사기록에는 "백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서>에 보면 소정방은 백제패망 전에도 백강에서 낚시를 가끔 했다고 적혀있다.

그럼 소정방은 한반도 백마강까지 바다건너 낚시하러 왔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백강이 당나라의 영역이든가 국경선이었고, 백제와

당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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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지는 백제에 대한 기사를 보시려면 이 지도를 참조하시면 이해가 빠르다.

 

최후를 맞는 백제의 수도는 어디?

아래는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기록에 의한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은 무왕의 아들인 31대 의자왕이다.

의자왕은 대외적으로는 영토를 많이 넓히고 대내적으로 정치를 잘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의자왕이 술과 여자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하고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가까이 두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기록된 것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만일 백제가 천하통일을 했다면 의자왕은 아마 명군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합세하여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빼앗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낸다. 사학계는 대야성을 합천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하튼 국가가 총체적인 위기로 몰리고 자체적으로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려 했으나 군사력이 없던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 갔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한다.>

여기서 이상한 기록이 있다.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자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가 끊겼다는 기록이다.

현 역사이론이라면 육지에 있는 당항성과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신라는 바닷길이 당나라와의 통로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육지에 있는 당항성을 잃자 통로가 끊겨졌을까?

즉 이 이야기는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당나라와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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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은 것을 그린 지도.

 

백제 멸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라는 진덕왕 때부터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자체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는 속국이 된다.

국가의 위기도 하나의 이유지만 개인적으로 딸의 복수를 위한 적개심 때문에 외세를 끌어들이고 스스로 속국임을 자청한 신라의

모습을 보면 이성계의 조선이 명나라의 힘을 빌기 위해 스스로 속국이 된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신라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하여 13만 대군을 동원한다.

이 때 신라왕이 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지원케 한다.

보통 군을 동원하여 직책을 내릴 때 정벌할 지방의 명을 따는 것이 상례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세적장군에게 내린

직책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이다. 요동은 하북성에 있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백제를 정벌하는 김춘추의 직책인 우이(嵎夷)는 바로 산동성을 의미한다. 즉 당나라는 산동성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간 것이다. 자고로 중국의 고지도에는 북경 이동과 한반도의 지도와 지명이 없다. 송나라 때 만든 지도인 우적도에도 만주와 한반도는 아예 안 그

려져 있다. 그러므로 만일 당나라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정벌하러 갔다면 지명부터 새로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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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중심 지역.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한강변이 아니라 황화변이다. 숭산은 하남성 소림사가 있는 지역이다. 거기까지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이야기이다. 초록색 사각형 아래 항성(項城)이 바로 당항성이다. 백제의 패망지는 바로 이 지도의 산동성 안에 있다. 평원, 황산, 백마하, 사성과 비성(사비성), 부흥운동의 중심지 주류성, 석문(석가장)은 신라와 당나라가 싸우던 곳이다. 최치원전에 나오는 연, 노, 제가 이지역이다. 산동성 아래가 海지방이다. 백제의 수도로 들어가면서 이곳을 지나간 것을 두고 바다를 건넜다는 표현을 쓰기도 해 마치 황해바다를 건넌 것처럼 오인하기도 한다.
여름 5월 무열왕이 김유신을 대동하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하였고, 당나라는 협주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무열왕이 병선 100척과 함께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 덕물도를 사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옹진 앞바다 덕적도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 때 소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당도하여 군사와 회합하여 의자왕의 도성을 무너뜨리려 하오.”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우리 대왕이 지금 대군을 고대하고 계시는 터이라 만약 대장군이 오셨다는 말을 들으시면 반드시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리라”하였다.

여기서 이 장면은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무열왕이 5월에 수도를 떠나 6월에 남천정에 주둔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라면 경상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백제 국경까지 가는데 한달씩이나 걸릴 정도로 그렇게 넓었는지? (5월말에 떠나 6월초에 도착했다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상황을 보라)

당나라가 출발하는 같은 달에 이미 무열왕이 군대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고 태자를 보내 덕물도에서 영접케 한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분명 당나라는 물길을 타고 동으로 내려왔고, 내려오니 신라 태자가 기다렸다고 기록하였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물론 없다.

