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아나사마 2012.05.06. http://cafe.daum.net/mookto/GUJC/4029
[천부]이야기 -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증(징)심록」에서 취했음에랴[펌] 생육신의 한 사람은 " 훈민정음 28자 " 가 증심록[證心錄 : 마음을 증거하는 기록]에서 취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증심록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징심록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필자는 뜻을 표현하는데 증심록이 더 합당하여 증심록으로 적겠습니다.
증심록이란 책은 신라 시대때 충신 박제상이 전한 책으로써 3교(상교, 중교, 하교)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만약 한글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면 상교속의 부도지(符都誌)와 음신지(音信誌)안에 기록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부[符]는 부호, 부적의 소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글자을 뜻하는 소리이고 음[音]은 소리를 뜻하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천부경을 해석한 바에 의하면 천부경은 모음과 자음 28자를 모양원리를 상세하게 표현하여 놓은 경으로 풀렸습니다. 부도지와 천부경이 사실의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글원리와 일치하고 기록으로 전해지는 있는 것이 신비롭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것은 신비로움 뿐이고 중요한 것은 현실입니다. 현재 한글의 현실에서 중요한 사실은 한글기호에 뜻이 담긴다는 사실입니다.
[●]에는 원천의 뜻이 담기고 [ㅡ]에는 땅, 음성의 뜻이 담기고 [ㅣ]에는 인간, 양성의 뜻이 담깁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한글이 미래에도 희망적이란 사실입니다.
아래의 글은 확인 될 수 없는 과거의 글인데 참고 삼아 올려봅니다.
금척리 고분에 감춰진 박혁거세의 금자 [김유경의 '문화산책']<6> 경주풍경 ⑤기사입력 2010-12-24 오전 8:21:28
영천-경주간 국도를 지나던 늦은 밤에 경주 건천읍 금척리 고분군을 처음 보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벌판에 어슴프레 길 양옆에 보이는 크고 작은 고분들이 있었다. 금척리 30여 고분 한가운데를 뚫고 뻗은 오래된 2차선 국도로 달리는 중이었다. 일행은 우리 두 동행인뿐이었는데, 아무 말도 안하고 약간 긴장해서 그곳을 지나쳤다. 자동차 불빛에 언뜻 보이는 고총들은 어둠 속에 비밀과 함께 감춰진 듯 보였다.
그후 금척리 고분군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됐을 때 밤에 지나던 앗찔한 기억은 추억이 되어 이곳에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단군고조선 부루단군 때도 있었고 박혁거세 임금이 지녔다던, 국가 통치권의 상징 금자(金尺)가 이곳 고분들 중 어느 하나에 묻혀있었다는 것이다. 금척과 옥적, 그리고 선덕여왕이 지녔던 화주(火珠; 태양으로부터 불씨를 얻는 수정 돋보기)를 두고 신라의 삼기(三奇) 또는 삼보라고 한다. 옥 허리띠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집안이 6.25때 북에 두고 온 이후 전해지지 않음. 「징심록」을 구성하는 15지중의 제1지인「부도지」만 후손 박금씨가 복원해 1986년 김은수역으로 출판됐다) 처음 나온다. 박혁거세가 '금척과 옥적의 이치를 따라 다스렸다.'고 했는데, 박제상의 아들 박문량(백결선생으로 널리 알려진 거문고음악가)이 후일 「금척지」란 글을 써「징심록」에 덧붙여 한 책처럼 언급된다. 「금척지」또한 전하지 않지만, 일차적으로 모두 도량형 기능을 하는 금척과 옥적이 뭔가 중요한 제왕적 일인가 보다 하는 인상을 준다. ' 금척으로 죽은 사람도 살리고...' 라는 표현은 의료에 관련된 도량이야기는 아니었을까. 경주의 다른 이름, 동경(東京)에 관한 조선중기의 인문지리서「동경잡기」에도 박혁거세의 금척이 어떻게 고분 속에 묻혔는지 그 전말이 나온다. 금척을 탐내는 중국에게 "땅이 크다고 교만한 외국에 국가의 보물을 내줄 수 없다." 하고 조정의 의견을 정해 안 뺏길 방책을 생각, 땅에 묻고 똑같은 무덤을 여러개 만들어 감춰버렸다. 후일 금척을 파내려는 소정방의 무력시위에도 "공사한 사람이 죽어 어느 무덤에 묻었는지 모른다. 못 주겠다." 고 버티는 모습이 그림같이 보인다. 중국을 제껴버린 외교였다.
