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3. 04:33

*출처:상원갑자원년 천체환국상고사 BC.8937    http://www.bc8937.pe.ne.kr/index.html 

 

 

 

 

 

 

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1  

 

약 2만년전 지구는 두터운 얼음층이 쌓여있었다. 우리는 이를 빙하기라 한다.

빙하시대의 유럽은 두터운 얼음층과 동서로 길게뻗은 산맥들이 사방으로 둘러쌓여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리고 대륙 전체가 눈으로 덮여 빙하를 이루었으며 인류는 자연의 대재앙 앞에 굴복하여 한 곳에 고립된 채 오랫 동안 살아야만 했다.

이와는 반대로 아시아의  인류들은 춥기는 하지만 비교적 긴 여름과 4계절의 구분이 있었고 대륙 전체에 빙하가 쌓이는 현상은

없었으므로 빙하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아시아에서는 유럽보다 빨리 초고대문명의 발판을 마련해 나아갈 수 있었다.

실제적으로 해빙기 이후 세계최초의 문명이 아시아에서 일어나게 된다. 바로 메소포타미아와 중국, 인도문명이다.

유럽의 원시인류들은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않아 피부색이 희어졌다.

그리고 추운 환경에 잘 적응 할 수 없었던 사람은 쉽게 도태되었으며 악조건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사람들만 남게되었다.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해주는 학설이 최근 일본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발표된 적이있다.

유럽인들의 몸속에는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효소' 라는 알코올해독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알코올해독제라는 것은 두가지 종류의

효소라고 한다.

(술을 마셨을 때 얼마나 알코올을 빨리 분해시키는가 하는 작용을 하는 효소) 동양인들에게는 이 두 가지 효소 가운데의 하나가

결핍된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이를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효소결핍증'이라고 한다.

혹독하게 추운 기후에 적응을 하기위해 유럽의 인류는 짧은 여름 한 철에 많은 식량을 저장 했다가 긴 겨울을 나면서 소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서 비축되어 있던 음식물이 알코올 발효를 일으켰으며 몸에 '아세트알레히드'를 해독시켜주는 효소가 없거나

조금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장기간에 걸쳐서 음식을 기피 한다던가 소화불량, 산소결핍증 등의 원인으로 환경 적응이 어려워져

자연도태 되어 버렸고 다행히 몸속에 두가지의 분해 효소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살아 남아 현재의 유럽인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들은 왠만큼 술을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의 동쪽끝은 유럽의 지형과는 다르게 남북으로 산맥이 뻗어있어 대륙간 이동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뻗은

산맥주변으로는 얼음이 덮히지 않아 빙하기의 영향을 적게 받게 되었고 자연도태나 생리적 변화 등을 격지않았다.

그 후 해빙기가 되고 인류는 이동을 시작했고 한반도는 이들 해빙기 무리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끝자리였다.

사람 뿐만이 아니라 동물 , 식물 등도 자연적 이치에 따라 한반도로 이동해 오게 되는데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서

대륙에서 흘러오는 모든 것을 주워담는 자루형태의 지형으로 인하여 온갖 것들이 다모여들고 자라나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를 한방에서는 기(氣)가 모이는 형상이라한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우리나라 것이 최고로 약발을 잘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약효가 좋은 양질의 제품이 생산) 특히, 주목 할 것은 인삼, 산삼, 천마, 가시오가피 등등...이다.

 

빙하기 이후 기나긴 이동의 역사를 끝내고 우리나라에서 살게되었던 고대인들은 원래 유목민족이었고, 양의 창자에 음식을

보관하다보니, 저절로 발효가 되어, 유구한 세월동안 우리 체내에는 저절로 알콜분해 효소들이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알코올 분해효소가 부족하여 술에 약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점은 유목민의 이동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대목이다.

 

 

북극해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북아메리카 북유럽이 얼음으로 덮인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캄차카반도 시베리아 일부지역이 얼지 않은 것은 높은산맥이 북극으로부터 내려오는 냉기류를 차단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효과로 아시아 대륙과 그 남부지역은 빙하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 할 수 있었다. 

고대문명은 이들 지역에서 태동하게된다. 

빙하로 덮여있었던 기간이 약 1만년 정도인 것을 감안 하면 고대에 아시아 문명이 유럽보다 월등히 앞서 발전 할 수 있었던 명백한

이유가 지구물리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위 지도에서 보면 활 처럼 산맥이 뻗어있다.

그 남쪽은 빙하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며 중앙시베리아 고원 아래로 높은 산맥이 둘러쳐진 곳은 빙하가 엄습하지 않았다.

산세가 험하고 높은 것이 인류문명발전에 도움이 된 것이다.    


빙하가 녹기 시작한 것은 약 12000년전 부터이다.

약 12,000년전 서서히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동물 식물 등의 활동과 이동이 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12,000년전 마지막 빙하기에 유라시아,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등 세계 도처에서 매머드, 마스토돈, 들소, 땅나무늘보

따위의 대형 초식동물이 대부분 사라지는 운명을 격게된다.

매머드의 경우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에서 200만년 동안 번성을 누렸으나 단기간에 모두 멸종됐다.

이들 대형초식동물들의 멸종원인에는 아마도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류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매머드는 시베리아 대초원에서 빙하기를 이겨냈으나 무자비한 인간들이 살륙을 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으로 추정 할 수 있다.

푸른초원에서 서로 먹고살기 위한 투쟁의 결과 매머드는 계속 북쪽으로 내몰리게 되었고 먹을 것이 부족해진 매머드는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다. 

점차 기후가 온화해 지면서 얼음이 녹고 지금 바이칼호 일대와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 기타 분지 등은 차츰 많은 사람과

동식물들이 몰려 들었으며 푸른초원과 아름다운 숲을 이루었다.

지금은 사막화되어 척박한 땅이 되어 버렸지만 과거에는 아주 살기가 좋았다고 한다.

특히, 낮은 사막지대인 신강성일부, 타림분지, 토노번분지 등은 호수를 형성하였다. 마치 지상낙원과도 같았다.

 

 

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 2  

사실상 지상의 마지막 지질시대로 알려진 홍적세(洪積世)는 약 25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우리인류의 역사시대는 홍적세가 끝나는 시기인 약 1만 2천년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홍적세 이후 250만년이 흐르고...

 지금으로부터 약1만 2천 년전 홍적세의 마지막 간빙기가 끝나갈 때 지구촌은 서서히 빙하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마치 여명이

밝아오듯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하였다.

모든 잠들었던 것들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였고 얼었던 호수와 바다에는 다시 물이 차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그때 동아시아의 지도는 지금의 모습처럼 변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1만년전 서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만년전 서해는 육지였다. 불과 5천년전까지도 서해는 육지였다.

