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신라]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인가? (1~3부)

설레임의 하루 2014. 4. 15. 20:37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성훈(헌식) 2014.04.05. http://cafe.daum.net/mookto/GUJC/5122 

                              (원문)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24§ion=sc3§ion2=

 

 

 

 

[신라]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인가? (1부)|

2008년 하반기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 B.C134~B.C86년)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고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는 유물로는 1796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

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명문이 소개되었다.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하늘에 제사지냄이 7대를 이어졌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秺侯祭天之胤傳七葉...

15代祖星漢王)”라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한나라에서 투후(秺侯)라는 벼슬을

받았던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조상임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역사스페셜이 방영되자 많은 사람들은 흉노의 후손이 어떻게 한반도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그나마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 멀리 한반도 경주까지 왔다고 억지춘향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과 해석은 신라를 한반도 경주에 놓고 보는 식민사학의 이론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으나, 원래 초기

신라가 있던 산서성 남부에 놓고 해석하면 그 의문이 깨끗하게 풀린다. 

 
▲ 높이 55cm 너비 95cm 두께 28cm의 파손된 문무왕능비     © 편집부
▲ 사서에 그려진 한나라 투후의 시조 김일제 상     ©편집부

 
흉노는 조선대연방의 일부 
 
대부분 사람들은 흉노와 조선을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에 따르면 “3대 가륵 단군 B.C 2177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했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흉노는 조선의 제후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1세 소태단군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흉노)의 땅을 차지하고는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등의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는 정변을 일으켜 조선의 22대 단군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와 같이 흉노는 곧 조선의 일부이며 한 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흉노는 중국사서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대신해 기록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이 흉노를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감숙성에 있는 흉노라기보다는

당시 북부여의 남침을 견제하기 위한 장성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한 고조 유방을 평성의 백등산에서 포위한 주체도 흉노이고, 천하의 미인 왕소군이 흉노에게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은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과 북부여라는 나라이름 대신에 흉노, 동호, 예, 맥 등 종족명을 사서에 기록해 마치 이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 외 또 하나의 예가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일제의 이야기이다.

 
▲ 한무제 묘역 곽거병묘 옆에 있는 김일제의 무덤     © 편집부
▲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의 묘비     © 편집부

 
김일제가 한나라로 가게 된 사연
 
한나라 무제의 처조카인 장수 곽거병은 18살 때 위청의 부장으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21살 때인 B.C 121년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다시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해 롱서(隴西)에서 흉노를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참고로 롱서는 진시황이 쌓은 진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산서성 서남단 황하가 꺾이는 지점이다.

즉, 북부여의 남쪽 강역이었다.


이때 흉노 선우의 번왕(제후)였던 휴도왕(休屠王)과 혼사왕(渾邪王)이 계속 한나라에게 패배하자, 선우가 그들을 송환해 죄를

물으려 했다.

혼사왕은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휴도왕에게 같이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했다.

휴도왕이 이에 반대하자 혼사왕은 그를 살해하고는 혼자 투항하면서,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한나라 장수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피살된 휴도왕의 장남이 바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로 그때 나이 14살이었다.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는 처음에는 장안에 있는 마구간에서 말 키우는 노비로 있다가 일처리를 워낙 잘하다보니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마구간을 감독하는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라는 벼슬에까지 오르게 된다.

 
▲ 감숙성 무위시에 있는 김일제의 석상     © 편집부
▲ 석상 앞에 서있는 김일제 안내문     © 편집부

김일제는 망하라가 한 무제를 암살하려는 것을 목전에서 격투 끝에 막아낸 공으로 거기장군이 되고, 무제는 일제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이란 금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냈기에 성을 김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일제는 역사상 최초로 김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신라인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제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공주를 유혹하려하자,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경하다고 생각해 자식을 죽이고는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 무제는 상심했지만 김일제의 충성심에 더욱 감동했고, 나중에 한 무제는 죽으면서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소제

(昭帝)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남긴다. 즉, 김일제가 한나라 조정의 핵심권력에 들어간 것이었다.

