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고구려, 백제 영토의 수수께끼를 밝혀주는 정말 놀라운 글(펌)-1

설레임의 하루 2013. 1. 23. 21:09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호두까기 2013.01.23.  http://cafe.daum.net/mookto/GUJC/4638 

 

 

고구려, 백제 영토의 수수께끼를 밝혀주는 정말 놀라운 글(펌)-1

이 글은 저격수란 coo2넷의 논객분이 퍼오신 자료입니다.

먼저 이분의 시각은 극단적인 대륙삼국설- 한반도엔 한국이 없었다 - 를 

한반도 역시 포함해야 하는것으로 수정해야 함을 주장하는 분입니다.

길어서 1,2,3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원문게시판-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4&sn=off&ss=on&sc=on&keyword=%C8%C4%C7%D1%BC%AD&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6838


해양백제, 대륙백제, 왜백제| 자랑스런 우리 역사 
이태완 조회 30 |추천 0 | 2010.09.11. 16:42

백제는 부여에서 남하하여 세운 국가로서 만주 요동반도가 그 출발지입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싸웠고 백제 계왕은 일찌기 일본을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요동반도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피난길의 요동반도 백제인들은 중국 산동반도와 일본으로 더많이 진출했습니다.

  요동반도와 한반도 절반을 잃고나서 백제는 왜백제보다 국력이 약해졌습니다. 

   
1장. 백제의 건국과 성장(百濟建國記) 

1절. 온조의 한반도 도래(溫祚渡來記)    

  백제의 기원은 여제(女帝) 소서노(召西努)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소서노는 연타발(延佗渤)의 딸로서 고주몽(高朱蒙)을 맞아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다. 

  그러나 고주몽이 고구려 왕위를 부여에서 온 유리왕(琉璃王)에게 물려 주려하자 소서노는 스스로 떠나가서 어하라(於瑕羅)를 세웠다고 전한다.
  

  백제의 기원은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서는 소서노가 기묘년, 즉 기원전 42년 3월에 진번지간(辰番之間)에 이르러 10년만에 장원을 사고, 오백리의 땅을 차지하니 북으로 대수(帶水; 今 海城河)에 이르렀다고하였다. 

  이는 바로 어하라 땅에 대한 기록이다. 

해성하의 해성에 있는 영성자산성은 여왕이 쌓았다고 전설이 전해진다. 

바로 소서노의 북쪽 경계 성인 것이다. 

  여기서 어하라(於瑕羅)는 대련시 득리사진(得利寺鎭) 예애(倪崖) 부근으로 추정하며 득리사진의 용담산성(龍潭山城)이 그 기원지로 추정한다. 

북으로는 태자하에 이른 적도 있고 동쪽으로는 벽류하(碧流河)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해에 고주몽(高朱蒙)이 소서노(召西努)를 어하라(於瑕羅)라고 책봉하였는데, 후대에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로 부른 기록이 중국의 여러 사서 중의 <백제전>에

남아 있다. 

  어하라(於瑕羅)는 지역 이름을 의미하는 “라”로 끝나고 어라하(於羅瑕)는 존칭의 의미가 있는 “하”로 끝나니 왕의 우리말 호칭이 될 수 있다. 

  한편 어하라(於瑕羅)는 어하(於河)의 땅(羅)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 어하(於河)(於)(wu, yū, yu,)는 복주하(復州河)의 고대 이름인 낙하(樂河)(樂)(yꐃo, yue)의 중국발음과 서로 유사하다.

또한 예애(倪崖)도 복모음을 풀은 우리말로는 어이아이, 어아가 된다.  


  어하라(於瑕羅)의 소서노(召西努)는 13년, 임인년에 붕어하였고 비류(沸流) 태자가 뒤를 이어 어라하(於羅瑕)로 즉위하였는데 이 해는 기원전 19년이 된다.

따라서 어하라가 제후 국가로 인정받은 어하라 1년은, 기원전 31년으로서, 이 해에 소서노는 고주몽을 떠난 기원전 42년으로부터 10여년만에 또하나의 나라를 일으킨

것이었다. 

