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낙랑/말갈/대방으로 본 위례성의 위치
온조 13년(ad 6년) 2월 왕모(소서노)가 61세의 나이로 죽고, 5월 온조대왕은 신하들에게 “동으로 낙랑이 있고 북으로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었는데, (중략)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한 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하략)”
라고 말한다.
(소서노의 죽은 나이 61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고구려의 건국년도와 함께 언급할 예정입니다.)
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할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浿河), 남으로 웅천(熊川),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을 한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위 낙랑은 최씨의 낙랑국(한반도+만주)이 아니라 한사군 낙랑으로 보아야 한다.
▲ 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안에 모든 것을 잡아 넣어 서부산악지대에만 있었던 중국은 어부지리로 역사 강역을 넓혔다. 이걸 아직도 청소년들에게 교육하고 있는 이나라 식민사학계는 매국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 |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고, 북쪽엔 말갈이 있었다고 온조는 말하고 있다.
이 낙랑군의 위치를 밝히면 백제의 위치가 저절로 밝혀진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낙랑군이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한다.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으니 백제는 그 잘난 후손들 때문에 황해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다.(?)
낙랑의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려면 장문이라 사진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백제와 낙랑의 기록을 보면 고이왕 13년(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니 백제 고이왕이 낙랑을 습격한
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군의 위치사진을 보면 이 기록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한반도 서부에 있었다면 어떻게 백제가 낙랑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즉 낙랑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 25사>에 백제는 대방의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럼 대방은 어디인가?
대방은 백제 패망 후 당과 신라의 전투에서 보듯이 석문(石門)과 접한 곳이다. 9대 책계왕의 기록에 보면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에서 우리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대방은 우리와 장인 사위의 관계이니 그 청을 듣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즉 대방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 백제의 건국지인 대방은 위 지도의 낙랑군 (산서성 원곡 일대)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 |
초기 백제와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초기 백제가 서울 근처에 있었으면 말갈은 황해도 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과서에 따르면 그 곳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닌가? 도대체 말갈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온조왕 2년 왕이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있고 (생략) 막고 지킬 계획을 마련하라”라고 말한다.
그 후로도 말갈과의 전투 기록이 많다. 그래서 온조왕이 말갈을 피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그런 말갈의 위치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기록이 있다.
“5대 초고왕 49년(214년) 북부(北部)의 진과에게 명하여 군사 천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석문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방과 접해 있는 곳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신라와 당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마한으로 본 백제의 둘째 도읍지
온조왕 24년(ad 6) 왕이 남쪽 경계인 웅천에 울짱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당초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00리 땅을 갈라주어 안정케 하였소.(이하생략)”라고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3년 후인 온조 27년 마한이 결국 백제에 복속된다. 이로서 마한은 백제 남쪽 경계인 웅천의 서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번조선의 왕인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하해 한(삼한)의 왕이 된다는 위치와도 일치한다. 그 삼한의 하나가 마한이다.
마한은 한수 남쪽에 백제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이다.
참고로 <후한서>에서 기준이 세운 한(韓)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모두 옛날 진국이다.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皆故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해)로 달려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
위 내용 중 식민사학계는 走入海(주입해)의 해석을 ‘바다로 뛰어 들어 자살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走入海는 ‘바다로 뛰어 들어가’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으로 들어가서’로 해석해야 한다.
走란 글자는 ‘뛰다’ ‘달리다’의 뜻도 있지만 그냥 ‘가다’라는 뜻도 있다.
중국인들이 잘 쓰는 走吧의 뜻은 ‘가자’ “let's go'의 뜻이다.
또 海라는 지명은 현 산동성 동남부와 강소성 북부가 만나는 지역 일대에 있다.
한문 실력 없는(?) 식민사학계는 海자만 보이면 전부 바다로만 해석해 전혀 엉뚱한 역사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역사를 도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둘째 도읍지의 지리적 조건
여하튼 온조는 두 번째 도읍지에서 나라를 다스린다.
식민사학계는 이곳을 서울로 비정하고는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보고, 북쪽 패하를 예성강으로, 남쪽 웅천을 안성으로, 동쪽
주양을 춘천으로 비정하였다.
