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한-韓 마한 진한 변한

설레임의 하루 2012. 6. 30. 01:05
 *출처:천지인    天鼓다음카페-천지인 천지인    天鼓글쓴이 무극 2011.08.09    http:blog.daum.net/mukeukyy/49
    
 

 

 

한-韓  마한 진한 변한

 

○ 한전(韓傳)[교92][註001]

 

(韓)[註002]은 대방(帶方)[註003]의 남쪽에 있고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며 사방

 4천리쯤 된다. (韓에는) 3종(種)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註004], 둘째는 진한(辰韓)[註005], 셋째는 변한(弁韓)[교93]

이다. 진한(辰韓)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집해1][註006]

 

마한(馬韓)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種植)[교95] 잠상(蠶桑,누에와 뽕나무)을

알아 면포(綿布,명주로 짠 피륙)를 만든다. (나라마다) 각기 장수(長帥,우두머리,수령)[교96]가 있어, 세력이 강대한 자는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城郭)은 없다.[註007]

 

(마한의 나라로는)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교97]水國), 상외국(桑外[교98]國),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교99]國), 신분고국(신분활국)(臣濆沽[교100]國)[집해2], 백제국(伯濟國)[집해3],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목지국)(月[교101]支國)[註008]자리모로국(咨[교102]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교103], 비리국(卑離國), 점리비국(점비리국)(占離卑[교104]國)[집해4], 신흔국(臣釁[교105]國), 지침국(支侵國)[교106],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교107],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교108]盧國), 벽비리국(辟[교109]卑離國), 구사오단국(臼[교110]斯烏旦[교111]國)[집해5],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교112]半國) [집해6],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교113]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집해7], 고랍국(古臘[교114]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교115]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원지국(爰池[교116]國), 건마국(乾[교117]馬國), 초리국(楚離國)으로, 모두 50여 개의 나라가 있다. (※ 민족문화대백과 각 항목을 링크했음)

 

대국(大國)은 (그 나라의 호구수가) 만여 가(家,호戶)이고 소국(小[교118]國)은 수천 가(家)로서[집해9] 총 10여 만 호(戶)이다. 진왕(辰王)[註009]이 월지국(月[교119]支國)을 다스린다. 신지(臣智)는 때로 우대하는 호칭이 더해져(加優呼) 신운(臣雲)

(신국의) 견지보(遣支報), 안야(安邪)(국의) 축지(), 분신리아(濆臣離兒)(신분고국?)의 불례(不例), 구야(拘邪)(국의)

진지렴(秦支廉)[註010]의 호칭으로 불리운다.

(※) 그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조선)후(侯) 준(準)[교120]이 왕을 참칭한 뒤[집해10] 연(燕)의 망인(亡人,도망자,망명인)인 위만(衛滿)에게 공격받아 왕위를

빼앗기자[집해11][1] 그의 좌우(左右,주변인,측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 땅[註014]에 거주하며

한왕(韓王)이라 자칭했다.[2] 그 뒤 절멸(絶滅)되었으나 지금도 한인(韓人) 중에 여전히 그의 제사(祭祀)를 받드는 이가 있다.

[집해19]

 

한나라 때는 낙랑군(樂浪郡)에 속하여 사시(四時)로 조알(朝謁)했다.[집해20][2]

 

[2]「위략魏略」왈,,

당초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右渠)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으로

진국(辰國)으로 가니[집해21][註015] 당시 그를 따라 출거(出居,이주)한 백성이 2천여 호(戶)에 달했으며[註016] 또한 조선

(朝鮮), 공번(貢[교126]蕃)(※조선에 조공하던 번국 or 조선과 진번眞蕃)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집해22] 왕망(王莽) 지황(地皇:서기 20-23년.신라 2대 남해차차웅 17년-20년) 때 염사착(廉斯)(※[집해20]참고)이 진한

(辰韓)의 우거수(右渠帥)였는데 낙랑(樂浪)[註017]의 토지가 비옥하고 인민(人民)들이 요락(饒樂,풍요하고 안락함)하다는 말을

듣고는 달아나 (낙랑으로) 와서 항복하고자 했다.

 

그 읍락(邑落)을 나왔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보았는데 그의 말()이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물으니 남자가 말했다,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漢人)으로 (제) 이름은 호래(戶來)입니다.

우리들 무리() 1,500명은 나무를 베다가 한()의 습격을 받아 사로잡혔고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奴)가 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염사)착이 말했다, 나는 한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 하는데 그대도 함께 가지 않겠는가? 호래(戶來)가 말했다,

 좋습니다.(可(辰)[교127]) 그리하여 (염사)착이 호래(戶來)를 데리고 떠나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 도착했다.

[집해23]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보고하자 (낙랑)군에서는 (염사)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

(辰韓)으로 들어가 호래와 함께 항복한 무리를 맞이하여 천명은 되찾았으나(※) 그들 중 5백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염사)착이 이때 진한(辰韓)을 깨우치며 말했다,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러지 않으면 낙랑(樂浪)이 1만 군사를 보내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칠 것이다. 진한(辰韓)이 말했다,

 5백명이 이미 죽었으니 우리는 그에 대한 보상을 치루겠습니다. 

그리고는 진한(辰韓)(사람) 15,000명과 변한포(弁[교129]韓布) 15,000필을 내어놓았다.

[집해24] (염사)착이 이를 거두어 곧바로 돌아왔다. (낙랑)군(郡)에서는 (염사)착의 공의(功義)를 표창하여 관책(冠幘), 전택

(田宅,농토와 집)을 하사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후한)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서기 125년)에 이르기까지 이 덕분에 (조세나 부역을)

면제받았다.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환제,영제의 재위 146-189년), 한(韓), 예(濊)[註018]가 강성하여 (한나라의) 군현(郡縣)이

능히 통제하지 못하자 (군현의) 백성들(民)이 다수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하였다.[註019]

 

(후한 헌제) 건안(建安: 196-220년. 백제 肖古王 31년~仇首王 7년) 중,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荒地

,거친 땅)를 갈라 대방군(帶方郡)을 세우고는[집해25]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보내 유민(遺民,남은 백성)들을 수집

(收集,거두어 모음)하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치니 구민(舊民)(→한국으로 유입했던 예전 백성)들이 점차

 (한국으로부터) 나왔고 이후로 왜(倭),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복속하였다.

 

경초(景初: 237-239. 백제 古爾王 4~6년) 중, (위나라) 명제(明帝)가 은밀히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 낙랑태수

(樂浪太守)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郡)(→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했다.

그리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도장과 인끈)를 사여하고 그 다음(→신지보다 아래

군장들)에게는 읍장(邑長)(의 인수)를 사여했다.

그 풍속이 의책(衣幘)을 좋아하므로 하호(下戶)[註020]들이 군(郡)으로 조알(朝謁)하러 올 때에도 그들 모두에게 의책

(衣幘)을 내리니(皆假衣幘)(※) 스스로 인수(印綬)와 의책(衣幘)을 착용한 이가 천여 명에 달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 8국을 떼어내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전하는데 이동(異同,차이,다른점)이 있어 臣智激韓[교130][註021]이 분노해(※)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대를 일으켜 이를 치다가 (궁)준(遵)이 전사했으나 2군(二郡)

(→낙랑군과 대방군)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집해26]

 

(→마한의) 풍속은 강기(綱紀,기강)가 적어 국읍(國邑)에 비록 주수(主帥,우두머리,군장)가 있으나 읍락(邑落)에서

 (읍락민들과) 뒤섞여 살며 잘 제어(制御)하지 못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간에) 궤배(跪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는 예(禮)가

없다.

거처(居處)는 초옥(草屋,초가), 토실(土室,흙집)을 지어 그 모양이 무덤과 같고 문이 윗부분에 있는데(其戶在上)[교131]

[집해27] 온 집안식구가 그 속에서 함께 살며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구별이 없다.

 

그들이 장례를 치를 때는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註022](※) 소(牛), 말(馬)을 탈 줄 모르고 소, 말을 모두 장례용으로

쓴다.

영주(瓔珠,옥돌과 진주)를 재보(財寶,보배로운 재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에 걸거나 귀에 달기도 하나,

금은(金銀)과 금수(錦繡,비단)는 진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 원문은 有槨無棺이 분명한데, <정사조선전> 번역문이나 역주에서는 有棺無槨으로 거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성정은 강용(彊勇,굳세고 용맹함)하고, 괴두(魁頭,머리카락을 틀어서 묶음), 노계(露,맨머리를 드러냄)하여

[집해28] 그 모양이 경병(炅兵,번쩍이는 병기)과 같고, 포포(布袍,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혁교답(革蹻,가죽신)

신는다.

 

그 나라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官家)에서 성곽(城郭)을 쌓게 할 때는 여러 용맹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로 꿰고 또한 1장(丈) 남짓의 나무를 매달고는 온종일 환호([교132]呼,떠들썩하게 소리지름)하며 일하며 이를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니, 이로써 작업을 권하며 또한 이를 씩씩한 것으로 여긴다.[註023]

 

 5월에 하종(下種,씨뿌리기.파종)을 마치면 귀신(鬼神)에 제사지내며 무리지어 모여 가무(歌舞), 음주(飮酒)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함께 일어서서 서로 뒤따르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며 손, 발을 서로 맞추는데 그 절주

(節奏,가락)는 (중국의)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귀신(鬼神)을 믿으며 국읍(國邑)에 각각 한 명씩을 세워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그를 천군(天君)[註024]이라

부른다.

또한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어 이를 소도(蘇塗)[註025]라 부르며,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立大木)[교133]

[집해29]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鬼神)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들이 그 곳에 도착하면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처벌하)지 않으니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蘇塗)를 세우는 뜻은 부도(浮屠,불탑)와 유사하나 선을 행하냐 악의 행하냐의 차이가 있다.

 

그 북방의 (중국의) 군(郡)에 가까운 여러 나라(→마한 중에서 북쪽에 있어 중국 군현과 가까운 나라)는 다소 예속(禮俗)을

깨우쳤으나 멀리 있는 나라들은 (예속을 몰라) 마치 수도(囚徒,죄수)나 노비(奴婢)들이 서로 무리지어 사는 것과 같다.

다른 진보(珍寶,보물)는 없고 금수(禽獸,짐승), 초목(草木)은 대체로 중국과 같다. 큰 밤(大栗)이 나는데 크기가 배(梨)만하다.

또한 세미계(細尾雞)[교134][집해30]가 나는데 그 꼬리길이가 모두 5척 남짓이다. 그 남자에게는 때때로 문신(文身)이 있다.

 

또한 주호(州胡)[註026]가 마한(馬韓) 서해(西海) 중의 큰 섬 위에 있다.[집해31] 그 사람들은 다소 단소(短小,키가 작고

몸집이 작음)하며[교135] 언어가 한(韓)과 같지 않고 모두 선비(鮮卑)족처럼 머리를 깎고(곤두髡頭) 다만 가죽으로만 옷을 해

입고(但衣韋)[교136] 소,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에는 상의는 있으나 하의가 없어 대체로 벌거벗은 형세(裸勢[교137])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시매(市買,교역,매매)한다.(市買韓中)[교138][집해32]

 

○ 진한전(辰韓傳)[교139]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 나라의 기로(耆老,노인)가 대대로 전하며(傳世) 스스로 말하길, 옛 망인(亡人)이

진(秦)나라의 노역을 피해[집해33] 한국(韓國)으로 오니 마한(馬韓)이 그 동쪽 지경의 땅을 갈라 주었다고 한다.