  어하라 13년, 기원전 19년에 비류(沸流) 태자가 소서노의 뒤를 이어서 비류왕이 되었으나 온조(溫祚)는 스스로 독립하여 마한(馬韓) 땅으로 옮겨간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기원전 18년이 온조의 즉위년도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서문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같이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서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살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 비류는 자기 어하라 왕국에서 온조를 따라올 이유가 없다. 

소서노를 계승하여 어하라의 왕이 된 것이다. 즉 미추홀에 비류가 왔다면 그것은 비류가 아니라 비류의 후손이다. 

  그런데 온조 13년, 기원전 6년에 온조왕의 북쪽 국경은 이미 패하(浿河;今 遼陽市 太子河)에 이르고 있으며, 온조왕 38년, 기원전 20년에 패하(浿河;今 遼陽市 太子河)

까지 순무(巡撫)하고 있다. 

즉 비류가 일찍 죽었으며, 그의 후손도 온조에게 귀복한 것이다.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중에 온조왕의 개국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하 마려(馬黎)가 온조(溫祚)에게 말하기를 “신(臣)이 풍문을 들으니, 마한이 쇠퇴(衰敗)하였으므로 뜻을 세워 마한에 가서 도읍을 세울 시기입니다.(可往立都之時也)” 

  온조 왕자가 마한의 미추홀에 상륙하고, 둘레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다시 한산(漢山)으로 떠나 부아악에 올라 위지성(慰支城)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마한(馬韓) 땅에는 월지국, 목지국, 달지국 등과 마찬가지로 “지”로 끝나는 성 이름이 많다. 

따라서 본래의 위례성은 어하라성이고 온조가 세운 것은 위지성인데 비류의 어하라가 귀복하였으므로 위지성이 위례성으로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비류와 온조가 패대수(浿帶水; 今 遼陽市 太子河와 海城河)를 건너 같이 복주 어하라에 살았다는 것과, 온조가 홀로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제국(十濟國)을 세우고

다시 마한까지 병탄하였을 때에, 북쪽 어하라로부터 비류가 아닌, 비류의 후손이 도래하여 미추성(彌鄒忽)에 따라와 살았다는 것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삼국사기]<온조왕 서문>의 패대수는 [한서지리지]의 패수와 대수로서 각각 요양시 태자하(太子河)와 해성시 해성하(海城河)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후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패수는 청천강이며, 대신에 태자하는 패하(浿河)로 바꾸어 기록되었다.  

 


 2절. 하북 위례성과 평성시 청룡산성(河北慰禮城, 平城 靑龍山城)   

  [한단고기]<고구려본기>는 온조 왕자가 마한의 미추홀에 상륙하고, 둘레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다시 한산(漢山)으로 떠나 부아악에 올라 바라보고, 하남의 위지성

(慰支城)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서문 중에 온조왕 정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온조(溫祚)는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보고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여 개국하였다. 

  온조는 요동반도 어하라로부터 배를 타고 미추홀(彌鄒忽; 평안남도 永柔縣)에 상륙하여서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지를 정하여, 하북 위례성(慰禮城)에도 살고

다시 하남 위지성에도 살았다. 

  미추홀은 미추성(彌鄒城)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지리지>에 명확한 기록이 없다. 

미추홀을 경기도 인천 운운 하는것은 온조의 한수(漢水; 大洞江), 한성(漢城)을 오늘날의 한강(漢江)에서 찾고 거기에 꿰어맞추려 한 김부식의 잘못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미추성은 두 번 나온다. 

한번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빼앗은 성으로서 소개되었는데, 야리성(也利城) 앞에 기록되어 있고 두번째는 414년 수묘인을 공출한 성 이름

중에서 야리성(也利城) 앞에 나온다. 