또 소정방은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도착한다고 말했다. 무열왕이 5월에 먼저 출발했으니 무열왕의 금성 출발은 소정방의 백제 도착 최단40일 ~ 최장70일 전이다. 한반도 경주에서 백제까지는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40~70일이나 신라가 왕이 직접 나서서 군사행동을 먼저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건 분명 대륙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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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에 나와있는 백제 패망 지도.

 

이것을 아직까지 믿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사학계의 잘못이 너무도 크다.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도 없고, 백제는 22개 담로를 건설한 해양제국이었는데 당나라가 황해를 건너려면 백제와 해전을 해야 하는데 그런 기록도 없다. 해양강국 백제의 앞 바다에 신라 배 100척이 나타나 소정방을 영접했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안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신라 태자가 배 100척을 거느리고 영접한 곳인 덕물도는 한반도의 덕적도가 아니라 바로 대륙 어딘가에 있는 지명으로 보는 것이다.

당나라가 한반도백제로 떠나기 전에 산동백제와 전투한 기록도 없다. 그럼 그 때 산동성엔 대륙백제가 없었을까? 160년 전인 동성대왕 시대에도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전부 차지한 백제였는데, 그 사이에 대륙백제는 명맥이 끊어졌을까?

백제는 대륙에 없었고 한반도 서부에만 있었다고 보는 것이 식민사학계의 이론이다. 대륙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7월 김유신이 황산의 평야로 나가 백제의 계백장군과 전투를 벌여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충천한 신라는 백제군을 격파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같은 날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해 백제군과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다. 한반도 덕적도에 6월에 도착한 소정방이 왜 이리도 늦게 기벌포에 도착한 것일까? 기벌포까지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렸다.

위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5월 무열왕의 출발에서부터 6월 소정방과 신라태자가 만나고 7월 10일 경 소정방이 기벌포에 오기까지는 최단 40일 ~ 최장 70일 걸렸다. 소정방이 6월말에 덕적도에 도착했다면 기벌포까지는 최소 10일 이상 걸린 것이고, 그렇다면 5월말에 무열왕이 금성을 떠났으면 최단 30일간 ~ 5월 초면 최장 60일간 신라의 무열왕은 어디에서 뭘 했단 말인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5월말에 무열왕이 떠나고 소정방이 6월 초에 덕물도에 도착했으면, 이 건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덕물도에 도착한 소정방이 기벌포에 나타나는 7월 10일까지 40일간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덕물도와 기벌포는 같은 한반도라면 한반도 내에서 소정방이 이동하는데 40일이 걸렸단 말인가? 한반도 백제가 그렇게 큰가?

여하튼 무열왕 출발에서부터 기벌포에 소정방이 나타나기까지 40일 ~ 70일 걸렸다는 것은 땅덩어리가 큰 곳에서 벌어진 상황이지 좁은 한반도에서는 상식적으로 날자 계산이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륙이 아니면 잘 설명이 안 되는 싱황인 것이다. 이 날자 계산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다.


사학계에서는 당나라가 중국에서 떠나 한반도까지 오려면 그 정도는 걸린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뭐 하러 무열왕이 김유신과 함께 5월에 소정방을 맞으러 먼저 출발한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3~4일이면 경주에서 백제 국경까지 가고도 남음이 있는데 40~70일 전에 움직인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하려는가?

기록과 같이 무열왕과 김유신이 소정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도착 후 모든 작전계획이 실행된 것을 보면, 무열왕과 김유신과 소정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런 스토리가 엮이지 않는다. 다들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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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하, 주류성, 해, 사수는 사성이 있는 곳,

 

 황산은 계백장군이 패한 곳, 래는 동성대왕 시절 임류각이 있던 곳,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 서화는 기자가 살던 곳,

바로 이 산동성에 백제가 있었다. 패망시 지명이 여기 다 들어있다.
현 국사책의 이론은 당나라는 서쪽 바다 건너고,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이고, 신라는 동남부이다. 기록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먼저 만난 후 백제로 간다. 그렇다면 소정방의 배가 신라바다까지 가야 하는데 백제 앞바다를 거쳐야 하므로, 당연히 신라가 황해바다 어딘가에서 영접을 했을 것이다.