 

성책(城柵)이 있다.[註027] 그 언어(言語)가 마한(馬韓)과 같지않아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활)을 호(弧)라 하고 적(賊,

도적)을 구(寇)라 하고 행주(行酒,잔에 술을 부어서 돌림)를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를 때 모두 도(徒)라 하니 진인(秦人)[교140](의 명물)과 유사하고 단지 연(燕), 제(齊)의 명물(名物,사물의 명칭)인

것만은 아니다.

(진한인들은) 낙랑인들을 아잔(阿殘)이라 부르는데, 동방인(東方人)들은 아(我,나)를 아(阿)라 하니[집해34] (아잔阿殘은)

‘낙랑인(樂浪人)들이 본래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辰韓을) 진한(秦韓)이라 부를 때가 있다.

(今有名之爲秦韓者)[집해35] 처음에는 6국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집해36]

 

(진한은※) 토지가 비미(肥美,비옥)하고 오곡(五穀)과 벼(稻)를 심기에 적합하다.(宜[교163]種五穀及稻)[집해49][註029] 잠상

(蠶桑,누에와 뽕나무)를 알아 겸포(縑布,고운 비단으로 짠 피륙)를 만들고 소(牛)와 말(馬)을 타거나 (멍에를 채워) 몬다.

혼인하는 예속(禮俗)은 남녀의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을 써서 장례를 치르니 그 뜻은 죽은 자가 (새처럼) 날아오르게 하려는 것이다.

[4] 그 나라에서는 철(鐵)이 산출되며[註030] 한(韓·), 예(濊), 왜(倭)가 모두 이곳으로부터 철을 구한다.

여러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모두 철(鐵)을 쓰니 이는 중국이 전(錢,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한 2군(二郡)(→낙랑군과

대방군)에도 (철을) 공급(供給)한다.

 

(※「후한서」에서는 진한의 기사로 기술함)

 

그 풍속은 가무(歌舞), 음주(飮酒)를 좋아한다. 슬(瑟)이 있으니 그 모습이 축(筑,악기 이름)과 비슷하고 연주하는 음곡(音曲)

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돌로 그 머리를 누르니(厭[교165]) 이는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 하는 것이고(欲其褊[교166]) 지금

진한인(辰韓人)들은 모두 편두(褊[교167]頭=扁頭,납작머리)[註031]이다.

[집해50] 왜(倭)와 가까워 남녀가 또한 문신(文身)[註032]을 한다. 보전(步戰)에 능하고 병장기는 마한(馬韓)과 같다.

그 풍속에서는 길을 다니다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고는(住[교168]) 길을 양보한다.[집해51]

 

○ 변진전(弁辰傳)[교141](※)

 

변진(弁[교142]辰) 또한 12국이다.[집해37] (진한과 변진 or 진한에는) 또한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고 각기 거수(渠帥,

우두머리,군장)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大者)는 신지(臣智)라 부르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교143]側)[집해38], 그 다음에는

번예(樊濊)[교144][집해39], 그 다음에는 살해(殺奚), 그 다음에는 읍차(邑借)[교145][집해40]가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과 더불어 뒤섞여 살며 또한 성곽(城郭)이 있다. 의복(衣服)과 거처(居處)는 진한(辰韓)과 같다.

언어(言語)와 법속(法俗)은 (진한과 서로) 유사하나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에는 차이가 있고 조(竈,부엌 또는 부엌신竈神)를

문의 서쪽에 둔다. 그(→변진 중의) 독로국(瀆盧國)[註033]은 왜(倭)와 경계를 접한다.

[집해52] (변진) 12국에는 또한 왕(王)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크고, 의복이 청결하고 머리카락이 길다.

또한 광폭세포(廣幅細布,폭이 넓은 고운 피륙)를 만든다. 법속(法俗)이 특히 엄준(嚴峻,엄격)하다.

 

○ 韓傳[교92]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교93]. 辰韓者, 古之辰國也.

[집해1]

 

[집해1]趙一淸曰, 弁韓, 後漢書作弁辰, 然弁辰別是一國, 則此當作弁韓, 以當三韓之數, 竊疑范氏爲非. 王會汾曰, 晉梁二書,

皆作弁韓. 丁謙曰, 三韓, 以馬韓爲最大, 其地當有忠淸全羅二道及慶尙道之半. 辰韓及弁韓, 惟慶州一帶而已. 朝鮮史, 謂三韓雖曰分立, 實則辰弁二國, 僅爲馬韓所支配, 非勢均力敵也. 弼按, 漢書朝鮮傳,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朝鮮雍閼, 弗爲通. 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後漢書光武帝紀, 建武二十年秋, 東夷韓國人, 率衆詣樂浪內附. 章懷注, 東夷有辰韓弁韓馬韓, 謂之三韓國. 梁書, 辰韓. 始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其一也. 馬韓有五十四國, 百濟其一也. 舊唐書, 百濟國, 爲馬韓故地.

 

 

[집해1] 조일청(趙一淸,청) 왈,, 변한(弁韓)을 범엽의「후한서」에서는 변진(弁辰)으로 적었다.

그러나 변진(弁辰)은 별개의 다른 나라이므로 여기서는 변한(弁韓)으로 적어야 하고 삼한(三韓)의 숫자에도 맞으니, 내가

보기에는 범씨(范氏)(→범엽)가 틀린 것 같다.

왕회분(王會汾,청) 왈,,「진서晉書」,「양서梁書」의 두 책에서는 모두 변한(弁韓)으로 적었다.

정겸(丁謙) 왈,, 삼한(三韓)에서는 마한(馬韓)이 가장 커서 그 땅으로 충청, 전라의 2도(道)와 경상도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진한

(辰韓)과 변한(弁韓)은 오직 경주 일대에 불과했을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에 의하면 비록 삼한이 분립했다고 칭해지나 실제로 진한, 변한 두 나라는 마한의 지배를 받았고 그 힘이

서로 필적하는 형세는 아니었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건대,「한서漢書」조선전(朝鮮傳)에서 진번(眞番),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해도 조선이 이를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했다. 하였고, 안사고(顔師古,당)가 (이를 注하여) (辰)은 진한(辰韓)의 나라를

일컫는다. 하였다.

(※ 한서편 역주 참고)「후한서」광무제기에서 건무(建武) 20년(서기 44년; 백제 2대 다루왕 17년; 신라 3대 유리이사금

21년) 가을, 동이(東夷) 한국인(韓國人)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樂浪)(군郡)으로 와서 내부(內附)했다. 하였고, 장회(章懷,당

장회태자 이현李賢)가 이를 주(注)하여 동이(東夷)에 진한(辰韓), 변한(弁韓), 마한(馬韓)이 있어 이를 일컬어 삼한국(三韓國)

이라 했다. 하였다.

「양서梁書」(권54 신라전)에서는 진한(辰韓)에는 처음 6국(國)이 있었으나 점차 나뉘어져 열둘이 되었고 신라(新羅)가 그 중

하나다.라 하였고 (백제전에서는) 마한(馬韓)에는 54국(國)이 있었고 백제가 그 중 하나다.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권199 백제전)에서는 백제국(百濟國)이 마한(馬韓)의 옛 땅이라 하였다.

 

[校勘 092]原典에는 없으나 「宋本」에 의거하여 補入한다.
[校勘 093]『翰苑』所引『魏略』에는 ‘弁辰’으로 되어 있다.

 

馬韓在[교94]西. 其民土著, 種植[교95],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교96],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有爰襄國·牟[교97]水國·桑外[교98]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교99]國·臣濆沽[교100]國· [집해2] 伯濟國· [집해3] 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교101]支國·咨[교102]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교103]·卑離國·占離卑[교104]國·[집해4]臣釁[교105]國·支侵國[교106]·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교107]·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교108]盧國·辟[교109]卑離國·臼[교110]斯烏旦[교111]國· [집해5] 一離國·不彌國·支[교112]半國· [집해6] 狗素國·捷[교113]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 [집해7] 古臘[교114]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교115]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교116]國·乾[교117]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집해8] 大國萬餘家, 小[교118]國數千家, [집해9] 總十餘萬戶. 辰王治月[교119]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집해2]北宋本, 活作沽.

[집해3]伯濟國, 卽百濟國.

[집해4]馮本, 卑作甲, 誤.

[집해5]宋本, 臼作 , 卽匊字. 臼與, 未詳孰是.

[집해6]宋本, 支, 作.

[집해7]錢大昭曰, 莫盧國, 已見上文, 此重出.

[집해8]范書云,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滿洲源流考卷二云, 三韓統名辰國, 自漢初已見. 後爲親羅百濟所倂. 其七十八國之名, 備載於魏志, 國名多繫以卑離二字, 如監奚卑離·內卑離·辟卑離·如來卑離, 以滿洲語考之, 當爲貝勒之轉音, 正猶汗之訛爲韓, 而三汗之統諸貝勒, 於體制恰相符合也. 至馬韓, 亦作慕韓, 辰韓, 亦作秦韓, 弁韓, 亦作弁辰, 又作卞韓. 尙書傳, 扶餘並稱. 正義謂, , 卽韓也. 當時, 祗以諧音, 並非漢語, 范蔚宗, 始稱爲韓國韓人. 魏志, 遂有韓地韓王之目, 甚者至訛爲韓氏. 又如弁韓, 在三韓中, 記載獨少. 考史記眞番注謂, 番音普寒切. 遼東有潘汗縣, 或卽弁韓之轉音, 亦未可定. 或有以三韓爲高麗者, 蓋因宋史高麗傳. 有崇寧後, 鑄三韓通寶之文. 又遼史外紀, 遼時, 常以三韓國公, 爲高麗封號, 遂謂三韓之地, 盡入高麗, 不知高麗之境, 亦屬三韓所統, 當時假借用之, 未經深考耳. 至遼之三韓縣, 乃取高麗俘戶所置, 非其故壤也.

[집해9]毛本, 小, 作千, 誤.

 

 

※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 해독이 확실히 안되고 논란이 많은 대목인데, 정사조선전의 번역과 역주를 참고해서 풀었습니다.

정사조선전에서는 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臣雲遣支報 安邪支 濆臣離兒不例 狗邪秦支廉의 稱號를 더하기도

한다.고 풀이했고, 24사전역에서도 전체문맥은 비슷한 취지로 풀되 칭호 부분은 원문그대로 그냥 쭉 붙여놓았습니다.

진수(또는 진수가 참고한 위략 등 원사료의 지은이)가 낙랑군, 대방군의 공문서나 전해들은 정보를 수록한 글 따위를 읽고

발췌해서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臣智의 優呼가 遣支, , 不例, 秦支 이며, 遣支報에서 報, 秦支廉에서 廉은 인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집해2] 북송본(北宋本)에는 活(활)이 沽(고)로 적혀있다.

[※ 삼국지집해본에서는 臣濆活國(신분활국)으로 표기했으므로 이렇게 주해했음]

 

[집해3] 伯濟國(백제국)은 즉 百濟國(백제국)이다.

 

[집해4] 풍본(馮本)에는 卑(비)가 甲(갑)으로 적혀있으나 이는 오기이다.