  따라서 야리성(也利城)과는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광개토왕 비문> 중에서 뒤에 나온 미추성의 추(鄒)자가 확실한 판독이 어렵다. 그러나, 미(彌)자가 확실하고 추(鄒)의 자리에는 읍(ꞥ)변이 확실하게 남아 있으며,

무엇보다도 <광개토왕 비문> 앞 부분에서 이미 나온 바가 있는 데다가, 그것도 기록 순서에서 야리성(也利城)의 앞자리인 것이 일치하기 때문에 미추성이라고

추정하여도 거의 틀림없는 것이다. 

  이 미추성(彌鄒城)을 비정하는 데에 있어서의 조건은 첫째 해안이 가깝고 둘째 부아악이 바라보여야 한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던 함종현(咸從縣)은 <백제본기>에서 비류의 후손이 광무제의 침략을 피해 즐거이 온조 백제 땅으로 따라온 것을 기리는 지명일 수 있다.

또한 온조가 사냥을 다닌 아산(牙山; 咸從縣의 古名)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함종현의 북쪽인 평원군 영유현(平原郡永柔)에는 미추성(彌鄒城)의 변음으로 추정되는 미두산성(米豆山城)이 남아있다. 

  미추성(彌鄒城)의 발음이 오늘날같이 현대적으로 분화하기 전에는 미투성이었다가 훗날에 고구려에 의해서 폄하되어 미두성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현재는 태조산(泰祖山)이라고 하는데 바로 한반도에 처음 도래한 백제왕 온조(溫祚)를 곧 백제 태조로서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평원군 평야를 장악하는 영유현 태조산 미두산성을 백제의 미추성(彌鄒城)이라고 비정한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미추성(彌鄒城)은 두번 다 야리성(也利城)과 동반하는데 야리성(也利城)은 아리성의 변형이다. 

  아리성의 아리는 알이라는 어원을 가지며 이 아리는 어머니를 의미한다. 아리랑(阿利浪)이나 아리수(阿利水)도 어머니의 물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패수(浿水)는 풀어서 발음하여 바이물, 즉 아버지의 물이라는 뜻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왕의 정도 기록에서 비류(沸流)와 온조 형제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정도(定都)하였는데 반하여 비류는 미추성(彌鄒城)을 택하였다고 한다. 

  물론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비류왕자가 소서노의 어하라(於瑕羅)를 계승하자, 온조왕자는 혼자 어하라를 떠나와 바다를 건너 미추성에 도착하였다가

부아악에 오른 뒤에 위례성에 정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부아악에서 위례성(慰禮城)과 미추성(彌鄒城)이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은 부아악의 발음을 연상하여 서울의 북악산(北岳山)이라고 말하였다. 

북악산에서 인천을 바라보고 광주(廣州)를 바라볼 수 있는가 의문이다. 

  대신에 필자는 부아악(負兒岳)의 뜻으로 새롭게 추정하는데 부아(負兒)는 아이를 등에 업은 산으로서 어머니 산이라고 이름이 변했다고 추정한다. 즉 부아악은 모산

(母山)으로 변한 것이다. 그것도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라고 불러서 오늘날의 자모산(慈母山)으로 변한 것이다. 

  미추성이라고 추정한 영유현(永柔縣)의 동북쪽에 우리가 찾는 자모산성(慈母山城)이 있다. 

온조(溫祚) 때의 부아악이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에 야리성(也利城)로 변하고 오늘날에는 자모산성(慈母山城)로 변한 것이다. 

  자모산성은 우물이 99개이고 성둘레는 5KM의 산성이다. 

이중에서 북쪽 성벽 일부, 즉 내성이 백제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야리성(也利城)이 왜 아리성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 중에 어리성도 있고 아리수도 있다.

아리수가 압록강일 때 청천강 남쪽 아리성은 야리성으로 구분하여 기록될 수 밖에 없다. 즉 당시에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발음하면서도 표기는 달리한 것이다. 

    다음으로 자모산성(慈母山城) 남쪽에 청룡산성(靑龍山城)이 위치하고 있다. 

<광개토왕 비문>의 정벌 기록에서는 야리성(也利城) 다음에 대산한성(大山韓城)이 기록되었다. 

  이 대산한성(大山韓城)이 바로 온조(溫祚)의 첫번째 하북 위례성(慰禮城)이다. 