 
한나라 소제는 김일제가 병들어 죽기 직전 그를 투후(秺侯)에 임명했으며 자손들로 하여금 그 관작을 세습토록 했다.

김일제의 무덤은 한 무제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인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섬서성 흥평현(興平县)에 있다.

감숙성 무위시에는 김일제의 석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김씨 집안의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김씨 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가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자신이 살던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신라 김씨의

먼 조상이 소호금천의 후손으로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다.

 
▲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는 김씨 집안의 내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편집부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라 하는데, 이 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김씨)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로 흉노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묘비명에 대한 해설은 다음 칼럼에 이어집니다>

 

 

[신라]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인가? (2부)

(원문)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26§ion=sc3§ion2=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아래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여셨으니 소호씨금천이라 한다.

이 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金氏)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로 흉노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위 비문에서는 신라 김씨의 조상이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면서, 신라 김씨의 조상이 한나라에서 신라 땅으로

피난가게 된 사연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한나라의 난리를 피해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난리란 바로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新)이

패망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것이다. 

▲ 사서에 그려진 흉노 휴도왕은 김일제의 부왕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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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말기의 최고권력자 왕망은 누구인가? 
 

▲ 신나라 1세 황제 왕망     ©편집부

왕망은 B.C 45년 한나라에서 태어나 높은 관직에 있다가 64세 때인 A.D 9년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9~25)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시호는 가짜 황제라는 뜻인 가황제(假皇帝) 또는 황제를 섭정했다는 뜻인 섭황제(攝皇帝)라고도 하며, 중국의 역사기록에서는 '찬탈자'로 기록하고 있다.
 
왕망의 가문은 무척 지체가 높은 가문이었다. 왕망의 아버지의 이복여동생이 한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였다가 원제가 죽고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태후가 되어 왕씨 일가는 정치적 실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원자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관운(官運)은 불투명했다.
 
B.C 22년 그는 궁중에서 비교적 낮은 직책에 임명되었다가, B.C 16년 신도공(新都公)이라는 귀족작위를 받게 된다. B.C 8년에는 황제를 대신하는 섭정에 임명되어 정치적으로 좋은 기회를 잡았으나, B.C 6년 성제가 죽고 조카인 애제(哀帝)가 등극하자 왕망은 파면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B.C 1년 애제가 갑자기 죽자 이복고모인 왕태후가 왕망을 불러 섭정에 임명했다.
    
섭정이 된 왕망은 재빨리 조정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새 황제인 평제(平帝)의 황후로 책봉해 정권을 잡았다. 평제가 A.D 6년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왕망의 정치적 지위도 불안정해지자, 정적들은 정치공세를 펴 그가 평제를 독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왕망은 50명에 달하는 후계자 가운데 2살짜리 영(嬰)을 황제로 선임함으로써 후계문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했다.
 
그는 6년에 가황제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이때 왕망은 황족과 그 지지자들로부터 산발적인 반대에 부딪쳤으나 손쉽게 진압했다.

그는 조직적인 대규모 선전공세를 펴 한나라의 국운이 다했으므로 새로운 국가를 열라는 하늘의 명이 자신에게 내렸음을 알렸다.

A.D9년 드디어 왕망은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의 첫 황제로 등극하며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신나라 황제로 등극한 왕망
 
왕망이 황제로 재위하고 있었을 때의 사료가 매우 빈약한 이유는 신나라가 붕괴되고 유씨의 한나라가 다시 복원된 후 당시의

역사가들이 왕망의 치적은 모두 없애고 그를 사악한 찬탈자로 매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왕망은 이상주의적 개혁가며 유능한 정치가이자 독실한 유생(儒生)인 동시에 미신을 믿는 현학자(衒學者)였다.
 
그의 재정·농업 정책은 한대의 관습과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아들 3명, 손자 1명, 조카 1명을 처형할 정도로 가족에게도 예외 없는 철저한 법치주의자였다.

