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8대 성씨로 본 백제의 위치?
<북사(北史)> 권94 열전82 백제 편과 <수서(隋書)> 권81 열전46 동이편의 백제 조에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했다.
중국의 성씨사전에는 부여(夫餘)씨와 복(福)씨 골(骨)씨 등도 백제의 8대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는 분명한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들 8대 성씨가 백제 멸망과 함께 모두 죽지 않은 다음에야 현재에도 그 후손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
2000년도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국(國)씨가 2,182명으로 성씨 순위 154위이며, 연(燕)씨는 3,549명으로 138위, 진(眞)씨는 1,579명으로 성씨 순위 164위,
묘(苗)씨는 61명으로 성씨 순위 258위 등이며, 나머지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그리고 해(解)씨나 목(木)씨는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멸망 당시 200여개의 성(城)이 있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로 되어 있다.
옛날은 지금과 같은 핵가족제가 아니고 대가족제도이므로 백제의 인구는 450만 ~ 550만 명 정도로 추산이 된다.
이중에 8대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을 것이다. (참고로 구당서에는 호당 인구가 5.7명 ~ 7명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천삼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백제 8대 성씨의 후손이 7,300명 정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백제의 주 강역이었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하남성 일대에는 백제의 8대 성씨가 득실득실 엄청나게 살고 있다.
이는 백제의 주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황하이남~양자강 이북 사이의 동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인구로 본 백제는 대륙인가? 한반도인가?
<삼국사기> 및 모든 중국의 기록에 백제국은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戶)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76만호면 대충 4~5백만 정도 되는 인구였다.
이런 인구가 과연 한반도에서 가능했을까? 2가지 방법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는 단순비교이다. 통계청이 1992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 중종(1519년) 때와 현종(1660년) 때 조선 전체의 인구가
약 76만호이다.
백제 멸망 900~1000년이 지난 조선 전체의 인구와 백제 멸망 시의 인구가 같았다면 백제는 조선 땅보다 훨씬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구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줄어들 수가 없다. 특히 인구=노동력이었던 옛날과 같은 대가족제도 하에서는 말이다.
아래는 두 번째로 분석비교이다.
(1) 사서에 나오는 백제 인구의 변화
신 라 : 18만호 (수도만) (삼국유사)
백 제 : 76만호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 려 : 210만명 (송사 : 백제멸망 600여년 후 약 35만호)
조 선 : (통계청 발행 한국통계발전사)
- 태조 6년 (1406년 : 백제패망 740년 후) : 153,404호 (370,365명 : 한성제외)
- 중종14년 (1519년 : 백제패망 860년 후) : 754,146호 (3,745,481명)
- 영조 8년 (1732년 : 백제패망 1,100년 후) : 1,713,849호 (7,273,446명)
* 백제 패망 730 여년 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
- 경기 + 충청 + 전라도 : 56,003호
- 경상도 : 48,993호
(2). 분석
- 백제(4~5백만) > 고려(210만) > 조선 초(37만-한양제외) : 백제가 조선의 약 10배
- 백제(76만호) > 경기 + 충청 + 전라도 (700여년 후 5.6만호) : 백제가 13.5배
- 신라 수도 > 경상도 (700여년 후) : 신라 수도가 경상도 전체의 약4배
(3). 결론
-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만 존재하지 않고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 백제의 강역이 경기, 충청,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신라의 강역이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백제의 영역 > 고려의 영역, 고려는 한반도보다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일식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그리고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과학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대 박창범교수의 삼국사기 일식기록 분석으로 삼국의 위치를 찾아보니 백제는 발해만 일대가 일식의 최적관측지로
측정되었다. 이 결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식민사학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과학은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상으로 본 백제와 신라의 위치는?
다음은 기상청에서 21년간 근무했던 정용석씨가 쓴 책 “고구려.백제.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에 보면 삼국시대 기이한
기상 기록이 나온다.
백제 동성왕 4년(a.d 482) “겨울 10월에 큰 눈이 한 길(丈)이 넘도록 내렸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같은 해 신라에는 큰 눈이 왔다는
기록이 없다. 이렇듯 한쪽은 홍수와 가뭄과 폭설이 있었는데, 다른 쪽은 그런 것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가능한 일인가?
백제 기루왕 32년(a.d 108) “봄.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같은 해 신라의
기록에는 “여름 5월 큰 물이 져서 백성이 굶주리므로 사자를 10도에 파송하여 구호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는 극심한 가뭄인데, 신라는 홍수가 났다니 이게 한반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삼국사기>에 보면 황충(蝗蟲 메뚜기데) 기록이 유난히 많다.