  현재 청룡산성(靑龍山城)의 마을 이름도 상차리(上次里)로서 우리말로 윗 차례인 것이 위례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현재는 오리동(오리洞)이라고도 부르니 역시 웃리, 상리의 의미로서 위례성의 변음인 것이다. 

  온조의 위례성은 백제 시대에 이미 하남 위례성과 대비하여 대산한성(大山韓城)이라고도 불렀으며 오늘날의 평성시 청룡산성(靑龍山城)이 되었다. 

  하북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한 청룡산(靑龍山 559M) 산성은 성둘레가 약 5KM의 석성이다. 하지만 온조 당시에는 토성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온조는 평안남도 영유현 미추홀에 왔다가 산넘어 평성시 청룡산에 위례성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가 온조 13년에 한수 남쪽의 위례성으로 옮겨갔는데 얼마 후, 다루왕에 이르러 비류의 후손들이 와서 미추성을 쌓고 살았다. 

   

  3절. 하남 위례성, 한성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온조왕 8년에 낙랑국이 침범하여 청룡산의 위례성을 포위하였으나 온조왕은 농성하여 지켜냈다.

이는 온조가 안전을 도모하여 대동강 한수 남쪽 한성(今 樂浪土城)으로 천도하는 이유가 된다. 


   "북으로는 한수를 띠고, 동으로는 고산에 의지하고 남으로는 옥택을 바라보며 서로는 바다에 막힌 천험의 땅이다.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 方沮大海). 열사람의 신하가 따라왔으므로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여기서 십제 건국지가 대동강 남쪽 십성동의 낙랑토성으로 고려된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의 천도 기록을 본다. 

  “낙랑이 동쪽에 있고 말갈이 북쪽에 있어 편할 날이 없고 국모 소서노마저 돌아가셨으니 한수 남쪽으로 천도하겠다.” 

  앞에서 소서노의 붕어는 어하라(於瑕羅) 13년으로 비류(沸流)태자 1년이고, 온조(溫祚) 1년이지, 온조 13년은 아니다.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13년 한성 천도 전에, 한산(漢山)에 책성(柵城)을 세워서 위례성의 민가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 

  여기서 한산 책성은 평양 동쪽 안학궁 아래 청호동 산성(淸湖洞 山城)으로 추정된다. 

  청호동 산성 남쪽에는 대동강을 건너는 나무 다리가 발굴되었다. 1981년에 발견된 이 나무 다리는 너비가 9M, 길이는 375M 이다.

고구려 광개토왕 시대 신라인들이 평양에 쌓은 건축물일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백제인들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漢山)은 훗날 근초고왕이 천도한 한산(漢山)으로서 평양 동쪽 대성산성, 안학궁 일대이므로, 평양 북쪽 하북 위례성민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던 것이다.

뒷날 장수왕 때에 개로왕의 한성을 치기 전에 먼저 친 북성, 즉 대성이기도 하다.

아신왕 4년, 394년경에 한수(漢水;大洞江)를 타고 올라가 고구려를 치려다가 회군한 한산성도 이곳이다.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13년 8월에, 마한왕에게 한수(漢水; 大洞江) 남쪽 한성(漢城) 천도를 알리고 경계를 통고하였다.

백제는 북으로 패하(浿河), 즉 요양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熊川)에 이르렀는데, 웅천은 오늘날의 임진강(臨津江)으로 본다.

임진강 상류는 고미천(古味呑川), 또는 웅천(熊灘川)이라고 하는데 같은 말이다. 

  서쪽 경계는 바다이고 동쪽 경계는 주양(朱壤)이라고 했는데 임진강의 발원인 마식령(馬息嶺)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추마리(秋馬里), 달해산(達海山), 북쪽의 달암산(達巖山), 두류산(頭流山), 동남쪽의 추애산(楸愛山) 등이 백제 주양(走壤)의 흔적으로 추정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태백산맥의 임진강 발원(發源)이라는 것이다.

마식령의 남쪽 추가령은 적목령(赤木嶺)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북쪽의 청목령과 대비된다. 