백제를 한반도 서부로 비정하는 결정적 근거로 백제의 서쪽 대해(大海)를 황해로 본 것이다.
대해가 황해인지는 잠시 후에 한꺼번에 알아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온조의 최초 도읍지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는 당시 말을 타고 당일치기가 가능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두 군데 다 한수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례성은 북대한수(北帶漢水)이니 분명 한수의 남쪽이다. 그리고 온조는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고는 그리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데 온조는 한수의 남쪽에서 왜 굳이 한수의 남쪽을 순시했다고 말했을까?
두 기록 중 어느 하나는 거짓이던가 아니면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어야 삼국사기의 이 기록이 맞는 것이다.
두 기록 중 어느 하나가 거짓이라면 아무래도 북대한수(北帶漢水)가 수상하다.
<한단고기>에는 분명 남지대수(南至帶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다면, 온조는 (북)한수의 남쪽인 위례성에서 (남)한수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도읍지가 더 남쪽이라는 근거는 북으로 말갈이 침략하니 남쪽으로 도읍을 옮겨야겠다고 온조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해 보았다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
즉 한수가 양쪽으로 갈라진 그 중간의 큰 섬과 같은 곳에 백제가 위치해야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 것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한강의 여의도처럼 남과 북 위.아래로 한수가 흐르는 곳이어야 한다.
굳이 여의도로 표현을 하자면 한강 남쪽의 여의도에서 한강 남쪽인 영등포로 도읍을 옮겼고, 그런 여의도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고
그 너머에 낙랑군이 있어야 한다.
즉 섬처럼 보이면서 여의도 같은 작은 섬이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육지여야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먼저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서울의 한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사학계가 비정한 한수는 서울의 한강이다.
그런데 한강은 강줄기가 둘로 갈라지지 않아 이 조건에 안 맞고, 동쪽 끝은 주양(東極走壤)으로 비정한 춘천 동북쪽에 낙랑군이
있어야 하는데 낙랑군은 대동강 평양으로 정북쪽에 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러므로 식민사학계의 백제 도읍지 비정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차라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북한강의 남쪽을 위례성으로, 남한강의 남쪽을 한성이라 했으면 이 조건에 일단은
맞는다. 그러나 양수리도 낙랑군이 춘천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북쪽인 대동강 평양에 있다고 했으므로 역시 조건이 안 맞는다.
그리고 한강은 대부분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한줄기인 한강의 하류가 상황에 따라 절대로 둘로 갈라질 수가 없다.
그러니 “2,000년 전 백제 때 한강 하류는 두 줄기 이었다”라고 우길 수도 없다.
결국 여러 조건으로 보아 서울은 백제의 도읍지가 아닌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미 필자는 4부에 걸쳐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의 위치에 대해 기고한 적이 있다.
백제는 위례성-->한성(?)-->한산-->웅진-->사비로 천도를 했다.
웅진과 사비에 대해서는 백제 패망 전쟁 기록을 통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밝혔다.
이번에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과 한성(?)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백제 도읍지의 실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필자가 백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자 식민사학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네티즌들이 서조대해(西阻大海)를 핑계로 중국의
서쪽엔 바다가 없고 멀리가면 지중해라고 하면서 한반도의 서쪽에 대해 즉 황해가 있어 백제는 한반도에 있었다는 코미디 같은
항의성 댓글을 단 적이 있어 필자를 크게 웃긴 적이 있다. 일소일소(一笑一少)라 고맙기는 했다.
한국과 같이 작은 땅에서야 한반도 전체를 놓고 지형을 따지지만 광활한 중국 대륙은 그렇지 않다.
각자 나라의 중심에서 동서남북의 중요한 지형을 자기네 영토라고 기록에 적는 것이다.
백제를 산동성에 놓고 보면 <삼국사기>의 동서남북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
서조대해(西阻大海)의 대해(大海)를 바다로만 해석하면 위와 같은 코미디가 생기는 것이다.
