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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 이전 문명의 흔적

설레임의 하루 2013. 2. 4. 21:57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2013.01.09.  http://cafe.daum.net/dobulwonin/GGII/376 

-8천년전의 세계최고의 선박.

 
바다와 인접해 있는 인도.동남아.영국.유럽의 고인돌의 원형은 한반도 고인돌문화에 있다.

이것은 고대 한반인들이 이미 해로를 통하여 고인돌 문화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창녕 비봉리서 8천년전 배 발견-무려 8천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시대 초창기 통나무 배(舟)가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신석기시대

유적. 최하층에서 기적적으로 출현돼 국립김해박물관 임학종 학예연구실장이 5일 현장설명회를 하고 있다.

/김태종/지방/문재 - 지방기사참조 -2005.9.5 (창녕=연합뉴스)

 
 

 

1만7000여년전의 세계최고의 볍씨

한반도는 가장 일찌기 벼농사를 시작한 땅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1만7000~1만3000년 전 볍씨. 출처는 ‘소로리 사이버박물관’

( http://www.sorori.com).

벼농사 역사에서 획을 그을만한 놀라운 발견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1998년과 2001년 조사한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유적이 그곳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1만 7000~1만 3000년 전의 토탄층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흙층)에서 모두 59톨의 볍씨(고대벼와 유사한 벼)가 발견되었다. 

일단 과학적 연대측정법에 의해 확인된 이상, 우리는 소로리볍씨가 갖는 의미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넓게는 벼농사가 7~8천년전 인도나 동남아시아, 중국 남방에서 시원했다는 종래의 학설을 새롭게 수정하는 근거이자 좁게는 우리나라의

벼가 남·북방 양로를 거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는 전래설의 종언을 뜻하기도 한다.

요컨대, 벼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였다는 개연성을 시사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가 엄청난 충격이고 커다란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고대의 논농사와 관련한 문헌기록도 적지않다.

최초의 문헌은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 재배에 알맞다’라고 쓴 중국 사서 <삼국지>의 ‘위지(魏志)-변진(弁辰)’조이며, 국내 사서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백제 2대 문루왕(文婁王)이 즉위 6년(32년) 2월에 ‘명을 내려 처음으로 벼를 심을 도전(稻田: 논)을 만들게

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러한 제반 사실은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청동기 시대에 본격화했음을 말해준다.

고로 한반도보다 땅자체가 척박한 중국땅에다가 한반도3한을 설정하거나 백제을 개국했다는 논리도 맞지 않다 할 것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한반도에 서양인이 살고 있었다”

 

41년전 발견된 황석리 13호 인골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발굴 당시 발굴단은 서울대 의대(나세진·장신요 박사팀)에 인골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는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분석팀은 당시 “인골의 신장이 1m74 정도”라면서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두개장폭(頭蓋長幅)지수가 66.3”이라면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인 점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김병모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은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두개장폭지수는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라면서 “황석리 인골의 지수(66.3)로 보아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BC 1700년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BC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놀라운 것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조용진 한서대 교수가 이 인골의 두개골을 복원한 결과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고, 이가 큰 북방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또 “이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난다”면서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서양인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유태용 경기대 강사는 “지금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고 전제하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그는 최근 발간한 ‘한국 지석묘 연구’(주류성 간)에서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정도에 따라 골격이 다르다”고 전제하고 “지석묘에서 나온 뼈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은 튼튼한 것들임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평민들은 과도한 노동력으로 어깨뼈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의 현상을 보인다는 것.

 

결국 족장급이 분명한 황석리 인골은 잘 먹고 계급도 높은 사람의 것이지 ‘서양인’의 것으로 보기는 무리라는 게 유씨의 주장이다. 자, 지금이라도 최근 서울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온 황석리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논쟁의 결론이 나지 않을까.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