  주양으로 함흥의 주이천(朱伊川)을 고려할 수 있으나 이때는 백제의 동쪽 경계도 바다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당시 웅천은 절대로 충청도 금강(錦江)이 될 수 없는 것이 백제의 금강 진출이 온조왕 31년에 나오기 때문이다.  


  한편, 이 한성이 마한과 동북 백리로 추정된다. 당시 [후한서-한전](韓傳)에서는 마한의 통치자가 진왕이며 월지국이었는데 이는 구월산의 안악으로 추정된다.

그 동북 백리가 십성동 낙랑토성이다. 



  4절. 백제의 성장 강역(百濟 成長 彊域) 



  온조왕 원년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그런데 이 두 성이 백제 하북 위례성 동쪽의 함흥 낙랑국과 국경 분쟁을 일으켰다. 

  병산책(甁山柵)은 평안남도 맹산군 병풍산(屛風山;1166M) 남쪽 철옹산성(鐵甕山城)이다.

토성이며 성둘레는 650척인데 지형이 마치 항아리, 혹은 호리병처럼 생겼다는 곳이다. 

  마수성(馬首城)은 요덕군 마유봉(馬踰峰; 972M), 모도봉(毛都峰;1883M)과 관련하여 대동강 발원(發源)인 대흥군(大興郡) 신성면 창의리 부근으로 추정한다. 

  2년후 온조왕 10년에 백제군은 말갈군이 쳐들어오자 곤미천(昆彌川)에서 패배하고, 청목산(靑木山)에 의거하였는데 온조왕이 직접 봉산(烽山)에 가서 구원하였다. 


  <백제본기>에서 청목령에 대한 언급은 위의 기록까지 다섯 번이다. 

  374년 근초고왕은 청목령 위에 고구려 방어를 위하여 청목성을 쌓았다. 

  386년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 관방(關方)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에서부터 북으로 팔곤성(八坤城; 靉陽 灌水鎭)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임하였다. 

  394년 아신왕(阿莘王)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수를 지나 청목령 아래까지 진격하였다가 기상이 나빠서 한수로 회군하여 한산성(평양 대성산성)에 머물렀다. 

  469년 개로왕은 청목령에 큰 책(柵)을 설치하였다. 

  즉 청목령은 고구려와의 주요 통로이므로 고구려 집안 평양에서 압록강을 건너 오늘날의 만포천을 따라 청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길목으로 추정된다.

청천강 상류와 대동강 상류는 각각 희천군과 영원군으로서 서로 이웃하였다. 


  자강도 희천시(熙川市)는 옛이름이 청색(淸塞)으로서 백제 청목성으로 추정되는데, 고읍성은 토성이며 성둘레는 9707척이다.

희천시 남쪽 대추령(大楸嶺)은 개로왕의 방책이 설치된 곳, 즉 대책령(大柵嶺)의 변음으로 추정된다. 

  온조왕이 구원한 봉산은 희천군의 봉단성(鳳丹城)으로 추정되는데 온조왕도 대동강 한수를 따라 올라가 구원한 것이 된다.

곤미천은 독로강의 지류인 간성군(干城郡) 간북천(干北川)으로 추정된다. 

     

  다음해 기원전 8년인 온조왕 11년에 병산책이 말갈군에게 불탔다. 

  온조왕은 함흥 낙랑과 통로가 되는 곳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을 쌓았다. 

  후대의 성왕(聖王)이 신라군에게 전사한 구천(狗川)은 구양(狗壤)과 관련하여서 충청북도 회인 부근에 있던 양성(壤城) 부근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때는 온조왕이 서울한강까지도 진출하지 못한 때이므로, 후대에 구천성(仇天城)이 된 은산 고읍성(殷山古城)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11년인 온조왕 8년에 말갈적 3000명이 위례성을 포위해 왔으나 반격하여 대부현(大斧縣)에서 격멸하였다.

당시의 위례성은 하북 위례성으로서 평성시 청룡산성이며 대부현은 평양의 봉수대의 하나인 부산(斧山)으로 본다.