해(海)는 바다 뿐만 아니라, 황하나 양자강과 같이 큰 강, 대야택이나 동정호와 같은 큰 호수, 동부 평원과 같은 대평원 등을 모두
바다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한족들은 대대로 우리 조상인 동이족에게 밀려 서부 산악지대에만 살았던 산적들이기 때문에 바다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해(海)라는 지명도 있다.
백제의 도성은 동.서 두 군데
백제는 동.서 두 군데에 도성이 있다고 했다.
혹자는 동도(東都)는 한반도에 있고, 서도(西都)는 대륙이라고 한다.
물론 22담로를 설치한 해양대제국 백제가 한반도에 아무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담로 형태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는 분명 대륙에 있었고 주무대는 하남성과 산동성인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렇게 본다.
동도는 산동성에 있었고, 서도는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湖南省)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중국장수전전 흑치상지편에 나오는 백강은 현 상강(湘江)으로 호남성 기양이라는 곳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전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된 중국장수들의 기록을 보면 전투지가 호남성 동정호 부근으로 추정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
▲ 중국 장수전전의 기록에는 백제/왜의 연합군과 당나라와의 전투가 벌어진 백강(현 상강)을 호남성
기양으로 말하고 있다.
흑치상지의 고향은 광서 장족자치구 백제향이니 백제는 호남성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 당항성을 빼앗은 지도와 연계해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 |
백제 의자왕이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끊은 것도 산동성 백제와 호남성 백제와의 육로 개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이론은 아직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온조대왕에 의해 건국된 백제의 위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하늘에 천제를 지내던 나라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에 보면 채부원구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봄 사중월(2월.5월.8월.11월)에 왕이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께
제사지낸다.”고기에는 “온조왕 20년 봄 2월 (원구)단을 쌓아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태종 이세민이 백제 무왕이 승하하자 상복입고 곡하고 있는 장면 | |
중국 25사를 종합 검토해 보아도 백제는 고구려 못지않은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백제를 고구려보다 더 강한 나라로 표기한 기록이 여럿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641년 백제 30대 무왕(의자왕의 부왕)이 승하하자 당태종 이세민이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 <구당서>와 <만주원류고>에 전한다.
<구당서 권199상>에 보면 (十五年璋卒其子義慈遺使奉表告哀太宗素服哭之
贈光祿大夫賻物二百叚遺使冊命義慈爲柱國封帶方郡王百濟王)
<삼국사기>에는 당태종이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렸다고 되어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당시 당나라는 백제의 제후국이며 백제는 당나라의 부모국이었던 것이다.
근세조선시대 세종대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자신은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1일간이나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당시엔 입장이 반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
시 백제는 당나라를 신하국으로 두고 있었음이 분명한 기록인 것이다.
지금까지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과 둘째 도읍지를 서울 하남으로 국민들에게 교육하고, 공주를
웅진으로, 부여를 사비로 교과서에 실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교육한 매국식민사학계(민족반역자
이병도의 후학들)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건 민족정신을 썩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거짓으로 조작한 식민사학을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의 진실인양 국민들에게
말하고 있는 사학계는 이젠 매국노란 소릴 들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은 점차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썩어빠진 이 나라 식민사학계와 정부는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중국/일본과 역사 전쟁을 하려면 역사의 진실을 가지고 싸워야 하거늘 매국 식민사학계는 자기들의 자리지킴 때문에 그런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사학계가 역사의 진실에 대해 침묵하니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을 수 밖에 없고, 또 정부는 외교 문제가 된다는 한심한 논리로
동북공정에 손을 놓고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다.
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잘 되리라 보는가!!!!
지금의 식민사학계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역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역사를 바꾸려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단군은 신화로 되어 있으며, 삼국은 한반도에 갇혀 있다. 고려의 만주 영토는 다 어디로 갔는가?
구한말 잃은 간도 땅은 아예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사학은 다른 인문학과 달라 국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들 국익을 포기하지 말기 바란다.
*** 부록 ***
필자가 백제 패망지에 대한 연재를 계속하자 두 네티즌이 아주 흥미있는 자료를 보내주었다.
다음은 필명 심제(心濟) 선생이 제공한 글이다.