서해의 최저수심은 100m 정도이고 평균수심이 고작 70m 이다. 최저수심 3000m에 달하는 동해와는 전혀 다른 지형인 것이다. 

서해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전인 약1만2천년전에는 빙하기였기 때문에 전세계의 평균해수면이 약100m 정도나 낮은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1만2천년전에 서해는 해수면 보다 30m나 높은 육지였던 것이다.  

 

      

       12000년전~8000년전까지 해수면                            5000년전~현재까지 해수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금의 서해 바다는 육지였고 약5000년 전 까지만 하여도 대륙과 일본열도는 연이어져 있었으므로 인류는

육로를 따라서 일본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발해만은 생기지도 않았으며 단군임검께서 건국하시던 bc2333년경 즈음에 발해만은 하나의 호수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 호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냥, 채집, 농사를 지었고 또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얕은 바닷가에 나아가 어패류를 줍거나 좀 더

먼 바다로 나아가는 어로 생활도 차츰 발달 하였을 것이다. 

서해 바다로 부터 나오는 충분한 양의 염분 공급도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하는데 일조하였을 것으로 본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보금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천혜의 조건 때문에 고조선문명은 세계최고의 문명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이를 발해문명이라고 이름지어두자.

서양에 지중해문명이 있으면 우리 한民族에게는 발해문명이라는 세계최고의 유적지가 있는것이다. 

 

 


 

 

(아래는 요하문명과 관련된 신문기사)

 

"요하문명은 韓·中·蒙 공동의 뿌리”
[서울신문 2007-04-17 09:00]   

 

  
[서울신문]“요하(遼河)문명은 결코 중국만의 문명이 아닙니다. 요하문명을 동북아 공동의 시원(始原)문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중국이 내세우고 있는 ‘요하문명론’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요하문명을 ‘흐름과 교류’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항공대 교양학부 우실하 교수는 16일 “우리가 동북공정만을 경계하는 사이에 중국은 요하문명론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면서 “자칫 우리 상고사 전체가 중국의 방계역사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요하문명론은 중국이 만주의 서쪽인 요하일대의 고대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삼아, 이 지역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민족과 역사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논리이다. 그렇게 되면 이 지역에서 기원한 예·맥족은 물론 단군, 주몽 등 한국사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황제의 후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大)중화주의’ 완결판

 

그렇다면 중국은 왜 요하문명론에 집착하는 것일까.

중국은 신화와 전설의 시대인 하(夏), 상(商), 주(周)시대를 역사에 편입하는 작업(하상주단대공정)을 필두로,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 등 일련의 역사관련 공정을 진행해 왔다.

이미 1950년대부터 정립하기 시작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이론적 배경을 갖추기 위한 작업이다.

“현재의 중국영토 위에 있는 모든 민족과 역사는 통일적 다민족인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속한다.”는 얘기다.

이같은 작업은 21세기 ‘대(大)중화주의’ 건설을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국가적 전략이었다.

우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는 요하지역으로 중국문명의 기원을 옮기는 것이 요하문명론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실제 요하지역에서는 지금껏 지구상에 있었던 그 어떤 문명보다도 앞선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요하일대에서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은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 홍산문화(기원전 4500∼3000년) 등이다.

이는 애당초 중국이 문명의 시초라고 떠들었던 황하유역의 앙소문화(기원전 4500년∼ )나 장강 하류의 하모도문화(기원전 5000년∼ )보다도 훨씬 앞서는 것이다.

더욱이 홍산문화 후반부로 보이는 우하량 유적(기원전 3500년∼ )에서는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대량 발굴돼 충격을 던져줬다.

이들 지역은 종래 중국에서는 ‘오랑캐’ 땅으로 알려진 데다 발굴되는 유물들이 중국문명의 본거지로 알려진 중원과는 사뭇 다르고, 오히려 내몽골이나 만주·한반도와 유사하다. 중국이 서둘러 문명의 기원을 황하에서 요하로 옮기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흐름과 교류’의 역사

우 교수는 “동북아 고대사는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이동하는 ‘흐름과 교류’의 역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중국이나 우리나 ‘닫힌 민족주의’를 벗고, 요하문명을 끊임없는 흐름과 교류의 역사로 바라봐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는 또 “요하문명은 세계사를 다시 쓰는 계기를 마련할 정도로 엄청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면서 “요하문명을 어느 한 국가의 고유한 문명이 아닌 동북아 공동의 시원문명으로 삼을 때 ‘동방 르네상스’가 빛을 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 교수는 신간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펴냄)에서 한·중·일·몽골 등 동북아 각국의 연구진들이 이같은 요하문명을 공동으로 연구해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근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새 감각 바른 언론”

- Copyrights ⓒ서울신문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가칭 발해호(渤海湖) 주변으로 발생한 문명들을 나열해 보면 요하문명(BC7,000년경), 소하서문화(BC7,000년), 흥룡와문화(BC

6,200년), 사해문화(BC5,600년), 부하문화(BC5,200년), 조보구문화(BC5,000년), 홍산문화(BC4,500년), 소하연문화(BC3,000년),

하가점하층문화(BC2,000년) 등 이있다. 그 밖에 황하문명(BC5,000~4,000년) 등이 있다.  

이들 고대문명들은 제3빙하기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먹거리가 풍부해지고 인류의 활동력이 왕성해지면서

빙하기 때 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불어나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고대문명의 주인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것이 내가 가진 첫번째 의문이다.

물론 인구가 불어났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빙하기 이전의 시조로부터 피를 이어받았을 것으로 생각이된다.

그러면 제3빙하기가 끝나던 일만 이천 년 전의 시대에는 어떤 인류가 있었으며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요하문명에서 보이는 특징적 상징인 삼족오와 곰토템은 과연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이 장(章) 에서는 이러한 의문들을 풀어나가면서 한民族史에 첫 등장하는 인류 苗에 대해서도 알아보기로한다.

 

상고사특집/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 3  

 

지구과학적 입장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대륙을 생각해 보기로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생겨난 이후 한번도 바다밑으로 가라앉은 적이 없는 과학적용어로 '순상지대' 라고

한다.

순상지(shield . 楯狀地)를 백과사전에 찾아보면 " 지각 중에서 지질학적으로 가장 오래되며 안정된 부분을 말한다. 영어 명칭인 쉴드는 캐나다 순상지 처럼 선캄브리아기의 지층이나 암석이 노출된 지역이 마치 방패모양을 이루고

표면이 평탄하고 단단한 데서 유래된다. 각 대륙에 1~2개씩 분포한다."  