현재 사학계는 신라태자가 덕적도(옹진 앞바다)로 영접을 갔다 하는데, 거긴 백제 또는 고구려 지역으로 해상강국 백제와 고구려 수군이 신라 배 100척을 가만 놔둘 리가 없고, 또 해전이 벌어졌다면 태자와 소정방이 참전한 해전이므로 당연히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전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다. 고구려/백제는 수군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이 상황은 대륙에서 발생한 전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는 당연히 당나라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백제와 전투를 시작한다. 첫 전투가 황산전투라고 치고 다음의 상황을 보자. 김유신과 계백의 5번의 전투가 얼마나 소요되었는지 몰라도 최소한 10일 이상이다. (하루 전투해 져서 다음날 재정비해서 그 다음날 또 도전했다 하더라도 최소 10일은 걸린다.)

덕적도와 기벌포가 같은 한반도 내에 있었으면 이렇게 늦게 소정방이 도착할 리가 없다. 덕적도에서 신라 태자를 만난 후 출발한 소정방의 첫 전투지인 기벌포까지 그렇게 오래 (최단 10일 ~ 최장 40일) 걸린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이후 7월 13일 의자왕이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고, 18일 드디어 웅진성에서 나와 의자왕이 항복한다. 해양대제국 백제의 31대 700년 사직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의자왕은 온갖 수모를 당하고, 9월 3일 소정방은 백성 12,000명과 함께 의자왕을 끌고 사비성으로부터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국가가 썩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잘 나가다가 적의 기습을 예측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단 몇 번의 전투에 패해 수도가 무너지고 왕이 항복해 급격히 패망한 것이다. 즉 국가 실력으로 볼 때 패망할 정도가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상대 특공대의 기습 공격에 카운타 펀치를 급소에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건 흑치상지가 벌인 부흥운동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다음 연재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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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부흥 운동의 주인공 흑치상지의 고향은 중국 대륙 남단.

 

여기까지 백제가 있었단 이야기이다. 고향이 이곳인 흑치상지가 한반도에가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했다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봐야 한다.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그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왔다는 걸 믿는 사람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다.

고대중국의 수도가 서부산악지대인 이유

아래 필자의 글을 확실히 이해하려면 대략적인 중국 고대국가의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의 수도는 주로 서안과 낙양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다. 낙양이 동부 평야지대에서 서부 산악지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왜 고대 중국은 동부의 넓고도 넓은 평야지대를 놔두고 서부 산악지대에 수도를 둔 것일까? 산악지대가 평야지대보다 살기 좋아서일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동부 평야지대에는 동이(東夷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감히 평야로 나오지 못하고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고대중국인들은 산적(山賊)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동부평야지대로 나온 것은 신라와 대진국이 망하고 난 뒤였다. 그 정도로 우리 삼국은 막강했기에 중국은 감히 동부평야지대를 넘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5호16국이 끝나고 남북조시대로 들어간다. 그 남북조시대의 북조(北朝)의 최강국은 북위였다. 그 북위의 수도도 역시 산악지대로 산서성 대동시와 하남성 낙양이었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5차례나 동부평야지대인 백제를 공격했으나 동성대왕에게 완패하여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불과 백제 패망 170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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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조시대 북조의 북위도 산적 신세였다.

 

동부의 넓은 평야지대로 나오려고 동성대왕과 5차례 전쟁을 했지만 모두 패해 결국 산 속에서 패망하고 만다.
동부평야지대를 지배한 동성대왕이 파견한 7태수들.
한반도 백제가 황해를 건너가 이렇게 큰 식민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북위는 수십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것을 격퇴시키려면 거의 대등한 병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병력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갔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그 때 충청도와 전라도의 인구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분명 백제는 대륙에 있었고, 주 무대는 산동성이었다.

중국 25사의 하나인 <남제서>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강시단야(僵屍丹野) : 북위의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즉 북위의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는 남제서의 일부 내용(15줄 324자)이 지워져 있다. 거기에는 더 엄청난 기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고의로 그 기록을 지운 것으로 보인다. 무슨 내용인지는 중국학자만 알고 현재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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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제서의 일부 내용이 지워져 있다.

 

중국은 왜 이 기록을 고의로 삭제했을까? '강시단야'라는 표현까지 쓴 남제서가 왜 무슨 기록이 여기에 있길래 이랬을까?

뭔가 엄청난 비밀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나라도 선비족으로 다 같은 단군의 후손으로 고구려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룬다. 한 핏줄이다 보니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자웅을 겨루자고 수.당이 단군의 적장자국(嫡長子國)인 고구려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것이 명분이었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수나라의 수도는 하남성 낙양이고, 당나라의 수도는 섬서성 장안이었다. 왜 그들은 평야지대로 못 나오고 산속에 갇혀 있었을까?

