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스크랩] 부여말기 한반도 지역에서 개국한 고구려.백제.사로(신라).가야

설레임의 하루 2012. 4. 4. 00:11

[규원사화]而後世蚩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견夷.우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 夷之爲言, 大弓之稱也. 盖自蚩尤氏作刀.戟.大弩以後, 狩獵征戰, 賴以爲武, 中土諸族, 甚畏大弓之用, 聞風膽寒者久矣. 故謂我族曰夷.《說文》所謂: 「夷, [人人大]人人弓, 東方之人」者, 是也. 乃至仲尼《春秋》之作, 而夷之名, 遂與戎狄幷爲腥조之稱, 憤哉! 後世견夷,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힐항,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 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하게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견夷)·우이(우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이(夷)'라고 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끝]

 

치우천왕이래로 치우씨를 중심으로 9환(구려)족은 난하이남으로 계속 이주하여 회대에 속하는 산동.양자강지역까지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단군조선시대에 은나라를 중심으로 많은 구려족의 나라들이 생긴 것이다.

 

오.월.연.제 등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이 모두 구려족의 나라들이다. 그러나, 주나라에게 은나라가 망하면서 대거 마조선에 속하는 한반도지역이나, 난하를 건너 번조선지역으로 이주를 하기 시작한다. 은나라 왕족 기자의 망명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다시 연나라 장수 위만세력과 한나라에 의해 번조선(기자조선)이 망하면서 다시 대거 진조선에 속하는 만주지역이나 마조선(한반도)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이 때 번조선 지역의 나라이름들이 그대로 만주나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재현되게 된다. 곧 옥저.예.맥.최씨 낙랑.대방 등의 조선유민 국가들이 그것이다.

 

 

진조선(부여) 지역(환인=홀본=골본/졸본x)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굴종을 강요했던 동부여를 제압하고 만주의 주인이 된 이래로 요하를 건너 번조선과 지나지역을 회복한 다물정신의 역사적 배경이며,

고구려와 싸우던 부여왕의 아들 구태세력이 요동지역에서 100가를 거느리고 서해를 따라 마조선의 남한지역(웅진=공주)에서 세운 백제가 온조 십제를 통합하고 서해를 건너 번조선과 지나지역을 회복한 다물정신의 역사적 배경이며, (만주원류고:"백제는 동진말기 마한을 통합하고 바다를 건너 요서군을 설치했다." 구당서:"백제영역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일본열도에 이른다.")

박혁거세 모자가 만주 부여에서  동해를 따라 마조선 남한지역(경주)으로 망명하여 진한6촌장들의 추대로 박혁거세가 시조가 된 사로국[환단고기 내용]이 마조선 해상세력인 석탈해가 사로국의 왕으로 있을 때 남지나해를 건너 월주지역에서 영토를 개척한 다물정신의 역사적 배경이다. 
1세기에 지나지역에서 망한 신나라 김일제 후손 김알지 세력이 진한지역으로 망명.4세기 고구려와 전쟁 중에 동해안을 타고 내려 온 모용선비(전연) 일파는 모씨에서 김씨로 창씨개명을 하고 신라 김씨왕조를 세웠다.

 

경남지역의 번한(가야/신나라가 망한 후에 망명한 흉노족 김일제 남동생 김수로 세력)는 신라에 의해 통합되었다. 월주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의해 통합되었다.[환단고기-고구려본기:"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산월.좌월이 있었다. 문자태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회계.오월.좌월.산월.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한반도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백제.사로(신라)가 요하와 바다를 건너 지나지역으로 진출한 배경에는 번조선과 지나지역은 지나배달족의 우두머리 황제헌원의 반란을 잠재운 치우천황이래로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영토라는 주인의식의 발로가 바로 다물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뿌리는 동북지역으로 지나인들에게는 천제들의 땅인 천상에 해당하는 만주.한반도임을 명심해야 한다.

 

[규원사화]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기大荒, 西率알견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정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병)[추莊], 風氣勁雄, 曰루진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濊]君. 夫蘇.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眞番.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卒本.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험독)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루진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북한 평양)에 자리 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고리)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32)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우夷)와 래이(萊夷) 및 회이(淮夷)와 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읍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끝]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3성씨가 치우씨.고시씨.신지씨다

 

흑도문화가 바로 배달단군족의 문화인데, 이 흑도문화는 백두산신시에서 지나지역으로 전파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으며, 황하상류의 채도문화는 동남아에서 북상한 오리지날 지나족의 문화로 나중에 동방의 흑도문화와 결합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지나족의 원형이다.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3성씨가 치우씨.고시씨.신지씨다. 고시씨는 불을 발견하고 농업을 발전시켰고, 치우씨는 청동무기를 개발했으며,신지씨는 문자를 개발하였다.

3성씨는 백두산지역에서 이주하여 살게 되는데, 고시씨는 한반도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고, 치우씨는 지나중원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고 신시씨는 만주지역에서 살게 된다.

따라서 마조선에 속하는 한반도인들은 고시씨의 후손들이고, 번조선에 속하는 배달조선인들은 치우씨의 후손들이고,진조선에 속하는 만주인들은 신지씨의 후손들이다.

배달조선족은 환국에서 나왔고 12환국은 만주의 9환족을 중심으로 64부족으로 유라시아에 분포한 12개의 연방국이였기 때문에 지나인들은 배달국 천제나 단군조선의 천제를 구려 천자라 하였다.

구려korea란 9려로 환국의 중심부족인 9환족을 의미하는 한자어다. 곧 만주의 우리 한국민족을 의미하는 일이다. 따라서 치우씨도 9환족에 속하니 치우가 배달국 천왕이 되었을 때 지나인들은 구려 천자라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치우가 배달국의 천왕이 되자, 배달국 신하으로 양자강지역의 군대를 지휘하는 군책임자 소전의 후손 중에 공손헌원씨가 있었는데, 지나지역의 배달족을 규합하여 치우천왕에 도전을 하게 되니 백두산신시에서 지나중원으로 신시를 이전한 이래로 10년간의 헌원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헌원을 황하상류로 유배를 시키고, 단군왕검이 만주 하얼빈에서 도읍를 삼고 신시를 회복한 배달국 말기까지 지나지역과 티벳지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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