우리나라의 지표는 가장 오래된 땅 덩어리이다. (약 35억 년) 

지표가 생겨난 이래로 한번도 바다 밑에 가라앉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상승하였고 약 500만 년 전 까지만 하여도

한반도는 적도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발견되는 경상도, 전라도지역의 공룡발자욱은 우리나라가 과거 공룡들의 천국이었으며 경상도, 전라도 지역은

바닷물이 밀려드는 해변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1억년이 흐른 사이 지금도 우리나라는 지표가 솟아오르고 있으며 땅 덩어리 전체는 남쪽 적도에 있었던 것이

서서히 북상하여 지금은 북위도에 자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기후도 열대성에서 아열대로 변해왔다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약1만 2천 년 전, 동북아시아에서 지구문명의 최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날씨와 벼농사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보았을 때 앞서 말한 발해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는 물론이고 엄청나게

기름진 땅과 바다에서 수확된 풍부한 해산물, 그리고 초원에서 자라는 야생동물들을 기반으로 세계최고의 문명이

발달하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육지는 땅밑 맨틀이라는 것에 떠있어서 움직이며 서서히 이동을 한다. 

이번 사천성대지진도 대륙의 판끼리 부딧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사이에 한 쪽 대륙판은 내려앉고 다른 한쪽 대륙판은 솟아오르게 된다.

중국대륙의 북쪽과 인도의 북쪽 희말라야,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형과 광물들은 지구의 역사를 간직하고있다고

할수 있다. 그것은 순상지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땅 덩어리는 쉬지 않고 이동을 한다.

심령학자 루쓰몽고메리에 의하면 약 5만년전에 레무리아대륙이 오늘날 호주대륙옆 남태평양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레무리아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을 때 극이동 으로 인해 남극의 모든 짐승들이 거의 순간적으로 멸망하였다고

했다. 지금도 남극의 두꺼운<1.2km>얼음 밑에는 수 많은 짐승들의 시체가 뭍혀 있을거라고 하였다.

실제로 남극대륙은 수 백 만 년전에 따뜻한 온대지역 이었었고 또 한 때 호주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 과거의 남극대륙과 호주를 연결 했던 땅이 페름-석탄기 때 존재했었다고 지질학자 들의

말을 빌어 적고있다.

 

 

인도서 해저침몰 도시 유적 발견 (1만년전)  

 

||||||||||||2002/9/25(수) 17:40 (MSIE5.0,Windows98,DigExt) 211.105.130.242 800x600|||||대구 달서뉴스

|2002년4월12일|||09/25-17:40||||||||2||||||||||

 

인도서 해저침몰 도시 유적 발견

인도 남동부 마하발리푸람 연안에서 빙하기 말기에 바다 밑에 가라 앉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의 유적이

발견됐다.

11일 BBC에 따르면 인도.영국 합동 잠수부팀은 현지 어부들의 진술과 `7개 사원"의 전설을 토대로 해저를 탐사,

지난 4월1일 이 도시 해저에서 한때 큰 도시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대규모의 유적을 발견했다.

탐험을 주도한 인도 국립 해양학.과학탐사연구소는 이번 발견으로 고대 도시가 해저에 침몰했다는 확신을 갖고

오는 2003년 초부터 이 해역 일대를 추가 탐사할 계획이다.

탐험대장 몬티 할스는 "잠수부들이 인공의 흔적이 뚜렷한 일련의 구조물들을 확인했다"고 말하고 "해저 유적지

규모는 상당히 커서 50명의 잠수부들이 3일간의 조사 끝에 일부분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발견으로 추가 탐사와 집중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구조물중에는 사원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었으며, 해저 유적은 전체적으로 대도시의 흔적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것이 탐험대의 결론이다.

마하발리푸람의 전설을 처음 기록으로 소개한 인물은 영국 여행가 J. 골딩험. 1798년 이 인도 남부마을을 여행한

그는 당시 어부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7개 사원의 전설을 듣고 글로 남겼다.

전설에 따르면 신이 이 곳에 세워졌던 대도시의 아름다움을 질투한 나머지 홍수를 내려 하루만에 휩쓸어 버렸는데

6개의 사원은 바다 밑에 가라앉고 나머지 한개가 바닷가에 남아 있었다.

탐험대의 일원인 그래함 한콕은 "여러 해 동안 홍수 신화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서방학자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이번 마하발리푸람의 발견으로 신화가 맞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이 도시가 빙하기 말기에 해저에 침몰했을 가능성에 대해 연구할 계획인데 이것이 증명되면 이

고대도시의 역사는 5천년 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 달서뉴스 2002년 4월 12일

 

 


 

 

  중앙일보 2002년 1월 17 일자 보도

"인도 서부 수라트 해안 가까운 얕은 바다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9천5백년 전 고대도시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16일 인도 정부가 발표했다.

이제까지는 5천5백년 전의 수메르 문명 유적(이라크 소재) 이 인류 최고(最古) 의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교도 통신에 따르면 발굴현장에서는 건축자재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나무와 뼈의 조각들이 발견됐으며, 이들은

기원전 7천5백년 전 유물로 추정된다고 조시 인도 과학기술부 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인도 고고학자 라지글 박사는 "최소한 9천5백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인간이 활동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인도에는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기원전 2천5백년) 이 있지만,이번 발견이 학계의 인정을 받을 경우

연대가 인더스 문명보다 5천년, 수메르 문명보다 4천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교도 통신은 "이번 발견은 고대문명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2003/6/15(일) 09:21 (MSIE6.0,Windows98) 211.109.165.248 1024x768|||||

주간동아|2002년 3월 21일|||06/15-09:21||||||||2||||||||||

“캠베이 유적은 세계 最古 도시”

 기원전 7500년경 조성 인도 학계 흥분 …

탄소 연대 측정 맞다면 인류문명사 다시 써야 할 판

인류의 문명사는 다시 쓰여야 하는가?

최근 인도 캠베이만(灣)에서 발견된 해저 도시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고 있는

인도 고고학계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번에 인양된 유물 중 일부를 연구기관에 의뢰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나뭇조각 화석의 연대가 기원전 7500년경으로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도시문명은 기원전 4000~35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었다.

 기원전 70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문명의 흔적으로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예리코(구약성서의 ‘여리고’)

에 요새화된 주거지가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도시문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파키스탄에 있는 메르가르에서도 기원전 7500년경의 대형 집단 주거지가 발견되었으나, 이는 농경민들의

주거지로 역시 도시문명은 아니다.

만약 기원전 7500년이라는 연대 측정이 맞다면 캠베이만 유적은 세계 최초의 도시문명이 될 것이며, 인류의

도시문명사는 3500년 이상 앞당겨질 것이다.