그건 바로 고구려만큼이나 강력했던 백제 때문이다. 중국은 평야지대로 나오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으나 힘이 약해 그러질 못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은 산 위에서 본 선망의 대상인 넓은 지역을 다 바다(海)로 보았다. 海는 글자 그대로 바다일 수도 있으나, 큰 강, 큰 호수, 큰 평야를 바다(海)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X海란 지방이 중국에 여러 곳에 있고, 그냥 海라는 육지지명도 있다. 백제와 관련되는 사서에 나와 있는 海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고대 중국에는 해전 기록과 유명한 수군장수가 없다. 그건 중국이 바다를 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의 적벽대전은 허구의 소설이지 그런 역사 기록은 없다. 적벽은 양자강 중류에 있고, 거기가 위.오.촉 삼국의 격전지였다. 그 동쪽의 평야지대에는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국본기>로 본 백제의 최후

의자왕 16년(656년) 백제의 충신 성충(成忠)이 목숨을 걸고 의자왕에게 간한다. “(전략) 반드시 난리가 있을 겁니다. 무릇 용병하는 법은 반드시 그 지형을 살펴 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타국의 군사가 들어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을 들어서게 하지 말며, 그 요새(혐애)를 의지하여 막아야 합니다(據其險隘以禦之).”

성충은 분명 강의 상류로 나가 적과 싸우라 했는데, 현 국사이론대로라면 백마강의 상류로 가서 적과 싸우란 말이다. 소정방이 배를 타고 부여를 오려면 분명 하류로부터 거슬러 올라 와야 하는데 왜 성충은 강의 상류로 나가서 적을 대항해야 이길 수 있다 했을까? 이 한마디만 들어도 성충이 말한 강은 부여의 백마강이 아니고 부여는 백제의 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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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벌포를 금강 하구 장항으로 비정한 식민사학계.

 

장항이 군사적 요새인지 묻고 싶다.게다가 적의 수군은 요새 즉 험애(險隘)인 기벌포의 언덕을 들어서게 못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요새인 기벌포의 언덕이라 함은 바다 포구가 아니고 강에 있는 포구로 봐야 한다. 바다 포구 옆에도 언덕이 있을 수는 있으나, 강 포구 옆에 언덕이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리고 성충은 기벌포의 언덕이 험애(險隘) 즉 요새라고 말하고 있다.

사학계는 기벌포를 장항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필자는 장항이 천연적인 요새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서해안 포구에 요새가 있을 수 있는 확률은 전무하다. 왜냐하면 요새란 반드시 험한 산이 있고 천연적인 지형지물인 협곡(峽谷)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경새재(조령) 정도는 되어야 요새란 소릴 듣는다. 높은 산도 없는 서해안 바닷가가 요새가 될 수는 없다. 장항을 기벌포로 비정한 식민사학계의 거짓말이 도가 지나칠 정도이다.

현 사학계의 이론대로 백제 땅인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에 요새가 될만한 높은 산과 깊은 협곡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산동성은 그 유명한 태산(泰山)을 비롯해 험한 산과 호수가 많은 지역이다. 충신 성충의 이야기 한마디만 들어봐도 백제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산동성 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다음은 현 삼국사기 번역문이다. 소정방은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서쪽 덕물도에 도착하니(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신라왕이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좌평이 아뢰길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와 병났고(唐病遠涉溟海)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는 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피곤해져 있으니(不習水者在船必困) 그들이 육지에 내리어 사기가 오르기 전에 급히 들이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은 “당나라는 협주(莢州)를 떠나 전선을 거느리고 동(백제)을 향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라는 <신라국본기>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분명 <신라국본기>에는 바다가 아니라 물길(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 왔다고 했다. 그러나 <백제국본기>에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이 있어, 사학계는 이를 근거로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두 기록이 다르다는 것은 어느 기록 하나는 위작이란 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누가 위작을 했건 위작을 하려면 어느 기록을 고쳐야 했는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다. 만일 어느 하나가 위작이라면 <백제국본기>가 위작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위작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蘇定方引軍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는 소정방이 성산,제해(지명)에서 나라 서쪽 덕물도까지 군을 이끌었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성산과 제해 둘 다 지명으로 볼 수도 있고, 성이 있는 산인 제해지방에서로 번역할 수도 있다. 성산제해는 <신라국본기>의 협주(莢州)보다 더 서쪽에 있거나 가까운 지방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섭명해(涉溟海)를 바다를 건넜다고 해석하지 않고, 큰 평야인 溟海라는 지역을 지났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 근거는 걸어서 지난다는 섭(涉)자이다. 진짜 바다를 배로 건넜다면 굳이 걸어서 건넌다는 섭(涉)이란 한자를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 않은가??? 고대 중국인들은 큰 평야도 바다로 표현했다.