 

[집해5] 송본(宋本)에는 臼(구)가 ●(국)으로 적혀있으며 (●은) 즉 (국) 자다. 臼는 ●와 서로 다른 글자인데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 ●(국)은 (국)의 고어체로, 臼의 좌우변이 끊어진 형태입니다. zdic 漢典 참고]

 

[집해6] 송본(宋本)에는 支(지)가 (발)로 적혀있다.

(※ 아래 [교112]에서는 ‘송본에 友(우)로 되어있다’ 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집해7] 전대소(錢大昭,청) 왈,, 막로국(莫盧國)은 앞 글에서 이미 보였고 여기서 중복되어 나왔다.

(※) 마한의 소국에 관해 여기 삼국지 한전에서는 55개 국을 하나하나 열거한 뒤 50여 나라가 있다고 했고, 후한서

한전에서는 따로 국명은 열거하지 않고 마한 54개 국이라 기술했습니다.

전대소의 지적처럼 삼국지 한전에서 막로국(莫盧國)이 두번 나오므로 막로국을 잘못 중복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외에 일리국(一離國), 일난국(一難國)의 조합을 중복표기로 보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 막로국일난국 설명 참고)「한원」기록과 대조해볼 때(아래 표1 참조) 莫盧國卑離國 중의 國자가 잘못

삽입된 것이고 <莫盧國+卑離國>이 아니라 莫盧卑離國이 전부 한 나라의 이름일 수도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집해8] 범엽의「후한서」에서는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개 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한다. 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권2에서 (살펴보건대) 삼한(三韓)의 통명(統名,총칭)은 진국(辰國)이고 한나라 초부터 이미 보인다. 뒤에 신라, 백제에 의해 겸병되었다. 그 78국의 이름은 위지(魏志)(동이전)에 모두 실려있는데, 감해비리(監奚卑離), 내비리

(內卑離), 벽비리(辟卑離), 여래비리(如來卑離)와 같이 비리(卑離) 두 글자에 연계된 국명이 많다. 만주어(滿洲語)로 이를

고찰해보면, 응당 (비리卑離는) 貝勒(패륵,베일러.※)의 전음(轉音,음이 변한 것)으로 汗(한)이 와전되어 韓(한)이 된 것과

똑같으며, 3한(三汗)이 여러 패륵(貝勒)을 통수하니 체제에 있어 흡사하고 서로 부합한다. 마한(馬韓)은 모한(慕韓)으로도

적고,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으로도 적고, 변한(弁韓)은 변진(弁辰)이나 변한(卞韓)으로도 적는다.

「상서전尙書傳」에서 扶餘(부여한)이라 아울러 칭했고 정의(正義)에서 (한)은 즉 (한)이라 하였다.

당시의 해음(諧音,비슷한 음)으로 모두 한어(漢語)가 아니다.

범위종(范蔚宗,범엽)이 처음으로 한국(韓國)한인(韓人)이란 말을 썼고 위지(魏志)에서는 마침내 한지(韓地)한왕(韓王)

이란 말이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릇되이 한씨(韓氏)라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변한(弁韓)도 삼한 중에 있었으나 그에 관해

기재한 바가 유독 적다.「사기」중의 진번(眞番)에 관한 (사기집해의) 주(注)에서 番의 음은 普와 寒의 반절이라 하였다.

 

요동(군郡)에 번한현(潘汗縣)이 있었는데 혹 (潘汗이) 弁韓의 전음(轉音)인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간혹 삼한(三韓)이 고려

(高麗)가 되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송사宋史」고려전에서 비롯된 것 같으니 (북송 휘종) 숭녕(崇寧) 연간(1102-

1106) 뒤에 (고려가) 삼한통보(三韓通寶)를 주조했다는 글이 있고 또한「요사遼史」외기(外紀)에 의하면 요(遼)나라 때에 늘

삼한국공(三韓國公)을 고려의 봉호(封號)로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한 땅이 모두 고려에 편입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고려의 지경이 또한 삼한이 통할하던 곳(의 일부)에

속함은 알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가차(假借)해서 쓴 것을 깊이 고찰하지 못한 것 뿐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삼한현(三韓縣)은 고려의 부호(俘戶,포로)를 취해 설치한 것으로, 그 옛 영역은 아니다. 하였다.

 

※ 패륵 [貝勒] - 청나라 때 만주인 종실(宗室)과 몽고(蒙古)의 외번(外藩)들에게 봉해진 작위(爵位) 가운데 하나를 이르는

용어. 청나라에서는 만주인 종실과 몽고의 외번들에게 여섯 가지의 작위를 나누어 봉했는데, 그 여섯 가지는 친왕(親王)

군왕(郡王)패륵패자(貝子)진국공(鎭國公)보국공(輔國公) 등이었음. 이 가운데 패륵은 만주어로 부장(部長)이라는 뜻임.

(네이버 용어사전에서 인용)

 

[집해9] 모본(毛本,급고각본)에는 (小國 중의) 小(소)가 千(천)으로 적혀있으나 이는 오기(誤記)이다.

 

[校勘 094]『翰苑』所引에는 ‘在’다음에 ‘其’字가 있다.
[校勘 095]『翰苑』所引에는 ‘稻’로 되어 있다.
[校勘 096]『後漢書』와 『晋書』「馬韓傳」에는 ‘渠帥’로 되어 있다.
[校勘 097]『翰苑』所引에는 ‘牟’다음에 ‘襄’字가 있다.
[校勘 098]『翰苑』所引에는 ‘水’로 되어 있다.
[校勘 099]『翰苑』所引에는 ‘淥’로 되어 있다.
[校勘 100]「汲古閣本」에는 ‘活’로 되어 있고, 『翰苑』所引에는 ‘沾’으로 되어 있다.
[校勘 101]『翰苑』所引에는 ‘自’로 되어 있고, 『後漢書』「集解校補」에 의하면 ‘月’은 ‘目’의 誤記이다.
[校勘 102]『翰苑』所引에는 ‘資’로 되어 있다.
[校勘 103]『翰苑』所引에는 ‘國’字가 없다.
[校勘 104]『翰苑』所引에는 ‘古卑離’로 되어 있다.
[校勘 105]『翰苑』所引에는 ‘疊’으로 되어 있다.
[校勘 106]『翰苑』所引에는 ‘支侵支’로 되어 있다.
[校勘 107]『翰苑』所引에는 ‘古滿’으로 되어 있다.
[校勘 108]『翰苑』所引에는 ‘邁’로 되어 있다.
[校勘 109]『翰苑』所引에는 ‘群’으로 되어 있다.
[校勘 110]『翰苑』所引에는 ‘田’으로 되어 있고, 「殿本」에는 ‘臼’로 되어 있다.
[校勘 111]『翰苑』所引에는 ‘鳥且’로 되어 있다.
[校勘 112]「宋本」에는 ‘友’로 되어 있다.
[校勘 113]『翰苑』所引『魏略』에는 ‘挺’으로 되어 있다.
[校勘 114]『翰苑』所引에는 ‘榔’로 되어 있다. (※櫛의 오기?)
[校勘 115]『翰苑』所引에는 ‘一國’으로 되어 있다.
[校勘 116]『翰苑』所引에는 ‘奚他’로 되어 있다.
[校勘 117]『翰苑』所引에는 없다.
[校勘 118]「汲古閣本」에는 ‘千’으로 되어 있다.
[校勘 119]『翰苑』所引『魏略』·『後漢書』에는 ‘目’으로 되어 있다.

 

[표1]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들 (삼국지 한전 & 한원)

 

 

삼국지 한전 (중화서국 점교본)

 

 

한원翰苑

 

1

爰襄國

원양국

 

奚襄國

해양국

2

牟水國

모수국

 

牟襄水國

모양수국

3

桑外國

상외국

 

桑水國

상수국

4

小石索國

소석삭국

 

小石索國

소석삭국

5

大石索國

대석삭국

 

大石索國

대석삭국

6

優休牟涿國

우휴모탁국

 

優休牟淥國

우휴모록국

7

臣濆沽國

신분고국

(급고각본) 臣濆活國

臣僕沾國

신복첨국

8

伯濟國

백제국

 

伯濟國

백제국

9

速盧不斯國

속로불사국

 

速盧不斯國

속로불사국

10

日華國

일화국

 

日華國

일화국

11

古誕者國

고탄자국

 

古誕者國

고탄자국

12

古離國

고리국

 

古雜國

고잡국

13

怒藍國

노람국

 

怒藍國

노람국

14

月支國

월지국

(후한서) 目支國

[]支國

[목]지국

15

咨離牟盧國

자리모로국

 

資離牟盧國

자리모로국

16

素謂乾國

소위건국

 

素謂乾國

소위건국

17

古爰國

고원국

 

古受國

고수국

18

莫盧國

막로국

 

莫盧<國>

막로<국>

19

卑離國

비리국

 

卑離國

비리국

20

占離卑國

점리비국

 

古卑離田[]

고비리전[국]

21

臣釁國

신흔국

 

臣疊國

신첩국

22

支侵國

지침국

 

支侵支<國>(※)

지침지<국>

23

狗盧國

구로국

 

狗盧國

구로국

24

卑彌國

비미국

 

卑彌國

비미국

25

監奚卑離國

감해비리국

 

監奚卑離<國>

감해비리<국>

26

古蒲國

고포국

 

古滿<國>

고만<국>

27

致利鞠國

치리국국

 

致利鞠國

치리국국

28

冉路國

염로국

 

 

 

29

兒林國

아림국

 

兒林國

아림국

30

駟盧國

사로국

 

駟盧國

사로국

31

內卑離國

내비리국

 

內卑離<國>

내비리<국>

32

感奚國

감해국

 

感奚國

감해국

33

萬盧國

만로국

 

邁盧國

매로국

34

辟卑離國

벽비리국

 

群卑離國

군비리국

35

臼斯烏旦國

구사오단국

 

田斯烏且國

전사오차국

36

一離國

일리국

 

一離國

일리국

37

不彌國

불미국

 

不彌國

불미국

38

支半國

지반국

 

 

 

39

狗素國

구소국

 

 

 

40

捷盧國

첩로국

 

挺盧國

정로국

41

牟盧卑離國

모로비리국

 

牟盧離國

모로리국

42

臣蘇塗國

신소도국

 

臣蘇塗國

신소도국

43

莫盧國

막로국

 

莫盧國

막로국

44

古臘國

고랍국

 

古櫛國

고즐국

45

臨素半國

임소반국

 

臨素半國

임소반국

46

臣雲新國

신운신국

 

臣雲新國

신운신국

47

如來卑離國

여래비리국

 

如來卑離國

여래비리국

48

楚山塗卑離國

초산도비리국

 

楚山塗卑離一[]

초산도비리일[국]

49

一難國

일난국

 

[]難國

[일]난국

50

狗奚國

구해국

 

狗奚國

구해국

51

不雲國

불운국

 

不雲國

불운국

52

不斯濆邪國

불사분야국

 

不斯濆邪<國>

불사분야<국>

53

爰池國

원지국

 

奚他<國>

해타<국>

54

乾馬國

건마국

 

<乾>馬國

<건>마국

55

楚離國

초리국

 

楚離國

초리국

 

[표 설명] 위의「삼국지」한전에서 마한의 소국들을 열거한 것과「한원翰苑」번이부 백제 조의 위지(→삼국지 한전)

인용문을 표로 정리했습니다.