이번 발견은 지극히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지난해 상반기에 인도 국립 해양기술원은 근해의 해양오염도를

연구하기 위해 캠베이만 연안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팀은 해양오염 조사에서 늘 하게 마련인 수중 음파탐지기로 해저 촬영을 실시했는데, 사진 분석 결과 인공물인

것으로 보이는 직사각형 구조물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놀라운 분석 결과에 해양기술원은 해양 고고학자인 라오 박사에게 의뢰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9km 걸쳐 수심 30~40m 지역 분포

켐베이 도시 복원도
①은 도로, ②는 주거지역, ③은 댐시설, ④는 광장이다. 이 복원도는 인더스 문명의 고대 도시인 하라파의 유적과 흡사하다.

해저 유적지가 발견된 곳은 인도 구자라트주(州) 캠베이만 해안에서 30km 가량 떨어진 수심 30~40m 지역이다. 고대 도시의 유적은 약 9km에 걸쳐 강가에 펼쳐져 있으며, 강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돌로 된 댐의 흔적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이 도시는 국제규격의 수영장 크기 목욕장(으로 추정되는 건조물)과 길이 200m, 넓이 45m 규모의 좌대(座臺)도 갖추고 있어 본격적인 거대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대형 건조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주거지로 추정되는 직사각형의 지하실들이 밀집된 지역이 있으며, 하수도 시설과 도로 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 고대 도시가 언제 바다 밑에 잠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규모 지각변동이 그 원인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와 함께 해양기술원 연구팀은 인근 해저를 뒤져 2000점이 넘는 유물을 인양했다.

인양물에는 연마된 석기, 부서진 도기 조각, 장신구와 작은 조각품들, 상아와 보석, 인간의 척추와 턱뼈 화석, 치아

등과 함께 문제의 나무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캠베이 고대 도시인들이 신석기와 도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이로써 확실해진 셈이다.

전체 문명사의 흐름으로 보아도 기원전 7500년부터 5000년경까지는 신석기가 발달하고 쟁기를 사용해 농경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던 시기다.

이러한 농업혁명은 농업 생산의 잉여를 낳아 대규모의 도시생활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인도의 고고학자들, 특히 민족주의 계열의 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캠베이 유적이 기존의 인더스강 문명의 고대

도시인 하라파, 모헨조다로 유적지와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는 점이다.

캠베이 유적지에 나타나는 대규모 목욕장과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대형 좌대, 하수도와 도로가 잘

정비된 주거지역은 인더스 문명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에 전성기를 맞았기 때문에 캠베이 유적과는 수천년의 연대차가 있지만, 이번

발견을 인더스 문명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인도 고고학 연구원 전임 원장인 자라트 조시 박사는 “농경 집단이었던 고대 인도인들이 어떻게 하라파나

모헨조다로 같은 고도의 도시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는지 그 중간 단계를 보여주며, 인도 문명의 연결고리를 

제공한다”고 이번 발견의 의의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캠베이와 인더스 문명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시각이지만 두 지역이 동일 문명권에 속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대형 농경 주거지를 이루었던 메르가르와 캠베이를 연결시켜 신석기 시대의 거대 문명권으로 보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기원전 7500년이라는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나무 화석을 두 군데 연구기관에서 연대를 측정했는데, 비르발 샤니 고식물 연구소의 측정 결과는 기원전

6148~5678년이었고,인도 국립 지구물리학 연구소의 결과는 기원전 7908~7328년이었다.

두 연구소의 결과에서도 200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난다.

일부에선 “나무 화석 근거 부족”

 좀더 중요한 문제는 이 나무 화석이 과연 도시 유적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캠베이만 근처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센

곳이어서 이 나무 화석이 서아시아(중동) 지방으로부터 바다를 통해 밀려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그레고리 파실 교수(고고학)도 캠베이만의 급격한 조수 운동을 지적하며 문제의 나무 화석과 해저 도시 유적 간의 연관성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이번 발굴팀을 이끈 카티롤리씨는 좀더 많은 인양물을 연구기관으로 보내 연대 측정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해저 유적의 발견에 대해 하버드 대학의 리처드 메도 교수는 “그 자체로 국제적 조사단을 구성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가 맹목적인 ‘연대 올리기’와 ‘인도 문명, 역사의 미화’ 경향을 보이는데

우려를 나타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인도 델리 대학의 나야니트 라히리 교수(고고학)를 비롯한 좌파계열 학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유적의 연대 측정과 함께 고고학계의 눈앞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캠베이의 유적을 이룬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인도의 원주민이었을까?

아니면 서아시아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 인도로 들어온 외래인들이었을까?

또 그들이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전환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농경생활을 시작한 후 언제쯤 충분한

잉여를 산출해 도시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캠베이 유적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게 된다면 이번 발견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인류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이지은/ 델리 통신원 >

 

 또 하나의 잃어버린 문명- 놀랍게도 대만 펑후(澎湖)에서 1만년 된 인조 해저성 발견  

 ||||||||||||2002/9/25(수) 17:36 (MSIE5.0,Windows98,DigExt) 211.105.130.242 800x600|||||

광쪼우르빠오(廣州日報) 따양(大洋)네트워크 |2001년8월28일|||09/25-17:36||||||||2||||||||||


(편번역) 최 월화 (2001.08.30)

원 제목: 또 하나의 잃어버린 문명- 놀랍게도 대만 펑후(澎湖)에서 1만년 된 인조 해저성 발견
  
‘하느님의 지문’, ‘하늘의 거울’이라는 책을 저술한 영국의 고고학자 칼라한은 대만으로 가서 펑후 후징구(虎井口)

해저 유적을 탐사하고, 8.27일 발표하기를, 그가 과거에 연구했던 고대문명의 경험으로 볼 때, 펑후 해저유적지에는 인조의, 천연이 아닌 최소한 1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건조물이 있으며, 향후 그는 계속 타이뚱(臺東), 화리엔(花蓮)

및 양밍산(陽明山, 타이베이 근교의 산, 역자주)을 취재하여 다음 번 책의 출판을 위한 준비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칼라한이 제시한 논증은 중국 역사는 5천 여년이고 이집트는 6천 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마야 고 문명 및

