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주에 있는 무녕왕릉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어 학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공주 무녕왕릉에 대한 의혹을 앵콜 칼럼으로 제기한다.
본 글은 장문이라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독살당한 무령왕은 백제 땅에 묻혔나?
(2부) 무령왕의 아버지(부왕)은 누구인가?
필자가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며 백제는 대륙에 있었다는 글을 계속 게재하자, 식민사관의 이론을 무조건 추종하는 무리들이 충남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을 근거로 내세우며 “네가 아무리 떠들어도 백제는 한반도에 수도가 있었다.
무령왕릉이 그 증거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무령왕릉이 있는 충남 공주가 과연 백제의 수도였는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현재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보면, 시조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도읍해 한성(서울)백제 시대를
열었으며,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자 아들인 문주왕이 남쪽인 웅진(熊津 공주)으로 천도했고, 26대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고치고 도읍을 사비(泗沘 부여)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식민사학계의 백제수도에 대한 지명 비정은 지금까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학계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망국의 식민반도사관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끝없는 애국심(?)에 힘입어 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인 한반도에 백제가 있었다고 하는 데 싫어할 국민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식민사학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사학계가 파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선량한 우리 국민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오히려 필자처럼 역사의 진실대로 백제의 주무대가 대륙 산동성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이유는 필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이 땅 한반도가 삼국의 주무대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가관인 것은 “백제가 중국에 있었다면, 백제인은 중국인 아닌가?
나는 중국인의 후손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국민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이 내세우는 “현재의 중국 땅에서 있었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다.”라는 논리와 같은 것으로
참으로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륙의 노른자인 동부평야지대를 호령했던 백제의 역사가 지금 그 땅이 중국 땅으로 바뀌었다고 중국의 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중국 땅은 우리 역사 강역의 일부다.”라는 개념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혈연 즉 조상을 찾아 그 나라가 활동했던 지역을 우리의 역사 강역으로 봐야지,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는 국가영토가
역사구분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에게 묻고 싶다. 만일 중국 땅의 반 이상이 미국 땅으로 된다면, 지금 중국(한족)의 역사는 땅 임자인 미국의 역사가 되느냐?
역사란 그 영토의 현 소유자의 것이 아니라, 당시 소유하고 있던 자의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동이족의 역사가 중국 한족의 역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의 기준에서 볼 것이 아니라 당시의 기준에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동이가 활동했던 지역은 역사적으로는 우리의 강역이다.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제기
▲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과 왕비의 금관 장신구. 왼쪽이 왕의 장신구 | |
무령왕은 백제의 25대 왕으로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왕이었다.
그런 위대한 왕의 무덤이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자 온 나라가
온통 흥분에 휩싸이고 들썩거렸다.
거기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며, 이중 국보가 12건에 이른다.
유물에는 지석, 석수,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몇 점의 부장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덤의 주인공과 연대가 뚜렷하게 새겨진 왕과 왕비의 지석
(誌石)이 출토되어 백제 역사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더구나 그
기록들이 <삼국사기>의 기록들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어 더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던 삼국시대 왕의 무덤이
기에 더욱 그러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와 신라의 왕릉은 어디에 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는 의자왕을 빼고는 왕릉위치에 대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 무덤이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을 더욱 정착시키는데 악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고분의 발견으로 충남 공주는 백제의 수도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며, 더불어 서울과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다는 이론(반도사관)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 무덤은 대륙백제론을 주장하는 민족사학자들의 이론을 반격하는 결정적인 유물적 증거로 맹활약(?)을 하게 된다.
역사의 진실인 삼국의 대륙존재론을 주장하는 민족사학자들 중 일부는 그 무덤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가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의혹들을 제기했으나 그것을 가짜로 확정지울 수 있는 결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무령왕릉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면
할수록 오히려 억지를 부리는 이단아로 취급받아 왔다.
그런데 최근에 무령왕의 죽음에 관련된 역사 기록이 나타나 눈길을 끌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전에 먼저 민족사학계가 주장했던 <공주에서 발굴된 사마왕(斯麻王)에 대한 지석(誌石) 연구>란 제목으로
무령왕릉에 대해 의혹 제기한 것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전에 참고로 두 민족사학자의 글을 간략하게 인용해 본다.
첫째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저자인 송종성선생의 글이다. “(중략) 이런 위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물증까지 위작해 넣어 놓은 것이
무령왕릉 지석인 것이다.
斯麻라는 이름은 8세기 초에 일본서기 저자들이 지은 이름인데 어찌하여 6세기 초의 무령왕릉에서 그것이 새겨진 지석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송선생은 무령왕릉이 한번도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발표되었으나, 발굴 시 무덤 내부가 엉클어져 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누군가가 지석을 위작해 넣은 것으로 본 것 같다.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나 그렇게까지 비약해서 지석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은 국회 국사청문회 속기록 내용 중에 있는 <무령왕릉의 묘제는 백제의 대륙진출을 입증한다.>는 제목의 임승국교수의 글이다.
