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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류 초기문명사에 던지는 의구심.

설레임의 하루 2013. 3. 12. 00:13
 동북아에 살던 구석기人 Homoerectus와 이후의 신석기人 Homosapiens와의 인류학적 연관성과 인류문화사적 연관성이 과연 단절 되었을까? 대륙의 하북北京遠人,요녕山頂洞人,섬서藍田遠人발굴지와 고대문화의 발상지와 관련이 없었을까? (운영자 주)

 

아프리카 케냐에서 발견된 돌도끼.

지금까지 발견된 아슐리안 석기보다 35만년이나 앞선 176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됐다. / Nature 제공

 

미국 컬럼비아대의 고생물학자인 크리스토퍼 레프리(Lepre) 박사는 ‘네이처’ 최신호에 아프리카 케냐 투르카나 호수 기슭에서 주먹도끼 등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슐리안(Acheulian) 양식의 석기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제작연대는 석기가 묻혀 있던 지층을 토대로 지금까지 발견된 아슐리안 석기보다 35만년이나 앞선 176만년 전으로 추정됐다.

 

이번 발굴 지역에서는 큰 돌로 작은 돌을 내려치는 단순한 방법으로 만든 올도완(Oldowan) 석기도 자주 발견됐다. 과학자들은 270만년에서 17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도구의 인간)가 올도완 석기를 개발해 썼으며, 그 후 베이징 원인(原人)과 같은 직립 원인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나타나 150만년 전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아슐리안 양식을 발전시켰다고 추정한다. 아슐리안이라는 이름도 첫 발견지인 프랑스 지역의 이름을 딴 것이다.

문제는 최근 유럽에서도 올도완 양식의 석기가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에 이미 아슐리안 석기가 있었음에도, 유럽으로 이주할 때 굳이 구식 올도완 석기를 가져갔다는 말이 된다.

과학자들은 이 모순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먼저 호모 에렉투스뿐 아니라 호모 하빌리스도 유럽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다. 유럽에서 발견된 올도완 석기가 바로 호모 하빌리스가 유럽으로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쪽에서는 일부 호모 에렉투스가 아프리카에서 아슐리안 석기를 개발했지만, 전체 집단으로 퍼지지 않았다고 본다. 유럽으로 이주한 호모 에렉투스는 한동안 구식 올로완 석기를 쓰다가 아슐리안 석기를 다시 발명했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는 화살과 활과 같은 기술이 발명됐다가 사라지고 재발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1. 한반도의 최초 주인 한반도 중부를 정복하다

구석기 시대란 최초 고인류가 등장한 때부터 약 1만 년 전까지에 걸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선사시대란 유럽적 기준으로 하면 석기, 청동기, 철기의 발견 시기까지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석기는 도구의 제작 방법에 따라 뗀석기와 간석기로 구분한다. 이 구석기 시대는 보통 신생대 3기와 4기 시대에 나타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시 이 신생대 4기는 갱신세와 전신세로 나뉘어지며 흔히 말하는 빙하기는 갱신세에 해당한다.

이 빙하기시대의 인류와 동물은 추위를 피해 쉴새없이 움직여야 했고 추위를 피해 남으로 이동하여 그들의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 시기를 약 200만년에서 100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류의 탄생은 이러한 추위를 피하고 살아오면서 점차적으로 현생인류로 발전을 하게 된다.

오늘날 한반도의 최초 인류는 아직까지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중국에서 빙하가 발견된 시기를 추적하고 빙하기 시기 황해와 중국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측면에서 한반도에도 빙하기 인류가 생존하였을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에 최초의 구석기인들의 유적으로는 단양의 금굴 유적과 공주 석장리 유적으로 전기 구석기시기에 해당하는 70만 년 전 유적들이 발굴되어 세계 고고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구석기 전기 유적에 있어 인류의 도구 기술을 실질적 발전을 이룬 아슐리안형 돌도끼가 발견된 것은 한탄강 유역의 전곡리 유적지이다.

서구의 개념으로 본 인류 역사에 있어서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한 이 돌도끼는 1978년 전곡리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동양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전곡리에서 발견된 이 돌도끼는 동양의 인류발전이 서양의 인류발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증거로 전 세계 고고학계의 이론을 완전히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전곡리에서 발견된 이 유적은 한반도에 이미 오래전부터 발전한 인류가 생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었다. 전곡리 유적 이후 한반도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구석기 유물들이 대규모로 출토되기 시작했다.

1) 아슐리안 석기와 구석기인들

아슐리안 돌도끼의 발견

   
▲ 세계 구석기 역사를 바꾼 연천 전곡리의 아슐리안형 주먹돌도끼. [사진-최현진]

 

 

 

 

 

 

 

 

 

 

 

 

 

 

 

 

 

 

 

 

 

 

 

아슐리안 돌도끼는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이다. 이 돌도끼가 발견되는 지역이나 그 형태에 따라 구석기 문화의 각 단계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주로 이 문화가 존속하였던 시기는 약 5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이며 최초의 원인류가 발견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어 약 100만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문화는 주로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발견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아시아에서는 발달한 구석기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자바를 제외하고는 전기 구석기 시대의 유물로는 아슐리안 돌도끼보다는 주로 초퍼(chopper), 초핑툴(choppingtool)로 대표되는 자갈돌석기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는 아프리카나 유럽보다 구석기 문화의 발전이 늦은 미개한 대륙으로 이야기되었다.