일본 큐우슈우 에나국의 해저 거대(巨臺)로 볼 때, 후징구에 가라앉은 성은 같은 시기의 유적임에 틀림없고, 인류

역사 이전의 것으로서 초보적으로 추정하면 상고 전의 문화거나 외계인의 문화일 수 있는데, 이 문화권은 중동,

동아시아, 일본을 가로질러 유럽으로 형성된 문명지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전문 잠수부 씨에신만(謝新瞞)을 따라 이미 펑후 해저성에 대한 탐사활동을 마친 칼라한은 장기적으로 그는 증명되지 않은 역사 및 고 문명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지구상에는 각기 다른 지역에 각기 다른 문명이 있고, 매우 많은 고 문명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가 특히 흥미를 느끼는 것은 1만 년 전의 역사로서 즉 빙하기에 빙하가 녹아 바다 수면이 높아졌을 때, 해안에 가까운 저지대를 조심해서 찾기만 한다면 재미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하였다. 칼라한은 과거 몇 년간 이미 고고학자와 이 세상에 몰락된 문명이 있느냐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다만, 고고학자들이 관심를 보이지 않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고고학자들이 확실한 증거만을 믿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펑후 해저성을 잠수해 본 경험에 대하여, 칼라한은 그는 펑후 해저성의 십자성과 동서와 남북으로 향한 성벽을 본 후 이것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만이 동서남북 방향의 문화에 대하여 흥미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본 것은 또한 성벽이 한 조각 한 조각의 돌로 쌓은 것이었는데, 비록 초보적으로 인조적 문화유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지질학자와 고고학자들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출처) 광쪼우르빠오(廣州日報) 따양(大洋)네트워크

 

 

백과사전에 의하면 히말라야는 지금도 융기 하고있다고 한다. 

" 히말라야산맥이 형성된 것은 지질적으로 보아 최근의 일인데, 제3기 부터 조산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히말라야가 융기하게 된 원인의 하나는 산지에서의 빙하 ·하천의 격렬한 침식으로 하중(荷重:산지 내의 물질)이

제거됨에 따라 지각이 보상적(補償的) 회복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히말라야의 해발고도는 티베트의 해발고도보다 1,000m 이상 높다).

히말라야의 활발한 융기 현상은 특히 동부지역에서 지진이 잦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수 있다. "

아울러 우리나라와 중국대륙 중북부산악지역 대부분이 순상지역으로 그 나이가 무려 35억년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일본은 약 5억 년 전에 생긴 젊은 육지이다. 일본열도에 인구유입은 필히 한반도와 대륙에서

유입되었다는 반증이기도한다. 

5천 년 전만 하여도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걸어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만 2천 년 전, 그 때 桓因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 지구는 오랫동안 빙하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동을하며 살기는 어려웠다.

특히, 유럽지역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아시아지역은 빙하의 영향이 적어 비교적 인류는 풍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원시인류가 생겨난 이래 아시아의 인류는 몇 십 만년을 이렇게 살아왔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빙하기로 인하여 아시아의 문명이 유럽 보다 먼저 발생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른바 백인종이 시베리아 북쪽의 툰드라 지역에서 남하하기 전 까지는 원시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아시아의 인류는 초고대문명을 일으켰으며 태평양상에 그 흔적을 남겼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현재의 아시아인류

은 과거에 초고대문명을 이룩했던 고아시아 인종의 후예들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이들 초고대문명을 말하자면 제임스처치워드가 언급했던 태평양의 '무우(MU)' 플라톤이 언급했던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인도양의 '레무리아' 등이 있다.

古亞世亞人의 초고대문명들은 하나 같이 1만 2천 년전 빙하기가 물러가면서 지구촌에 들이닥친 대재앙 때문에

바다속으로 사라지게되었다. 

빙하기가 끝 날 무렵 부터 해수면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그때 동아시아의 지도는 지금 처럼 변해가는 과정을

거치게되었다.

1만 2천 년 전, 서해 바다는 육지였고 불과 5천 년 전까지만하여도 부산에서 대마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수면의 상승을 유추해보면 1천 년전 고구려가 망할 때 발해만은 하나의 내륙호수 였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지구촌에 물이 불어나면서 급격하게 침수 된 지역이 늘어났으며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대륙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약 6천여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해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닥친 재앙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만 2천 년 전에 초고대문명이 멸망하면서 약6천년동안 지구는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끓임 없이 숨고르기

를 해왔으며 桓因時代에는 干支曆法이 탄생하였고 道를 통한 많은 선지자들이 선천의 세상을 이끌어 왔다.

6천 여 년전 복희씨(伏羲氏)가 태어나고 지구의 역사는 또 다시 6천년 대주기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 4   

 

고대문명의 주인들은 어디서 왔을까?


지금까지 언급한 고대문명의 주인이었던 초기 인류는 동아시아지역에서 첫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도와 호주대륙 중국대륙 동남아시아 등 동아시아지역 전체가 북극에서

내려오는 찬공기를 막아주는 높은 산맥들로 둘러 쌓여 있었기때문이다.

상상고시대에는 이들 지역이 축복을 받은 것이며 빙하가 지속되던 200만년 동안 인류는 번성하였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마지막 빙하기인 홍적세는 약 1만 년 전에 끝나고 200만 년 전에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시아지역 고인류는 약 200만 년 동안 독자적으로 생존해왔으며 만년빙하로 덮인 높은 산맥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인하여 동과 서는 철처하게 갈라져서 왕래가 없었으며 비교적 따뜻한 기후의 영향으로

아시아지역내에서는 서로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을 할 수가 있다.

어느시기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200만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시아의 인류는 점차적으로 발전해왔으며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약 2만 년 전에 아시아의 문명은 최고 수준까지 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오늘날 처럼 국가와 국가간의 교류를 비롯하여 삶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방법, 문자의 사용, 천문학의 발달 등

오늘날 인류의 상식으로는 밝혀내기 어려운 수준까지 도달하였을 것이다.

그 흔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증거자료는 고대인도의 사원에서 발굴된 1만 2천 년 전의 나칼토판, 마야의 점성술을

기록한 8천 년 전의 트로아노고사본 그외 수메르점토판, 라사의 옛기록들, 전설의 아틀란티스, 무우대륙 등을 들수

있다.

이야기가 갑자기 전설쪽으로 빠지면 재미 없으니 최근에 밝혀진 흥미로운 기사를 소재로 상고대인류사에 대해서

접근해 보기로 한다.


흑피옥과 발해호(渤海湖) 주변으로 발생한 문명들

 

제3빙하기가 끝이 나면서 인도와 아시아 전체를 감싸고 있던 산맥들에서 빙하들이 녹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구 전체에 해수면도 상승하였고 유럽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시베리아대평원을 가득 덮었던 수십km의

얼음층도 차차녹으면서 약 5천 년간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지구 전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기온이 상승하였고 사계절의 구분도 뚜렸해 졌으며 대형 초식 동물들이 사라지고 먹거리가

풍부해지면서 인류의 활동력이 대단히 왕성해졌으며 따라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약 5천여년에 걸쳐서 발해호(渤海湖) 주변으로 고대문명들이 발달하기시작하였다.