삽량태수 박제상은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으며 언변이 좋았다고 한다. 내물왕 사후 실성왕이 어린 조카 눌지의 왕좌를 빼앗고 아우인 복호와 미사흔은 고구려와 왜국에 인질 보내 후환을 없이하고 왕위에 올랐다. 박제상 등이 나중에 실성왕을 내쫒는 반정에 성공, 눌지왕에게 왕위를 찾아주었다. 그는 눌지왕 즉위 후, 고구려에 가있던 왕의 동생 복호(혹은 복해)와 왜국에 가있던 미사흔(혹은 말사흔, 미해)을 구해 내는 임무를 맡아 해내고 자신은 왜왕의 신하되기를 거부하다 죽임 당했다. 이를 엄중하게 지키는 일이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집안 대대의 운명이 되었지만 이때가 되면서는 이미 금척의 법에 대한 해득이 불가능해진 때였다. 세조때 험악한 폭력 정세가 되자 후손은「징심록」과「금척지」두 책을 가지고 강원도 김화로, 더 나중에는 함경도 문천으로 숨어들어가 살고 그후 6.25로 종손조차 찾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북한 영해 박씨 집안에 혹시라도 그 유물이 온전히 전할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1455년 단종 폐위를 겪고는 세종이래 주어진 벼슬을 버리고 김화로 들어가는 박효손을 따라가「징심록」과「금척지」를 읽고 「징심록 추기」라는 글로 금척에 관한 유래와 형상, 논평 등을 기록했다. 다음은 그 책에서 인용한 금척관련 글의 일부이다. 김시습의 글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최고의 지식인인 그의 기록이 대중적인 설을 넘어 신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이다. 것이다. 혁거세왕이 13세의 어린나이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것은 그 혈통의 계열이 반드시 유서가 있었기 때문이며 금척이 오래된 전래물 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집안에 내려오는 금척 전설이 많아도 후손들은 엄중하게 비밀에 부쳐「징심록」을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록에 의하면 이미 박혁거세 때에 금척을 땅에 묻고 38개의 언덕같은 무덤을 같은 장소에 만들어 감추어 버렸다. 병들고 군세가 약해져 매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니 당나라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신이 와서 신라에 무슨 신기한 물건이 있어 그런 것인가 살피고 갔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금척리 일대를 파내므로 어떤 사람이 이를 감춰가지고 후일 금강산으로 들어가 깊이 감춰버렸다고도 하니 이 또한 기설인 것이다. 옥적은 이미 땅속에서 나왔으니 금척도 다시 나타날 때가 있는 것인가."
