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나? (1~2부)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6. 01:59

*출처:역사복원신문    

                                                            

 

 

 

 

 

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나? (1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조선왕조 중종 때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훈 컬럼리스트 기사입력  2011/05/12
본 글은 장문이라 다음과 같이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나? (조선 초기의 역사테러)
(2부) 삼국사기는 누가 왜 조작했나? (중종반정 이후의 역사조작)


위화도회군(쿠데타)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나 대의명분이 약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부도덕하게 정권을 잡다보니 내부의 인정보다는 강력한 외부의 힘이 필요해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청하고는 자신의 정치기반을

명나라로 하게 된다.

이는 해방 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들이 제일 먼저 미국에게 승인을 받고 미국을 자신의 후원자로 섬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젊을 때 어진.


조선초기의 사대와 역사테러

명나라는 이성계에게 조선이란 국호를 정해주고는, 예전에 지나족이 단군조선에게 지배당했던 역사의 한을 풀게 된다.

즉 그때와 입장이 180도 뒤바뀌어, 이제는 지나족(명나라)이 상국이 되어 속국인 조선에게 역사 보복을 하기 시작한다.

조선 초 삼봉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을 보면 ‘조선’이란 국호가 정해진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  조선 건국의 주역인 삼봉 정도전

“해동(海東)은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 있었으니, 단군(檀君) 기자(箕子) 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중략) 이들(삼국과 후삼국)은 모두 한 지역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를 침탈하였다. (중략) 단 기자만은 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朝鮮候)에 봉해졌다.

지금 천자(명태조 주원장)가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고 명하였는데,

아마 주 무왕이 기자에게 명하던 것으로 전하에게 명한 것이리니, (중략)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의 교(敎)를 지어서 나라 안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기자의 선정(善政)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 명나라 천자의 덕도 주 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 배움과 8조의 가르침이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위 구역질나는 정도전의 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결국 근세조선이란 나라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인 기자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기자조선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명나라는 속국을 자청한 이성계에게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줌으로서, <기자조선>이 주 무왕의 제후였듯이 조선은 명나라의

제후국인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을 말하려 함이었다.

▲   삼봉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


세종대왕은 국민들에게 성군(聖君)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려 이전의 역사를 배척했다.

개국 이래 조선은 중화(기자)의 후예이지, 단군의 후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명나라 영락제가 죽자 자신은 군신(君臣)관계라 하며 21일간이나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것이 근세조선의 실상이고, 민족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대왕이 민족사를 바라보는 역사관이었던 것이다.    

세조 3년 팔도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 등의 1백여 권과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하라.”고 하였다.

예종 때도 비슷한 어명이 내려진다.

“고대서적을 가지고 있는 자는 승정원과 고을 원에 바치도록 하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바치지 않는 자는 고발하라.

고발한 자는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

이후로 조선에서는 단군조선과 삼국에 대한 고대서적을 가진 자가 발각되면 엄벌에 처했다.

두 임금의 어명은 조선이 실제 조상인 단군과 삼국에게 저지른 실로 엄청난 역사테러였던 것이다.

아니 조상의 사서를 숨긴 자에게 참형이라니? 원 세상에 이런 나라도 다 있나?

이 고대서적들이란 대륙을 지배했던 위대했던 조상들의 역사서로 주로 단군조선에 관한 책들이었다.

스스로 명나라의 속국임을 자처한 근세조선은 기자를 조상으로 삼고 단군은 남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들(단군과 삼국)이

상국의 땅인 대륙을 지배했다는 역사 기록은 지극히 불충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관련사서의 체포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세조가 언급한 목록에는 <한단고기>에서 인용한 책들이 많이 보인다.

일제 때 20만권이 넘는 고대 사서를 불태우고 중요한 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간 목록이 있는데, 그 목록에 세조가 언급한 사서 중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고대서적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일제와 이병도가 단군을 신화로 만들었으니 이 얼마나 나쁜 x들인가!

