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스크랩] 북위가 고구려를 상국으로 받든 기록을 찾았다

설레임의 하루 2012. 12. 28. 18:47

 

遣使者十余輩詣高麗、東夷諸國,詔諭之

북위서

신라 눌지왕 20년, 고구려 장수왕 24년, 백제 비유왕 10년(북위 태무제 태연 2, 436년2월)

사신 10여명을 보내 고구려와 동이의 여러나라를 찾아뵙고 왕의 말을 전했다.

 

詣(예) 자는 윗사람을 찾아뵐때 쓰는 말이다. 즉 북위가 자신들의 윗자리에 있는 고구려와 동이여러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북위가 고구려 호태왕때에는 초미니 소국이었기에 이미 호태왕에게 복속내지는 하위동맹관계였을 것이다라는 나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호태왕이 붕어하고 후연이 쇠락해지면서 북위가 힘을 길러 고구려에게 대항하는 형국이었지만 적어도 436년 2월초까지는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 상국으로 대접한 것이다. 이해에 북연이 망하고 고구려군과 북위군이 북연의 수도 화룡에서 싸워 고구려군이 이기고  북위는 룡우지역의 기병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시도하다 접고 만다.

 

逸豆歸遠遁漠北,遂奔高麗。

북위서 신라 흘해왕 35년, 고구려 고국원왕 14년, 백제 비류왕 41년ㆍ계왕(契王) 원년(진 강제 건원 2, 344)

일두귀가 막북으로 도망한뒤 마침내 고구려로 도망했다.

 

 

막북은 막연하게 사막지방을 뜻하는 것이기 떄문에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할 수는 없어도 고구려땅이 이미 사막지대를 고국원태왕때부터 일부나마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高麗、鄯善國並遣使朝獻

북위서  신라 눌지왕 19년, 고구려 장수왕 23년, 백제 비유왕 9년(북위 태무제 태연(太延) 원년, 435)

 고구려가 산산국과 함께 사신을 보내 선물을 보내왔다.

 

 남조의 양서에 보면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신라 법흥왕 즉위초기 신라가 백제사신을 따라서 남조의 양나라에 간 것이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辰韓亦曰秦韓,相去萬里,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馬韓亦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名國?邦,弓?弧,賊?寇,行酒?行觴。相呼皆?徒,不與馬韓同。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相系,辰韓不得自立?王,明其流移之人故也;恒?馬韓所制。辰韓始有六國,稍分?十二,新羅則其一也。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裏。其地東濱大海,南北與句驪、百濟接。魏時曰新盧,宋時曰新羅,或曰斯羅。其國小,不能自通使聘。普通二年,王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土地肥美,宜植五穀。多桑麻,作?布。服牛乘馬,男女有別。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貝旱支。其冠曰遺子禮,?曰尉解,?曰柯半,靴曰洗。其拜及行與高驪相類。無文字,刻木?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양서

 

신라는 본래 진한의 후손이다. 진한은 또 전국시대 진나라를 본따서 진한이라고도 하는데 진과 거리가 만리정도이다.사람들이 말하길 진나라가 망할때 부역을 피해 마한으로 도망온 사람들에게 마한이 동쪽땅을 떼주어서 진나라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진한의 왕은 마한사람이었다. 신라는 진한의 6국중 하나인데 백제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남북은 고구려 백제와 접한다.  나라가 작아서 사신을 스스로 보낼수 없다. 521년 법흥왕즉위2년에 백제에 순응하여 사신을  보내 선물을 보냈다. 나라에는 6탁평과  52개 읍륵이 있다.

 

《당서(唐書)》에는 이르기를,
“왕이 거처하는 금성(金城)은 둘레가 8리(里)이며, 위병(衛兵)이 3천 명이다.”

남조왕조인 양나라의 기록에 등장하는 신라가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경상북도 경주의 신라이다. 졍주시는 진나라의 영토인 장안일대에서 약 만리정도 떨어져 있는 것이 맞다. 베이징에서 서울까지 예전에 3천리가 조금 넘는다고 했는데 서울에서 경주시까지 약 7백리이고 베이징시에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인덕주시까지 약 천리정도 되니 백제수도 사비성인 덕주시에서 경주시까지 약5천리가 옳다. 남북이 고구려 백제와 접한다고 하니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만 신라땅이고 경상남도는 백제땅(백제제국에 속한 가야땅)이고 강원도중부이상은 고구려땅임을 알수 있다.

