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스크랩] 고인돌 원산지

설레임의 하루 2012. 6. 30. 00:26

 

<인공흔적이 분명한 우리나라 유일의 해중고인돌>

한반도에 2만9510기 산재, 국가성립 표지
지난 2000년 11월 말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덮개 부분의 큰 돌을 받침돌로 고였다는 뜻) 유적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불국사, 석굴암,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 창덕궁, 경주 역사 유적지구를 포함해 총 7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세계문화유산은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을 지칭하는데, 세계유산위원회의 엄격한 등록기준에 따라 지정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과연 유네스코의 까다로운 선정기준을 너끈히 통과할 만큼 가치 있는 유산일까?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계가 오랫동안 주목하고 인정한 문화유산을 당사자인 우리나라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른 채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고인돌은 우리의 고대문화를 밝히는 유력한 증거이자,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는 점에 그 가치가 있다. 나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강력한 뇌관을 지닌 유산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는 고인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6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스톤헨지나 카르나크 열석과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3∼4천 년 전후가 된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대의 고인돌 유적 보유국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고인돌의 건립 연도가 5∼6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그 시기부터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게다가 고인돌과 함께 발견된 청동기 부장품들의 존재는 "한반도에 청동기 시대가 없었거나 극히 미비했다"고 하는 이론들을 여지없이 일축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마디로 고인돌의 존재는 여타 문화권과 비교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은 뛰어난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던 우리의 고대문화를 밝히는 결정적인 증거물이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위대한 유산이다.

〈고인돌의 나라〉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로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한반도 전역의 고인돌은 북한지역의 3천160기(북한은 1996년에 평양 부근에서만 1만4천 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발표)를 비롯하여 모두 2만9천510기(基)에 달한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요령지방(고조선 영역)에 316기,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6백여 기, 인도네시아에 2백여 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는 약 6만 기로 추정되므로 2만9천510기라면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이나 되는 숫자이다.

특히 전남지역에서는 2천2백여 곳에서 무려 2만여 기가 발견되어 세계적으로 단일면적 밀집도가 가장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소위 '고인돌 문화지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풍부한 자료가 산재해 있는 것이다.


고인돌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한서(漢書)』에서 보인다. 『漢書』는 후한의 반고(班固)가 저술한 것으로 동이족에 관한 자료가 많아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 사료이다.

‘원봉(元鳳) 3년 1월 태산의 내무산(來蕪山) 남쪽에서 수천 명이 ‘슁슁’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큰돌이 스스로 세워져 있었다. 이는 높이가 1장 5척이고, 크기가 48발이며 깊이가 8척으로 큰돌의 밑에는 3개의 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큰 돌 주변에 수천의 백조가 한데 모이고 있었다.’

이 기록에 의한 원봉 3년은 기원전 78년이다. 3개의 돌이 다리로 받치고 있는 것을 보면 탁상식 고인돌이 틀림없으며 크기를 한나라 척도로 계산하면 약 3.5미터에 깊이는 1.86미터로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인돌로 추정된다. 요동지방의 고인돌에 관한 기록은 기원 3세기경 서진(西晉)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공손도전(公孫度傳)〉에도 보인다.

‘(중략) 漢나라의 왕이 당장 끊어지게 되자 여러 대신들이 모여 부처의 귀에 대하여 말하던 중, 마침 양평 연리사에 큰 돌이 생겼는데, 그것은 길이가 1장 남짓하고, 그 아래에는 새 개의 작은 돌을 다리로 삼은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공손도에 말하기를 “이것은 한나라 선제(宣帝)의 면류관 모양의 돌로서 상서를 나타내는 징조다. 즉 마을 이름이 여러 선군(先君)과 같고, 사(社)는 땅 주인인데다가 광명이야 당연히 땅위에 있으니, 이렇게 하여 베 분이 보필하고 있다”고 했다. 공손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이 때는 기원 190년으로 다리가 세 개이고 개석이 면류관을 닮은 것으로 보아 역시 탁상식 고인돌로 보인다. 두 기록을 보아 현지인들이 이러한 고인돌의 축조와 기능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기원전 1∼2세기경에는 고인돌이 세워지지 않아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支石墓)이란 용어는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이규보는 고려 신종(神宗) 3년(1200) 11월 말에 전라도를 여행하던 준 금마군에 이르러 지석묘를 관찰할 수 있었다.

'다음날 금마군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을 구경했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해지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이했다.'