그리고 해방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군을 신화라고 말하고 있는 사학계도 한 통속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조는 계유정난(쿠데타)을 통하여 집권하고는 결국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다.

부도덕한 방법으로 왕이 되다보니 명나라에게 고명(승인)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명나라에서는 고명을 해주는 대신에 대륙을 지배했던 단군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없애라고 압력을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명을 받은 직후인 세조 3년에 이런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부도덕한 방법(쿠데타)으로 정권을 쥐면 항상 뭔가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만고의 진리인 것 같다.

▲  계유정난의 주역으로 세조 때 최고 실권자였던 한명회의 묘


중종 25년 1530년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마친 대제학 이행(李荇)은 “우리 조선이라는 나라는 기자(箕子)가 교화를

일으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적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함께 중화 사대주의가 극치를 이루는 대목이다.  


김부식은 삼국의 역사를 변질시켰을까?

▲ 현 삼국사기와 대비되는 역사책인 <조선상고사>
조선 세조 때 내린 명령에서 보듯이 이미 민간에 많은 고대사서들이 있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민간에 있던 이 책들을 자료로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서적의 목록을 김부식이 쓴 것인지 후대에 <삼국사기>를 조작한 사람이 쓴 것인

지 는 모르겠으나,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모화 사대주의 유학자로 주로 중국

사서를 참조했기 때문에 대륙을 지배했던 조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는 적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단지 사가로서의 양심은 있어서인지 (대륙에 있었던) 360개 지명을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했다.

<삼국사기>는 애초 편찬될 때부터 변질된 역사도 상당부분 있었을 것이나, 지금의

<삼국사기>와 같은 왜곡내용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지금과 같은 내용이었다면, 민간에 고대사서가 많았기 때문에 분명 누군가가 문제(역사의 진실)를 제기했을 것이므로 함부로

임의대로 심한 역사왜곡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삼국사기>가 최초 간행된 것이 태조 2년(1394년)인데, 이 때도 민간에 많은 고대사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내용으로 간행되었더라면 분명 민간에서 심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조는 명나라의 지시대로 단군과 삼국의 역사를 말살하려면 먼저 민간에 있는 고대사서부터 거둬들여야겠다고 판단해

명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일제 때 역사왜곡을 위해 <조선사 35권>을 편찬하기 전에 고대사서 20만권을 불태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조선 중기의 사대와 역사말살

분명 현 <삼국사기>는 조선 세조와 예종 때 많은 고대사서를 거둬들인 이후에나 본격적인 조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성종까지의 임금들은 역사기록은 사관들의 고유권한이라며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사초조차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연산군이 봐서는 안될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는 감히 세조임금을 능멸했다며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역사조작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선생은 <열하일기>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면 지금의 평양에

도읍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만주의 봉황성이 평양이었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만주의 요동 땅에 또 다른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해괴망칙한 소리라고 꾸짖을 것이다.

이것은 요동 숙신 예맥이 모두 조선에 소속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은 영토의 경계를 밝힐 생각도 않고 청천강이나 대동강을 ‘폐수’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의 땅덩어리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저절로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탄하셨다.

이 내용은 연암선생이 활동하던 영.정조시대 이전에 이미 역사왜곡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연산군 ~ 숙종 사이에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왜곡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연산군이 외할머니를 만나 폐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영화의 한 장면.

영화의 이 장면이 수많은 사대부의 목숨을 뺏는 갑자사화로 이어지고, 결국 갑자사화는

중종반정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데...과연 그럴까?


조선시대 벼슬깨나 했던 사대부의 비석을 보면 어김없이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한다.

유명조선이란 '명나라가 있고 그 다음에 조선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조국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이고, 그들의 조상은 단군이 아니라 기자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왕조는 환국 3,301년, 배달국 1,565년, 단군조선 2,096년 합계 6,962년의 역사를 다 말살해 버린다.