(「한원」원문은 고대사료집성 참고) 한원 웜문 중의 부호는 그 내용으로 볼 때 <>는 누락된 글자를 추가한 것,

[]는 원글자를 오기로 판단하고 정자를 덧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ex) 自[目]支國 - 원글자인 自支國 (X), 目支國 (O)

(※) 고대사료집성 원문의 교감, 구두점에서는 支侵<國>·支狗盧國 즉, 支侵國 + 支狗盧國이나, 삼국지 한전과

[교106]에 따라 支侵支<國>·狗盧國으로 간주해 기입했습니다.

 

侯準[교120]旣僭號稱王, [집해10] 爲燕亡人衛滿所攻奪, [집해11][1]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2]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집해19]

 

[1]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교121], [집해12] 不攻. [집해13]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집해14] 朝鮮遂弱.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교122]水. [집해15] 及綰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교123] 中國亡命 [집해16] 爲朝鮮藩屛. 準信寵之, 拜爲[교124]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 [집해17] 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집해18]

[2]魏略曰: 其子及[교125]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집해10]淮, 當作準, 見前濊國傳注.

[집해11]丁謙曰, 箕淮之王馬韓也. 據朝鮮史言, 避衛滿之逼, 率衆奪金馬郡居之, 自稱武康王. 金馬, 卽本傳, 王所治月支國,

今爲全羅道益山郡.

[집해12]毛本, 下燕字, 作以.

[집해13]攻, 疑作改.

[집해14]趙一淸曰, 潘韓譌. 兩漢志, 俱作番汗.

[집해15]趙一淸曰, 漢書地理志, 樂浪郡浿水縣, 水西至增地入海, 今大同江也. 字誤. 下同. 弼按漢書朝鮮傳云, 至浿水爲界.

浿水解見前高句麗傳.

[집해16]何焯曰, 故字當作收.

[집해17]亡字下, 似少一字

[집해18]弼按, 魏略所云, 與史記漢書朝鮮傳, 略同而較詳, 可補史漢朝鮮傳之缺. 丁謙曰, 朝鮮史相傳, 其國, 肇自檀君傳一千四十八年, 至周初, 箕子代興, 傳四十世, 爲燕人衛滿襲據其地. 班書, 記漢事, 故託始於滿. 眞番, 本朝鮮附屬番部, 七國時爲燕所略. 武帝, 破朝鮮, 改爲郡. 治霅縣, 在今奉天興京廳邊外, 東南至鴨緣江地. 浿水有二, 唐書高麗傳, 南涯浿水, 指大同江, 而此傳浿水, 均指鴨綠江. 今攷據家, 但知大同江爲浿水, 不知鴨綠江亦有浿水之名. 蓋大同江, 在平壤南, 衛滿所都王險城, 卽平壤. 滿渡浿水, 而後居此, 則水在平壤之北可知, 證一. 涉何, 諭右渠還朝, 必經浿水, 證二. 左將軍, 擊破浿水西軍, 方得至王險, 證三. 右渠太子, 入謝天子, 至浿水引歸, 證四. 觀此, 傳中浿水, 皆指鴨綠江, 明矣. 臨屯亦番部. 後爲郡, 治東, 今爲朝鮮道江原道江陵府城.

[집해19] 丁謙曰, 東藩紀要, 馬韓立國, 始朝鮮王箕淮, 在漢惠帝元年, 後爲百濟王溫祚所滅, 在新莽二年, 計傳國二百有三載, 辰韓·弁韓, 不知始立何時. 後俱爲新羅王赫居世所滅, 在漢宣帝五鳳以後. 是三韓有國, 均在西漢之世, 至東漢初, 三韓已亡, 何論曹魏. 陳氏此傳, 作於晉初, 乃仍言三韓事, 若不知有百濟新羅者, 何也. 余細核傳文, 參以朝鮮史, 知所云其後絶滅者, 卽滅於百濟也. 所云韓人猶有奉其祭祀者, 卽後漢書, 馬韓人復自立爲王也.

 

 

[1]「위략魏略」왈,, 옛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하자 연(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약지(略地,경략,침략)하려는 것을 보고는, 조선후 또한 왕이라 자칭하고 군대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逆擊)해

주왕실(周室)을 받들려 하였으나, 그 대부(大夫) 예(禮)가 간언하므로 그만두었다.

예(禮)를 서쪽으로 보내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약지하려던 것을) 그만두고(燕止之)[교121][집해12] (조선을)

공격하지 않았다.(不攻)[집해13] 뒤에 자손(子孫)이 점차 교학(驕虐,교만하고 포학함)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

[註011]를 보내 그(→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천여 리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註012]에 이르러 그곳을 경계로 삼으니

[집해14] 마침내 조선(朝鮮)이 쇠약해졌다.

그러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아우른 뒤 몽념(蒙恬)을 시켜 장성(長城)을 쌓게 하여 요동(遼東)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 부(否)가 즉위해 진(秦)나라가 조선을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대체로 진나라에 복속(服屬)했으나 조회(朝會)하려

하지는 않았다.

부(否)가 죽고 그의 아들 준(準)이 즉위한 지 20여 년 만에 진승(陳勝), 항우(項羽)가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수고(愁苦,근심하고 괴로워함)하여 점차 준(準)에게로 달아나니 이에 준(準)이 그들을 (조선의) 서방

(西方)에 두었다.

그러다 한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자 조선은 (노관의 봉국인) 연(燕)과 패수(浿[교122]水)[註013]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집해15] 그러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해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호복(胡服,

오랑캐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로 와서 항복하고는, 준(準)을 설득하여 (조선의) 서쪽 경계에

거주하며 중국의 망명인들을 거두어(故)[收][교123] 조선의 번병(藩屛,울타리,보호벽)이 되기를 청했다.[집해16] 준(準)이

그를 신임하고 총애하여 박사(博士)로 임명하고(拜爲[교124]) 규(圭,홀)를 하사하며 백리 땅에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滿)이 망당(亡黨)(→중국인 망명자 일당)들을 꾀어들여[집해17] 그 무리가 점차 많아지니 이에 사람을 보내 준(準)에게

거짓으로 고하길 한나라 군대가 열 갈래 길로 쳐들어왔으니 (왕궁으로) 들어가 숙위(宿衛)하길 원한다 하고는 마침내

되돌아가(거꾸로) 준(準)을 공격했다. 준(準)이 (위)만(滿)과 더불어 싸웠으나 감당하지 못했다.[집해18]

 

(※ 노관이 흉노에 투항한 것은「사기」노관전,「한서」고제기에 의하면 고조 12년인 B.C 195년 4월 유방이 죽은 뒤의

일입니다.)

 

[2]「위략」왈,, 그 아들 및(及)[교125] 친척들 중 나라(→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은 그리하여 성(姓)을 한씨(韓氏)라 사칭했다. 준(準)은 바다 가운데(海中)에서 왕노릇하며 조선(朝鮮)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집해10] 淮(회)는 응당 準(준)으로 적어야 할 것이다. 앞의 예국전(濊國傳) 주(注)에 보인다.

(※ 삼국지집해에서는 侯淮로 표기했으므로 이렇게 주해했음)

 

[집해11] 정겸(丁謙) 왈,, 기회(箕淮)(→준왕)는 마한(馬韓)에서 왕노릇했다.「조선사朝鮮史」의 말에 의하면 위만(衛滿)의

핍박을 피해 무리를 이끌고 금마군(金馬郡)을 빼앗아 그곳에서 거주하며 무강왕(武康王)이라 자칭했다. 금마(金馬)가 즉

본전(本傳)에서 말한 (진)왕이 다스렸다는 월지국(月支國)이며 지금의 전라도 익산군(益山郡)이다.

 

[집해12] 모본(毛本)에는 (使禮西說燕燕止之 중에서) 아래의(뒤의) 燕 자가 以로 적혀있다.

 

[집해13] 攻(공)은 改(개)로 적어야 할 것으로 짐작된다.

 

[집해14] 조일청(趙一淸) 왈,, 潘韓(※)은 잘못이다. 양한지(한서 지리지와 후한서 군국지)에는 모두 番汗으로 적었다.

(※ 삼국지집해의 본문에서는 潘汗으로 표기하고 주석부분에서 이 글자를 오기로 보는 조일청의 설을 소개한 것이므로,

潘汗을 潘韓으로 잘못 옮긴 듯합니다.)

 

[집해15] 조일청(趙一淸) 왈,,

「한서」지리지 낙랑군(樂浪郡) 패수현(浿水縣) 조에서 물(→패수)이 서쪽으로 흘러 증지(增地)(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다. (추) 자는 오기이며 아래에서도 같다.

(※ 삼국지집해에서는 전대 판본들에 따라 위의 삼국지 주 위략 기사 중의 浿水를 水로 표기했음) 노필이 보건대,

「한서」조선전에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 하였다. 패수(浿水)의 풀이는 앞의 고구려전에 보인다.

(※ 노필은 패수=압록강으로 추정함. 고구려전 [집해1] 참고)

 

[집해16] 하작(何焯) 왈,, 故(고) 자는 응당 收(수)로 적어야 할 것이다.

 

[집해17] 亡 자 아래에 一 자가 부족한(빠진) 듯하다.

(※ 滿誘亡[一]黨 의 형태로 추정한 것)

 

[집해18] 노필이 보건대「위략」이 말하는 바는「사기」나「한서」의 조선전과 대체로 같으나 비교적 더 상세하여 가히

「사기」나「한서」조선전의 빠진 부분을 보완해준다.

정겸(丁謙) 왈,, 조선사(朝鮮史)에서 서로 전하기로는 그 나라(→조선)는 단군(檀君)으로부터 비롯되어 1,048년을 전하였고

주나라 초에 이르러 기자(箕)가 이를 대신해 흥하여 40세(世)를 전하다 연인(燕人) 위만(衛滿)에게 습격받았고 (위만이) 그

땅을 점거하였다 한다. 반고의「한서」는 한나라 때의 일을 기록하였으니 이 때문에 (조선이) 위만에서 시작된 것으로

가탁하였다. 진번(眞番)은 본래 조선에 부속된 번부(番部)로 칠국 때(→전국시대) 연나라에게 경략되었으며, 무제가 조선을

격파하고는 이를 고쳐 (진번)군(郡)으로 삼았다.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霅縣)이었으니 지금의 봉천 흥경청(興京廳,지금의 신빈)의 변경 바깥에 있었고 동남쪽으로 압록강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패수(浿水)에는 둘이 있었다.

「(신)당서」고려전에서 (고구려 왕성인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연해있다. 한 것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키고,

이 (동이)전(傳)의 패수(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나, 지금 상고하는 자(攷據家)들이 다만 대동강이 패수라는 것만 알 뿐

압록강 또한 패수의 이름이란 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저 대동강은 평양의 남쪽에 있고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王險城)이 즉 평양이다.

(그러나) 위만이 패수를 건넌 뒤에 이곳에 거처했으므로 즉 (패)수는 평양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첫째

증거이다.

(한무제 때) 섭하(涉何)가 (조선왕) 우거(右渠)를 초유하고 (한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면서 분명 패수(浿水)를 거쳤으니 이것이

둘째 증거이다. 좌장군(→순체)이 (조선의) 패수서군(浿水西軍)을 격파하고 바야흐로 왕험(王險)(성)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셋째 증거이다.

우거(右渠)의 태자(太子)가 (조정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사죄하려 하여 패수(浿水)에 도착한 뒤에 사람들을 이끌고 되돌아갔으니 이것이 넷째 증거이다.