이 황충은 우리나라 논에 있는 낭만적인 메뚜기가 아니라,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 나오듯 태양을 가리는 공포의 메뚜기떼를
말하는 것이다.
이 메뚜기떼가 지난 곳에는 풀잎 하나 남지 않고 오로지 적토(赤土)만이 남는다. 즉 엄청난 자연 재앙인 것이다.
그런데 이 메뚜기떼는 한반도에 나타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메뚜기의 날개 특성상 황해 바다를 건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의 기록에 황충이 있다는 것은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의 기록을 보면 이 황충이 나타난 기록이 같은 해에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그 말은 삼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의 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는?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수도(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直京師東六千里 而瀛濱海之陽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新羅也)”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발해만 연안에
백제가 있었다. 즉 하남성, 산동성 유역에 백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근초고왕 때 진출한 요서군은 산서성 남부의 서부일대.
진평군은 아직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 |
백제가 수나라 요동정벌의 향도가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백제왕 창(위덕왕)이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도를 하겠다고 청하니, 수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므로 이미 용서해
주었으니 다시 칠 수는 없다.”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고 돌려보냈다.
왕(영양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와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鄕導)가 되려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 군대의 선도란 군대가 행군 시에 길 안내 및 첨병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맡는 중요한 역할이다.
향도가 본대를 계획한 행군로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여 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 25사인 <수서>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개황(開皇) 18년(a.d.598년)에 창(위덕왕)이 그의 장사 왕변나를 보내와 방물을 바쳤다.
마침 요동정벌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수군(隋軍)의 선도(先導)가 될 것을 청하였다.
문제는 조서를 내려 “(내용 생략)”라고 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여 보냈다.
고구려가 대략 이 사실을 알고, 병사를 내어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였다. (開皇十八年,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屬興遼東之役,
遣使奉表,請?軍導.帝下詔曰:往歲?高麗不供職貢,無人臣禮,故命將討之.高元君臣恐懼,畏服歸罪,朕已赦之,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高麗頗知其事,以兵侵掠其境.)
섬서성에 있는 수나라가 하북성과 요동에 있는 고구려를 침략하는데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어떻게 수나라 군대의 향도를 맡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겠는가?
수나라 군대보다 하북성과 요동지리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바로 백제가 그 지역부근에 있으면서 고구려와 이곳에서 자주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본 백제의 위치?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최치원(857 ~ ?)은 신라 말기 대문장가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즉 백제는 한반도의 충청도와 전라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중동부 일대에 넓게 퍼져있었던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 위치를 <사기>에서 찾아보면, 유(幽)는 유주로 산서성 남부이고, 제(齊).노(魯).연(燕)은 황하 남쪽 하남성 일대이다.
오는 그 동남쪽이고, 월은 그 남쪽으로 보인다. 오와 월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추적중이다. (유.연.제.노.오.월의 위치는 지도 참조)
▲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인 유,연,제,노의 위치를 조작함으로서 역사왜곡을 자행한다.
©역사복원신문 | |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말갈(靺鞨)의 전쟁 기록이 많다. 그리고 말갈과 신라와의 전투 기록도 있다.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말갈과 전투를 치룰 수 있단 말인가? 말갈이 한반도 중부에 있었단 말인가?
교과서에는 백제와 신라 위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말갈은 허위 기록이란 말인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보면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말갈병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에 진영을 만들고, 신라왕(문무)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방어케 하였는데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백제 땅에서 몰아내는 광경이다.
여기서 석문(石門)이라 함은 현 황하 북쪽 하남성이고, 대방은 석문 아래로 접한 곳으로 황하 북쪽으로 초기 백제의 도읍지로
낙랑군에 속한 지역이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 때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양하도총관(兩河道摠管)에 임명되어 군량을 평양에 운송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양하도(兩河道)라는 지명이 황하 하류의 북과 남을 통칭하는 명칭인 것이다.
현 사학 이론대로라면 김유신이 한반도에서 황하하류에 와서 군량을 조달해 대동강 평양으로 군량을 싣고 갔다는 얘기인데 이게
가능한 일인지? 이는 백제의 땅이었던 양하도에서 김유신이 군량을 조달해서 운송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백제 패망시 김춘추가 당으로부터 받은 벼슬이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이다.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 중국 지도에도 우이는 산동성을 나타내는 지명이고, 양하도는 황하 하류의 북부와 남부를 통칭하는
지명이다. | |
<삼국사기 백제국본기> 21대 개로왕편에 보면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崇山)의 북까지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식민사학계는 이 제방을 현 한강변 풍납토성이라 하며 숭산을 검단산으로 비정했다.
