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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방 천제국 단군조선과 지나족(주.진.한)의 동방진출

설레임의 하루 2012. 4. 4. 00:11

동방 천제국 단군조선과 지나족(주.진.한)의 동방진출

 

단군조선의 광대한 영토와 찬란한 문화


 

고대 지나문헌에 숙신.동호로 기록된 단군조선은 만주의 수렵족답게 기마민족의 웅대한 기상과 단결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홍익사상과 정치체제로 인해 곰.호족을 중심으로 주변의 많은 부족들을 통일시켜 나갔다. 또한 인민들은 지역환경에 따라 사냥과 농업과 목축을 발전시켜 생활하였다.

지나.티벳지역을 다스린 배달국을 계승한 단군조선은 광대한 지역의 영토를 확정하고 다스렸다. 확정된 영토는 단군조선의 성통공완의 성인철인되는 단제들의 통치철학인 홍익주의에 반대하는, 권위적인 주나라(무왕, 성왕, 목왕, 여왕, 선왕, 유왕)와의 전쟁, 춘추전국시대 여러 제후들과의 전쟁, 진나라, 한나라의 동방진출에 맞선 끊임없는 전쟁 등으로 강토의 신축은 있었다.

그러나, 단군조선 2천년 동안 해머리땅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현재 지나본토의 많은 부분 등 1만여리가 넘는 영토를 확정하고 다스렸던 것은 모두 사실로 드러 나고 있다. 이는 해머리땅의 고인돌 문화를 계승한 만주지역의 고인돌 문화가 산동반도 왕모산(王母山) 두파촌(杜坡村) 등에서 발견되며, 산동성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에서 단군신화와 비슷한 줄거리를 갖는 벽화가 발견되는 것 등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해머리땅 고인돌 문화가 서해를 건넌 마고한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단군조선 강역이 단군조선의 수 많은 제후국들에 해당하는 고구려(서쪽으로 감숙성 동쪽으로 연해주 북으로 흑룡강 남으로 양자강과 일본열도까지), 남북옥저(백두산 및 연해주.함경도 지역), 부여(대흥안령 산맥 및 흑룡강 주변), 예맥(하북성~산서성, 감숙성/번조선 상실이후 한반도지역으로 이주)의 강역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하시삼위태백(下視三危太伯)'이라고 적혀 있는데 삼위(三危)란 서울대 최창규 교수의 지적대로 지금의 산서성의 삼위산이며 태백은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다. 또 단군조선의 강역에 관한 문헌은 지금의 지국쪽에도 많이 있는데 '삼국지(동이전)''사기''후한서''춘추좌씨전' 등이 이것이며 이 문헌에 대한 해석은 학자마다 차이가 있으나 단군조선의 넓은 강역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예성강에서 난하 사이까지가 고조선의 강역이다'라고 주장한다.(김용주 저 '단군조선사' 참조)


이상에서 단군 조선의 강역은 신축은 있었다 하여도 지나지역이 통일대제국을 이룬 진, 한시대까지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전(前) 지나 서북부를 영토로 확정하고 다스렸음을 알 수 있고, 이 강역은 이후 부여, 고구려, 발해로 계승, 발전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조선민족의 강대함은 진(秦), 한(漢) 이후 수, 당 시대까지도 전(前) 지나국의 제국들을 압도하였을뿐 아니라 단군조선의 계승을 국시로 삼은 대진국(발해)까지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의 영광을 누렸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은 넓은 지역을 다스리며 강성함을 자랑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수준높은 과학기술문화도 이룩하였다. 단군조선 내부에서는 건국을 전후하여 청동기 문화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단기 1330년경(서양기원전 10세기) 이후에 청동기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제련기술과 가공기술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였다. 이는 현재까지 발굴되는 당시의 무기류, 공구류, 생활용품, 장식품을 망라한 청동유물 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단군조선의 첫 아사달인 송화강 지역에서 산업박람회를 열 정도였다고 하니 산업기술이 매우 뛰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의 유물 중에는 현대의 나노기술에 해당된다는 0.25미리미터 정도의 가느다란 청동선을 뽑아 정교하게 그물을 짠 청동그물이 발견되는데 이는 청동가공기술이 세계에서 최고 높은 수준이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청동을 부어 제조한 비파형 단검들도 있는데 이는 주조기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청동기가 대량생산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동합금기술도 세계 최상수준이었음을 나타내는 유물들도 발견되는데 청동거울과 마구류, 수레의 부속품 등이 그것이다. 특히 청동거울은 동과 주석의 배합비율에서 주석을 많이 넣어 잘 비치도록 만들었으며, 단검 등을 강하고 예리하게 만들었다.