이를 보건대 (동이)전(傳) 중의 패수(浿水)는 모두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임둔(臨屯) 또한 (조선의) 번부(番部)였다가 뒤에 (임둔)군()이 되었는데 그 치소는 동이(東)(현)으로 지금의 조선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의 성이다.

 

[집해19] 정겸(丁謙) 왈,,「동번기요東藩紀要」에 의하면, 마한이 나라를 세운 것은 조선왕 기회(箕淮)(→준왕準王)가

처음으로서 한나라 혜제 원년(B.C 194)의 일이고 뒤에 백제왕(百濟王) 온조(溫祚)에게 멸망된 것은 신(新)나라 왕망 2년(※)의

일이니 나라를 전한 것(傳國)을 헤아려보면 203년이다.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처음 어느 때에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뒤에 모두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에게 멸망되었으니 이는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B.C 57-54) 이후의 일이다.

이 삼한(三韓)에 나라가 있었던 것은 모두 서한(西漢,전한) 때의 일이며 동한(東漢,후한) 초에는 삼한(三韓)은 이미 망한 뒤이니

어찌 (하물며) 조위(曹魏)를 논하겠는가?

진씨(陳氏)(→진수)의 이 (삼국지 동이)전(傳)은 진(晉)나라 초에 지어졌으나 여전히 삼한의 일을 말할 뿐 백제, 신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니 어찌된 일인가?

내가 (동이)전의 글을 세밀히 살펴보고 조선사(朝鮮史)를 참조해 볼 때, (위에서) 그 뒤 절멸되었다.

 말한 것은 즉 백제(百濟)에게 멸망한 것이고 한인(韓人) 중에 여전히 그의 제사를 받드는 이가 있다.

 말한 것은 즉「후한서」에서 (준왕의 후손이 절멸된 뒤)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왕으로 즉위했다 한 것을 가리킨다.

 

(※「삼국사기」권23 백제 온조왕 27년(서기9년) 조에 마한멸망의 기사가 있고, 서기9년은 왕망 시건국始建國 원년에

해당됩니다.)

 

[校勘 120]「汲古閣本」·「藝文本」에는 ‘淮’로 되어 있다.
[校勘 121]「汲古閣本」에는 ‘以止之’로 되어 있다.
[校勘 122]諸本에는 ‘
’로 되어 있다.
[校勘 123]諸本에는 ‘故’로 되어 있으나 何焯의 주장에 의거하여 ‘收’로 고쳐 잡는다.
[校勘 124]「殿本」에는 ‘以’로 되어 있다.

[校勘 125]「宋本」에는 ‘友’로 되어 있다.

 

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집해20][2]

 

[2]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집해21]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교126]蕃不相往來. [집해22] 至王莽地皇時, 廉斯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辰)[교127] 因將戶來(來)[교128] 出詣含資縣, [집해23] 縣言郡, 郡卽以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교129]韓布萬五千匹, [집해24] 收取直還. 郡表功義, 賜冠幘·田宅, 子孫數世, 至安帝 延光四年時, 故受復除.

 

[집해20]范書東夷傳,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 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郡, 四時朝謁.

章懷注, 廉斯, 邑名也.

[집해21]漢書,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乃使人殺朝鮮王右渠, 來降.

[집해22]貢, 疑作眞.

[집해23]兩漢志, 樂浪郡含資, 三國魏, 改爲帶方郡. 晉志, 屬帶方郡. 一統志, 故城, 今朝鮮京畿道城之南境. 官本考證云,

辰字·來出來字, 疑皆衍.

[집해24]毛本, 弁, 作牟, 誤.

 

 

(※ 중화서국본 구두점은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로 되어있고 <정사조선전>의 번역도 이에 따랐으나, 호래는 이미

염사착과 함께 함자현에 도착했으므로 다시 진한으로 들어가 호래를 맞이한다는건 말이 안되므로 두 구절이 이어지는 한

문장인 것으로 간주해 <逆取戶來降伴輩, 尙得千人>의 형태로 읽었습니다.)

 

[집해20]범엽의「후한서」동이전 (한전)에서 (후한) 건무20년(서기 44년) 한인(韓人) 염사인(廉斯人)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군으로 와서 공헌(貢獻)하니, 광무제가 소마시(蘇馬諟)를 한(漢)나라의 염사(廉斯) 읍군(邑君)으로 봉하고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사시(四時)로 조알(朝謁)하도록 했다. 하였다. 장회(章懷)가 이를 주(注)하여 염사(廉斯)는 읍(邑)의 이름이라

하였다.

(※ 이를 볼 때 염사(廉斯)는 (진)한에 속한 지역명, 국명이나 족명이고「위략」기사 중의 염사착 또한 염사 사람인 착 

정도의 뜻으로 보입니다.)

 

[집해21]「한서」(권95 조선전)에서 (한무제) 원봉(元封) 3년(B.C 108) 여름, 니계상(尼谿相) 참(參)이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를 죽이고는 와서 항복했다. 하였다.

 

[집해22] 貢(공)은 眞(진)으로 적어야 할 것으로 짐작된다.

 

[집해23] 양한지(兩漢志,한서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낙랑군(樂浪郡)의 함자(含資)(현)이고, 삼국시대의 위(魏)나라가 대방군(帶方郡)(소속)으로 고쳐「진서」지리지에서는 대방군(帶方郡)에 속한다.「일통지一統志」에 의하면 그 옛 성이

지금의 조선 경기도 성(城) 남쪽 지경에 있다 한다.

「관본고증」에서 辰 중의 辰자와 來出 중의 來자는 모두 연자(衍字,군더더기

글자)로 짐작된다고 하였다.

 

[집해24] 모본(毛本)에는 弁(변)이 牟(모)로 적혀있으나 이는 오기이다.

 

[校勘 126]‘眞’의 誤記인 듯 하다.
[校勘 127]「殿本考證」에 의거하여 삭제한다.
[校勘 128]「殿本考證」에 의거하여 삭제한다.
[校勘 129]「汲古閣本」에는 ‘牟’로 誤記되어 있다.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집해25]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집해25]兩漢志, 樂浪郡屯有縣. 李兆洛云, 今朝鮮平壤城南. 丁謙曰, 帶方郡治所在, 前人均未言及. 漢地理志, 樂浪含資縣有帶水, 西至帶方, 入海. 査京畿道北境, 有臨津江, 發源江原道伊川郡, 北至開城, 西南入海, 正在樂浪之南. 再南, 卽百濟境. 以形勢揆之,

當卽漢時帶水. 然則伊川郡, 其漢之含資縣乎. 辰韓渠帥, 先詣含資降. 可知含資, 實辰韓至樂浪孔道. 今伊川郡, 居平壤東南, 情形尤協. 以此觀之, 臨津江, 於開城西南入海, 非卽帶方郡地之所在耶. 今定以開城郡爲帶方, 或相去不遠矣.

 

 

[집해25] 양한지(兩漢志)(→한서지리지와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낙랑군(樂浪郡)의 둔유현(屯有縣)이다.

이조락(李兆洛,청) 왈,, 지금의 조선 평양성(平壤城) 남쪽이다.

정겸(丁謙) 왈,, 대방군(帶方郡)의 치소가 있던 곳에 관해서 예전 사람들이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 대수(帶水)가 있어 서쪽으로 흐르다 대방(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경기도 북쪽 지역을 살펴보면 임진강(臨津江)이 있어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북쪽에서 발원해 개성(開城)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딱 낙랑(樂浪)의 남쪽이며 다시 그 남쪽이 바로 백제(百濟)의 지경이다.

이런 형세로 헤아려볼 때 (임진강이) 바로 한나라 때의 대수(帶水)일 것이고 그러한 즉 이천군(伊川郡)이 한나라 때의 함자현

(含資縣)이다. 진한(辰韓)의 거수(渠帥)가 먼저 함자(현)에 도착해 항복했으니 함자(현)이 실제로 진한(辰韓)에서 낙랑(樂浪)에

이르는 공도(孔道,요로,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이천군(伊川郡)이 평양의 동남쪽에 위치하니 그 정형(情形)이 매우 잘 들어맞는다.

이로써 보면 임진강이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므로 (개성이?) 대방군 땅(대방군 치소인 대방현?)이 있던

곳은 아니나, 지금 개성군(開城郡)을 대방(帶方)으로 비정하니 어쩌면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은 듯하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교130]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집해26]

 

[집해26]丁謙曰, 百濟雖滅馬韓, 而馬韓中尙有一二小部, 仍襲韓王之稱號. 傳紀, 桓靈末, 韓濊强盛, 建安後, 倭韓屬帶方, 及明帝時, 二郡滅韓, 皆指馬韓人自立之小部, 非三韓全境也. 但三韓舊時, 皆土番散部, 勢分力弱, 故樂浪可羈屬之. 迨百濟新羅崛興, 則地大兵强, 足與高句麗鼎峙, 斷非郡縣所能制馭, 何當時中國, 竟不聞不問, 漠然置之, 絶不道及其事. 豈以百濟本馬韓列國之一, 新羅亦弁辰列國之一, 雖兼倂坐大, 可仍以三韓視之, 不必特爲之分析耶. 噫, 疏亦甚矣. 何怪晉書·後漢書, 均承其誤, 而不覺乎.

 

 

※ 皆假衣幘  <정사조선전>에서는 [韓族의] 풍속은 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下戶들도 [樂浪이나 帶方]郡에 가서 朝謁할

적에는 모두 衣幘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印綬를 차고 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번역했습니다.

저는 이와 달리 假를 내린다, 사여한다는 뜻으로 보고 한인韓人들이 의책을 좋아하므로 그 특성을 이용해 조알하러 오는

 下戶(지배계급이 아닌 수행하던 평민 또는 노비)들에게까지도 의책을 (남발하면서) 주었고 이에 따라 인수나 의책을 가진

자가 천여명에 달했다.는 문맥으로 간주해서 풀었습니다.

 

※ 臣智激韓忿 - <정사조선전>에서는 臣智와 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24사전역>에서는 신지가 한인韓人들의 분노를

격동시켜로 풀었습니다.

주어진 문장으로만 보면 <24사전역>의 풀이가 무난한 것 같고 <정사조선전> 경우는 激, 韓자가 뒤바껴서 표기된 것으로

간주해 풀이한 듯 합니다. (臣智韓激忿) 그런데, 일부 판본에는 이 대목이 臣幘沾韓으로 표기되어있고「통지」의 위지

인용문에는 臣濆沽韓으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이 대목을 臣濆沽韓의 오기로 보아, 위에 열거된 마한국 중 하나인 신분고국

(臣濆沽國)이 기리영 공격을 주도한 것이고, 당시 대방군과 진한8국의 교역을 매개하며 번성하던 신분고국이 이 사건을

계기로 몰락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윤용구, 삼한의 대중교섭과 그 성격 ; 윤선태, 창해군과 현토군)

 

[집해26] 정겸(丁謙) 왈,, 백제(百濟)가 비록 마한(馬韓)을 멸했으나 마한 중에는 여전히 12개의 작은 부(部)가 있어 한왕

(韓王)의 칭호를 이었다.