게다가 삼국의 대륙지배 사실까지 조작해 버리는 엄청난 패륜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럼 <삼국사기>는 언제 조작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삼국사기의 조작은 조선왕조 5백년 역사 중 가장 강력했던 임금인 연산군을 반정(쿠데타)으로 끌어내리고

대신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중종조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삼국사기, 누가 언제 왜 조작했나? (2부)
삼국사기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산군은 실록에 130여 편의 시가 전하는 등 시문에 밝았고, 문화 예술을 장려한 임금이었다. 

한국영화사상 역대 최다관중을 동원한 ‘왕의 남자’의 극중 인물로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정사를 그르치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정말 그랬는지는 필자도 알 수가 없다.

▲  한국 영화 사상 최대의 관중을 동원한  '왕의 남자"의 주연들.

가운데가 연산군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산군은 결코 성군은 아니었던 것 같고, 조선의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임금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왕권강화를 위해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한 태종과 세조를 오히려 능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의 초기는 인수대비(덕종비)가 정치의 핵심으로 왕권을 능가하는 전지전능한 절대 권력자였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일으키며 자신의 왕권을 강화했고, 당시 궁핍했던 왕실의 재정을 위해 공신들에게 하사된 세습토지인 많은

공신전(功臣田)을 강력해진 왕권을 이용해 거둬들이려 했다.

그 작업이 바로 갑자사화인 것이다. 당시 공신세력과 기득권층은 왕실보다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쉽게 그리고 합법적으로 토지를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을 대역죄인으로 모는 것이라고 판단한 연산군은 결국

폐비라는 결정적인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윤씨의 일을 즉위 초부터 알고 있었다는 흔적이 여러 곳에 있다.

그런 연산군이 왜 왕이 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폐비의 일을 본격적으로 들추어 갑자사화를 일으켰을까?

결국 갑자사화는 훈구대신들의 재산인 공신전을 빼앗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 이후에 연산군은 폐비와 관계없는 신하들의 토지도 빼앗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박원종 등의 반정 세력이 나타나자 토지를 빼앗길 위기에 빠진 기득권층이 그 세력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반정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집권층은 국가와 백성을 위해 임금을 바꾼다는 도덕적인 사명감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득실 때문에 반정을

도와주거나 가담한 것이다.

▲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의 묘.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왕 치고는 무덤이 너무나 초라하다.


중종 반정세력의 역사조작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박원종 일파는 가장 먼저 연산군의 역사기록을 고쳐야 했다.

 그래야 반정의 대의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연산군의 모든 기록이 악행뿐인 것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왕위에 올린 중종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을 서두르게 된다. 그 과정이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멀쩡하던 왕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명나라가 그냥 도장 찍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반정세력은 연산군이 평소에 병이 많아 이복동생(중종)에게 양위했다고 꾸민다.

 

명나라에서 “양위하면 당연히 세자가 있는데 어떻게 이복동생이 왕이 되느냐?”고 따져 물을 것에 겁이 난 반정세력들은 세자를

비롯한 4명의 연산군의 적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는 전부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말을 만든다.

명나라에서 전왕(연산군)이 살아 있으므로 신왕(중종)의 등극을 허락하지 않는다 했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중종반정 세력은 연산군을 바로 죽여 버리고는, 폐주가 갑자기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고 이야기를 꾸민다.

연산군은 분명 음력 11월인 겨울철에 죽었는데, 어떻게 여름철에나 있는 모기가 일으키는 질병에 걸려 갑자기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급질에 걸려 죽은 것처럼 각본을 꾸며 명나라에 고하기로 하면서 조선족 출신 환관들에게 줄을 대 명나라 조정에 뇌물을 넣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면 뭔가 역사가 삐뚤어지는 것이다!!!

▲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으로 영의정이 되는 박원종의 묘.

 부인의 묘가 나란히 있지 않고 뒤에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이 때 분명 명나라는 뇌물 받고 문제점 있는 중종을 승인해주는 대신, 조선에게 삼국의 역사조작을 요구했을 것으로 보이며,

조선 조정은 그 요구를 듣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 집권세력들이 명나라에 의해 반역으로 몰려 3족(본가.외가.처가)이 멸문지화를 당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왕도 자기네 맘대로 바꾸었는데, 그까짓 역사책 내용을 바꾸는 정도야 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결국 부도덕한 짓(쿠데타)을 한 정권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이상한 짓거리를 하게 되어있다.