그리고 불습수자(不習者)라는 문구는 강물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이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말로 해석하기는 지나친 면이 있다. 진짜 바다라면 불습해자(不習者)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장 그대로라면 당나라 군대는 처음부터 배를 타고 온 것이 아니고, 먼저 명해 지방을 멀리 걸어 와 병이 났고 다음에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온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하면 신라국본기와 해석이 거의 같아진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국본기>는 위작이 아니라 다른 표현을 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본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무대는 분명 한반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에 없었다는 다른 근거도 많으니 여기에 집착할 필요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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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원, 동평, 황산, 백마강, 사수 등이 패망시 지명.

 

부흥운동의 중심인 주류성도 보인다. 동평은 치우천자의 능이 있는 곳으로 도독부가 설치된 곳.
계속해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흥수가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당군은 (생략) 신라와 더불어 기각(掎角:기병)이 되었으니, 만약 평원(平原:지명) 광야에서 대진한다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나라의 요긴한 길목입니다. (생략) 당병은 백강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은 탄현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며 (후략)”라고 고한다.

그러자 대신들이 말하기를 “(전략)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게 하더라도 물결따라 내려오는 것이어서 여러 배를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이며, 신라군을 탄현에 오르게 하더라도 지름길을 경유하는 것이어서 여러 말을 나란히 하여 오지 못할 것입니다. (후략)”이라고 반대의견을 내던 중, 이미 적이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5천 병사와 함께 계백장군을 급히 황산으로 보낸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황산을 논산으로 비정했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흥수와 다른 대신이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바로 “백강은 도성(都城)의 요긴한 길목이고, 백강에 들어서더라도 물결 따라 내려온다.”라는 대목인데 현 부여의 백마강은 흥수와 대신의 말과 많이 다르다. 우선 길목이라 함은 백강과 도성과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을 말함인데 현재의 백마강은 부여의 바로 옆을 휘감아 돌아 흐른다. 이 백마강이 어떻게 요긴한 길목이란 말인가?

그리고 백마강은 백강에 들어와 물결 따라 내려오는 강이 아니다. 이 말은 백강은 다른 강과 연결된 강이란 말이며, 분리되어서는 내려오는 강물인 것이다. 그래서 성충이 “강 상류로 가서 대항하라”고 의자왕에게 충언한 것으로 본다. 성충이 말한 강이 백강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여하튼 부여의 백마강은 그런 강이 아니다. 소정방은 분명 바다에서 백마강 하류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했다. 이는 흥수와 대신이 의자왕에게 고하는 사서의 기록과 다르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여가 사비성이라면, 소정방의 병력을 막으려면 하류에서 막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지 왜 상류를 막아야한다고 성충이 말했을까? 성충이 잘못 말한 건지 현 부여의 백마강이 틀린 건지 머리 좋은 독자는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부여 백마강이 가짜인 것이다. 산동성 백마하(白馬河)는 사하(泗河)에서 분리되어 내려오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이다. 사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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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동성 백마하는 사수에서 분리되어 흐르다 독산호수로 들어가는 강으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났기 때문에 계백을 황산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백강과 사비성 중간에 황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쪽인 논산(황산)을 지나야 서쪽인 부여(사비)로 들어갈 수 있으며, 사비 서쪽에 백강(백마강)이 바로 옆으로 흘러 현재의 지형은 사서 기록과 전혀 안 맞다.

현재 사학계에서 설정한 백마강과 논산과 부여의 위치가 역사기록과 엇박자가 난다. 즉 백강, 황산, 사비 순으로 지형이 놓여 있어야 하는데, 서쪽에서부터 백마강(백강), 부여(사비), 논산(황산) 순으로 놓여있다. 이건 삼국사기 기록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이유로 분명 부여는 원래 백제의 수도가 아니고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의 가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것이다.