1개읍의 인구가 지금 기준은 2만명이상인데 한나라떄와 청나라때 현의 인구가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시대와 읍의 인구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한나라때 공신에게 내린 식읍의 기준이 6천호 약 25000명에서 3만명사이였으니 지금시대와 읍의 인구가 큰 차이가 없음을 알수 있다. 수도의 병사가 3천명이면 대략 인구는 10만명을 넘는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법흥왕때 대략 수도에 5-10만 지방에 110만정도 있었을 것이다. 총 120만내외로 보인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133 금나라기록을 통해 추산한 고구려인구 1860만

http://blog.daum.net/manjumongol/1135 백제인구는 3400만

그런데 주목해야 할 기록은 이 작은 나라인 신라가 백제에 순응해서 백제사신을 따라서 사신을 보낸 것이다.실제로 신라는 일본서기에는 백제 근초고황제때 백제에 병합되었고 북조와 북위의 기록을 보아도 원래 왕도 백제인이며 백제에 속해 있다가 호태왕때 고구려에 정복되었고 무령황제때 백제가 다시 병합했다. 법흥왕이 들어서면서 독립하기 시작했는데 법흥왕즉위2년째에는 아직 백제에 종속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1070 산산근처 고구려성 유적

http://blog.daum.net/manjumongol/1114 산산 남쪽의 고구려성 유적

 

高麗、契丹國並遣使朝獻

북위서 신라 눌지왕 21년, 고구려 장수왕 25년, 백제 비유왕 11년(북위 태무제 태연 3, 437)

고구려가 거란국과 함께 사신을 보내와 선물을 보냈다.

 

 

高麗、庫莫奚國並遣使朝獻

북위서 신라 자비왕 11년, 고구려 장수왕 56년, 백제 개로왕 14년(북위 헌문제 황흥 2, 468)

고구려가 고막해국과 함께 사신을 보내 선물을 보내왔다.

 

 

高麗、契丹國並遣使朝貢。

북위서 신라 자비왕 12년, 고구려 장수왕 57년, 백제 개로왕 15년(북위 헌문제 황흥 3, 469)

고구려가 거란국과 함께 사신을 보내 선물을 보내왔다.

 

高麗、庫莫奚國並遣使朝獻

북위서 신라 자비왕 12년, 고구려 장수왕 57년, 백제 개로왕 15년(북위 헌문제 황흥 3, 469)

고구려가 고막해국과 함께 사신을 보내 선물을 보내왔다.

 

高麗、吐谷渾國並遣使朝貢。

북위서 신라 소지왕 8년, 고구려 장수왕 74년, 백제 동성왕 8년(북위 효문제 태화 10, 486)

고구려가 토욕혼과 함께 사신을 보내 선물을 보내왔다.

 

산산국 거란국 고막해국 토욕혼은 왜 고구려와 함께 사신을 보냈겠는가? 바로 고구려의 종속국이었기 때문이다. 토욕혼은 호태왕비문에 버젓이 호태왕이 정복했다고 쓰여있다. 아직 등신들이 많아서 이를 인정치 않는데 토욕혼의 옛땅에 있는 고구려성유적은 어찌 설명할려고 하는지

http://blog.daum.net/manjumongol/825 사천성북부 송번 고구려성유적

이곳은 송주라고도 불렸는데 중국기록은 또한 수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涇岐及豳悉已陷賊,扶風以西,非複國有

북위서 신라 법흥왕 7년, 고구려 안장왕 2년, 백제 무령왕 20년(북위 효명제 정광(正光) 원년,  520년)

경기 에서 빈수지방은 이미 적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에 부풍서쪽은 우리 땅이 아니다.

 

 

 

북위서에 버젓이 경주 기주 수주 빈주가 자기땅이 아니라고 쓰여있지 않은가? 이땅이 누구땅인가? 유연땅인가?

유연은 최대전성기에도 남쪽으로 대적이 국경이었다. 분명히 유연은 최대전성기에 서쪽으로 고구려를 쳐서 국경서쪽이 고구려에 닿았다라고 원나라기록에 쓰여있다.즉 신장자치구의 산산국과  섬서성와 산서성일대에 걸쳐살던 거란국 고막해국은 고구려의 속국이었으며 토욕혼은 호태왕때 점령된후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며 고구려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수많은 나라의 상인들이 고려에 선물을 바치는 기록이 등장한다. 송나라도 엄청나게 선물을 많이 바쳤다. 고려사를 쓴 조선에서 중화를 높인다는 명분하에 송나라가 조공한 것을 송나라상인이라고 바꾼 것이다. 고려사신이 지나는 곳에 이들을 접대하느라 지방이 피폐해져서 송나라 대신들이 고려사신들이 오는 것을 막으려한 기록도 있다. 송나라가 요와 금의 압박에서 동맹국을 찾기위해 고려에게 굉장히 잘대해준것이다. 어쩌면 고려에 굽신거렸는지도 모른다.

 

 

출처 : 민족혼닷컴 http://cafe.naver.com/coreaspirits/1239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 삼태극 전문 학술위원 서울사나이

출처 : 삼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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