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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자와 민족사학자가 다른 점

설레임의 하루 2012. 3. 7. 03:52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한얼원 2006.08.05.  http://cafe.daum.net/dobulwonin/HCF2/6 

 

 

식민사학자와 민족사학자가 다른 점

 

식민사학자들은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에게 충성하며, 모두 다 죽을 때까지 명예와 부귀를 누린 반면 민족사학자는

하나같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모두 다 처참하게 참살되어 조국에 목숨을 바쳤다.


1.식민사학자.

자신을 낳아 길러준 조국을 배신하고, 민족혼을 말살하여 조국이 일찍 멸망시키는 일에 심혈을 쏟아 무수한 위서(僞書)를

저작하여 철저히 위장(僞裝)했다. 

오직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평생 일본왕에게 신명을 다 바쳐 충성한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희대

(稀代)의 사기꾼들이며, 죽을 때까지 명예와 부귀영화를 누린자들을 말한다.

그 대표적 인물은 이병도, 신석호, 홍희 등이 있다.


특히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세계 인류의 부모국이며, 종교 원천국의 우리역사를 말살하고. 세계 인류의 문명을 주도한

종주국의 우리나라를 문명이 제일 늦은 열등한 민족으로 변조하고, 동방예의지국의 성군(聖君)을 무능한 조상으로 둔갑하여,

철저히 폄하(貶下) 조작하고, 역대 제왕들의 허물을 과장해서 청소년들이 조상님을 멸시하도록 변조했습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저작(著作)은 다 위서(僞書)입니다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삼한:진한, 마한, 변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3국(신라, 백제, 가야국)을“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한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을 철저히 말살하여, 대한민국이 일찍 망하는 일에 온갖 심혈을 쏟아 죽을 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한 충견

(忠犬)이었습니다. 지략(智略)이 뛰어난 이병도는 자신이 말살, 변조, 조작하여 유린한 범행이 들통 날까 항상 두려워하며,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청소년들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도록 유인(誘引) 술책으로 일생동안 무수한 위작(僞作)을 저술하여 철저히

위장(僞裝)했습니다.


그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한국사(중세편), 고려시대 연구, 국사와 지도이념》등은 대표적 위작입니다.

조국을 배반하고 일생 동안 조국이 일찍 망하는 일에 온갖 심혈을 쏟았으나 지략(智略)과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뛰어난 이병도는

국사학계의 대부로서 서울대학 사학과 교수 문교부장관등을 역임한 그에게 감히 누구도 그의 僞作에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총칼로 나라를 침탈하고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민족혼을 말살하여 대한민국이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해 일생을 일왕에게

신명을 바친 세계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稀代(희대)의 범죄적 사기(詐欺)꾼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고 이병도는 민족혼을 말살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범죄보다 민족혼을 말살하여 대한민국을

영원히 멸망시키려 했던 이병도의 범죄는 이미 죽고 없으나 7천만 국민의 이름으로 반드시 처단해야 유린된 민족혼이 다시 살아나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웅비할 것입니다.


2. 민족사학자

식민사학자들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린 반면, 민족사학자는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민족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하고자 분투하며, 역사서를 저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모두 다 일본 밀정에 붙잡혀 처참히 참살되어 조국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

그 대표적 선각자로 계연수, 신채호, 박은식 등이 있습니다.


1, 계연수 선생은 일제에 맞서 “환단고기”를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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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3월 16일 대한자강회의 李沂(이기) 선생은 계연수,김효운, 이정보 등과 함께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 일제가

말살한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 회복을 위해 “ 단학회 ”를 조직하였다.