부산(斧山)은 순안(順安)과 평양(平壤)의 사이에 있었는데 지금은 단지 봉수산(烽燧山)이라고 한다. 


  온조왕은 14년에 한성으로 천도하였다. 십성동의 낙랑토성이다. 그해에 온조는 한강(漢江)의 서북쪽에도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 한강 서북쪽의 성도 대동강 서북의 성이다. 




  기원전 1년이 되는 온조왕 18년에, 칠중하(七重河; 臨津江)에서 말갈을 격퇴한 백제의 남쪽 경계는 상당히 확장이 되었고, 금마 마한은 황해도 재령강 서쪽으로

축소되어 포위가 되었다. 칠중하는 임진강 파주군 적성(赤城)이다. 서쪽에 중성(重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같은해에 낙랑이 침입하여 백제 위례성, 즉 청룡산성을 불태우는데, 백제는 보복으로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치려다가, 구곡(臼谷)에서 눈에 막혀 돌아왔다. 

  이 낙랑국 우두산성은 함흥의 동쪽 40리에 있던 우두산(牛頭山)으로 추정되며, 현재 낙원군(樂園郡)의 퇴조고성(退潮古城)을 치러간 것인데 도중에 포기한 것이다.

퇴조고성은 석성이며 4917척이며 당시 낙랑 도읍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낙원군명도 낙랑과 관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온조왕 20년에 고목성(高木城)과 석두성(石頭城)을 쌓았는데 뒤에 다루왕 때에 말갈의 침략이 있었고 무령왕 때에도 말갈의 침략이 있었으나 무령왕은 고목성

아래에 두 책성을 보완하고 아울러 장령성(長嶺城)까지 쌓았다. 

  장령성은 오늘날의 함경남도 금야군(金野郡)으로서 신라, 고구려 모두 장령성, 또는 장령진성이라고 하였다. 성력산성(聖歷山城)으로서 성둘레 2982척의 석성이다. 

  고목성은 고원군(高原郡) 성내리(城內里)로 추정하는데 고성은 확인할 수 없다. 

  석두성은 양덕군(陽德郡) 석탕온천 동쪽 상성리(上城里)로 추정하는데 고성은 확인할 수 없다. 




  서기 12년인 온조왕 26년에 마한(馬韓)을 병탄하였는데 이 마한은 기준의 후예가 자리한 곳으로서 재령의 장수산성이다. 

  이때, 온조가 마한을 병탄하는 데에 반대하는 마한의 구세력이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우곡성(牛谷城)에서 각기 온조왕에게 저항을 하였다. 

  당시 마한이 78국의 연합이므로 연합체제를 깨트린 백제에 대하여 각국의 저항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마한 합병은 마한의 한성을 점령하는 것에서

겨우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 일년여에 걸쳐 백제는 남진하여 서울 한강을 넘어 충청남도 공주 지방까지 진출하여 영역을 확장하였다. 


  원산과 금현은 정복당하여 강제로 한산 북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옮겨간 곳은 덕천군(德川郡) 금성(金城), 영원군(寧遠郡) 고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서기 18년에 온조왕이 원산, 금현성을 수리하면서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는데 고사부리성은 전라북도 부안 남쪽 고부(古夫)에 있었다.

고부 동쪽 덕안(德安)의 두승산성이 고사부리성이다.

따라서 온조왕이 수리한 두 성은 백제가 쳐서 옮기기 전의 원산, 금현성으로서 금현성은 충청남도 금산(錦山)으로 추정된다. 원산성은 알 수 없다. 

  우곡성은 현재의 법동군(法洞郡)으로 추정한다. 신라와 백제, 말갈간의 많은 쟁탈이 있었다. 




  서기 18년 온조왕은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고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 탕정은 충청남도 온양 바로 옆에 지명이 남아 있으므로 탕정성은 온양성이다. 

  대두는 우리말로 콩인데 콩산성은 공주시 공산성이다. 공주시에는 공산성과 웅진성이 다로 있다. 곰산성이 공산성이 된 것이 아니라 대두산성이 공산성이 된 것이다. 