“무령왕릉에 관한 말씀도 했습니다마는, 중국 땅에 가보면 무령왕릉과 꼭 같은 양나라의 묘제가 많이 있는데 무령왕릉의 묘제는
이상하게도 양나라 묘제와 꼭 같습니다.
그렇다면 양나라와 백제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과거와 같으면 의래 이렇게 생각들을 했어요.
즉 "묘제가 같으니 아마도 양나라 쪽에서 백제를 쳐들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백제가 양나라에 진출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중략)”
임교수는 철저한 대륙론자답게 백제와 양나라의 묘제가 똑같다는 것은 아예 백제가 양나라에 진출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했다.
여하튼 무령왕릉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으나 역시 근거 부족으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 외 민족사학계의 대표적인 의혹은 아래와 같다.
1. 백제 대왕릉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다.
우선 이 무덤이 과연 강성했던 백제 무령왕의 부부합장 능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무덤의 크기가 작다.
이 무덤의 크기는 1976년 평남 남포시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귀족이었던 유주자사 진의 무덤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덕흥리 고분은 전실(크기: 297 x 202 x 285)과 내실(328 x 328 x 290) = 48.3m3으로 2개의 석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부부합장 능임에도 불구하고 단칸으로 크기가 420 x 272 x 293 = 33.5m3에 불과하다.
▲ 왕과 왕비의 합장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크기가 작은 무령왕릉 | |
2. 왕릉 옆에 다른 무덤을 쓸 수 있나?
게다가 보통의 경우 왕릉주위에 다른 무덤을 쓰려면 반드시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는 것이 상식인데 사마왕릉에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 두개의 무덤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실제로 거의 붙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진짜 백제의 왕릉이었다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 공주 무령왕릉 바로 옆에는 2개의 무덤이 붙어 있다.
'가'가 무령왕릉이고 2개의 피장자를 알 수 없는 고분이다. | |
3. 지석의 글씨체가 조잡하다
무덤 안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체가 마치 어린 학생이 졸필로 새긴 듯한 조잡한 글씨체이다.
대왕의 지석이란 당연히 당대 국가 최고의 명필이 쓰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석의 글씨체는 성의를 다해 정교하게 조각한 것이 아니라 대충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서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를 백제대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미흡하다는 의견이다.
▲ 일국의 왕의 지석으로 보기에는 너무 조잡하고 졸필이다. | |
4. 왕의 이름인 사마의 마(麻)자가 기록과 다르다.
무덤의 내부에서 발견된 지석에는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문구가 있다.
그리고 사마를 존호로 쓴 왕도 없고 휘(이름)로 쓴 왕도 기록상으로는 무령왕 뿐이기 때문에 이 무덤의 주인공은 당연히 무령왕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사마(斯麻)의 마자가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와 있는 사마(斯摩)의 마자와 다르다는 것이다.
일개 귀족의 무덤에도 오자(誤字)를 내지 않거늘, 하물며 일국의 국왕의 이름에 오자를 새겼다는 것이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냐는
것이다.
발음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이두문 이라면 가능하다 하겠으나, 여하튼 왕의 칭호를 글자를 다르게 썼다는 것에 의문이 남는다.
양서에는 여융(餘隆)이라는 이름 밖에 없다. 그렇다면 斯麻가 시호인가 아니면 휘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휘는 분명히 사마(斯摩)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석의 사마왕(斯麻王)은 시호가 아닌 휘(이름)를 쓴 것으로 봐야하나, 광개토대왕비등 어느 곳에도 ‘휘’를 기록하지 않고
‘시호’를 기록하여 능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석에 있는 사마왕은 휘가 아닌 시호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도 의문점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무령왕의 장례를 분명 아들인 성왕이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지석에다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썼다는 것이 이상하다.
분명 부왕이 붕어하면 묘호나 존호를 정해 올려 쓰는 것이 당연한 자식의 도리이다.
일개 서민의 집안에서도 “저희 부친은 x자 y자를 함자로 쓰십니다.”라고 말하듯 아비의 이름인 xy를 함부로 부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석에 부왕의 이름을 함부로 썼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로 여겨진다.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의문으로 인해 이 무덤은 백제 무령대왕의 무덤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한반도 담로의 총독인 사마왕의 무덤이
아니냐는 강한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그리고 중국 25사의 하나인 수서에는 왜국의 위치에 대해 설명하는 이런 기록이 있다.
즉 백제에서 왜국으로 가는 중에 사마국(斯痲國)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다.