이규보가 본 고인돌은 전북 지방에서 몇 안되는 탁상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중국은 석붕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이규보는 지석(支石)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달리 사람뼈와 함께 부장품이 출토된다는 사실이다. 부장품으로는 여러 가지 토기와 화살촉 같은 석기들뿐만 아니라 청동검, 옥, 석검 등도 발견된다. 부장품이 있다는 것은 고인돌의 연대 측정이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이를 근거로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한마디로 고인돌 문화를 설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고인돌의 크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크게 북방식(탁상식 : 네 개의 반석을 세워 돌방(石室)을 만들고 위에 큰 뚜껑돌을 올려놓는 것), 남방식(바둑판식 : 지하에 판석이나 할석 등을 이용하여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낮은 받침돌로 뚜껑돌을 올려놓은 것), 개석식(蓋石式 : 받침돌 없이 뚜껑이 직접 지하 돌방을 덮고 있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사적 410호)의 남방식 고인돌은 길이가 7.3미터, 폭 5미터, 두께 4미터, 추정 무게만 무려 280톤짜리의 초대형 거석이다. 그 외에 효산리에도 무게 100톤 이상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있다.

북한의 경우 안악군 로암리의 고인돌은 뚜껑돌이 길이 778센티미터, 폭 572센티미터, 두께 70센티미터이며, 파손되지 않은 원형은 길이 910센티미터, 무게는 거의 72톤으로 추정된다. 또 받침돌과 막음돌까지 합하면 거의 100톤이나 된다.

북방식은 남한에도 있지만 강화, 인천, 수원, 이천을 연결하는 선을 한계로 그 북쪽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사적 137호)은 뚜껑돌만 해도 길이 7.1미터, 폭 5.5미터,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흑운모 편마암으로 추정무게 80톤으로 남한 최대의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무리 중에서 유달리 큰 고인돌이 하나씩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우리나라 고인돌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1∼2기가 독립적으로 발굴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10여 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100∼200여 기씩 무리를 지어 있는 채로 발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유달리 큰 고인돌은 촌락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추정은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의 경우 뚜껑돌을 옮기기 위해서 최소한 800명의 장정이 필요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서양 학자들의 연구와 실험에 의하면 둥근 통나무 위에 약 1톤 무게의 돌을 올려놓고 옮기는 데에는 약 10명의 성인 남자가 필요하다고 추정한다) 800명의 장정을 거느릴 정도라면 당시에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다는 뜻이다. 북한 학자들은 한 때 고인돌을 군사령관의 무덤으로 해석했는데 현재는 고인돌 사회를 족장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군사령관이나 원시 족장은 용어상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고인돌 = 국가 탄생〉

우리나라 고인돌은 시베리아 카라스크 돌널무덤(석상분(石箱墳))의 영향을 받은 '북방설', 가매장한 뒤 나중에 뼈만 추려 묻는 세골장(洗骨葬)과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남방설', 한반도에서 독립적으로 발생되었다는 '자생설' 등으로 그 기원설이 나누어지지만 아직 확정된 정설은 아니다.

고인돌이 동남아시아로부터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중국의 중원에는 고인돌이 존재하지 않고 절강성, 호남성, 사천성, 티베트, 대만 같은 주변지역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김병모는 동남아시아에는 인도네시아열도 말레이반도 보르네오섬 등지에서도 보고되며, 서남아시아의 인도 등지에서도 고인돌이 분포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국의 벼농사의 기원지가 동남아시아이고 벼농사가 해류를 따라 민간신앙과 함게 이동해 왔다면, 지석묘의 전파도 거석숭배사상과 함께 그 루트를 따라 전파되어 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그는 인도-동남아시아-한반도의 해안 지역의 고인돌 분포와 난생(卵生)신화의 지리적 분포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고인돌의 남방설을 주장했다.

자생설은 한국의 고인돌이 어느 지역보다 밀집도가 높고, 고인돌의 축조연대도 앞선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고인돌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은 생산력의 고른 발전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천으로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고인돌 문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특히 만주 지방의 고인돌이 형식의 선후관계를 볼 때 한반도에서 전파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근거로 삼았다.

고인돌의 기원과 관련하여 석관묘에서 고인돌이 파생했다는 석관묘 파생설도 등장했다. 고대에 석관묘를 집중적으로 건설하다보니 주변 토사가 시간에 따라 유실되자 석관을 보호하기 위해 보다 크고 무거운 개석을 석관위에 올려놓게 됨으로서 고인돌이 출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인돌이 중요시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고인돌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로 들어선 경우에만 비로소 그 민족이 국가라는 틀을 구성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고인돌은 비록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인돌 자체만을 갖고도 청동기 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즉 고인돌의 연대가 올라갈수록 바로 그 시기부터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 달리 부장품이 함께 발굴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화살촉과 돌검이 중심을 이루고 돌도끼 등의 석기와 민무늬토기 계통의 토기류, 옥(玉) 장식품과 청동기 등도 발견된다. 이들 부장품들이 고인돌을 만든 시대와 사회생활을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연대를 측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쓰는 고대사〉

우리나라의 고인돌 연대는 주로 요령, 길림, 한반도 지역으로 구분되어 연구된다.
현재까지의 부장품을 통한 절대 연대 측정 자료에 의하면 요령 소재 고인돌은 기원전 20세기에서 15세기에 축조되었으며, 개석식에서만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는 것을 감안하여 북방식이 먼저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길림지역의 경우 부장품들이 대표적인 청동기 문화인 보산문화와 비슷한 점이 많으므로 기원전 10세기로 추정한다.