  뒤에 문주왕이 웅진시로 천도하면서 서울 한강 이북의 백성을 대두산성으로 같이 옮긴 기록이 있다.

즉 공주에 수도 고마성(固麻城)을 세우기 위해 평안도에서 피난온 백성들을 먼저 콩산성에 옮겨 웅진시를 건축하는 일군으로 삼은 것이다.  


  서기 13년, 온조왕 31년에 백제는 남북 2부에 더하여 동서 2부를 설치한 기록이 있는데 4부를 갖춘 것이다.

북부는 압록강 이북으로, 동부는 대동강 동쪽과 강원도로, 서부는 황해도, 경기도로, 남부는 오늘날의 한강 이남으로 추정된다. 

  당시 전라북도 지리산 이남은 백제 영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에 백제에게 밀려서 새로 이주해 내려간 삼한, 즉 진한, 모한, 변한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온조 38년, 서기 20년에 온조왕은 50일을 걸려서 패하(浿河)를 돌아보고 돌아왔는데 패하는 바로 당시 고구려와 국경인 태자하이다.

온조 13년 이후, 광무제의 살수 공략 이전까지 백제의 북쪽 국경은 패하가 되었던 것이며 이때 어하라 비류백제와 통합되었다. 




  서기 22년, 온조왕 40년에 술천성(述川城)과 부현성(斧峴城)이 말갈의 공격을 받았다.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고구려 술천군은 경기도 여주 부근으로 말하고 있다. 지금은 강원도가 된 여주 동쪽 취병리 성상봉을 고구려 술천군으로 추정한다. 

  부현성(斧峴城)은 부양(斧壤)이라고 했던 강원도 평강군으로 추정된다. 두 성이 서로 멀다. 

   

  서기 25년, 온조왕 43년에 온조왕은 아산(牙山)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는데 아산은 평안남도 서해안 함종현이다. 고지명이 아산(牙山)이었다. 

  서기 30년, 다루왕(多婁王) 3년에 말갈이 마수산(馬首山; 馬息嶺)을 쳤으나 백제가 물리쳤다. 다음해에는 고목성(古木城; 高原郡)에서 다시 말갈군을 물리쳤다. 







   5절. 횡악산성과 신평 달보산성(橫岳山城, 新坪 達寶山城) 




  서기 31년, 다루왕(多婁王)은 횡악(橫岳)에서 사냥하였다. 

  이 다음해 다루왕 5년 정월에 백제는 대사령(大赦領)을 내렸는데 국가적인 경사가 있었던 것이며 이는 다루왕이 횡악(橫岳)으로 천도한 것을 의미한다. 

  횡악은 다루왕의 새로운 왕성으로서 그 위치는 황해도 신평군(新坪郡)의 달보산성(達堡山城)으로 추정된다.

다른 이름으로 달운산성(達雲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모두 다루왕성(多婁王城)을 지칭하는 것이다. 

  달보산성은 성둘레가 15060척이며 석성(石城)이다. 앞에서 본 태백산성보다 규모가 두 배로 커졌고 이제까지와 달리 석성이었다. 




  북쪽에 호위성으로서 다호천보(多乎遷堡)도 있었다. 북쪽에 흘령산(屹嶺山)이 있는데 다루왕이 좌보(左輔)로서 중용한 동부(東部)의 흘우(屹于)와 관련된다. 

  또한 서쪽에는 대동강의 남쪽가지인 남강(南江)이 발원하는 곳으로서, 횡천(橫川)이 흐르고 있다. 


  횡악성이 신평군의 달보산성이라고 추정되는 두 번째 이유는 남쪽의 오륜산(五倫山)이 있는데 원래는 오운산(五隕山)이 어원이다.

기루왕 때에 횡악에서 다섯 개의 돌이 떨어졌던 기록이 있다. (橫岳大石五一時隕落) 즉 오운산, 현재의 생왕산(生旺山,852M)이 백제 횡악 지방이었다.