(인용) 산동성에 있는 백마하를 따라가 보니,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수도라고 전해지는 임치(臨淄 사실 제나라는 전국시대에
산동에 이르지도 않았다 )와 8세기 고구려 유장 이정기의 제(齊)나라 수도 운주와는 관련이 없는 곳에서 백마하 주위에 산재하는
몇 개의 고성( 古城)이라는 지명과 백마창(白馬廠)이 있으며 그 중심부에 제왕성(齊王城)이 위치한 지도를 발견했다.
▲ 상단에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에 바로 옆에 제왕성(齊王城)이라는 지명이 있다.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 |
특이한 것은 분명히 위의 두 제(齊)와 상관이 없는 지역에서 백제의 의미인 제(濟)에서 삼수변을 떼어버린 제왕성<齊王城> 이라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은 미군군사지도에도 백마하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실수인지 의도적인지 이 지도에는 馬河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의도적이지 않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지역이 춘추전국시대의 제, 이정기의 제나라 지역이 아니라면 제왕성이라 표기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百濟 수도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인용 끝)
▲ 우측 상단 곡부 우측에 제왕성이 보인다.
청색 사각형이 백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지명들이다. | |
게다가 친절하게 대청광여도에 당나라 소정방의 침투로를 그려 주었다.
소정방은 협주(莢州-->陜州로 지명 바뀜)를 출발해 황하를 타고 오다, 진공로2와 같이 회수(淮水)로 들어가 덕물도(위치 미상)에서
신라태자를 만나고, 회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독산호)에서 백마하를 타고 도성(사비성)으로 들어간 것으로 본 것이다.
▲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기습 침투로 2와 같이 낙양에서 황하를 타고오다 회수로 빠졌다가 하류에서 황하 쪽으로 가다 대야택으로 들어가 사수 또는 백마하를 탄 것으로 보인다. | |
따라서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남, 곡부, 비성 등에 백제 도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과 백마하
주변에 있는 제녕(濟寧)이란 도시도 백제와 관련된 도시로 보인다. 왜 유독 산동성에는 백제의 제(濟)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을까?
또 한 네티즌(필명 님의 침묵)은 곡부에서 찍은 성(城)의 사진을 몇 장 올리면서, 이것이 백제의 건축양식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참고로 독자들을 위해 맨 끝에 사진을 올려 드립니다.
그런데 사진 중 옥으로 만든 말과 장식물은 분명 중국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이의 문명인 홍산문화의 출토물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은 3황5제의 한 사람으로 동이족이었으며, 신라 김유신의 조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문화혁명 때 소호금천이 우리 동이족이라는 이유로 능을 파헤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인근에 있던 공자의 무덤은 멀쩡했다.
또 중국에 사는 교포 한의사 한 분은 필자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백제의 일백 백(百)자는 옛날에 ‘온’이라 했으며 시조 ‘온조’는 바로
백제를 의미한다고 했다. 다들 민족사를 바로 찾자는 취지로 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아직 있기 때문에 현재 매국식민사학자들의 썩어빠진 반도사관의 이론은 얼마 못 가 반드시
뒤집어질 것으로 본다.
▲ 산동성 곡부에 왜 성이 있을까? 성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 |
▲ 동이족의 성루 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사진.
서울의 숭례문 양식과 비슷한 곡선으로 치켜 올라가게 되어있다.
자고로 중국의 성루는 직선으로 천안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양식을 중국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
▲ 성의 지붕이 우리 것과 비슷하다.
연변에서 조선족과 한족 집의 구분은 곡선이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 |
▲ 이 누각의 지붕 양식도 중국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곡선 양식은 중국의 것이 아니다. | |
▲ 이 사진으로는 동이족의 건물인지 한족의 건물인지 구별이 어렵다 | |
▲ 동이족인 백제의 양식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성누각의 지붕.
숭례문과 비슷하지 않은가? | |
▲ 동이족으로 김유신의 조상인 소호금천의 능.
문화혁명 때 한족에 의해 파헤쳐 졌다. | |
▲ 동이족의 문명인 홍산문명의 출토물과 아주 닮은 옥마와 옥장식.
이게 한족의 유물이라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