李沂(이기) 선생은 단학회 발기총회를 앞두고 한일합방의 국치에 비분을 참지 못하여 서울의 모 여관에서 단식 중에 7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기 선생이 단식 끝에 운명하시자 1910년 10월 3일 계연수 선생이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을 마치고, 2대 단학회

회장이 취임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대한제국의 모든 백성들은 희망도 없이 암울한 슬픔에 잠겨있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단군조선의 역사 말살에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계연수 선생은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민족역사(민족정기)로부터 시작되고 오직 단군사상을 회복하는 것 만이 우리민족의 살길임을

직시하고 일제가 말살한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를 한 대 묶어 “桓檀古記(환단고기)를 편집했다.


1911년 단학회 회장 계연수 선생은 곧바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선생 등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일제가 말살한

삼성(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 “ 환단고기 ” 30권을 편찬하였다.

30권의 환단고기는 대부분 일제에 압수당해 불태워 졌고 몇 권은 독립운동가 안창호 신채호 등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신채호는 장차 우리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1910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국에 망명해 있었다.


1914년 단학회 계연수 회장은 5,6명과 함께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하고 남만주 관전현 홍석납자로 옮겨가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과 연계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계연수 선생이 편찬한 환단고기는 단군 조선 삼한의 역사를 말살하려던 일본제국의 흉계에 큰 위협 요소가 되었다.


1923년 계연수 선생은 결국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인 밀정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나라를 강탈한 일본인들은 한민족의 석각자 계연수 선생을 무참히 참살한 뒤 머리와 사지를 절단한 후 머리는 대동강물에 던지고

몸통과 사지는 압록 강물에 버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아...! 7천만 한겨레여.....!

가슴이 찢어 질 듯 통한의 눈물이 핑 돌지 않는가?

만약에 한민족의 선각자 계연수 선생께서 한민족의 국보적 정통 사서의 [환단고기]를 저술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력화

시킬 수 없고,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이 영원히 감춰 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애국가와 같이 하느님이 우리나라를 보호하지 않고서야 어찌 [환단고기]가 전해 질수 있었겠는가?

지금 계연수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다 함께 묵념합시다...!


계연수 선생의 서거 이후 단학회는 독립군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이 단학회를 계승하였으나 이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역시 일본 밀정에 붙잡혀 살해되었다.

다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과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장군에게 단학회가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 역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단학회도 침체되고 환단고기도 유실되었다.

당시 단군교는 대한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1900년에 羅鐵(나철)은 단군교를 창설하였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조상신을 숭배하는 민족 종교의 단군교가 창설되자 국민들의 큰 관심 속에 당시 신도 수는 약 2백만

명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한 민족의 구심점으로 등장하여, 대한 독립운동가 들의 활동발판이 되었다.

일본은 급기야 단군교 말살 정책으로 전환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저명한 인사들은 피살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


 

2, 신채호는 일제의 역사 왜곡 철폐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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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며, 또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ꡒ매일신문ꡓ의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처음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을 갖고 있었으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면서부터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1910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초대총독으로 취임하자 신채호는 장차 우리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자

1910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과 중국으로 망명해 윤세복(尹世復)․이동휘(李東輝)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부회장으로

일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본국에서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우리나라 고조선 삼한에

대한 역사를 말살하는 일제의 만행에 맞서 조선상고문화사, ꡒ조선상고사와 ꡒ조선사연구초등의 역사서를 저술해 냈다.


1924년, 25년경 중국의 망명지에서 쓴 [조선 상고사]는 1931년 6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14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조선사'는 총 102회에 연재되었고(10월 14일까지), 이어서 '1, 조선상고문화사'가 두 번으로 나뉘어(1931년 10월 15일 ~

 12월 3일, 39회;1932년 5월 27일 ~ 5월 31일, 4회) 같은 신문에 총 43회분이 연재되었다.


ꡒ조선상고문화사에서 신채호는 한사군에 의해 멸망한 위씨국(衛氏國․위만조선)의 강역을 요동반도로 비정(比定)하여 그간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정설로 통하던 패수=대동강, 왕검성=평양설을 완강히 부정했다.