결국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도망갔다 나와서 항복하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는 쓰러졌다. 당시 백제는 막강했었으나 방심하다 상대의 기습공격에 수도가 졸지에 함락당하고 왕이 항복해서 순식간에 나라가 망한 것이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무하마드 알리가 빠른 발로 다가가 휘두른 강펀치에 턱을 정통으로 맞아 한방에 K.O 되는 조지 포먼과 같은 신세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고,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에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백제의 인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3부에서 다시 언급한다). 덕안은 양자강 이남 강서성에 있고 나머지는 산동성에 있는 지명이다.

이후 백제는 부여풍 복신 흑치상지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왜까지 동원된 백제부흥운동은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겨루는 국제전이 된다. 이 부흥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한다. 이 당나라 40만 대군이 역시 배타고 황해바다 건너 한반도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정신병자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이런 대군이 배타고 황해바다를 절대로 건너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 만 척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우기는 사람들을 위해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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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사학계의 이론은 당나라가 황해바다를 건너 한반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얘긴데 글쎄요? 건널 수 있을까요?

소정방은 과연 황해바다를 건너 왔을까?

필자는 중국에 갈 때 배 타고 가길 좋아한다. 선박으로 갈 수 없는 곳이라면 모를까 웬만해선 배를 이용한다. 배 여행은 편하고 나름대로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모든 배는 밤을 끼고 달린다. 배를 타면 저녁식사를 하고 독주를 마시고 잠을 청한다. 잠자리가 바뀌어 잠이 안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 이유는 파도에 울렁거리는 배 멀미를 안 느끼기 위해서이다. 파도가 높은 날에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때도 있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구토하기 예사이다.

정용석씨가 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 124쪽에 보면 황해바다 해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중간 중간 생략하고 요점만 말하자면, “인천과 청도를 항해하는 1만 톤급 뉴 골든 브리지(New Golden Bridge)란 동력선이 있는데 청도까지 21시간이 걸린다. 이러한 대형 선박도 대륙연안의 급 해류 지역에서 ‘걸프 스트림’을 만나면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심하게 요동을 치며 항로를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급 해류 해역에서의 항해는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연안해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한국의 연안해류도 같은 방향) 평균 유속은 0.5~0.6m/초 정도이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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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의 해류도. 청색은 육지쪽의 연안해류이고, 적색은 바다 가운데 주 해류다.

 

연안해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주해류는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른다. 산동반도 앞바다는 주해류와 연안해류가 만나는 곳으로 바닷물이 빙글빙글 도는 곳이다. 여기를 중국형 목선으로 돛과 노도 없이 도만 가지고 황해를 건넜다는 것은 정신병자들이 하는 소리다.
참고로 위의 해류 사진을 보면 바다 한 가운데 황해바다의 주 해류(빨간 선)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 흐르고, 그 해류가 발해만으로 들어갔다 돌아 나와 중국과 한국의 연안해류(청색 선)로 이어져 내려온다. 주 해류의 유속은 중국연안 해류의 몇 배나 된다. 이러한 해류들은 만조나 간조 시간에 특히 심하게 움직인다.

가장 물살이 강한 곳이 대련과 연태사이의 바다이고, 다음이 위해 앞바다로 육지간의 거리가 좁아지다 보니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주 해류와 나오는 연안해류가 만나 뒤엉키는 곳이다. 해서 21세기인 지금도 대련과 연태를 오고가는 쾌속선은 사고가 잘 나고, 배타고 온 사람들은 항상 배 멀미를 심하게 해 초죽음이 되어 도착한다. 이러한 급해류 지역을 1,350년 전에 목선으로 횡단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류의 방향과 속도는 같다고 봐야 한다. 기존 식민사학계는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으로 1만 척의 배로 황해를 건너 한반도 백제로 갔다고 쉽게 말하고 있다. 그 때는 철 동력선이 아니고 목선인데, 그런 배로 중국대륙연안 해류와 황해바다 주 해류를 횡단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짓말은 지금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과연 중국 배가 황해를 횡단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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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배들은 6 종류로 모두 도형강선으로 황해횡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돛도 없이 보트식 도를 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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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류가 급격한 황해를 횡단하여 건널 수는 없다. 이는 윤모교수의 뗏목탐험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고대 중국의 배 모양은 위 사진과 같이 대개 6 종류로 나뉜다. 이런 배의 형태는 B.C 500년 ~ A.D 1,621년까지 지속되는데, 한결같이 돛이 없고 보트형 도(櫂)를 장착하고 있다. 이런 배를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 한다. 이는 중국은 강에서만 배를 운영했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필자가 맨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역사적으로 서부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바다 항해가 필요 없었던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중국의 <무비지>에 따르면 중국 수군을 대표하는 누선의 경우에도 “만약 바람을 만나면 인력으로 능히 제어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櫂)형을 가진 배는 아무리 커도 연안 항해만 가능하지 횡단항해가 불가능한 법이다. 중국의 전선은 주로 정크선이나 판옥선(누선)과 같은 배로 대부분 돛이 없고 보트식으로 양쪽에서 도를 젓는 식이다. 만일 소정방이 산동성에서 이런 배로 출발했다면 당나라 군대 13만은 아마 전부 연안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표류되었거나 수장되었다고 봐야한다.