 

이름하여 요하문명(BC7,000년경), 소하서문화(BC7,000년), 흥룡와문화(BC6,200년), 사해문화(BC5,600년), 부하문화

(BC5,200년), 조보구문화(BC5,000년), 홍산문화(BC4,500년), 소하연문화(BC3,000년), 하가점하층문화(BC2,000년),

황하문명(BC5,000~4,000년) 등이 있다.  

 

이들 고대문명의 주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의문점은 나를 곤혹스럽게하였다.

정말 그들은 빙하기 이전의 시조로 부터 피를 이어 받았던 것일까?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 날수 있는 조건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먹거리가 풍성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더 덧붙이자면 전쟁이 없어야하고 그외에 자연환경이 좋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 할 수 있는 장소는 인도대륙과 중국대륙이 적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주대륙은 위도가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져있어서 기후가 좋지않다. 그나마 인도와 중국대륙과 같은 위도상에

위치한 북아프리카지역, 중동지역, 북아메카의 동부지역이 괜찮은 정도이지만 인구가 너무 적고 오랫동안 고립으로

인하여 문명이 축적되지 않아 이들 2군지역은 나중에 아시아의 인류가 이동해가서 살게 되면서 후발성문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즈음에서 최근 고고학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흑피옥조각상에 대해서 몇가지 알아보기로한다.

 

흑피옥조각상 과 한民族의 연관성


흑피옥조각상이란?

한국인출신 고대 유물 수집가 김희용(59세)氏가 내몽골의 오란찰포(烏蘭察布)지역에 수천점의 조각상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인근 지역에서 채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옥 과 황옥에 흑색의 염료를 입힌

조각상이다.

통상적으로 玉은 탄소c1을 함유하고 있지 않아 이것의 제작년대를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서울대학에서 이 옥조각상에 칠해진 염료의 성분을 분석함으로써 그 년대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1만4천년전까지 추정되는 것으로 밝혀져 관련학계에 대단한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일부 학계의 반응은 세계인류문명사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있다.

발견된 흑피옥조각상의 특징은 반직립인의 형태의 형상이 많고 그외에 반인반수 남녀의 성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등이있다.

이미 인터넷뉴스를 통해 알려진 내용들이 많은 관계로 중복된 내용을 피하기 위해서 자세한 내용은 흑피옥으로

검색해서 확인해 보기바란다.

이 장에서는 흑피옥조각상 과 한民族 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중국학자를 포함하여 국내에 내로라하는 고고학전문가들도 모두 현장발굴을 해보지 않고서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다면서 논평을 유보하고있는 실정이라 나 자신도 말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지만 흑피옥에 막혀서 근 1년을

글을 쓰지 않고 기다려 온 상태라 이제는 더 미룰 수 없기에 여기에 짧게나마 나의 소신을 밝히고 上古代 한民族史의 원류를 찾아 떠나기로 하겠다.


한民族은 上古代에서 부터 玉을 귀하게 여겨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사해지역이나 홍산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매장유물 들은 모두 석실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유일하게 북방민족의 특징만을 담고있어 우리측 학자들은 물론이고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도 동이족(東夷族)의 유물임을 인정하였다.

사해문명유적지와 홍산문명유적지를 대표하는 것들로는 玉유장품을 빼 놓을 수 없는데 이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이

상고대에서 부터 玉을 귀하게여기어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후 玉문화는 홍산문명을 거쳐 앙소문화 대문구문화로 번져갔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현재 인터넷검색으로 많은 지식을 확보 할 수 있는 상태이고 새삼 본인이 거론한다고해서

특별할게 없기 때문에 몇개의 사례만 소개하기로 한다.

 

 출처 구리넷

 

한민족의 뿌리문화 홍산문화  


Bracelet with Cicada Motif (A)                               Bracelet with Cicada Motif (B)


  eagle-on-human                    lingam_on_double-headed_human       hongshan-alien-eyes


hongshan-alien-roswell                      hongshan-astro-bird                  ornament_statue


Hongshan Culture,Bird on God          Hongshan Culture, Jade Figure         Motif of Eagle on Man


hongshan-astro-bird .앞                                                                  뒤                                         옆


Cicada on God Head                 Swallow                                      Hongshan Jade Eagle


bird man.옆                                                                                                                           뒤


Hongshan Jade Swan                                                                                       Hongshan Jade Fish


Hongshan Culture, C-shape Dragon .(A)                                                                                    (B)


Ax with Dargon Head.                                                        Jade Axe w/ vulture motif


Ax Shape Tri-bi-disk Dragon Motif.                       Hongshan Culture, Ax


C-shape Dragon.(A)                                                                          (B)


C-shape Dragon Plaque.(A)                                                              (B)


Hongshan Culture, Horse Head                                                      Hongshan Culture, Jade Hoop


Hongshan Culture,Bi-Disk                                                           Collared Bi-disk


Hongshan Culture, Jade Cicada                                                        Hongshan Culture, Jade Condor


Knife with Motifs of Dragon and Pheonix.  Knife with Motif of Horse Head.         Knife-Bird's Head Handle


Bracelet with Cicada Motif.     Pheonix & Dragon Plaque.                Fish                        three holes instrument


==================================================================================================


Shang Dynasty, Kingdom Emblem. (A)                                      Shang Dynasty, Kingdom Emblem.(B)

출처:Coo2 net  향고도
 
홍산문화와 한국역사의 뿌리

오정윤(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명지대 사회교육원 문화콘텐츠과 교수)

 

1. 홍산문화의 역사적 지위

만주지역과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통로는 육로와 해로가 있다.

이중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육로와 해로를 모두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유적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우하량유적, 동산취유적, 능원 삼관전자묘지,  요녕 부신 호두구유적이 있다.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근래에 이 홍산문화의 주체를 3황5제의 하나인 전욱고양씨로 보고, 고구려가 고양씨의

후예라는 역사기록에 근거하여 고구려족의 근원을 중국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홍산문화가 주목받는 것은 서기전 3,000-3,500년전 동북아의 고대문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중국학계에서는 80년대까지 황하 중류에서 번영하였던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하는 앙소문화가 황하문명의

원류이지 주류라는 황하문명 일원론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앙소문화의 최대 약점은 국가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의 지표유적인 신전, 제사, 도시유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홍산문화를 이룩한 주체는 고도로 발달한 종교문화와 돌문화, 옥문화, 청동문화를 지닌 종족이다.

공간적 위치와 시기적으로 이 문화를 남길 수 있는 세력은 서기전 28세기에 청구(靑邱)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치우천왕(서기전 2706-2598)의 직계조상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동이문화사에서 홍산문화가 갖는 의미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겠다. 


2. 우하량 홍산문화의 중요성

홍산문화는 1935년에 내몽골 적봉시 홍산후(紅山後)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동북아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문화이다.