즉 고명(승인)을 해주는 대신 비공식적으로 뇌물을 받고 거기에 역사조작까지 주문해 서로 바타제로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최고 오래된 책인 옥산서원본도 중종 7년(1512년)에 발간된 것이다.

그 이전에 간행된 <삼국사기>는 왜 현재 전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중종 때 <삼국사기> 조작을 위해 그 이전 간행본을 다 회수해 파기했기 때문으로 본다.

그리고 중종 7년이면 집권 초기이다. 고명 과정에서 명나라의 주문에 따라 <삼국사기>의 내용을 연구해서 고치고 새로 발간까지

하려면 그 정도의 세월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  삼국지는 진수가 쓴 정사서이고, 삼국연의는 나관중이 지은 소설로 서로 내용이 많이 다르다.

한족을 자랑스럽게 알리기 위해 명나라에 의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홍보된다.  

참고로 명나라는 한족의 역사 중흥을 위해 나관중의 <삼국연의>라는 픽션(허구)

역사소설을 국가 차원에서 보급하는 등 역사에 집착이 강한 나라였다.

그 허구소설을 역사적 사실(史實)로 각인시키려면, 당시 중국대륙의 동부를 지배했던

동이 삼국의 역사 강역을 대륙에서 한반도로 가져가야만 했다.

 

안 그러면 소설 속의 이야기 줄거리가 허구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조선을 압박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1432년(세종14년) 전국지리지인 <팔도지리지>가 완성되었는데, 이상하게 세조는

1455년 즉위하자마자 다시금 <팔도지지>를 만들라 명하나 이 지리지의 완성을 못보고

죽는다. 왜 불과 23년 만에 다시 지리지를 만들라 명한 것일까?

이것은 왕위 고명과정에서 명나라의 압력으로 세조 3년에 내려진 고대서적 몰수 명령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팔도지지는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으로 이어져 1484년(성종15년) 55권이 발간되고, 1530년(중종25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을 교정 보충한

것으로 현재 전해오고 있다.

불과 46년 만에 왜 새로운 지리지의 교정 보충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반정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의 명나라 고명과정에서 비공식적으로 하명

받은 역사조작을 지리지로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의 요동성(하북성 창려)을 황해도 수안에다 그려놓고,

안시성(하북성 개평)을 평안도 중화군에 그려놓는 등 중국대륙에 있던 지명들이 한반도

 옮겨져 있다.

조선왕조는 삼국이나 고려의 위치를 한반도로 고정시키기 위해 지명을 바꾸는 조작도 하게 된다.

일제 때 이병도가 역사왜곡하는 방법을 여기서 배워(?) 대대적으로 조선 팔도의 지명을 일제 때 바꿔놓는다.

이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폐수를 대동강으로, 평양을 서경으로 비정한 것과 서로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즉 중종 7년에 사서인 <삼국사기>의 내용을 먼저 조작해 놓고, 그 후 중종 25년(1530년)에 거기에 맞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까지 편찬한 것으로 본다.

▲ 30년 걸려 만든 동국여지승람을 불과 46년 만에 교정 보충한다.

이유는 뭘까?


그리고 중종 이전에 간행된 지리지는 왜 하나도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건 중종반정 세력이 새 지리지를 간행하면서 다 파기해 없애버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위와 같은 근거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삼국사기>의 조작을 조선 중종 때로 보는 것이다.

멀쩡한 정부를 무력으로 억지로 넘어트린 쿠데타들 즉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세조의 계유정난에 이은 단종폐위와 박원종에 의한

중종반정 등 이러한 쿠데타는 결국 대륙을 지배했던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시커먼 물로 오염시키고 말았다.