백제가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 된 것은 보트식 도(櫂)가 아닌 우리식의 노(櫓)를 발명해 노형해선(櫓型海船)의 형태였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식 노에다 돛을 달면 장거리 횡단 항해도 가능하다. 돛과 키와 우리식 노를 사용하여 아라비아까지 간 조상(백제)의 슬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중국 배는 우리 것과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다를 끼고 대륙 동쪽에 살았던 민족이고, 중국은 고대부터 산악지대에서 바다 구경을 못한 민족이었다. 중국인들은 진짜 바다가 아닌 큰 평야, 큰 강, 큰 호수 등을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생선이 잡히는 바다를 동경하고 또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우매한 산적(山賊)일 뿐이었다.

그들의 배들은 바다에서 싸우는 해전(海戰)이 아니라, 강에서 싸우는 수전(水戰)용 배이다. 그래서 사진처럼 돛이 없고 보트식 도인 것이다. 보트식 도는 강에서나 통하지 바다에 나오면 무용지물인 것이다. 게다가 중국 배는 돛도 없는데 어떻게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단 말인가? 돛도 없이 도를 저어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 있다고 보는지? 중국인들은 팔 힘이 무척 강했나보다!!!

이렇게 바다에 열악한 중국배로 황해바다를 건너오려면 해류를 3번 지나야 한다. 하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중국연안해류요, 둘째는 황해바다 가운데에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주 해류이다. 세 번째는 한반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연안해류이다. (참고로 중국의 연안해류는 한반도연안해류보다 강하다) 황해를 횡단하려면 해류가 내려갔다, 올라가고, 다시 내려간다. 그리고 해류가 만나는 곳에서는 바닷물이 빙글빙글 돈다. 이런 해류를 헤치고 황해를 횡단할 배가 당시에 중국에 있었다고 보시는지!!!

하물며 현대의 철 동력선이 연안해류에서 ‘걸프스트림’을 만나도 안간힘을 쓰는데, 1,350년 전의 중국의 목선이 버틸 수 있겠는가? 만일 황해 한 가운데에서 사나운 주 해류를 만나고 바람까지 불어 파도까지 높으면 전원 수장(水葬)이지 달리 방법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처럼 기상 예측을 못하고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다.

고려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하다가 2번이나 실패한 것도 태풍(神風)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해탄의 울렁이는 해류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만큼 바다를 건너는 원정은 무섭고 겁나는 것이다. 부산과 일본 사이의 바다보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황해바다가 훨씬 거리가 길고 해류가 강하고 변화가 심하다.

소정방 13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려면 배가 몇 척이 필요한지 계산을 해보자. 원래 전투 병력이 100이라면 지원 병력은 200인 법이다.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올 수 있는지는 고대전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일언지하에 불가능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 10만이 조선에 올 때 700척으로 6번에 나누어 왔다. 그것은 병력을 수송할 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대전에서도 상륙작전은 몇 번에 나누어 실시한다. 수송선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6.25 때 한반도의 허리를 끊은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수송선은 261척에 한번에 병력 25,000명을 3번에 걸쳐 실어 상륙시켰다.

현실이 이러한데,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가 13만 대군과 지원부대를 배 만 척에 실어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보냈다는 사학계의 이론은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다. 게다가 백제부흥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파병했는데, 이 40만 대군이 배를 타고 황해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은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과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과 임존성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식민사학자들은 떠들고 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지 살펴보기로 하자.