출토의 범위는 북쪽으로 내몽골자치구 소오달맹의 오이길목륜하에서 남쪽으로 요녕성 조양지구에 이르며 중국

하북성 북부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었다. 

 

1954년도에 산문화로 명명이 되었고 시기는 서기전 3,000년 전후이다.

1983년도에 능원현과 건평현의 경계지점인 우하량(牛河梁)에서 대표적 유적이 발견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출토유물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가장 대표적인 문화의 내용은 다음의 4가지를 들 수 있다.

1) 산상제단,

2) 적석총,

3) 여신묘,

4) 옥(玉)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이런 유형은 황하문명의 문화원류에 해당하는 대문구, 하모도와는 닮은 형이고, 또다른 황하문명의

원류인 황하중류 앙소문화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동북아지역 신석기문화의 주류에 해당된다.

 

1) 산상제단 : 인간의 생명과 죽음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사상체계에서 산상(山上)은 우주목의 원형이며,

환웅천왕이 하강한 태백산의 후신(後身)이며,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생명수(生命樹), 신단수(神檀樹), 건목(建木),

약목(若木)이라는 신수숭배의 원초적 모습이다.

 

또한 원형제단과 방단제단은 생명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상징을 표현하는 구조물이며 산(山)은 생명이 태어나고

돌아가는 근원으로 이때에 고유한 신교(神敎)의 3원적 세계관과 함께 원방각 이론이 체계화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종교문화는 한민족의 개국신화인 천손강림신화로 이어진다. 

 

2) 적석총 : 고대 동북아 돌무덤의 원형으로 이는 3만 5천년전부터 동북아의 주인으로 군림한 초원의 수렵족들이

남긴 바위새김무늬(암각화)의 후계문화로, 바위가 갖는 불변성(不變性), 부동성(不動性), 융기성(隆起性)의

상징이고, 나아가 산상제단의 변형이며 우주목의 또다른 모습이다.

 

적석총 문화는 돌문화의 시원적 형태로 뒷날 고조선, 부여의 고인돌, 석관묘(돌관무덤), 석곽묘(돌곽무덤),

고구려의 계단식적석총, 석실묘(돌방무덤) 등으로 전승되는 북방민족 고유의 무덤형태이다.

 

3) 여신묘(女神廟) : 여성신은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의 기본특징인 생산과 풍요의 숭배대상으로 여성이 신격화된

당대의 사회징표를 말한다.

홍산문화의 사람들은 원형제단에서 하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방단제단에서 여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이미 신격(神格)의 계통화와 함께 남성 조상신이 천제(天帝)의 위치로 격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여신묘의 얼굴이 위압적이고 근엄한 것은 군림하는 신격의 표시로 볼 수 있다.             


4) 옥문화 : 옥(玉)은 바위숭배를 계승한 영원성과 신비감, 종교적 권위, 정치적 권력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옥(玉)으로 만든 도끼는 왕(王)이란 의미로 발전하여 최고의 통치자로 상징되었고, 뒷날 불변성의 상징으로

금(金)과 함께 보석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바위에서  빛이 나는 옥(玉)을 뽑아내기 위해 바위를 불에 달구는 과정에서 청동(靑銅)이라는

인류최초의 금속을 발견하였으며, 이것은 훗날 청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화발전의 시금석이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특징인 옥문화의 탄생지였다.

 

3. 동산취 유적의 중요성과 의미

동산취유적은 요녕성 객좌현 대성자진 동남쪽에 있는 대능하 서안의 산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유적은 동남향으로

강 건너에 마가자산과 대산산맥이 있다.

 

사방이 평지로 5천 평방미터의 넓이에 방형기단의 건축부지와 원형의 석축제단이 발견되었다.

산상과 석축제단의 발견은 우하량의 돌문화와 천손숭배사상이 우연의 소산이 아닌 이 지역의 대표적 문화징표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아울러 제단의 부근에서 진흙으로 빚어만든 임산부의 여신과 나녀좌상(裸女坐像)이 발견되었는데, 이것 또한

이것은 우하량에서 발견된 나녀소상(裸女小像)과 문화적 친연성이 뚜렷한 지표유물로 천신의 후손이 지상의

생산신(生産神)과 결합하여 하늘+땅+인간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군림한다는 한국형 개국신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옥으로 만든 쌍룡황(雙龍璜), 녹송석으로 만든 올빼미상(鴞像)도 출토되어 홍산문화가 동아시아 옥문화의

원류임을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서 녹송석(綠松石)은 푸른 소나무 잎의 색깔이 나는 암석으로 다량의 구리를

함유하고 있으며,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청동(靑銅)을 생산하는 기본 광석이다.

따라서 서기전 3,500년경에 녹송석을 다룬 이곳의 석공들이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청동을 제련할 수 있는 물질적,

기술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

 

 

 

4. 홍산문화의 여러 유물의 내용

홍산문화는 동북아의 흥륭와유적, 조부구문화를 계승한 사람들이 남긴 문화로 다양한 형태의 유물과 유적이

드러났다.

산상제단과 산상무덤, 적석총과 여신묘, 여신숭배와 나녀상, 그리고 숱한 옥(玉)의 출현이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동물상이 옥저룡과 새, 거북이다.

옥저룡은 옥과 돼지의 결합으로 돼지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우세한 세력을 가졌다는 의미와 함께 돼지의

중요성이 강조된 사회를 말한다.


 

옥저룡 가운데 특이한 유물로 요녕성 건평현 출토의 백옥으로 만든 저룡(猪龍;요녕 건평현)으로 높이는

15 Cm이며, 몸체 너비는 10Cm이다. 형태는 머리와 몸체로 2등분되고, 큰 머리와 두 개의 눈이 특징적이다.

몸에 걸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다.

같은 유형이 적봉시 파림우기 나사태 유적에서 나왔다. 

 

적봉시 옹우특기 삼성타랍 유적의 벽옥룡은 동아시아에서 년대가 가장 오래된 벽옥룡으로 높이는 26 Cm이고,

줄을 꿰는 구멍이 있으며 저룡과 새의 결합이 아주 특이하게 표현되었다.

주변의 옹우특기 광덕공 황곡돈에서 모양이 비슷한 홍옥룡이 출토되었다.


대표적 그릇으로는 적봉시 옹우특기 대남구 무덤에서 출토된 연형도호(燕形陶壺)가 있다.

묘지에서 출토된 그릇으로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며, 목의 둘레에 검은 띠를 하여 제비를 표시하였다.