그러나 이 제방은 백제 개로왕이 황하변에 쌓은 것으로 숭산이란 지명이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少林寺)가 있는 산이 바로 하남성 숭산인 것이다.
▲백제 개로왕이 쌓은 제방는 서쪽 끝은 숭산으로 하남성 정주 서쪽이며, 동쪽 끝은 사성의 동으로 현지명
비성 즉 태산의 서쪽에 있는 곳이다.
즉 하남성 서쪽 끝의 숭산과 산동성 태산의 산 사이를 막는 대토목공사였던 것이다. | |
이 숭산(崇山)과 초기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의 김부식이 이름만 있고 위치가 미상인 곳으로 적어
놓은 곳이다. 게다가 침현(沈峴)과 평원(平原) 등 백제패망 시 언급된 지명도 위치미상이라 했다.
이 지명들이 만일 한반도 안에 있었으면 당대의 석학인 김부식이 몰랐을 리가 없다.
이 지명들이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김부식이 몰랐던 것인데 어떻게 이런 지명이 한강 이남에 있단 말인가?
▲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大夫는 고구려의 관직명이다. | |
현 풍납토성은 백제의 성터가 아니라 고구려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에 대부(大夫)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관직인 것이다. 고구려 9대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삼는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이를 백제의 유물이라고 발표하였다. 백제의 명문이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풍납토성이 백제의 토성이라는 발표는 학자의 양심을 저버린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거기서 발견된 피라밋을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했다.
피라밋은 분명 고구려식 무덤 양식이다. 백제도 같은 방식의 무덤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공주의 무녕왕릉과 완전히 양식이 다른 피라밋을 어떻게 같은 백제왕의 무덤으로 발표할 수가 있을까?
한 나라에 2개의 무덤양식이라? 이건 국민을 속인 기만행위가 아닐까?
▲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피라밋을 식민사학계는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이라고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大夫도 고구려 관직명이고 피라밋도 고구려 양식인데
백제의 유물이라니? | |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보니 한반도에서 그 유물이 안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식민사학계는 백제를 한반도로 밀어 넣기 위해 억지로 풍납토성을 백제 유물로 둔갑시킨 것으로 본다.
그리고는 의혹투성이인 백제사마왕릉을 무녕왕릉으로 비정한다.
그래야 한반도 남서부에 백제가 있었다는 이병도의 반도사관을 정착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일제가 만들어놓은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을 아직도 숭상하고 신봉하는 식민사학계의 작태가 한심스럽다.
비록 백제는 대륙에서 태어났다가 대륙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나라이지만 22담로를 건설한 해양대제국이라 한반도에도 백제
문화의 흔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이 조금 보였다고 해서 백제의 본거지가 한반도 남서부에 있었다는 것은 지나친 발상이다.
이미 필자는 부여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왕도이고, 진짜 백제의 근거지는 산동성이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
그럼 왜 일제는 부여를 백제의 왕도로 조작했을까?
일제는 조선을 영구지배하기 위해 일왕 특명으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조작한다.
역사도 없던 일개 섬나라 민족이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역사를 가진 민족을 힘으로 지배하려다보니 우리 조상의 역사를 축소
왜곡시킨 것이다.
20만권이 넘는 고대 사서를 불태우고 중요한 사서는 다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조선사 35권>이라는 새로운 역사 이론을 만들어 조선인을 세뇌교육 시켰다.
그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 등이 해방 후에는 메이저급 주요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게 된다.
그 학맥이 이어져 지금 대한민국의 강단에는 이병도의 후학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역사의 진실을 찾는 일은 게을리 하고 자기 자리지킴을 위하여 스승들의 식민사학을 더욱 고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큰 비극이며 문제인 것이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을 앞세워 삼국의 역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하루빨리 역사의 진실을 밝혀 중국의 주장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밝혀야 할 것으로 본다.
역사의 진실 차원에서 중국을 본다면 그들은 섬서성 부근 산속에 있던 산적일 뿐이다.
한족이 통일국가를 이룬 것은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뿐일 정도로 중국은 원래 역사가 없는 민족이다.
중국의 전체 역사에 300년 이상 된 통일국가가 없었다.
700~1,000년 사직의 우리 삼국이 존재할 때 중국은 계속 분열이 되어 있었고, 나라가 섰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지곤 했다. 이
런 초미니 국가들이 어떻게 우리 삼국과 대등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비록 잃어버린 땅이지만 중국대륙 동부는 엄연히 우리 조상들이 활동했던 무대였음을 밝혀야 한다.
조상들의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찬란한 역사라도 제대로 되찾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