부도덕한 방법으로 집권하고 대의명분들이 약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또 그런 상황에서 상국으로 군림하고 있던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의 조작과 한단고기의 편찬

<한단고기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선생의 <발문>에 의하면, “16년(중종 1520년) 내가 찬수관으로 뽑혔기 때문에 내각의 여러 비밀

서적들을 얻을 수 있어 이를 열심히 읽고 앞의 원고와 곁들여 편차하고 이름지어 <태백일사>라 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세상에 내지 못하고 비장하였다. 때문에 이 글들은 문밖에 나서지 못했던 글들이다.”라 되어있다.
<삼국사기>가 간행된 중종 7년은 이맥선생이 <태백일사>를 편찬하기 9년 전이다.

이맥선생은 조선 조정의 역사 테러를 보고는 “뜻있는 자의 원한 이렇게 깊은 것을! (志士之恨 於斯爲深矣)”이라고 한탄하셨다.

찬수관에서 일할 기회가 오자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던 여러 서적들을 인용하고 편차해 <태백일사>를 편찬한다.

민족 최고의 사서를 남긴 이맥선생은 성대한 출판기념회는 커녕, 죄인처럼 몰래 책을 숨겨 후손들에게 전해 민족사의 맥을 이어가게

한 것이다.

만일 <태백일사>가 왕실 서고에 정식으로 보관이 되었거나 또는 운이 없어 조선시대나 일제 때 발견이 되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대륙을 지배한 위대한 조상들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역사의 진실은 땅 속에 그대로 묻혀 버렸을 것이다.

 

여하튼 발각되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는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계연수선생과 이유립선생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강단사학계는 <한단고기 태백일사>를 편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기록에 없기 때문에 위서(僞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런 책은 개인이 소지할 수도 없는 책이었고, 그런 책을 지었다고 정식기록에 남길 수 없는 것이 당시

시대적 상황이었다.

오죽했으면 “감히 세상에 내지 못하고 비장하였다.”고 발문에 썼겠는가!

<삼국사기>가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바로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한 기록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끝에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다 사라지고

 소문조차 없었을 것이다.(雖有乙支文德之智略 張保皐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減而無聞)”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그리고는 <장보고 열전>에서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라고 기록하였다.

▲ 장보고의 활동무대. 사, 연수는 정년이 신라로 돌아와 살았던 신라 땅이라고 당서에 씌여있다. 위 지도의 지명이 옛지명과 같은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분명 <당서>에는 장보고와 친구 정년이 같이 신라로 돌아 왔으며,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에 정년은 신라 땅 ‘사(泗), 연수(漣水)’에서 

살았다고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 있을 때 사수(泗水)의 연빙현(漣氷縣)에서 돌아온 친구 정년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국도

(國都)로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고 신무왕(김우징)을 세우도록 한다고 되어 있다.

▲ 당서에는 분명 둘이 당나라에서 같이 돌아와 장보고는 청해진대사가 되고 정년은 신라 땅 사, 연수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장보고가 먼저 돌아 와 청해진 대사를 할 때 정년이 사, 연수 땅에서 살다가 돌아와 장보고를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대륙에 있는 사,연수가 신라 땅이 아니라 당나라 땅임을 각색하기 위해 후대에 조작한 증거이다.

고려에서는 소문조차 듣지 못했던 장보고에 대해 중국 서적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장보고와 정년이 신라에 온 것에 대해 중국의

원문과 다르게 기록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고려에 소문조차 없었던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해 중국 기록을 인용해 적어놓고는 어떻게 지금(고려)의 완도라고 확정할 수 있단

말인가?

청해진이 고려의 완도였다면 고려 땅에 장보고에 대한 소문조차 없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기록들은 대륙에 있는 사,연수와 청해진이 신라 땅임을 감추기 위해 후대에 누군가가 분명 조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아마 조선 중종 때의 일로 보여진다.