“倭國度百濟行至竹島 南望聃羅國 經都斯麻國 逈在大海中 又東至一支國 又至竹斯國 又東至秦王國 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 疑不能明也
又經十餘國 逹於海岸 自竹斯國印 皆附庸於倭”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지석의 내용 중 나오는 붕(崩)이라는 글자로 인해 설득력을 잃고 만다.
중국에서도 천자(황제)의 죽음에만 붕(崩)자를 쓰고, 제후(왕)의 죽음에는 훙(薨)자를 쓰기 때문이다.
공자가 <예기>에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천자가 죽으면 崩, 제후는 薨, 대부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錄) 서인은 사(死)”라고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서장족자치구에 있었던 흑치국의 왕인 흑치상지의 묘비(낙양 망산에서 발견)에는 제후에게 쓰는 훙(薨)으로 기록되어 있다.
▲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구리거울. 일본의 인물화상경과 관련이 있다. | |
지석의 이 붕(崩)자로 인해 피장자의 신분이 밝혀진 이상 피장자가 백제의
제후국의 왕이니 총독이니 하는 논쟁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피장자는 백제국의 제후가 아니라 대백제국의 대왕(황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대백제국의 정식 대왕으로 사마라는 글자를 쓸 수 있는 왕은 오로지
무령대왕 뿐이었다.
일본의 국보인 인물화상경에 새겨진 명문의 사마(斯麻)는 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와 같은 글자이다.
이 사마라는 글자를 쓴 장본인이 무령왕으로 밝혀짐으로서 인물화상경을 통하여 백제는 왜의 상국이고, 왜는 백제의 제후국(분국, 봉국)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래서 무령대왕의 휘는 斯摩가 아니라 斯麻가 맞던가 아니면 왜에서는 麻자를
摩자의 약자로 쓰지 않았나 하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참고로 <삼국사기>와 남당선생의 <고구려사략/사초>에는 斯摩로 쓰고 있다.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
그렇다면 지석의 내용이 도대체 어떠한지 독자들은 많이 궁금해 할 것이다.
지석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돌아가시고)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올려 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다음)과 같다.
丙午年十二月百濟國王大妃壽復終居喪在西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병오년(526년) 12월 백제왕대비가 수를 다해 돌아가시니 서방(서쪽 땅)에 사매장했다가(모셔졌다가) 기유년(529년) 2월 12일에
개장하여 다시 대묘를 만들었다.
錢日万文右一件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以前件錢訟
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不從律令
전일만문(錢一萬文)의 우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전건(前其件)의 전(錢)으로
토왕과 토백 토부모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땅)를 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번역 : 학술원논문집 1972년 11호, 백제문화 1991 제 21집 참고에 ( )는 필자의 번역 추가)
그런데 우리가 이 지석의 명문에서 유의해서 볼 문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백제 사마왕은 돈(錢) 이천석을 주고 신지(申地 땅)를 사서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을 작성하노니”라는 문구이다.
이 글의 내용은 무령왕이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땅을 사서 묘를 썼다는 것이다.
왕의 묘지에 쓸 땅을 자기나라 백성에게 돈을 주고 토지를 사는 경우도 있는가!!!
현대에도 국왕이나 현직 대통령이 죽으면 보통 국가 소유의 땅에 묻힌다. 하물며 왕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던 봉건왕조시대인데 왜
돈을 주고 땅을 샀을까?
여기서 무령대왕이 이천석이란 돈을 주고 토지를 샀다는 것은 무령왕의 묘지가 있는 곳(공주)이 백제의 땅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지석의 토왕/토백/토부모 상하중관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하튼 무령왕이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묻히다보니 묘지를 확실히 할 매지권을 작성하여 같이 묻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묘지(공주)가 백제 땅이라면 왕이 돈을 주고 땅을 산 후 굳이 매지권을 작성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로 알고 있는데 무령왕릉의 지석은 공주가 백제의 땅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 말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이기는커녕 무령왕도 돈을 주고 땅을 사야 할 정도이니 분명 다른 나라의 영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건 현재의 식민사학계의 이론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인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주무대가 대륙의 동부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민족사학 측에서는 한반도가 백제의 주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주가 백제의 수도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자 그거 가짜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동성대왕에 이어 대륙 동부평야지대를 호령하던 무령왕릉의 능이 한반도 공주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주의 무령왕릉을 부정하기에는 사료가 워낙 없었다.
그러다보니 근거를 대지 못하면서 무령왕릉이 가짜라는 주장을 하다보니 그런 주장을 하면 할수록 궤변론자가 되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궁금점 즉 “대륙이 주무대인 백제의 무령왕의 능이 왜 한반도 공주에 있는가?”란 의문을 말끔히 해결해 줄 사료가
번역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인이다.
광서장족자치구는 백제의 후국인 흑치국이 있던 곳으로 흑치상지의 고향이다. | |
▲ 광서장족자치구는 흑치상지의 고향으로 백제의 제후국인 흑치국이 있던 곳이다.