그는 면학과 폭넓은 지식의 수용을 권장해 대외정책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재위기간 중 3차례 이상 황하가 범람하는 재해를 당하게

된다.
 
여러 차례 일어난 수해로 인구가 감소하고 기근과 전염병 등이 생기면서 사회불안이 증가하다보니 마침내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만다. 

그 규모가 점차 커져갔으며, 이 같은 농민군의 하나인 적미(赤眉)는 18년부터 규모가 커져 왕망의 신나라 관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도성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23년 10월 4일 반란군은 도성의 동쪽 성벽을 뚫고 저녁 무렵 황궁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아침 도성의 백성들까지 반란에 가세해 황궁에 불을 질렀다.

불은 점점 더 번져나갔고 싸움은 그날 내내 계속되었다.

왕망은 자줏빛 의복을 입고 옥쇄를 흔들며 마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끝까지 황궁을 지키려 했다.

음식도 전혀 먹지 않아 몸이 점점 더 쇠약해져갔고, 10월 6일 새벽에 미앙궁으로 옮겨가 천명 이상이나 되는 측근들과 함께 마지막

저항을 벌였다.

그들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수비를 했고, 그 후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오후 늦게 반란군이 미앙궁으로 몰려 들어왔고, 왕망은 측근들과 함께 피살되고 만다. 

▲ 신나라 황제 왕망의 최후를 그린 삽화                                                                 © 편집부

 
왕망과 신라 김씨와의 관계
 
<!--[if !vml]-->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나라 왕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집안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왕망이 섭정으로 전권을 휘두를 때나 황제가 되었을 때, 김일제의 투후를 세습받은 김씨 집안은 당연히 한나라에서 정치실세가

되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 나아가 재야사학자 문정창 선생은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성이 왕씨가 아니라 김씨라고 하면서, 반고(班固)가 <한서>를 편찬하면서 왕망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로 기록된 사서도 있다.
                                                       
<한서 김일제전>에는 “김당의 어머니는 남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다(當母南卽莽母)”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던 김당과 왕망은 동복형제임을 알 수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와 아주 가깝고도 깊은 관계였던 것이다.
 
왕망은 제도개혁의 실패와 전국에서 일어난 호족들의 봉기와 한나라 왕족인 유씨(劉氏)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 만에 망하게 된다.

신나라 황제였던 왕망이 봉기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자, 신나라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신라 김씨의 시조 김일제 상                                                                                                      ©편집부

 

 

[신라]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인가? (3부)

(원문)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31§ion=sc3§ion2=

 

한(漢)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인 왕망(王莽)이 원래 김씨였다는 사실은 <한서 권68 곽광·김일제전>

에서 김일제의 가계도에 대해 설명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김당의 증조부 김일제는 아들 절후 김상으로 전해지고, 김흠의 조부 김안상은 아들 이후 김상으로 전해지고, 모두 아들이 죽어

나라가 끊기자 왕망이 김흠을 봉하고 김당이 그 임금을 받들었다.

김당의 모친 남씨는 곧 왕망의 어머니로 임금과 같은 배에서 생산된 동생이라는 공이 드러난다. 김당이 남대행을 태부인으로

올렸다. (当曾祖父日磾传子节侯赏,而钦祖父安上传子夷侯常,皆亡子,国绝,故莽封钦、当奉其后。当母南即莽母功显君同产弟也。

当上南大行为太夫人。)”

 
중국의 사가들은 왕망이 흉노족 출신인 김일제의 후예라는 역사적 사실을 감추기 위해 김씨가 아닌 왕씨로 적었던 것이다.

이렇듯 왕망이 원래 김씨였기 때문에 당연히 친족인 김씨들이 신나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았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나라는 제도개혁의 실패와 황하가 3차례나 범람하는 등 자연재해로 인해 전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와 한나라 왕족인

유씨와 호족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 만에 망하게 된다.

 
1954년 서안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언급된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라는 그 난리란 바로 왕망이 봉기군에게 죽임을 당해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난리였다.