결국 그 때 현 <삼국사기>처럼 삼국의 건원칭제 사실이 지워지고, 매번 중국이 삼국의 황제를 ‘xx대장군 xx왕’으로 책봉하고,

수시로 중국에게 조공을 올리는 기록으로 조작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삼국의 대륙지배 사실을 없애버리는 반도사관을 조작한 것이고, 그러다보니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태제 ~ 문자열제까지의 기록이 부실해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광개토태제가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정복군주라는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일제에 의한 조작 가능성은?

조선시대에 이미 많은 테러를 당한 우리의 민족사는 일제가 이 땅을 식민지배하면서 또 한번 엄청난 수난을 다시 겪게 된다.

 이번에는 ‘소중화’가 아니라 ‘조선왜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 말살이었다.

일제는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의 주역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충견(忠犬)인 이병도를 

시켜 아예 우리 역사를 도살해버렸다.
광개토태왕 비까지 계획적으로 위조한 일제가 옥산서원에 있는 <삼국사기> 중종조 간행본을 조작하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것만 조작할 수 있다면 <삼국사기>의 내용을 자기네 의도대로 조작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의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일제에 의한 조작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일제가 조작할 필요도 없이 이미 조선 중종 때  중국과 일제의 입맛에 맞게 거의 조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  명의 속국이었던 조선이 지우려했던 삼국의 대륙지배


우리의 나아갈 길과 결언(結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류 역사의 종주국이며, 대륙을 지배한 위대한 삼국의 역사는 고려 때 사대주의 유학자들로 인해 변질되고,

조선조에는 아예 심하게 내용이 조작되고, 일제 때에는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해방 62년이 지났건만 현재의 국사교과서는 일제 때 일본인이  만들어준 역사 이론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아직도 이 땅에는 소중화와 조선왜인들이 사학계를 완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대다수 국민들은 학교에서 배우고 매스컴에 나오는 가짜 역사를 우리 역사의 진실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제는 “역사가 밥 먹여주냐?”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국민들의 역사인식부족과 돈이면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 때문에 우리 역사가 중국과 일본에 의해 점점 더 엉망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자금이 들어온 mbc 태왕사신기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광개토태왕의 역사다.

조상의 역사야 어떻게 되든 말든 돈만 벌면 된다는 인식은 이제는 버려야 한다.
불쌍한 건 역사의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국민들과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고 애쓰는 민족사학자들 뿐이다.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면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로 몰리고, 사학계에서는 석사학위조차 주지 않고 있다.

학위를 받고 강단에 서려면 그들의 엉터리 매국(賣國)사학이론이 옳다고 하는 수밖에 없으나 그건 민족사학도로서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러니 일제 때 단재 신채호 선생처럼 생업을 포기하고 외롭고 고독한 역사탐구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삼국사기>는 주요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이 되었지만, 나머지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역사적 자료이며

위대한 유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떤 내용이 조작되었는지는 찾아내면 된다.

조작의 주 내용은 소중화(또는 조선왜인)들이 삼국의 위대한 대륙지배의 사실을  없애려고 삼국의 강역을 한반도 내로 조작한 것이지

다른 내용이 아니다.

즉 주로 반도사관을 수립하기 위해 내용을 조작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기록을 잘 분석해도 우리는 많은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다.

<삼국사기>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역사서이니 일부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이유로 전체 내용을 부정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언젠가는 조작된 역사의 오류를 찾아내어 <바른(正) 삼국사기>가 새로 편찬될 날이 조만간 왔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사학계는 “<삼국사기>는 한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며, 유교적 합리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삼국시대 역사를 재정리한 역사서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삼국사기>는 한국 최고의 역사서로 이 나라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불후의 사서로 치켜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민족의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주고 있는 <한단고기>는 위서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는 현 사학계가 조상의 역사에 테러를 가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유학자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과거 근세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었지만, 이제 대한민국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한국의 사학자들은 소중화(小中華)와 조선왜인이라는 마약에 빠져 있다.

그러니 중국과 일본에서 역사왜곡을 마음대로 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를 정사(正史)로 지정해 민족의 참 역사를 밝히는 길만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황국사관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사입력: 2011/05/12 [18:21]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