전기(傳紀)(→위 동이전 기사를 말함)에서 환제, 영제 말에 한(韓),예(濊)가 강성하다 건안(建安) 연간 뒤에 왜(倭), 한(韓)이

대방(帶方)에 복속하였고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2군(二郡)이 마침내 한(韓)을 멸했다 하였으나 이는 모두 마한인이 자립

(自立)한 작은 부(部)를 가리키는 것이지 삼한(三韓)의 전체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한이 예전에는 모두 토착민들의 흩어진 여러 부(部)가 세력이 나뉘고 역량이 미약하였으니 이 때문에 낙랑(樂浪)

(군郡)이 이들을 기속(羈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백제(百濟)와 신라(新羅)가 굴흥(崛興)하자 땅이 크고 군대가 강하여 족히 고구려와 정립할 정도였고 (중국의) 군현이

능히 제어(制馭)할 수 있는 바가 결코 아니었다.

어찌 당시의 중국이 끝내 듣지도 묻지도 않고 막연히 해두며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단 말인가.

백제(百濟)는 본래 마한(馬韓) 열국 중의 하나이고 신라(新羅)는 변진(弁辰) 열국 중의 하나로서 비록 겸병하여 저절로

커졌으나 어찌 여전히 삼한으로 간주하여 특별히 분석(分析,구분)하지 않았는가.(???) 아, 소루(疏漏)함이 심하도다.

어찌 괴이하게도「진서」,「후한서」가 아울러 그 오류를 답습하며 이를 깨닫지 못했는가.

 

[校勘 130]「宋本」에는 ‘臣幘沾韓’으로, 『三國志』「韓傳」에는 ‘臣濆沽國’으로 되어 있으니 ‘幘’과 ‘濆’ 중 어느 하나가

誤記인 듯 하다.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跪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如, 其戶在上[교131],

[집해27]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其人性彊勇, 魁頭露, [집해28]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蹻.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鍤之, 通日[교132]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勸作, 且以爲健.

 

[집해27]戶在上者, 或爲古者中之遺意.

[집해28]章懷云, 魁頭, 猶科頭也. 謂以縈繞, 成科結也. , 音計.

 

 

 

[집해27] 戶在上(호재상)이란 것은 혹 예전의 중의 유의(遺意,남은 의미,자취)일 수도 있다.

(※ 정사조선전 상의 글자는 그림파일로 =穴+留인데 무슨 글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집해28]장회(章懷)가 (후한서에 注하여) 괴두(魁頭)는 과두(科頭,아무것도 쓰지않은 맨머리)와 같다.

머리카락을 얽어 둘러 과결(科結,또는 과계)을 만든다. 의 音은 計. 라 하였다.

 

[校勘 131]『後漢書』「韓傳」에는 ‘開戶在上’으로, 『晉書』「馬韓傳」에는 ‘其戶向上’으로 되어 있다.
[校勘 132]『晉書』「馬韓傳」에는 ‘
’으로 되어 있다.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교133], [집해29]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집해29]毛本, 木, 作本, 誤.

 

 

[집해29] 모본(毛本)에는 木(목)이 本(본)으로 적혀있으나 이는 오기(誤記)이다.

 

[校勘 133]「汲古閣本」에는 ‘本’으로 되어 있다.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無他珍寶. 禽獸草木略與中國同. 出大栗, 大如梨. 又出細尾雞[교134],

[집해30] 其尾皆長五尺餘. 其男子時時有文身.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집해31] 其人差短小[교135], 言語不與韓同,

皆髡頭如鮮卑, 但衣韋[교136], 好養牛及豬.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교137]. 乘船往來, 市買韓中[교138].

 

[집해30]范書, 作長尾鷄.

[집해31]丁謙曰, 州胡, 卽今之濟州無疑.

[집해32]范書, 作乘船往來, 貨韓中.

 

 

[집해30] 범엽의「후한서」에는 장미계(長尾鷄)로 적혀있다.

[집해31] 정겸(丁謙) 왈,, 주호(州胡)는 즉 지금의 제주(濟州)임에 틀림없다.

[집해32] 범엽의「후한서」에는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과 화시()한다.”로 적혀있다.

 

[校勘 134]『後漢書』에는 ‘長尾雞’로 되어 있다.
[校勘 135]『後漢書』에는 ‘其人短小’로 되어 있다.
[校勘 136]『御覽』卷780 所引에는 ‘衣韋衣有上無下好養牛豕乘航往來
貨韓中矣’라 하여 『後漢書』의 기록과 같다.
[校勘 137]『汲古閣本』에는 ‘執’으로 되어 있다.
[校勘 138]『後漢書』에는 ‘
韓中’으로, 汲古閣本」에는 ‘買中韓’으로 되어 있다.

 

○ 辰韓傳[교139]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집해33]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교140],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집해34]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집해35]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집해36]

 

[집해33]范書, 作自言秦之亡人避苦役.

[집해34]錢大昭曰, 後人名我爲俺, 俺卽阿也. 聲之轉耳.

[집해35]局本, 無爲字, 誤.

[집해36]范書,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

 

 

[집해33] 범엽의「후한서」에는 스스로 말하길 진나라의 망인(亡人)이 고역(苦役)을 피해(自言秦之亡人避苦役)라 적혀있다.

[집해34] 전대소(錢大昭,청) 왈,, 후인(後人)들은 나(我)를 가리켜 암(俺)이라 하니 암(俺)이 즉 아(阿)이며 그 소리가 변한 것

(聲之轉) 뿐이다.

[집해35] 국본(局本)에는 爲 자가 없으나 이는 오기이다.

[집해36] 범엽의「후한서」에는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고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과 접한다. 하였다.

 

[校勘 139]原典에는 없으나, 「宋本」에 의거하여 補入한다.
[校勘 140]『後漢書』에는 ‘秦語’로 되어 있다.

 

○ 弁辰傳[교141]

 

[교142]辰亦十二國, [집해37]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교143]側, [집해38] 次有樊濊[교144], [집해39] 次有殺奚, 次有邑借[교145]. [집해40] 有已柢[교146]國·不斯國·弁辰彌離彌[교147]凍[교148]國·弁辰接[교149]塗國·勤耆國·難彌[교150]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교151]國·弁辰半路國·弁[辰][교152]樂奴國·[집해41]軍彌國[교153](弁軍彌國)·[집해42]弁辰彌烏[교154]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교155]國·戶[교156]路國· [집해43] 州鮮國(馬延國)[교157]·弁辰狗邪國·弁辰走[교158]漕馬國· [집해44] 弁辰安邪國(馬延國)[교159]· [집해45] 弁辰瀆[교160]盧國·斯盧國[교161]· [집해46] 優由[교162]國. [집해47] 弁·辰韓合二十四國, [집해48]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3]

 

[3]魏略曰明其爲流移之人故爲馬韓所制.

 

[집해37]官本考證曰, 此弁辰, 疑作弁韓, 下別有弁辰. 范書, 弁辰, 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집해38]范書, 險, 作儉.

[집해39]范書, 作樊.

[집해40]宋本, 作邑借, 范書同. 章懷注, 皆其官名也.

[집해41]沈家本曰, 弁下, 疑奪辰字. 弁辰十二國, 前後列其十, 尙少其一. 疑卽此樂奴國及下弁軍彌國也.

[집해42]沈家本曰, 與下弁軍彌國名同. 案弁辰韓合二十四國, 而傳文列二十六國, 必衍其一. 疑卽軍彌國與下馬延國也.

[집해43]馮本, 戶作尸.

[집해44]馮本, 走作定.

[집해45]趙一淸曰, 馬延國重, 下云二十四國, 合數之得二十六國也.

[집해46]斯盧, 卽新羅, 乃譯音之轉.

[집해47]馮本, 中作由.

[집해48]丁謙曰, 辰韓弁韓二國, 在今朝鮮東南慶州一帶. 大槪, 辰韓居北, 弁韓居南, 中間兩種雜居, 不易分析, 故合稱弁辰.

査二十四國中, 以弁辰冠首者十有一, 當爲弁韓所屬, 其餘皆屬辰韓.

 

 

※ 변진전(?)과 삼국지 한전 전체의 내용구조

: 이 중화서국본을 비롯해 여러 판본에서 이 앞을 여백으로 띄워서 여기서부터 작은 傳으로서 변진전이 새로 시작되는 것으로

편집해놓았고 정사조선전도 이를 그대로 따랐으나, 뒤에 이어지는 국명 열거, 풍속 설명 등의 내용을 볼 때 바로 앞 문단과

내용상 같은 문단이며, 앞의 辰韓在馬韓之東 이래로 한전 끝까지 쭉 진한과 변진(변한)을 번갈아가며 함께 기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진한과 변진 중 진한은)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弁辰亦十二國 // (진한과 변진 or 진한에는) 又有諸小別邑의 형태인 듯

합니다.

(후한서 한전에는 신지,험측 등 기사가 진한 조에 있음) / 전체문맥이나「후한서」한전을 감안해보면 삼국지 한전의 전체

내용구조는 대략 이렇게 정리됩니다.

< 삼한의 개요 → 마한의 위치, 산물 등과 50여 국명 열거 → (마한 또는 삼한 전체의) 중국과 관련된 역사 서술 → 진한 + 변진

(변한)의 기본설명과 24국명 열거(바로 앞문단과 이 문단) → 진한의 산물, 풍속 → 변한의 풍속 >

 

(진한과 변진의 나라로는) 이저국(已柢[교146]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교147]凍[교148]國), 변진접도국(弁辰接[교149]塗國), 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교150]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冉奚[교151]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진]낙노국(弁[辰][교152]樂奴國)[집해41], 군미국(軍彌國)(or 변군미국弁軍彌國)[교153][집해42],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교154]邪馬國), 여담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교155]國), 호로국(戶[교156]路國)[집해43],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교157],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교158]漕馬國)[집해44],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馬延國)[교159][집해45], 변진독로국(弁辰瀆[교160]盧國), 사로국(斯盧國)[교161][집해46], 우유국(優由[교162]國)[집해47]이 있어 변(弁), 진한(辰韓)을 합해 모두 24국이다. 

(※ 민족문화대백과 각 항목을 링크했음)

 

대국(大國)(의 호구수)은 4-5천 가(家), 소국(小國)은 6-7백 가(家)로 총 4-5만 호(戶)이다.

그 중 12국은 진왕(辰王)[註028]속한다.

진왕(辰王)은 늘 마한인(馬韓人)이 맡아 대대로 서로 계승하며 진왕(辰王)이 스스로 즉위해 왕이 되지는 못한다.[3](※)

 

[3]「위략魏略」왈,, 그들(→진한?)은 분명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사람(流移之人)이기 때문에 마한(馬韓)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 진왕(辰王) -「후한서」한전에서는 (韓은) 모두 예전의 辰國이다.

馬韓이 가장 강대하여 그(→마한) 종족을 옹립해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고 三韓 땅 모두에서 왕노릇한다.

그(삼한) 여러 나라들의 선대는 모두 마한의 종인(種人)이다.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라고 기술하여 삼국지가

묘사하는 辰王과는 그 위상이 다릅니다.

한편,「진서晉書」진한전은「삼국지」이 대목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으나 辰王을 모두 辰韓으로 바꿔 적었습니다.

 (弁辰 12국에는) 각기 거수(渠帥)가 있고 모두 辰韓에 예속한다.