 

▲ 김씨의 시조 김일제 가계도.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로 보인다. 이상하게 유독 김당의 부친 이름만 미상이다.


신나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요동(遼東)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요동 땅은 한나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국, 즉 당시 서라벌 땅으로 바로 김씨들의 조상인 휴도왕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아무리 위급하기로서니 자신들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피난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김씨 집안이 피신한 요동은 과연 어디였을까?

 
여기서 다시 김일제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한나라 무제 때 곽거병이란 장수가 흉노를 롱서(隴西)에서 대파하자 화가 난 흉노의 선우가 휴도왕과 혼사왕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혼사왕은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끼고는 휴도왕에게 같이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했으나 휴도왕이 이에 반대하자, 휴도왕을 죽이고는 혼자 투항하면서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인 김일제와 동생 김윤을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줘 김일제가 서안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흉노는 조선대연방을 구성하는 주 종족으로, 중국은 나라이름 대신에 종족 이름을 기술해 마치 당시 북방에는 나라가 없고

여러 종족들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따라서 흉노의 휴도왕이라기보다는 북부여의 제후 휴도왕이 옳을 것이며,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흉노족이라기보다는 삼한 중 마한

(마조선)에 속한 제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휴도왕이 곽거병에게 참패한 롱서는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다.

백이·숙제에 관한 기록을 보기로 한다.

 
1) <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길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

 (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같은 기록에 전하길 “롱서 수양현으로 지금의 롱서에 수양산이 있다.

 (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는 기록이 있으며,

 
2)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 포판의 화산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이는 곳에 있다.

   (集解馬融曰: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

 
위 기록에서 보듯이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 바로 롱서인 것이다.

황하가 남쪽으로 흐르다 동쪽으로 꺾이는 산서성 서남단에서 백이·숙제의 실제무덤이 발견됨으로써 롱서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흉노의 휴도왕이 이곳에서 곽거병에게 여러 차례 패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멀지않은 곳에 당시 휴도왕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 대청광여도에 산서성 서남단 황하굴곡지점에 그려진 백이·숙제의 실제 무덤     © 편집부
 

▲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

백이숙제의 무덤 있는 곳이 요서군이다.     © 편집부

 

또한 김씨 집안이 피난간 요동이 어디인지는 <한서지리지>에서 유주(幽州)를 설명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유주에는 요동군과 요서군 외에 낙랑군과 현토군,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 발해군, 탁군, 대군의 10개 군이 속해 있는데, 요서군은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성이 있는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서부에 있는 영제시 일대이다.

따라서 요서군의 동쪽에 있는 요동군은 산서성 남부 운성시와 임분시 일대일 수밖에 없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당시 김씨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휴도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요동(遼東)에 있던 서라벌로 피난했던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김씨들이 섬서성 서안에서 신라의 천년 고도인 한반도 경주까지 피난 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볼 때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어불성설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조상이 흉노 출신 김일제라는 사실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의 진실대로 최초 신라를 산서성

임분에다 놓고 보면 김일제에 관한 스토리가 기가 막히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명이 된다 하겠다.

 
▲ 김씨들이 피난간 곳은 한반도가 아닌 옛 조선 땅 요동     © 편집부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성립되는 때가 A.D 23년으로 서나벌(신라)의 2대 남해차차웅 20년이다.

<삼국사기>에 “20년 가을 태백성(太白星)이 태미성(太微星)의 위치로 들어갔다. 21년 9월 왕이 죽으니 사능원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뭔가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신라 문무왕비와 서안 김씨부인의 비문에서 공히 자신들의 조상은 김일제라고 밝혔다.

따라서 중국 김씨와 신라 김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인 것이다.

1998년 중국 언론은 산서성 임분시에 살고 있는 중국 김씨들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왜 중국 김씨들이 산서성에 많이 살고 있고, 종가가 임분시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초기 신라가 있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 산서성 임분시에 사는 김씨 종손이 보관하고 있는 김일제의 화상과 김씨 족보 
▲ 김씨 족보. 신라 김씨는 물론 중국 김씨의 조상도 김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