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스크랩] 고려는 한반도 왕조이기도 했다.

설레임의 하루 2013. 11. 7. 11:18

 

 운영자는 자연과학자다 그만큼 과학적 사실 그리고 자연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이나 운영자의 사고체계에는 학문적 절대 진리는 없으며 논증적 사실이 바뀌면 이전의 주장을 과감히 포기 할 수 있는 로직(Logic)을 갖고있는 사람이다.

 

  고려와 관련된 대륙사에 대한 주장은 그동안 사실은 많은 의문과 질책을 받은것이 사실이고 몇몇 대륙사를 주장하는 재야사가(?)들이 고려 사천성(四川省)존재설과 조선의 대륙설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륙이라는 존재만으로 환호하는 독자들이 그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확대 재생산되어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간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고려 대륙설을 뒷받침하려면 좀더 정밀한 근거와 자연사적 근거로 무장해야 하며 그래야 학계에서 인정받을 수준의 논리적 고리를 확보 할 것으로 보인다.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찬문학자 박창범의 역사천문학의 결과는 맹신하고 그에 근거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대륙존재설은 주장하면서 <고려 한반도 존재설>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입증가능한 타당한 이론이 새로 나오면 수정하지 않는 행위는 소위 재야사학이 강단사학을 <조폭적 식민사학>이라고 공격하는 빌미와 다르지 않다. 즉 자신이 주장해온 논거를 체면이나 조직의 유지를 위해 고집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학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다.

 

  운영자가 고려사를 태조부터 고종까지 통람(通覽)하고 얻은 <고려 대륙 존재설>에 대한 결론은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 될 수 있다고 본다.

 

1.초기고려는 대륙에서 태동했다.

 

   정인지의 지리지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그 폭이 1만리의 대국( 매우 넓었다는 의미)이었으며운영자가 고려사란에서 기술한대로 고구려,신라,백제가 영유했던 대륙영토의 일부분을 고려 초기까지 영유하였고 왕건의 탄생지인 한주(漢州)와 시봉지(始封地) 자체도 현재 하북으로 보인다. 이는 후당서,요사,송사등에서 후대에서는 이역지나 원사에서도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고려사에 보이는 초기 1012管內道,中原道,河南道,江南道,嶺南道,嶺東道,山南道,海洋道,朔方道,浿西道 등의 초기강역 명칭이 그를 뒷받침 해주고 있으며 이후 5도양계 등으로 양광도,경상도,전라도,교주도,서해도 북계,동계 등으로 대폭 축소되었으며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한국사가 승전으로 가르치는 고려와 거란과의 세번전쟁에서 현종때 패한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숨겨져 있으나 현종때 거란의 2차공격으로 개성이 분탕질 당하고 강동6주의 실지 이후 고려는 고려초기 기록을 분실하고 거란과 서로 가까이 두고있는 국경을 안전한 외지 한반도 개성으로 수도를 옮긴것으로 보인다.이러한 기록은 원사지리지에서 고려가 동령로에 존재함에 기인하기도한다.

 

2.시기별 전쟁기록에서 전투 규모와 사상자수의 차원이 다르다.

 

   10세기말 고려 성종(成宗)부터 시작된 거란과의 전투기록을 보면 양국이 동원한 병사 40만이며 고려와의 2차 전투(현종)에서 고려사에 기록되지 않은 요사 성종(聖宗)조 기록에 의하면 전투에서 고려군 3만여명이 사망하며 수천여명이 부상당한 기록이 등장하며 반대로 거란군이 대패한 기록은 고려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요나라 이후 고려와 금나라, 원나라간의 전투 기록을 보면 많아야 수 백명 적으면 십 수 명 정도의 전사자 밖에 기록되지 않으니 이는 결국 인적자원이 부족한 지역에서 소규모 전투를 수행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결국 당시에 만주와 한반도는 인구밀도가 성긴 지역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으며 전투지역도 이전의 남쪽이 아닌 동북과 서북면으로 국한되어 나타나는 양상이 보인다.

 

3.고려왕궁의 궁전 殿閣이름 현종 이후 다르다.

 

  고려사에 태조의 즉위 장소인 포정전(布政殿)과 목종까지의 전각 이름들과 현종 이후의 전각 이름이 다르다는데 그 근거가 있으며 현종 이후 인종까지의 전각명이 모두 같고 인종4년 이자겸의 대규모 반란과 방화로 인해 대규모의 전각이 소실(燒失)된 이후로 재건 또는 중수하면서 이전의 전각 이름을 새로 짓게 된다. 그러나 장소는 동일 지역으로 보인다.