1978년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미공군 그렉 보웬은 한국인 애인과 함께 연천 전곡리의 한탄강변을 산책하였다. 당시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강가를 산책하던 중 이상한 물건을 발견하게 된다. 일반적인 돌과는 모양이 사뭇 다른 돌로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깍인 듯한 흔적이 있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그 돌들이 예사 돌 같지 않음을 직감하였다. 그리고 주변을 더 찾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자신이 발견한 돌과 같이 누군가에 의해 조각된 듯한 돌이 몇 점 더 나왔다. 돌을 발견함과 동시에 보웬은 바로 귀대해 사진을 찍고 군용작전 지도를 들고 다시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지도에 자신이 찾은 돌들이 있던 위치를 적었다. 현장 사진과 유물 사진을 기반으로 보웬은 일주일간 자신이 겪은 일들을 보고서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발견을 누구에게 알릴 것인가 고민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발견한 돌을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스의 보르드 교수에게 우편으로 연락했다. 보르드 교수는 보웬의 보고서를 받아 본 이후 답장을 보내왔다.

“만약 이것들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나는 의심없이 아슐리안 문화의 석기라고 말하겠습니다. 내 자신이 직접 현장을 보고 싶은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러나 여건상 불가능하니 서울대학교 고고학과로 연락해 보십시오.”

이 답신을 받은 보웬은 휴가로 틈을 내어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인 김원룡 교수를 찾았다. 김원룡 교수는 즉시 영남대 정화영 교수와 현장을 답사했다. 그리고 이들은 연천 전곡리 한탄강 주변에서 발견한 구석기 전기의 유물에 대해 전 세계 학계에 공개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고고학계는 새롭게 쓰여져야 했다. 당시까지 아슐리안형 돌도끼는 아시아에 없다는 이론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1978년 전 세계의 고고학계는 완전히 새롭게 쓰여졌다. 우리나라의 고고학계 역시 새로운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발견 이후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였다. 이곳에서 발견한 석기들의 연대를 측정하는 문제였다. 과연 이곳에서 발견된 석기들이 20만~30만 년 전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논쟁이 쉼없이 이뤄졌다.

결론이 나지 않자 국내학계는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최고의 권위자인 미국 버클리대의 존 데스몬드 클라크(J. D Clark) 교수는 전곡리 유적을 관찰한 뒤 전기 구석기시대인 아슐리안기 구석기에 해당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아슐리안형 돌도끼

   
▲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 뗀석기의 일종인 양날찍르게. [사진-최현진]

 

 

 

 

 

 

 

 

 

 

 

 

 

 

 

 

 

 

 

 

 

 

 

 

아슐리안형 돌도끼는 양면핵석기라고도 불리는데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양면핵석기는 중기 구석기와 후기 구석기시대에도 계속 발견되고 있으나 이 시기에는 주로 박편석기와 돌날석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석기가 전기 구석기시대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석기는 아니다. 전기 구석기시대 초기에는 오히려 초퍼나 초핑툴이 먼저 나타난다. 양면핵석기는 자갈돌의 한 쪽 면을 한 방향으로 여러 번 쳐서 만든 초퍼, 그리고 자갈돌의 양 쪽 면을 서로 엇갈린 방향에서 여러 번 가격하여 만든 초핑툴 같은 석기들의 지속적인 발전에 의해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양면핵석기의 재료는 주로 규석, 석영, 사암 들을 사용하고 있으나 현무암 같은 다른 돌도 이용하였다. 양면핵석기를 만들 때에는 이러한 석재로부터 일차적으로 큰 박편을 떼어난 다음 박편의 아랫부분과 윗부분, 즉 박편의 양면을 주위로 돌아가면서 엇갈리게 타격을 가하여 작은 박편을 떼어내면서 처음부터 만들고자 하는 양면핵석기의 형태를 만들어 간다. 따라서 본래의 큰 박편은 박편의 양면에서 작은 박편들이 껍데기처럼 떨어져 나가고 알맹이만 남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양면핵석기라고 부른다.

이 석기의 사용방법은 주로 손에 쥐고 사용하기 때문에 돌도끼라고도 부른다. 이 석기의 용도는 지금의 주머니칼과 그 용도가 비슷하다. 짐승을 사냥하는 데에도 쓰이지만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것에도 이용된다. 또한 땅을 파서 풀이나 나무뿌리 등을 캐는 다용도로 이용되기도 한다.