중국 정부는 거기서 발견된 적실 고분을 한나라 때의 고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분명 저 무덤은 백제 양식으로 공주 무령왕릉과 같은 방식이다. |
▲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위 사진의 한나라 고분과 무엇이 다른가 찾아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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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비밀을 밝힌 남당선생의 고구려 사초.략
백제 무녕왕릉의 비밀을 풀어줄 기록이 나왔다.
그것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일본의 왕실서고에서 일하던 남당 박창화선생이 틈틈이 필사본으로 베껴놓은 고구려
사략 23대 안원대제 편에 보면 백제왕 사마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사마>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聖王}>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이에 <고노>와 <복정>에게 명을 내려 죄를 묻게 하여서, <한{漢}수>를 건너 <쌍현>을 무너뜨리고, <지충>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하였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이 <연희>를 보내서, 명마와 미녀를 바쳤으며, 신하의 도리를 저버렸던 것을 사죄하였다.
<명농>에게 입조하라 명을 내렸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乃命<高老>・<卜正>問罪渡<漢水>壊<雙峴>大破<志忠>於<金川>, 虜獲男女万余口. <明穠>, 遣<燕喜>献名馬・美女, 以謝失臣之禮.
乃命<明穠>入朝.)
이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부인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령왕이 독살을 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유배 형식으로 한반도로
옮겨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 남당의 고구려사초를 번역한 청송 김성겸선생의 의견이다.
추가로 위의 기록은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무령왕이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인 한반도로 옮겨져 남의 나라 사람의 손으로 장례를 지내다보니 감히 대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령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남당이 남긴 고구려 사초의 내용대로라면 무령왕이 한반도에 묻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고구려 사략/사초는 곧 책으로 출간되어 조만간 국내 유명서점에서 판매된다고 한다.
현재 출판 준비 중이라 하니 무더운 여름이 가기 전에 우리는 고구려인들이 쓴 고구려 역사책을 접하게 되는 행운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 기록의 분량이 <삼국사기>의 3배가량이고, 내용이 삼국사기와 많이 비교된다고 하니 역사 메니아들은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무령왕릉의 비밀에 대해 정리를 하자면, 무령왕이 독살당하고 패륜을 저지른 성왕이 보위에 오르고, 장례팀은 무령왕의 죽음을
비밀에 붙여야 했기 때문에 무령왕의 장례를 백제(대륙)에서 치르지 못하고 한반도 공주로 옮겨와서 치른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또 하나의 근거는 서쪽 땅(대륙)에 모셔졌던 왕대비를 옮겨다가 합장했다는 지석의 기록이다.
그리고 사용된 목관의 재질은 금송(金松)으로 한반도에서 나오는 나무가 아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이 금송의 산지가 일본 긴끼지방의 고야산에서 수입된 것으로 소개되었으나, 이 나무는 중국 절강성 태주
(台州)에서도 생산되는 나무이다.
당시 일본열도는 무령왕의 역사무대가 아니고 절강성은 백제의 활동무대이기 때문에 무령왕의 관은 절강성에서 나온 금송으로
만들어 진 것이 확실하다 하겠다.
▲ 발굴 당시의 내부 모습.
관에 사용한 목재는 금송(金松)으로 한반도에는 나지 않는 나무이며,
중국의 절강성과 일본 긴끼 지방이 주산지이다.
사학계에서는 일본에서만 나는 나무라 한다. | |
여하튼 백제 땅이 아닌 한반도 공주에 장지를 쓰려다보니 무료로 안되고 일정 금액(이천석)을 주고 토왕/토백/토부모 상하중관에게
토지를 매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후에 도굴이 되거나 묘지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묘지의 구입경위와 매지권을 지석에 명기함으로서 안전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이며, 외부에서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위장한 것으로 보인다.
매지권(買地券) 얘기만 나오면 백제 땅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자신들이 지금까지 거짓말만 했다는 것)이 두려운
식민사학계는 긴장을 하며 신지(申地)란 남서쪽의 땅을 샀다고 둘러대고 있으나 토지의 방향하고 한반도 공주가 백제의 주무대(수도)
가 아니라는 것 하고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위 남당 선생의 고구려사략의 기록이 무령왕릉의 숨겨진 비밀을 완전히 풀어주었다 하겠다.
이 기록에 대입하면 무령왕릉에 대한 모든 궁금점이 눈 녹듯 술술 풀려 버린다.
이 외에도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략/사초>는 잃어버린 고구려의 역사와 더불어 백제/신라의
역사의 일부도 함께 복원될 수 있으리라 본다.
지금까지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의 이론을 지키는 유물적 도구로 철저히 이용되었던 무령왕릉의 비밀이 위와 같이 깨끗이
밝혀짐으로서 더 이상 백제의 주무대(수도)가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당시 한반도는 누구의 땅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