내가 일찌기 「금척지」를 읽었으나 그 수사가 매우 어려워서 알 수가 없었다. 머리에는 불구슬(火珠)을 물고 네 마디로 된 다섯치 길이다. 그 허실의 수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天符)의 수이다. 대저 그 근본은 곧 천부의 법이다. 그것을 금을 가지고 만든 것은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요, 자로서 제작한 것은, 다 같이 오류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후인이 연구하여 아는 자가 있게 된다면 어찌 금척을 복제할 길이 없을 것인가. 만약 복제하지 못하더라도 그 법리를 알면 족할 것이다." 라고도 썼다(박금, 김은수 지음 「부도지」에서 인용).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태조가 꿈에 금척을 보고 난 뒤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심했다는 언급이 '용비어천가'에도 있다고. 세종대왕은 박제상의 집안을 두루 구제해 성균관 옆에서 살게 하고 병조판서 벼슬을 주었지만 이들은 얼마 안 가 서울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세종대왕이 박제상의 후손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은 당연한 바가 있으니, 하물며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징심록」에서 취했음에랴."고 했다. 고대 한글의 원형이라는 가림토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오는 것이다. 옥적도 기장 쌀알을 갖고 계산하는 도량형의 구실을 했다고 들었다. 도량형에 대해선 현대에도 국제표준 운운 하는 기구도 있을만큼 중히 다뤄진다. 도량형은 경제내지 국가의 부에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금척이어서 금척은 경주에 있고 은척은 상주에 묻혀 지명이 남았다는 것이다
놀랍게 거기에도 왕의 물건으로 자가 하나 나와 있었다. 두자쯤 되는, 검은 바탕에 화사한 자개 무늬를 박은 고상한 자였는데 평면적이지는 않고 도톰한 각목처럼 두께가 있는 것이었다. 재질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자개를 입힌 것으로 보아 금은같은 철물은 아닌지도 몰랐다. 일반의 반짓고리에 담겼던 화각자, 자개자, 금은 상감을 한 자 그런 것과 비슷할까? 아니면 어떤 형식을 엄격히 따른 것일까? 화주 장식이 붙어 있을까? 건천 가까이 '알마을'이 있었다. 박혁거세의 알인가? 아무도 왜 거기가 알마을인지 모른다고 했다. 거기서 얼마 안 떨어져 모량이란 옛 신라 지명이 간판에 띄엄띄엄 나왔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김대성이 여기 출신이고 몇 명이나 되는 왕비가 나온 번화한 곳이었다가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고 피폐되었다. 지금은 넓은 길이 신경주역에서부터 이어진다. 후백제 군사가 들어왔던 이 길로 지금은 서울도 두시간이면 오간다. 길가엔 모량초등학교, 모량 돼지갈비집도 보인다. 금척리에 가까워지는 이런 이름들이 정다웠다. 같은 평지에 쌓아올린 대릉원 고분들 보다 크기가 훨씬 작다. 그렇지만 여기 고분이 1천 5백년 이상 손보지 않은 것이라면 원래는 이보다 더 굉장했으려니 싶다. 워낙은 52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한 가운데로 국도가 뚫리면서 길 양옆 동서로 분리되었다. 적어도 여기 고분이 아무것도 없는 언덕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봉분이 다 깎여나가 납작해진 것도 있고 어떤 곳은 모서리 한부분만 남기도 했다. 뚜렷하게 모양새가 갖춰진 큰 무덤은 20여개 정도였고 동쪽에 몰려있었다. 경주 유적지를 보는 동안 이런 무덤들이 많았다. 무덤과는 달리 어두워 보였다. 풀이 크게 자라 뱀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안에 있던 인가들은 모두 정리된 듯 무덤들만이 고요히 솟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금척의 굉장한 이야기가 간직된 곳이라는 점이 이곳을 드라마틱하게 보이게 한다. 무슨 근사한 영화로 꾸며질 것 같은 상상도 된다. 그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제발 어거지같은 치정이나 중국무협영화의 아류같은 액션과 옷차림, 그런 것으로 몰아가지 말고 진지하게 한국인 고대의 정서를 다뤄줄 감독이 있다면..... 이 또한 한국의 매혹적인 인문자산이다. 조명이나 현대건축 같은 문명이 덜 가해져있어 경주의 원초적인 모습이 가장 리얼하게 남아있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나정은 왜소해진 반면 경주시내의 오릉은 그 넓이가 반월성 전체만 한데, 금척에 관련된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알영의 우물은 지상부분의 우물벽은 일찌감치 없어지고 땅속의 물만 남았다. 뚜껑을 덮어논 장대석 돌틈으로 물이 조금 보였다. 경주와 울산 경계 치술령에는 박제상의 처가 동해 바다를 내다보며 돌아오길 기다리던 장소가 있고, 경주 남천 벌지지라는 곳은 집에도 안들리고 떠나간 무정한 사람 박제상을 그려 주저앉아 울던 장소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단군 이래 금척이 있어, 금척을 묻은 고분이 있고 박제상같은 지킴이와 후손이 있고 김시습같은 지식인의 책도 있고 금척의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어 즐겁다. 역사가 오랜 나라라는 게 실감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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