당시 신채호의 연재는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군(眞番郡)의 한사군(漢四郡)을 한반도 내에 설치하고 漢武帝

(한무제)가 조선 땅을 다스렸다. 라고 주장하던 일제의 앞잡이 이병도의 논리에 큰 타격을 가한 연재이었다.


1925년경 동아일보에 게재된 [전후 삼한고]는 전 삼한과 후 삼한으로 나누어 논증하였다.

전 삼한은 곧 조선의 삼한 마한,진한,변한이며 후 삼한은 곧 고구려, 백제,신라(가야)라 하였다.

단재는 이두의 해석 방법을 이용, 조선 삼한의 범위를 요동일대에 비정하고 마한 50여국과 변진 24개국의 위치를 비정(比定)하고

이두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각종 전적에 대한 사료와 언어․풍속의 연구 등을 제시하며, 일제의 칙명을 받고 자신의 조국에 민족

반역 행위를 일삼던 이병도의 왜곡된 역사관을 비판하고 일제의 만행과 투쟁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조선역사상 일천 년래 제 일대사건]의 글에서 단재는 묘청이 일으킨 서경전역의 이면에는 낭,불,유

(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으며, 이는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하여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삼국사기'를 그 산물로 보았다.


또한 이 논문에서 김부식의 사대주의적인 중화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 논문의 서론에서 ꡐ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흥망성쇠를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 것이며, 역사를 버리는 민족은 자기 나라를 애국하는 관념도 없어질 것이다.

아, 역사가의 책임이 이토록 무겁구나 라며 한민족의 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분투하였다.


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흉악한 역적이라고 비판한 사론을 보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어리석음

때문이라며 [연개소문은 우리 4,000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라고 주장한 데서 김부식의 사대사상을 혹독하게

비판했던 사실이 잘 드러난다.


1910년대 후반에 저술한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 문화사]는 1931년 당시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그 내용은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며 전후 삼한설의 주장은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우리나라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이와 병행하여 현장 확인, 문헌수집, 유물 발굴 및 실증적 방법의 적용 등으로 당시 일제학자들과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주장하던

한4군(漢四郡)의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무력화시켰다.


단재는 전후 삼한설에서 한4군(漢四郡)의 한반도 외의 존재 설을 주장하고 우리의 상고문화는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고 일제의 식민지상황에서 남의 나라 역사왜곡을 철폐하라고 각 신문에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당시 일제식미지 하에서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학설과 대립하며 반론을 통절이 공박했으나 신채호는 결국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살인적인 고문과 병마에도 불구하고 일체 타협을 불허하며 마지막 순간에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이국 땅 여순

감옥에서 1936년에 순국함으로써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단재 신채호에 앞서 당시 민족주의사학의 대표 박은식(1859-1925)은 1915 《한국통사韓國痛史》,1920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와 1919 《한일관계사료》4권과 국권회복 투쟁사와, 1930년대 후반 안국선(安國善)의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김병조

(金秉祚)의 《한국독립운동사략》,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최현배(崔鉉培)의 《조선민족 갱생의 도》, 배성룡(裵成龍)

의 《조선경제론》 등이 항일 민족정신을 크게 고취하여 독립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일제는 모든 출판물에 대한

사전검열제도를 확립하고 이미 출판된 모든 사서는 금서로 지정하고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게 된다.

따라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된 단재 신채호의 글은 일제의 사전검열을 마치고 연재되었기 때문에 신채호가 저술한 본문과는

그 내용이 다르게 연재되었으리라 사료된다.


다음의 글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檀奇古史(단기고사)를 얻게 된 경위이다.

임자년에 내가 安東縣(안동현)에 이르렀을 때 뜻을 같이한 華史(화사) 李觀求(이관구) 동지가 한 권의 古史(고사)를 가지고 와서

장차 출간할 마음으로 나에게 서문을 써줄 것을 청하였다.