辰韓은 늘 마한인이 맡아서 임금(主)이 되고 (마한인이 맡는 그 辰韓의 임금이) 비록 대대로 서로 계승하나 스스로 즉위하지는

못하니 분명 (진한인이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사람이므로 마한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各有渠帥, 皆屬於辰韓. 辰韓常用馬韓人作主, 雖世世相承, 而不得自立, 明其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也.) 별개의 사료를

참고해서 다르게 적은 것일 수 있으나, 진서 찬자가 삼국지 이 대목을 옮겨적으면서 문맥상 이상하다 생각되어 고쳐 적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술 그 자체로 보면, 辰王은 

마한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월지국)을 다스리고(도읍하고) 

마한인이 맡아 대대로 계승하나 

스스로 즉위하진 못하고 마한인들(즉, 마한의 여러 소국들의 군장이나 유력 귀족들)에 의해 추대되며 

삼국지에 따르면 진한, 변한 중 12국의 수장, 후한서에 따르면 삼한 전체의 영도자의 지위를 가졌던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辰王이라는 명칭은 당시 삼한 사회의 전신으로서 적어도 위만조선 시기에까지 소급되는(전술한 위략의 역계경

기사) 辰國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집해37]「관본고증官本考證」왈,, 여기의 弁辰(변진)은 弁韓(변한)으로 적어야 할 것으로 짐작된다.

아래에 따로 弁辰이 있다.

범엽의「후한서」에서는 변진(弁辰)이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고 또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으로 또한 왜(倭)와 접한다고

하였다.

 

[집해38] 범엽의「후한서」에는 險(험)이 儉(검)으로 적혀있다. (※ 險側 vs )

 

[집해39] 범엽의「후한서」에는 (번예樊濊) 樊(번지)로 적혀있다.

 

[집해40] 송본(宋本)에서는 邑借(읍차)로 적었고 범엽의「후한서」에서도 같다. 장회(章懷)가 주(注)하여 모두 그 나라의

관명(官名)이라 하였다.

(※ 삼국지집해에서는 무영전본 등을 따라 본문을 借邑으로 표기했으므로 이렇게 주해했음.)

 

[집해41] 심가본(沈家本,청) 왈,, 弁 아래에(다음에) 辰 자가 탈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변진(弁辰)은 (모두) 12국이나 앞뒤로 10개를 열거하였으니 (이 낙노국을 변진낙노국으로 보아 변진12국에 포함시켜도)

여전히 하나가 부족하다. 그런즉 이 낙노국과 아래의 변군미국(弁軍彌國)이 (변진12국에 포함될 것으로) 짐작된다.

(※ 앞에 변진이 붙은 국명은 11개인데 심가본은 10개로 잘못 세었습니다. 즉 변진12국 중 하나가 빠진 상황이므로,

낙노국을 변[진]낙노국으로 본다면 뒤의 군미국변군미국은 군미국(변군미국)의 형태로 봐야 되고(원문 중의 []는 추가,

()는 삭제표기), (군미국)변군미국으로 본다면 (변)낙노국으로 보아야 맞습니다.)

 

[집해42] 심가본(沈家本) 왈,, 아래의 변국미국(弁軍彌國)과 이름이 같다. 살펴보건대 변(弁), 진한(辰韓)은 도합 24국이라

하였으나 (삼국지 한)전 글에서는 26국을 열거하고 있으니 필시 그 중(→군미국, 변군미국 중)의 하나가 연문(衍文,삭제해야

할 군더더기글)이다.. 그런 즉 군미국(軍彌國)과 아래의 마연국(馬延國)이 (연문으로) 짐작된다.

(※ 앞서 말했듯 심가본은 10개로 잘못 세어서 설명이 잘못되었는데, 중화서국본이 심가본의 설에 따라 교감한다 했으나 그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진 않았고 [진]낙노국, 군미국(변군미국)으로 맞게 정리했습니다.

다만, 마연국 부분은 표점부호를 잘못 붙였습니다. [집해41]과 [교157]의 보충설명 참고.)

 

[집해43] 풍본(馮本)에는 戶(호)가 尸(시)로 적혀있다. (※ 戶路國 vs 尸路國)

 

[집해44] 풍본에는 走(주)가 定(정)으로 적혀있다. (※ 弁辰走漕馬國 vs 弁辰漕馬國)

 

[집해45] 조일청(趙一淸,청) 왈,, 마연국(馬延國)이 중복되며, 아래에서는 (도합) 24국이라 했으나 (열거된 국명의) 합계는

26국이다.

 

[집해46] 사로(斯盧)는 즉 신라(新羅)이며, 바로 역음(譯音)(→현지어의 한자표기)이 변한 것이다.

 

[집해47] 풍본(馮本)에는 中(중)이 由(유)로 적혀있다.

(※ 삼국지집해에서는 ‘優中國’으로 표기했으므로 이렇게 주해했음)

 

[집해48] 정겸(丁謙) 왈,,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두 나라는 지금의 조선 동남쪽인 경주(慶州) 일대에 있었다.

대체로 진한이 북쪽, 변한이 남쪽에 살았으나 중간에 두 종류가 잡거하여 분석(分析,구분)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변진(弁辰)

[韓?]을 합칭했다. 24국을 살펴보면 변진(弁辰)이라는 말이 앞에 붙은 11국(ex.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등)이 응당 변한

(弁韓) 소속일 것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진한(辰韓)에 속할 것이다.

 

[校勘 141]原典에는 없으나, 「宋本」에 의거하여 補入한다.
[校勘 142]『翰苑』所引에는 ‘卞’으로 되어 있다.
[校勘 143]『後漢書』에는 ‘儉’으로 되어 있다.
[校勘 144]『後漢書』에는 ‘秪’로 되어 있다.
[校勘 145]「汲古閣本」·「殿本」에는 ‘借邑’으로 되어 있다.
[校勘 146]『翰苑』所引에는 ‘巳私’로 되어 있다.
[校勘 147]『翰苑』所引에는 빠져 있다.
[校勘 148]『翰苑』所引에는 ‘陳’으로 되어 있다.
[校勘 149]『翰苑』所引에는 ‘樓’로 되어 있다.
[校勘 150]『翰苑』所引에는 ‘彌’字가 없다.
[校勘 151]『翰苑』所引에는 ‘爰’으로 되어 있다.
[校勘 152]諸本에는 없으나 『翰苑』所引에는 있다. 沈家本의 주장에 의거하여 ‘辰’字를 補入한다.
[校勘 153]沈家本은 ‘軍彌國’은 ‘弁軍彌國’과 명칭이 같고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인데 이 弁辰傳에는 26國이 열거되었으니
 이 ‘軍彌國’과 下文의 ‘馬延國’은 衍文인 듯 하다고 하였다.
[校勘 154]『翰苑』所引에는 ‘焉’으로 되어 있다.
[校勘 155]『翰苑』所引에는 ‘露’로 되어 있다.
[校勘 156]『翰苑』所引 및 「南本」에는 ‘尸’로 되어 있다.
[校勘 157]沈家本의 주장에 의거하여 삭제한다.

※ 심가본[집해42], 조일청[집해45]은 마연국이 두번 나오므로 잘못 중복표기한 것으로 보았는데, 중화서국본이 이에

의거하면서 표점부호를 잘못 붙여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두개 다 삭제하는 것(괄호 표시)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중화서국본 표점이나 정사조선전의 [교157]에 구애받지 않고, 앞에 나오는 마연국은 그대로 적고 뒷부분 마연국은

해석에서 뺐습니다. 둘 중에서 후자를 빼는 것은 한원 기술에서도 뒷받침됩니다.
[校勘 158]「南本」에는 ‘定’으로 되어 있다.
[校勘 159]『翰苑』所引에는 없다. 趙一淸은 馬延國이 중복되어 下文에서는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합쳐 26國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校勘 160]『翰苑』所引에는 ‘續’으로 되어 있다.
[校勘 161]『翰苑』所引에는 없다.
[校勘 162]「汲古閣本」·「殿本」에는 ‘中’으로 되어 있다.

 

[표2] 진한과 변진(변한) 24국

 

 

삼국지 한전 (중화서국 점교본)

 

 

한원

 

1

已柢國

이저국

 

巳私國

사사국

2

不斯國

불사국

 

<不斯國>

<불사국>

3

弁辰彌離彌凍國

변진미리미동국

 

卞辰彌離陳國

변진미리진국

4

弁辰接塗國

변진접도국

 

卞辰樓塗國

변진루도국

5

勤耆國

근기국

 

勤耆國

근기국

6

難彌離彌凍國

난미리미동국

 

難離彌陳國

난리미진국

7

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

 

卞辰古資彌陳國

변진고자미진국

8

弁辰古淳是國

변진고순시국

 

卞辰古淳是國

변진고순시국

9

冉奚國

염해국

 

冉爰國

염원국

10

弁辰半路國

변진반로국

 

卞辰半路國

변진반로국

11

[辰]樂奴國 (※)

[진]낙노국

 

卞辰樂奴國

변진낙노국

12

軍彌國 (※)

(弁軍彌國)

군미국

(변군미국)

 

軍彌國

군미국

13

弁辰彌烏邪馬國

변진미오야마국

 

卞辰彌焉邪馬國

변진미언야마국

14

如湛國

여담국

 

如湛國

여담국

15

弁辰甘路國

변진감로국

 

卞辰甘露<國>

변진감로<국>

16

戶路國

호로국

(남감본) 尸路國

尸路國

시로국

17

州鮮國

주선국

 

州鮮國

주선국

18

(馬延國) (※)

(마연국)

 

馬<延國>

<연국>

19

弁辰狗邪國

변진구야국

 

卞辰狗邪國

변진구야국

20

弁辰走漕馬國

변진주조마국

(남감본) 弁辰定漕馬國

卞辰走漕馬國

변진주조마국

21

弁辰安邪國

(馬延國) ()

변진안야국

(마연국)

 

卞辰安邪國

변진안야국

22

弁辰瀆盧國

변진독로국

 

卞辰續[]盧國

변진속[독]로국

23

斯盧國

사로국

 

<斯盧國>

<사로국>

24

優由國

우유국

(급고각본,무영전본) 優中國

優由國

우유국

 

[표 설명]「삼국지」한전에서 진한,변한의 소국들을 열거한 것과「한원翰苑」번이부 신라 조의 위지(→삼국지 한전) 인용문을 표로 정리했습니다.

원문은 고대사료집성 참고. 삼국지 중의 []는 교감을 통해 추가한 글자, ()는 삭제한 글자이며 ; 한원 중의 <>는 교감을 거쳐

추가한 글자, []는 원글자를 오기로 판단하고 []안에 정자를 추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원에서 卞辰續[瀆]盧國 의 표기는 원문은 卞辰續盧國 인데 卞辰瀆盧國으로 교감했다는 뜻이며, 이를 중화서국본 방식으로 부호를 달면 卞辰(續)[瀆]盧國 이 됩니다.

(※) 원문은 弁樂奴國인데, 중화서국본에서는 심가본의 설에 따라 辰을 추가해 弁[辰]樂奴國으로 표기하고 변진 12국 중에

포함시켰습니다. [집해41],[교152] 참고.

(※②) 원문은 ‘軍彌國弁軍彌國인데, 중화서국본에서는 뒷부분 弁軍彌國을 잘못 중복표기한 연문으로 교감하여 24국의 숫자에 맞추었습니다. [집해42],[교153] 참고.

(※) 21번에서 弁辰安邪國馬延國으로 되어 있어 마연국이 또 나옵니다. 잘못된 중복기술로 보이므로 그 중 하나를 삭제해야 하는데 중화서국본에서는 둘다 삭제하는 쪽으로 표점부호를 잘못 달았습니다.