또한 주석의 배합비율을 낮추어 수레 부속품과 마구류 등은 불그스레한 빛이 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주석은 낮은 온도에서 증발하므로 뛰어난 주조기술을 요하는데 주석과 동의 합금구조는 단군조선의 영역권에서만 발견된다) 이 중 청동거울은 앞면을 윤이 나게 하였으며 뒷면은 가장자리에 테를 두르고 그 안에는 잔줄로 선명한 무뉘들을 새겨 넣었는데 이는 당시 청동 주조기술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며 특히 이등변 삼각형과 평행선같은 무뉘 그리고 원 안에서 사각형을 반복 전개한 정교한 무늬 등은 당시의 기하학적 도안법의 수준높은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배달국시대 치우씨로부터 시작된 청동제조기술에서 발전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청동기 문화의 발전뿐 아니라 단군조선에서는 단기 1850년경(서양 기원전 5세기) 이후 제철기술도 발전하였다. 요동반도, 요녕성 무순시, 평안북도 연변군 등의 유적에서 발굴되는 괭이, 도끼, 낫 등 생산도구와 무기류 등의 철로 된 유물 등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의 쇠는 탄소함 유량이 0.7%에 이르는 탄소 공구강에 해당하는 강철로 당시 제철기술에서 탄소 함유량을 조절할 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며 열처리 가공도 하였음이 밝혀 지고 있다.

단군조선 사회에서는 청동기, 철기문화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그에 기초한 농업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천문 기상관측의 발전도 이룩되었다. '별의 움직임을 보고 그해 농사의 흉풍을 미리 예견하였다'는 기록이나 천체를 관측하던 참성단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러한 천문과학적 지식에 의거하여 달력을 만들어 썼으며 절기에 맞게 농사도 지었다. 세계 천문학은 한반도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들이 증명하듯이 그 시원지가 해머리땅이며, 만주로 이주한 마고한국인들에 의해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단군조선에서의 천문학 발전은 이후 삼국시대로 이어져 비약적 발전을 낳았다. 삼국은 모두 천문을 맡는 관리가 있어 일식, 항성, 유성, 혜성 등의 운동을 관측했으며, 고구려에서는 북극 중심의 투영법으로 1467개의 별을 282개의 별자리에 묶어 정확히 제자리에 표시한 천상열차분야 지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항성표였으며, 백제는 1년을 365.2487일, 1달을 29.5308일로 계산하였고, 신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첨성대를 만들었다. 삼국에서 이룩된 이러한 천문학의 발전은 단군조선으로부터 계승된 천문학의 성과들에 토대하여 진행된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광대한 영토와 높은 문화수준으로 지금의 아시아 전역을 개화시키고 지도하며 사회발전을 영도한 홍익제국이었다.

단군조선을 배신하고 독립한 주나라 침략과 진.한의 동방진출

 

지나족들은 황하상류에 해당하는 지금의 지나 서방과 남방에서 기원하여 성장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단군조선이 형성되던 요왕 때 뿐 아니라 이후의 하나라 때 까지도 독자적인 민족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숱한 부족집단이나 부족국가가 산재하여 생활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으며 독자의 통일된 생활문화를 형성하지 못했으므로 단군조선의 사상과 정치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는 황하지역의 앙소문화로 나타나는 이들의 문화가 지금의 지나 동쪽 및 만주지역 일대에서 형성된 백두조선족의 흑도문화에 훨씬 뒤떨어지는 데서도 증명된다. 또한 지나문헌에도 자신들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삼황오제 및 하나라, 은나라의 역대 임금은 모두 배달조선족이거나, 조선족이 전수해 준 치수방법과 통치술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산해경]에서 "3황5제는 숙신(만주)에서 모셔 왔다."고 기록할 정도이니 명백히 3황5제는 고대 한국인들이다.

뿐만아니라 배달조선족은 삼황오제 때에는 이들에게 그물로 새나 고기를 잡는 법, 배를 만드는 법, 수레를 만드는 법, 문화와 음악 등을 가르쳤으며 단군조선 건국 이후에는 부루태자를 보내어 하나라에 치수법과 정치규범인 홍범9주을 전수해 주었다. 이처럼 우리 배달조선민족은 무력으로써가 아니라 훌륭한 사상과 정치이념, 문화와 기술로 황하지역의 지나종족들을 지도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지금의 지나 서남부에서 건국된 주나라가 단군조선의 지원에 힘입어 단군조선의 사상과 이념을 배반하여 폭악한 정치를 했던 은나라 주왕실을 제압하며 한족(漢族) 통일의 단초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주나라도 단군조선을 배신하고 난하지역까지 침력하는 등 끊임없는 동진정책을 강행하여 단군조선의 영향력에서 벗어 나려고 하였으나, 결국 천여리를 넘지 못하는 작은 나라에 그쳤다. 이들은 결국 난하이남의 단군조선의 작은 제후국들을 제압했지만, 단군조선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던바, 정치규범 및 제도를 계속하여 배워 가야만 했다.