그러나 한반도로 들어오면 고인돌의 축조 연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
북한 학자들은 평양 일대의 고인돌 무덤을 침촌형, 오덕형, 묵방형 등 3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침촌형은 하나의 묘역 안에 5∼6기의 무덤이 밀집해 있는 집합식 무덤이며 오덕형은 커다란 돌판을 4면에 세워 무덤칸을 조립한 것이다. 묵방형은 오덕형과 유사하지만 돌판을 조각돌이나 강돌로 쌓아 만든 무덤이다. 이 중에서 침촌형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4천 년 후반에 해당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한국의 고대사를 획기적으로 다시 쓰게 만든 것은 평양시 강동군 남강 로동자구에서 발견된 황대성(黃岱城) 위에 있는 고인돌이다.


황대성은 해발 약 50미터의 산정에 위치한, 흙과 돌로 축성한 일종의 산성(山城)으로 약 3백 미터가 남아 있다. 성벽의 서남쪽 구간은 완전히 없어져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축조형식으로 보아 평면은 긴 타원형으로 추정된다. 이 성벽의 하부 폭은 10미터이고 상부 폭은 5미터이며 높이는 1미터 정도이며 배수구도 발견되었다.

놀라운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겨 평평하게 된 성벽 위에서 고인돌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석회암 판석으로 남북 길이 2.2미터, 동서로 1.45미터, 높이 1.55미터의 무덤칸이 있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었다. 이 고인돌 무덤은 이른바 오덕형 고인돌 무덤류에 속한다.

이는 황대성이 폐성(廢城)이 된 다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축조된 무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고인돌 무덤은 황대성의 중요성 때문에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유사 고인돌 무덤인 구빈리 고인돌 무덤의 절대 연도는 4,990±444년 전이고, 룡곡리 4호는 4539±167년이었다. 중요한 것은 폐성이 된 성벽의 연대 추정이었다. 고인돌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 밑에 있는 성벽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 즉 기원전 3천 년경에 축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황대성의 축조 연대가 기원전 3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북한측 주장에 의하면, 축조 연대가 기원전 3천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황대성이야말로 단군조선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산성은 평지의 성이나 목책과는 달리 군사시설이다. 군사시설이란 고래로부터 통치자의 지휘처로 사용되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단군조선 시대와 유사한 시대에 축조된 산성의 존재는 곧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중국 내몽고 적봉시 부근에서는 황대성보다는 약간 후대인 기원전 20세기경이지만 1100여 기의 집단 무덤 유적이 발견되었다. 지가영자에서는 성터가 발견되었는데 성의 유적은 폭 4∼5미터, 높이 2∼3미터이며 성문 자리도 발견되었다. 성 안의 면적은 약 3만 평이며 6백 개의 집터 자리가 발견되었으며 최소한 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추정했다. 고조선 강역 안에서도 무려 60여 곳이나 성벽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조선이 강력한 영도력에 의해 지배되던 국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고인돌이 우리 고대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나라의 고인돌〉

고인돌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인돌 밀집지역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고창군은 고인돌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매년 10월 실제 고인돌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고인돌 축제'를 열고 있다.

고창군은 매산 마을 일대 2만5000평의 고인돌 밀집 지역을 세계적인 관광 지역으로 활용하기 위한 공원 조성 작업을 벌이고 있다.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 매산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 1.7킬로미터 범위에만 44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공존하고 있어 '동북아 고대 무덤의 야외박물관'으로도 불린다.

화순군도 춘양면 대신리와 도곡면 효산리 일대 고인돌 분포 지역 66만3000평을 선사 유적 공원으로 조성하고 있다. 대신리에는 사적 410호로 지정된 길이 7.3미터, 너비 5미터, 두께 4미터의 추정무게 283톤의 초대형 남방식 고인돌이, 효산리에는 무게 100톤 이상으로 추정되는 길이 5.3미터 짜리 고인돌이 있다.
고창과 화순이 관광지 조성에 나선 것은 이미 설명한 스톤헨지와 카르나크 지방이 연간 백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도시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고창·화순·강화 지역의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사실 역시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인정받았다는 뜻이 된다.

특히 프랑스 국립과학기술연구소(CNRS)의 고저 주스므 박사는 화순군의 경우 그 밀집 형태가 특이해 고고학 공용어인 '돌멘(Dolmen)' 대신 '고인돌(Goindol)'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출처 : 천지인 天鼓
글쓴이 : 곽광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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