檀奇古史(단기고사)의 책을 받아 읽어보니 渤海(발해)의 盤安郡王(반안군왕) 野勃(야발)이 편찬한 것을 발해의 大文人(대문인)

황조복이 다시 발간한 책이었다. 책 모양은 비록 오래되어 헐었으나 眞本(진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유래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文人(문인) 柳應斗(유응두)는 고금의 역사에 능통하고 지식이 많은 碩學(석학)인데 일찍이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서점에 들어가 檀奇古史(단기고사)를 읽어보고 천금을 얻은 것과 같이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곧 檀奇古史를 사 가지고 門下(문하) 庸菴(용암) 李允珪(이윤규)등에게 장차 출간 할 예정이니 수십 권을 베껴 쓰게 하였다.


오호라!

나 또한 생각하기를 檀奇(단기) 2000년의 역사가 반듯이 실사가 있을 터인데 아직 상고할 데가 없는 것은 여러 번 병화를 겪으면서

역사를 보존하지 못하였기 때문 이였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밝은 하늘은 진실로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 함으로 柳氏(유씨)로

하여금 이 원본을 얻어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도다.


유씨가 가지고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평생에 갈망하던 열성 중에서 얻어온 것이므로 누가 기쁘게 읽지 않으며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전하지 않겠는가?

실로 우리 檀奇(단기) 2000년의 역사가 다시 이 세상에 밝혀지게 됨은 이름과 같이 참으로 천고의 기이한 일이로다.


原著(원저) 주인공 野勃(야발)선생은 13년이란 성상을 노력하여 친히 古蹟(고적)을 박람하며 모든 역사를 참고하여 精選(

정선)하여 편찬하시고 그 백여 년 후에 발해의 大文人 黃祚福(황조복)이 다시 펴내어 세상에 널리 전하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 두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공은 대단히 크며 이것을 다시 전하는 일에 관여한 柳,李(유,이) 두 분의 공도 또한 적지

않다. 하겠다.


아...! 실로

大野勃(대야발) 皇祚福(황조복) 선생은 마음과 붓으로서 국가를 위하여 腦力(뇌력)과 血誠(혈성)을 다한 참 애국자요 柳,李(유,이)

두 분도 심력과 필력으로서 애국하기에 정성을 다한 분이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계속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펼치면 역시 만고에 없어지지 않을 공이 되리로다. 丹齊(단제) 申采浩(신채호) 識


申采浩(신채호:188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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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언론인이며 사학자로서 충남 대덕에서 출생하여 20여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을 지냄.

일본의 침략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혁명선언문을 발표하고 사대주의 통박과 민족사관을 고취하여 일본의 역사왜곡과 맞서

<조선상고사,독사신론>등 저서를 발표하여 민족사학에 큰 행적을 남겼다.


특히 중국에 망명해 있으면서 국내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많은 기고를 하였으며 북경의 권위지 중화보 북경일보에 기재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논설은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華史(화사) 李觀求(이관구) 선생과는 친구사이로 1912년 만주 안동에서 이 책을 출간하려고 하였다.

李觀求(이관구:1885-1952) 선생의 자는 明叔(명숙) 호는 華史(화사) 황해도 송화 태생으로 牧隱(목은) 李穡(이색)의

20세손이며 檀奇古史(단기고사)를 중국에서 찾은 柳應斗(유응두)의 제자인 庸菴(용암) 李允求(이윤구)의 아들이다.


대성학교를 거쳐 숭실학교 재학시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신채호 이동영 등과 함께 상해에서 同濟社(동제사)를 조직하여

비밀결사활동을 하였으며 이시영과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성곽규 조선환에게 총독 암살지령을 내려 1918년 왜헌에 체포되어 10년

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건국협진회를 조직하고 사학연구회도 설립하였다.

1949년에 아버지 李允求(이윤구)로 부터 물려받아 한문으로 된 檀奇古史(단기고사)를 金斗和(김두화)와 함께 국문으로 번역하여

출간하고 피난지인 전북 옥구에서 1952년에 세상을 떠났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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