양면핵석기문화가 존속하던 시기는 지질학적으로 제4기 지질시대에 해당한다. 제4기는 홍적세와 충적세로 나뉘며 대부분이 홍적세에 해당하는 하는데 흔히 대빙하기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는 4개의 큰 빙하기와 3개의 간빙기로 나눈다. 유럽에는 이러한 빙하기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빙하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에는 이러한 빙하기의 흔적이 남아있어 당시 중국과 한반도가 서해안으로 붙어있었기에 우리나라에 빙하기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양면핵석기가 발견된데 비해 중국에서는 양면핵석기문화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것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천 전곡리 이후의 구석기

   
▲ 아슐리안형 주먹돌도끼를 사용하는 전곡리의 네안데르탈인. [사진-최현진]

 

 

 

 

 

 

 

 

 

 

 

 

 

 

 

 

 

 

 

 

 

 

구석기라 함은 최초의 고인류가 발생한 이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의 긴 기간을 지칭한다. 이러한 구석기는 수백만 년을 거친 매우 장구한 시기이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등장에서부터 각종 고인류가 등장 소멸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문화진화의 속도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기에 약 10만 년 전까지는 도구제작과 형태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인지되고 있지는 않다.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은 주로 석기로 대표되는 유물의 변화양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흔히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구석기는 뚜렷한 기준이 아직 확립된 것은 아니나 시기별로 나타나는 석기의 변화에 따라 대략적으로 위의 세 시기로 구분되어 불리고 있다.

한반도에서 나타난 최초의 구석기 유적은 평안도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된 굴포리 유적이다. 그러나 이 유적은 발굴 당시 시대적으로 일제시대란 점과 일본인에 의해 발굴이 되어 구석기 유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1960년대까지도 잊힌 유적이었다. 그러나 1963년 패총퇴적층 밑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남한에서의 구석기 유적은 1964년 공주석장리 유적이 최초로 발견되어 구석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구석기 문화의 시작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78년의 연천 전곡리였다. 연천 전곡리 유적 이후 한반도에서는 연이어 구석기시대를 알리는 유적지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발견된 유적지가 전곡리 유적지가 발견되고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발견되었지만 이곳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에서만 15군데 이상의 전기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었다.

구석기인은 한반도 최초의 고인류

구석기 초기의 인간은 남자는 사냥, 여자들은 열매따기에 나섰다. 사냥을 하지 못하면 이들은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이들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도구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구의 발견은 이들 고인류는 흔히 손쓴사람(Homobabilis)이라 곧선사람(Homoerectus)으로 불리운다.

도구를 만들어 씀으로써 자연의 예속에서 벗어났고 동물의 상태에서 인간사회를 만들어갔다. 처음 이들의 도구는 주변의 흔한 돌이었다. 주변의 돌을 들고 사냥을 위해 동물에게 던졌으나 점차 돌을 쓰는 방법이 발전해 갔다. 한 방향으로 돌을 떼어내 쓰던 방법에서 점차 양쪽으로 돌을 떼어내 쓰게 되면서 단순한 차돌에서 조금씩 날카로운 형태의 석기로 발전해 나간 것이다.

이들 구석기인들의 주거형태는 대부분 동굴생활이었다. 이들의 흔적은 대부분 강가의 동굴이나 산 쪽의 동굴에서 많이 발견된다. 여기에서는 석기들과 여러 동물의 동물뼈 화석이 함께 발견되기도 하는데 당시 구석기인들이 석기를 이용해 사냥을 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동굴에서는 이와 함께 탄화목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동굴생활을 하면서 불을 피웠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불을 피우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불을 피우므로 인해서 맹수에게서 보호를 받고 동굴의 습기를 제거할 수 있었다.

전기 구석기 초기의 고인류가 산에서 생활을 하는데 반해 전기 구석기 후기에 가면서 당시의 인류는 강이나 낮은 언덕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의 석기는 이전에 비해 더욱 발전된 형태의 양면핵석기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또한 강가에서 살게 되면서 나무막대기에 석기를 끼워서 사용하는 창도 개발되게 되었다.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연천 전곡리와 양구이다.

이 지역의 구석기인들은 발달한 석기를 통해 점차적으로 혈족의 놀이를 발전시켜 나갔고 소속감을 높이게 된다. 강으로 나온 구석기인들은 점차적으로 자신들의 행동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하였으나 그들이 바로 우리 한반도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었다. 이들은 주로 곧선사람으로 마지막 빙하기 시대인 후기 구석기 시대에 슬기사람(Homosapiens)들과 대체되기 시작한다.

슬기사람으로 불리는 후기 구석기인들은 석기와 더불어 짐승의 뼈를 이용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이들 슬기사람이 신석기 초기와 후기 구석기 말기의 슬기사람으로 대체되기 전까지의 한민족의 기원으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전기 구석기에 나타나는 곧선사람은 한반도에 문화를 가진 최초로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전곡리의 인류는 구석기인류가 발달된 석기를 기반으로 산에서 점차 영역을 넓혀 강이나 한데로 나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한반도의 최초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truth1beauty2/13429242

       http://blog.daum.net/okchj/82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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