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말하지 않았던 비밀, “고종 때 이런 일이…” 박원규 충북대 교수, 나이테연대측정 통해 고종 5년께 대대적 지붕공사 첫 확인 2012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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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0일. 국보 1호인 숭례문이 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목재 건물인 숭례문은 3시간 만에 전 층이 불길에 휩싸였고, 결국 잿더미로 변했다. 4년이 지난, 이달 8일에는 숭례문 상량식을 갖고 막바지 재건 작업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없어졌던 문화재를 다시 만들 때는 과거보다 훨씬 공을 들여야 했다. 역사, 과학, 문화 등의 전문가들이 복원을 위해 다양한 연구를 해왔다. 숭례문이 타면서 남긴 잔재 등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분석한 결과 숭례문에는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숨어 있었다. 목부재 68점의 나이테 연대를 측정한 결과 1860년대에 대대적인 지붕 공사가 있었던 흔적을 찾았고, 조선 태조 때 사용됐던 건축양식을 가진 목부재도 알아냈다”고 말했다. 매년 한 개씩 생기는 나이테의 두께는 기후나 강수량 등에 따라 달라진다. 몇백 년씩 자라는 나무의 나이테는 넓거나 좁은 독특한 패턴을 나타내는데, 이 패턴은 나무 종류와 지역에 따른 특징이 있다. 박 교수팀은 2011년 4월부터 10월까지 숭례문 목부재의 나이테 패턴과 1170년부터 2010년까지 840년 치의 한반도 소나무 나이테 패턴을 비교해 연대를 측정했다. 성종 10년(1479년)에 대규모 공사가 이뤄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에는 6·25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기 위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한 게 전부다. 이 중 상층 남서쪽 지붕을 받치던 추녀는 나무줄기에서 껍질 바로 안쪽 부분인 ‘수피’까지 남아 있었다. 수피는 나무가 성장을 멈춘 지점으로 벌채한 연도를 나타내므로 이 부분을 보면 비교적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측정 결과 상층 남서쪽 추녀가 벌채된 시기는 1866년이다. “그 시기에 지붕까지 들어내는 대규모 공사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부재는 숭례문 상층에서 서까래 위에 들어가는 ‘마룻보’인데, 건축양식이 화재 전 숭례문과 다르다. 이 마룻보는 1961년 공사 당시 기와와 서까래 사이(적심)에서 발견됐고, 따로 보관되다 이번에 연대를 알게 됐다. 흔적을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때 것으로 파악된 옛 마룻보는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실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숭례문 내부 아래층 바닥은 홍예(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성문의 윗부분)만 마루로 이뤄져 있는데 이 부분을 받쳤던 것으로 보이는 ‘귀틀’ 부재 때문이다. 추정됐기 때문에 초창기 숭례문 마루는 지금과 다른 형태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문화재의 가치는 특정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이나 형태에 있다”며 “나이테 연대 측정은 과학적으로 건축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다. 청주=박태진 기자 tmt1984@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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