횡악산은 달보산(달보산, 801M)을 지칭한다. 




  세 번째 이유는 506년 무령왕 때의 기록이다. 무령왕은 개로왕이 잃어버린 국토수복을 하여 506년에는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이때 507년에, 고구려군이 한성(漢城)을 공격하려고 횡악(橫岳)에 주둔하니 무령왕이 횡악에서 싸워 이겼다.

여기서 평산위례성을 공격하기 위한 고구려군의 선택은 위례성의 서북쪽이 될 수 없고 오로지 태백산맥을 넘어오는 동북쪽 공격로라는 것을 고려할 때에

달보산고성이 횡악으로서의 방향으로 정확하다. 


  네 번째 이유는 다루왕의 낭자곡성(娘子谷城) 합병 기록이다.

서기 63년, 다루왕 36년에 백제는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국토를 넓혔다. 이는 함흥 낙랑을 백제가 점령한 것이다.    

다루왕의 도성인 달보산성이 백제 역대 도성 중에서 가장 동쪽인 바,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백제는 기념으로 신라왕을 불렀으나 신라왕이 오지 않았다. 한편 이후에는 [신라본기]에서 신라에 대한 낙랑의 침입이 없어졌다. 


  그밖에 <광개토왕비문>에서 광개토왕의 396년 백제 정벌과정에서 백제왕이 국성인 한산성(漢山城, 平壤)에서 도망하여 성횡악성(城橫岳城)이자 편국성(便國城;

임시 수도)에서 항전하다가 고구려와 항복 조약을 맺었다.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일팔성, 구모로성---- 구천성 등을 쳐서 빼앗았다.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광개토왕이 진노하여 직접 아리수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악성)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변방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以六年丙申 王躬 率水軍 討利 殘國軍 

  [][]首攻取 壹八城, 臼模盧城,-----,仇天城, 

  [王旣破]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 城橫[岳城][][](百殘)便國城 

  而殘主因逼獻[上]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殘]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위 기록 중에서 58성은 백제성이며, 압록강 북쪽 단동시 봉황산성에서부터 대동강까지다.

따라서 396년 당시 광개토왕을 피해 아신왕이 남천한 성횡악성은 백제 횡악한성으로서 임시 백제 수도가 된 것인데 오늘날의 달보산성인 것이다.




  서기 37년, 다루왕 10년에 철령시의 낙랑국(樂浪國)이 대무신왕에게 멸망하였다. 이후 낙랑 유민들은 함흥과 신라의 경주 등으로 이주하였다. 

  서기 44년인 다루왕 17년에는 후한(後漢) 광무제의 살수(薩水; 渾河) 남쪽 침입이 있었다.

 

그러나 광무제가 침범한 곳은 후한의 낙랑군을 넘지 못하며 이는 전한의 낙랑군과 비교하여

1)탄열(呑列; 英陵鎭 老城子),

2)불이(不而;昌圖 老城),

3)잠대(蠶臺;開原市 斷山子),

4)화려(華麗;法庫縣 依牛堡子鎭 花牛堡),

5)동이(東暆;復州), 6)야두매(邪頭昧;瓦房店市 倪涯; 穢涯),

7)전막(前莫;庄河市), 8)부조(夫租;普蘭店市 吳古城),

9)잡현(霅縣;吉林市) 등이 없어지고 대신에 낙도(樂都;義縣 大楡樹堡鎭)가 생겨났다. 

  따라서 요동반도 대부분, 현재의 개주시(蓋州市) 이하, 수암, 환인 등은 백제 땅이었다. 

    

  서기 64년 백제는 신라의 와산성(蛙山城)과 구양성(狗壤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고 2년후 와산성을 다시 빼앗지만 도로 신라에게 내주었다. 

  다루왕 때에 신라와의 경계로 등장한 와산성(蛙山城)은 충청북도 보은군 읍 부근에 와산이 있었다고 전하므로 보은의 노성산(老城山)으로 추정한다. 

  구양성(狗壤城)은 회덕 북쪽 문의면에 있는 양성산(壤城山)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