주나라 이후 춘추시대의 진, 오, 월,연.제 등의 나라들은 서로가 다른 족으로 취급했을뿐 아니라 그 내부에는 조선족의 강력한 영향이 있음으로 해서 지배세력에 의한 국가지배 체제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단군조선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진나라, 한나라 이후 강력한 통일제국을 형성하여, 주변의 단군조선의 작은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이들이 단군조선과 연계하여 다시 공격할까 두려워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들은 단군조선의 사상과 역사를 지워 버리려고 노력하였는 바 패권강화와 대치되는 서적류를 우선하여 한국의 줄기인 일본이 역사열등감에서 한국의 고서들을 수집하여 불태우고 폐기했듯이 '분서갱유'로 소멸시켰으며 수 많은 조선인들과 460여 학자들을 생매장하였던 것이다. 열등감에 사로 잡히는 나라와 민족과 권력이면 언제든지 벌일 수 있는 작태인 것이다.

결국 지나족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조선민족의 사상과 문화를 전수받고 정치적 지도를 받으며 발전해 가다가 단군조선보다 2천년 늦은 진, 한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지배세력에 의한 화하족 중심의 통일국가와 민족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지나(진).한족하는 용어들이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나당국에 의해서 단기 4288년(서양기원 1955년) 지나통사를 재서술한 '범문란'도 "중국은 진, 한 이후에야 국가분열시대의 민족체를 벗어나, 통일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일찍부터 다른 독특한 민족으로 형성되어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시기는 하, 은, 주까지 계속되던 단군조선의 영향과 지도력을 부정하고, 무력으로 주변의 단군조선 제후국을 병합시켜가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지배역사를 전파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진, 한 이후의 통일은 무력에 의한 정복과 병합으로 엄격한 의미의 통일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로 해서 진, 한 이후 지나사상은 계급지배를 강화하고 군권(君權)을 강화하는 내용뿐이었다.

단군3조선 연방의 붕괴와 분열, 진조선(부여)에서 나온 고구려.백제의 단군조선 회복전쟁

광대한 지역에 걸쳐 대통일 홍익제국을 형성하고 찬란한 자주문화를 꽃피우며 번영했던 단군조선은 주나라 이후 번조선 지역인 서쪽변방에서 발호한 지나족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화되고 국가의 통일성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주나라 때부터 형성된 지배세력은 이후 한나라 때까지 동진정책을 취하여 끊임없이 단군조선에 침입하여 왔다. 단군조선은 이들한나라의 침입을 막는 전쟁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난하 동쪽의 번조선 영토를 상실당하였으며, 홍익주의적 질서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민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고, 홍익주의적 정치와 경제제도도 혼란스러워졌으며, 고열가 단군천제의 권위와 지도력 역시 점차 약화되었다. 또한 사회 내부에서는 지배세력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전쟁에 지친 인민들은 단군조선의 각 제후국 중심으로 자치촌, 자치계 등을 수립하여 스스로의 자치를 도모하는 등 사회내부의 분열이 심화되어 가게 되었다.

 

번조선 지역은 상실하고 번조선의 마지막 단군 기준세력은 궁인들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 마조선 남한지역에 3한 체제를 만들어 한왕이라 칭했다. 마조선 북한지역에는 번조선의 유민들이 최씨 낙랑국.대방국.옥저.예.맥 국가들을 세워 마조선 전체가 분할되고 말았다. 진조선 지역은 해모수와 고두막으로 이어진 부여가 고추모의 고구려에 의해 통합되면서 고구려 중심지역이 되었다. 고추모는 고열가 단군천제의 친척인 해모수의 직계후손으로 단군조선을 회복해야 겠다는 다물을 국시를 삼고 압록강지역인 환인을 도읍지로 삼고 주변지역을 통합해 나갔다.

 

고두막이 도읍지를 환인지역으로 정했기 때문에 옛 부여의 도읍지인 길림지역에도 부여세력이 부여를 자처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그 부여왕의 아들 구태가 마조선 남한지역에 백제을 개국하고 기준세력이 만든 남3한을 통합하여 고구려를 대적하는 숙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만주의 패권을 노리는 동부여(고두막에게 굴복하고 단군직을 양위한 부여4대 해부루 단군이 연해주에 세운 나라)를 제압하고 북옥저와 동옥저.최리 낙랑국.대방국을 모두 통합한 후 만주의 주인이 되어 요하를 건너 번조선 회복에 나서게 되는 것이고,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배달단군조선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부여의 주인을 자처하는 백제 또한 마조선의 해상세력(해=왜)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면서 지나동해안.일본열도.동남아지역까지 차지하는 해상강국으로 성장하며 고구려와 자웅을 겨루게 된다. 근초고.근구수.동성대왕 시대에는 동아시아 해상강국으로써의 전성기를 누렸다. 진조선(부여)에서 나온 두 봉황의 싸움이였던 셈이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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