표에서는 앞의 18번 마연국을 살리고 뒤의 21번 마연국은 삭제했습니다. 삼국지 본문에서 24국이라 해놓고 실제로는 26국을

열거한 문제를 교감을 통해 弁軍彌國, (두 개 중 뒤의) 馬延國을 삭제해 해소한 셈이며 이는「한원」기술로도 뒷받침됩니다.

 

土地肥美, 宜[교163]種五穀及稻, [집해49] 曉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禮俗, 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4]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之亦有音曲. 兒生,

便以石厭[교165]其頭, 欲其褊[교166]. 今辰韓人皆褊[교167]頭. [집해50] 男女近倭, 亦文身.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교168]讓路. [집해51]

 

[4]魏略曰[교164] :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집해49]宋本, 無移字.

[집해50] 范書云, 兒生, 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 滿洲源流考卷二云, 以石押頭, 壯夫且不能堪, 而以施之初墮地之小兒, 實非人情所宜有. 滿洲舊俗, 兒生數日, 卽置臥具, 令兒仰寢, 久而腦骨自平, 頭形似扁, 斯乃習而自然, 無足爲異, 辰韓或亦類是耳. 漢人生兒, 常令側臥, 久而左右角平, 頭形似狹. 蒙古人生兒, 以韋帶束之木板, 植立於地, 長則股形微箕. 若如蔚宗所言, 豈漢人蒙古, 亦皆以石押之, 令其頭狹而股箕乎. 若夫三韓命名, 史第列馬韓辰韓弁韓[亦曰弁辰], 而不詳所以稱韓之義. 陳壽魏志, 直云韓地韓王, 魚豢魏略, 且以爲朝鮮王準, 冒姓韓氏, 其爲附會尤甚. 蓋滿洲語及蒙古語, 皆謂君長爲汗. 韓與汗, 音相混, 史載三韓各數十國, 意當時必有三汗分統之. 史家, 旣不知汗之爲君, 而庸鄙者, 至譌韓爲族姓, 何異扣槃捫籥, 以喩日哉. 且中外語言不通, 不能强爲詮解者, 勢也. 今夫天昭昭在上, 人皆仰之. 然漢語謂之天, 滿洲語謂之阿卜喀, 蒙古語謂之騰格哩, 西番語謂之那木喀, 回語謂之阿思滿. 以彼語此各不相曉, 而人之所以敬, 與天之所以感, 則無弗同, 若必一一以漢字牽附臆度之能乎, 不能. 夫韓與汗, 音似義殊, 謬而失之誣, 猶可也. 至於以石押頭之謬, 實悖於理, 斯不可也.

[집해51]毛本, 住, 作往.

 

 

[4]「위략」왈(曰[교164]),,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로 포개어 지으니 (그 모습이) 뇌옥(牢獄,감옥)과 유사하다.

 

[집해49] 송본(宋本)에는 移(이) 자가 없다.

(※ 삼국지집해에서는 宜移種五穀及稻으로 표기했으므로 이렇게 주해했음)

 

[집해50] 범엽의「후한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모두 돌로 누른다. 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권2에서 (무릇) 돌로 머리를 누르는 것은 장부(壯夫)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니 막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실로 인정(人情)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주(滿洲)의 오랜 풍속(舊俗)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수일 째가 되면 와구(臥具)에 두어 아이가 위를 바라보게 하여 눕히니

오래 지나면 뇌골(腦骨)이 저절로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납작한 것처럼 된다.

이는 익숙해져 저절로 그리된 것이라 족히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며 진한 또한 이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한인(漢人)들은 아이를 낳으면 늘 옆으로 눕히니 오래 지나면 좌우가 모지고 평평해져 머리 형태가 좁은 것처럼 된다.

몽고인(蒙古人)들은 아이를 낳으면 가죽띠로 나무판에다 묶어 땅에 세워두니 장성하면 넓적다리 형태가 미세하게 (곡식을

까부르는) 키 모양(微箕)(?)이 된다.

만약 위종(蔚宗,후한서 찬자인 범엽)의 말대로라면 한인(漢人)과 몽고 또한 모두 돌로 눌러서 그 머리를 좁게 만들거나 넓적다리를 키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삼한(三韓)의 명명(命名)에 관해서는 사서에서 차례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변진弁辰이라고도 한다]을 열거하였으나 한(韓)이라 칭한 뜻은 분명치 않다.

그런데 진수(陳壽)의 위지(魏志)에선 곧바로 한지(韓地), 한왕(韓王)이라 하였고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서는 더욱이 조선왕

준(準)이 한씨(韓氏) 성(姓)을 사칭했다 하였으니, 그 부회(附會)함이 매우 심하도다.

대저 만주어와 몽고어에서는 모두 군장(君長)을 한(汗)이라 일컫는다. 한(韓)은 한(汗)과 더불어 그 음이 서로 뒤섞이니(같으니)

사서에 실린 삼한(三韓)의 각 수십국은 당시에 필시 삼한(三汗)(→세 명의 汗)이 있어 이를 나누어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가(史家)들은 한(汗)이 임금(君)임을 모른데다 보잘것없고 비루하여 한(韓)을 족성(族姓)이라 그르치기에 이르렀으니, 쟁반을 두드리고 피리를 어루만져보고는(扣槃捫籥) 해(日)를 식별했다고 하는 (장님과) 어찌 다를 바가 있겠는가?

또한 중외(中外)의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억지로 전해(詮解,해석)할 수 없는 것이 형세로다.

지금 무릇 위에서 하늘이 밝게 비추고 사람들은 모두 이를 우러르는데, 한어(漢語)에서는 이를 천(天)이라 하고 만주어에서는

이를 아복객(阿卜喀)이라 하고 몽고어에서는 이를 등격리(騰格哩)라 하고 서번어(西番語)에서는 이를 나목객(那木喀)이라 하고 회어(回語)에서는 이를 아사만(阿思滿)이라 한다.

 

저 언어로써 이 언어를 말하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으나 사람이 공경하는 바와 하늘이 주는 감흥이 서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약 필히 일일이 한자(漢字)로 끌어붙여 억탁(臆度,억측)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겠는가?

무릇 한(韓)과 한(汗)은 음이 유사하나 뜻이 다른데도 헛소리를 하며 그르쳐서 왜곡하였음을 오히려 알 수 있다.

돌로 머리를 눌렀다는 헛소리의 경우에도 실로 이치에 어긋나므로 불가능한 말이다.

 

[집해51] 모본(毛本)에는 住(주)가 往(왕)으로 적혀있다.

 

[校勘 163]「殿本」에는 ‘宜’ 다음에 ‘移’字가 있다.
[校勘 164]「汲古閣本」에는 ‘云’으로 되어 있다.

[校勘 165]「汲古閣本」·「殿本」에는 ‘壓’으로 되어 있고, 『御覽』卷780 所引에는 ‘押’으로 되어 있다.
[校勘 166]『御覽』卷780 所引에는 ‘扁’으로 되어 있다.
[校勘 167]『御覽』卷780 所引에는 ‘扁’으로 되어 있다.
[校勘 168]「汲古閣本」에는 ‘往’으로 되어 있다.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竈皆在戶西. 其瀆盧國與倭接界.

[집해52] 十二國亦有王, 其人形皆大. 衣服絜淸,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峻.

 

[집해52]丁謙曰, 瀆盧, 當卽今慶尙道南巨濟島. 此島, 與日本之對馬島, 東西相距不遠, 故曰接界.

 

 

[집해52] 정겸(丁謙) 왈,, 독로(瀆盧)는 응당 지금의 경상도 남쪽의 거제도(巨濟島)일 것이다.

이 섬은 일본(日本)의 대마도(對馬島)와 동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이 때문에 (倭와) 경계를 접한다 한 것이다.

 

 

※ 한진서(韓鎭書)의 해동역사지리고 권3 삼한(三韓) => 한국고전번역원

 

※ 국사편찬위원회 정사조선전 한전(韓傳) 역주링크 모음

[001]韓傳 [002]韓 [003]帶方 [004]馬韓 [005]辰韓

[006]古之辰國也 [007]無城郭 [008]月支國 [009]辰王 [010]秦支廉

[011]秦開 [012]滿番汗 [013]浿水 [014]韓地 [015]辰國

[016]二千餘戶 [017]樂浪 [018]韓濊 [019]民多流入韓國 [020]下戶

[註021]臣智 [註022] 有棺無槨(※有槨無棺의 오기) [註023]諸年小勇健者 … 以大繩貫之 [註024]天君 [註025]蘇塗

[026]州胡 [027]有城柵 [028]辰王 [029]五穀及稻 [030]

[註031]褊頭 [註032]文身 [註033]瀆盧國

 

[표3] 이병도(李丙燾)의《韓國古代史硏究 262~266쪽》와 천관우(千寬宇)의《마한 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1979》에

따른 마한 54국의 위치비정 (한국고전번역원 역주에서 인용함)

 

소국명

현재의 지명

이병도 설

천관우 설

원양국

경기 수원 음덕면 일대

경기 파주, 연천 일대?

모수국

경기 수원 일대

경기 양주

상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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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강화 교동

대석색국

소석색국 부근

경기 강화

우휴모탁국

경기 부천

강원 춘천

신분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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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가평?

백제국

경기 광주

서울 강남

속로불사국

경기 통진 지방

경기 김포 대곶, 월곶

일화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탄자국

미상

경기 양평, 지평?

고리국

경기 양주 풍양

경기 여주?

노람국

경기 이천군의 음죽면 일대

경기 이천군?

(목)지국

충남 직산, 성환

평택 등지를 포함한 지역

자리모로국

경기 이천군의 일부(노람국과 인접)

충남 서산 지곡

소위건국

미상

충남 보령군

고원국

미상

충남 당진

막로국

미상

충남 예산, 덕산

비리국

전북 옥구군 회면 일대

충남 예산, 덕산

점리비국

전북 고부군?

충남 홍성군 결성

신흔국

충남 옛 진잠현?

충남 온양군?

지침국

충남 대흥 지방

충남 예산군 대흥

구로국

충남 청양군?

충남 청양군

비미국

옛 비인현(충남 서천의 일부)

충남 서천군 비인

감해비리국

충남 홍성군

충남 공주군

고포국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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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리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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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한산

염로국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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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림국

충남 서천군?

충남 서천군

사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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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리국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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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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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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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옥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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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

전북 김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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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군 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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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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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 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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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전북 부안, 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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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전북 정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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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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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로국

중출(重出)로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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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

임소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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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군?

전남 광산,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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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도비리국

전북 정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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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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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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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군 복내 이복성?

불사분야국

전북 전주군

전남 승주군 낙안

원지국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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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마국

전북 익산군

전남 장흥군

초리국

미상

전남 고흥군 남양

 

※ [표4] 이병도(李丙燾)의《韓國古代史硏究 274~276쪽》와 천관우(千寬宇)의《진ㆍ변한 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 20, 1976》에 따른 진한과 변진 24국의 위치비정 (한국고전번역원 역주에서 인용함)

 

소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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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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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군 풍기(기목)

불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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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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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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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군

경남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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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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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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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경북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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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경남 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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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

미상(경남 진주?)

군미국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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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군

경북 칠곡군 약목, 성주

변진미오야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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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고령, 성산 포함

여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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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미상(경북 경산군 자인, 경산?)

마연국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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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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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경북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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