 

  서경의 경우 태조가 서경을 중시하라고 유훈을 남기고 건설한 전각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현종이 서경에 새롭게 전각을 짓는 기록 그리고 인종13(1022) 묘청의 대규모 반란으로 인해 김부식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서경의 전각이 훼손되는데 이후 仁宗이 중수하면서 전각의 이름이 장락전(長樂殿)을 제외하고 대부분 바뀌게 된다. 그러나 남경의 연흥전(延興殿)이라는 이름은 숙종 이후에도 바뀐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근자에 남북이 공동조사하였다는 개성의 고려 만월대와 회경전터 그리고 기타 유지(遺趾)이외에 고려사 내용을 충족 시킬만한 회경전 가까이 존재했던 왕실 격구장(擊毬場)3천여칸이 넘는다는 왕사 흥왕사(興王寺)터 위치를 증명해 내야 고려왕도 개성의 진실이 다가올 것이다.

 

 

4.고려의 천문기록.

 

 

 

 

    윗 식분도는 박창범의 연구결과를 인용한것이다. 그의 연구결과를 인용하면 고려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로 나온다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다른 그룹에서 연구된 고려사 근거 천문기록을 살펴보면 고려태조 부터 현종 이전까지의 기록은 윗 천문현상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태조 원년 918315(양력) 부터 현종 4년인 1012225일 까지 기록은 현재 개성에서 관측 되지 않는 지역에서 일식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했다. 크게 본다면 일식은 한반도에서 관측 가능하고 두번째 원안인 중국 동해안 일대에서 관측 가능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 5명의 천문학자들이 1012820일 이후 자료를 해석한 것은 고려개성이 한반도에 있다는 근거에 의거해서 이다. 그 이전의 자료에 대한 관측자의 위치는 운영자도 저자와 확인 예정으로 있다

 

5.그밖에 외국사서의 고려 대륙 존재 기록은 왜 일까?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관리이거나 문인등이 송나라,거란,원나라 등을 다닌 使行기록이거나 문인의 시첩에 기록된 중국의 각지를 직접 발품팔며 다닌 기록과 변형된 무수한 고려지명, 대륙에서 만난 고려인,조선 원주민들의 기록은 무엇일까? 송나라사신의 거란 사행기록인 왕기공행정록, 고려사신 이승휴의 원나라 사행기록인 <빈왕록>,이외에 운영자가 소개했던 강소성 양주의 <려왕성>을 소개한 보응현지략 등 수많은 기록에는 고려왕조가 고려인이 공식적으로 대륙에 궁성을 짓고 중국각지를 다닌 기록이 남아있다.

 

  심지어 조선에서까지 대륙통로를 다니다가 명나라 왕제의 제지를 받는 기록도 등장한다 결국 이는 삼국시대에 대륙에 남아있다가 중국왕실의 흔적으로 사라진 삼국의 지배층보다 과거 지배지역에 흩어져 살고있었던 일반백성 그리고 집단 취락지역에서 모여 살던 조선인들의 흔적으로 고려초기 한반도로 이동하기전 과거 고려왕조가 지배했던 대륙에 대한 지리적 연고권을 중국왕조 중앙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결과로 보인다.

 

  소위 임내(臨內)지역이라 하여 산동,요녕,하북에 대한 고려인(혹은 조선인)의 영향력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많이 남아 있다.이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130년전 이전의 왕조들이 그 넓은 대륙을 빠르게 경영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어서 황제의 교지(敎旨)가 북경에서 수 천리 떨어진 강서성의 산간 오지에 닿는 일은 거의 일 년 후에나 가능한 것이기에 그러한 통치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6.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대륙내 남아있는 무수한 고려라는 지명이름과 변형된 지명이름 등은 한민족의 자취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 기록된 수많은 전쟁의 지명기록과 위치는 조선이 남겨놓은 지리지와 지도상의 지명과 일치하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동일한 지명이라도 실제위치가 조선과 고려가 다르거나 현재사가들이 과거의 고려지명을 바르게 추적하여 비정하지 못하고 공부하지 않은 학자로서 게으른 죄가 큰 것도 있을 것이다.

 

심제글.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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