(1) 김성호씨의 설에 의하면
연안항해(바다에 인접한) 능력 및 강상항해(양자강, 황하)능력에 능했던 중국민족이 이정도의 규모로 한반도로 올 수 있었는가?

(2) 윤O철씨의 의견도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혀, 육전이 아닌 수군의 동원은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뗏목탐험으로 유명한 분. 필자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리비정이 잘못된 것으로 본다.)

(3) 고대전쟁사를 연구하는 군사학자들도
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의견을 말하고 있다. 즉 군사 40만이 오기위해서는 수많은 보급품(군량미, 말, 각종무기)이 동시에 수송이 되어야 전쟁수행이 가능한데, 그 당시 정황으로 도저히 맞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지리 비정을 엉터리로 해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과연 소정방과 김유신이 백제와 전쟁을 벌인 곳은 한반도인가 중국대륙인가? 아래에서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 전함의 최대승선 가능인원(최대인원 추정)을 최대 약100명과 50명으로 추정 시

(소정방) : 당군 13만 / 100명 = 1,300척 ~ 2,600척 = 당군 13만 / 50명
(부흥군) : 당군 40만 / 100명 = 4,000척 ~ 8,000척 = 당군 40만 / 50명

과연 이 규모의 배가 산둥반도에서 금강하구로 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전투병력 말고 지원부대(말,무기,식량,수레)까지 합치면 2~3배의 배가 필요한데 그게 과연 가능했다고 보는지. 세계 어디 해전사에도 이런 병력이 바다를 건넜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이만 척이 넘는 배로 40만 대군이 황해 바다를 건넜다고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태연히 말하고 있으니 정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설사 그런 숫자의 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엄청난 대군을 전혀 가 보지도 않은 바닷길로 배를 태워 보낸다는 것을 허락할 왕이나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13만 ~ 40 만 전투 병력이면 국가 전투력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걸 하룻밤 사이에 전원 물귀신을 만들지도 모를 무모한 작전을 진행할 지휘관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소정방과 당 고종이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40만 대군더러 도형강선(櫂型江船)인 배를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릴 리가 상식적으로 없는 것이다.

웬만큼 상식이 통하는 말을 해야지, 그런 병력이 황해 바다를 횡단하여 건너왔다고 태연히 말하는 식민사학자들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횡단이 어려우면 연안으로 붙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억지를 부릴 사학자도 있을 것이나,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연안을 따라 오려면 고구려 앞바다를 지나와야 하는데 고구려 수군은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식민사학자들이 중국 가는 배를 한 번 타보면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백제는 분명 산동성에 있었고, 소정방은 황해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중국 배는 죽어도 황해바다를 횡단할 수가 없는 도형강선(櫂型江船)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모든 기록과 정황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즉 백제의 멸망은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작은 보트같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물을 따라 기습 침투작전을 폈기 때문으로 보인다. 22담로까지 해외에 건설한 강력한 해양대제국 백제의 해군과 소정방 군대와의 해전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겠다. 즉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고 중국 대륙 산동성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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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과학으로도 입증되었다.

 

 백제 일식의 최적관측지는 북경 부근. 북경은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곳이고, 부분일식까지 보는 지역은 넓어진다. 백제의 부분 일식은 한반도에서도 볼 수 있으나, 신라의 일식은 2개나 한반도에서 전혀 볼 수 없다. 따라서 신라와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에 잇었던 것이다.


패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이외에도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다음 3부 연재에는 “흑치상지의 백제부흥 운동과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다른 증거들”에 대한 글이 실립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북브레이크뉴스 송기옥(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의 지난 4월 30일 "동양초유의 국제전을 벌인 백제의 최후", 성훈 칼럼니스트의 "일제에 의해 조작된 백제 왕도는 '부여'"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기사와 함께 싣게 되었으며, 1만명이 넘는 독자들이 참여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오늘 (5월 8일)브레이크뉴스 송기옥 칼럼니스트 글(기사 작성은 5월 4일)과 본지 성훈 칼럼니스트의 글 2부. 그리고 양지환씨가 기고한 "백제 수도는 서울? 동방의 로마제국" 을 동시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많은 의견을 내주시어 바른 역사찾기에 국민 모두가 동참하도록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