 

귀가 달려있어 도기의 제작수준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유적지에서 나온 두 귀에 두 아가리를 지닌 홍도호

(紅陶壺)는 물이나 술을 담아 따르기 쉽게 두 개의 주둥이를 만들었지 않나 여겨지며 제사에 사용하였다면

술그릇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5. 주변문화, 주변민족과의 관계

홍산문화를 남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동아시아 초기역사의 주체를 결정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집단은 치우집단을 들 수 있다.

동이족의 주요한 종족이었던 청구, 주두, 고죽 등의 위치도 이곳이고, 서기전 28세기경에 천손사상을 가진 세력은

치우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중국학계가 이곳의 유적을 굳이 전욱고양씨(서기전 2514-2437)와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황제의 아들인 창의

((昌意)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산문화는 황제헌원씨의 선조들이 남긴 문화로 연결된다.

 

전욱고양씨는 산동 용산문화를 일으킨 소호금천씨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20세에 독립하여 공공씨를 누르고 천하의

주인이 된 후 동이족 계열을 핍박하고 동이족 문화를 부정한 인물이다.

[사기]에는 고양씨의 고손(高孫)이 우순이다.

 

한편으로 서기전 28세기경에 동북아에서 홍산문화와 같이 우월하고 뛰어난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북방민족은

오로지 고조선의 선주민인 배달족(동이족)만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우리겨레와 관계된

문화이고,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청구로 천도한 까닭도 이곳의 문화적 수준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하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대문구문화를 계승한 산동 용산문화의 창조자를 소호금천씨로 보는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소호금천씨는 동이족으로 성씨는기(己=활을 만든 종족, 궁=弓)이고 이름은 지(摯)이다.

 

[좌전]에 따르면 산동성 곡부에 도읍을 정하고 관직명을 봉조씨, 현조씨, 청조씨 등 24개의 새의 이름으로 정한

것에서 신조숭배를 하였다.

이로볼때 홍산문화, 대문구문화, 산동 용산문화는 새숭배를 공통으로 하는 동이족 계통의 사람들이 남긴 문화임을

알 수 있다.

 


[서울신문 2006-12-26 10:09]    

[서울신문]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이 한창이지만 동북공정은 요서·요동에서 발굴되고

있는 놀랄 만한 문명을 자기 역사로 끌어들이려는 노림수도 작용하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을 자랑해온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빠른 요하유역 고대문명의  등장에 놀라워했다.

중국 고대 민족인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 문화가 우월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중국 사학계는 ‘황화문명

일원론’에서 벗어나 ‘다원화 구역발전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중국내에 다양한 고대문명이 있었고, 또 다양한 교류를 통해 지금의 중국문명을 이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학계는 다른 시각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요령성 우하량(牛河梁) 지역에서 발굴된 ‘여왕국’에 주목한다.

기원전 25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 유물들은 고조선 등 우리 유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적석총 고분군이 수십개 산재해 있는데다 여신묘에서는 곰의 턱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적석총은 요동반도와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리 민족의 장묘 형식이라는 점에서 우하량의 여신은 혹시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아닐까.

기이하게도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가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과 비슷한 시기다.
이같은 의문을 풀어나가는 학술회의가 27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다.

국학운동시민연합이 주최하고, 국학학술원 등이 주관하는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한 한·중 국제학술회의’에서

‘동이족의 국가기원’이 집중 논의된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중국 내몽고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곽치중 연구원이 ‘우하량 유적에 나타난 여왕국의

실체’를, 중국 대련대학교 한국학연구원 부원장인 유병호 교수가 ‘요하 유역에서 생장 발전한 문명의 현재적 의의’

를 발표한다.

유 교수는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우하량 등 요하문명을 보면 한민족의 선조가

적어도 이들과 같은 문화권이었던 것이 틀림없다.”면서 “계속되는 발굴과 문헌고찰, 유전자분석 등과 같은 종합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또 “요하 고대문명에 대한 발굴은 한국사학계에 한민족의 기원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곧 한민족의 기원과 요하 고대문명의 관계가 밝혀질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김호일 국학학술원 원장은 “비파형동검, 다뉴세문경 등 요하 유역의 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우리의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면서 “우리 민족이 요하 상류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했거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문화공동체를 이룬 증거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Copyrights ⓒ서울신문사  

 



 

이러한 동이족의 玉문화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근세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왔다.

조선시대에 王妃는 玉으로 태교했으며 王이 사용하는 도장은 옥새(玉璽)이며 왕이 앉는 의자는 옥좌(玉座), 왕의

옷인 곤룡포에는 옥대(玉帶),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는 玉을 장식하여 만들었다고 내시내훈(內侍內訓)에

전한다.

민간에서도 귀한 아들이 태어나면 옥동자(玉童子)라고 부르고, 딸을 낳아도 이름자에 玉자를 빼놓을 수 없었다.

사전에는 玉자와 관련된 글자가 무려 451字이며 이들은 모두가 玉이름이라고 되어있다.

옥이 그 만큼 귀하다는 것의 상징이기도한다.

물론 지나족들도 玉을 사랑하여 시신을 매장할 때 몸에 玉을 지니게하였다는 기록이 여러건 있다.

포박자(抱朴子)에는 옥을 시신의 아홉 개 구멍(九竅)에 막으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不朽)고 하였다.

마왕퇴 유골에서도 많은 양의 玉이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으며 연구 결과 옥이 시신의 부패를 막아주는 역활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이 처럼 수천년동안 한民族의 사랑을 받아왔던 玉이 과연 어디에서 생산되었으며 어떻게 가공을 하게되었을까 하는

또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현재 玉의 주요 생산지는 중국의 남부(미얀마) 와 곤륜(崑崙)지역 그리고 일본 정도로 알려지고있지만 최근 학설에

의하면 북미대륙이 베링해에서 아시아대륙과 연결되었을 당시(약 5000년~12000년) 이주민들에 의해서 귀한 玉이

교역되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주장도 제기되었다.

 

또한 학자들이 지금까지 발굴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인 중앙아시아에 추정컨데 상당량의 경질옥이 매장되어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아서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의 남쪽 과 곤륜(崑崙)의 북쪽에는 주로 석유 · 석탄 · 구리 · 금 등이 채굴되고 신강

(新疆) . 내몽골지역은 아직 조사가 충분하지 않아서 알수 없다는 학계의 말이다.

곤륜(崑崙)의 玉은 중국 최고의 玉으로 각광을 받아왔으며 모두가 연옥(경도 6 이하)이라는 보고가 있었지만 최근

곤륜의 서쪽지역에서 네프라이트 · 경옥(硬玉)도 산출되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곤륜산맥 일대의 상류하천에서는 玉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든다고 한다.

수 년전 상고사학회 회원들도 화전(和田)지역에 방문했을 때 곤륜산에서 옥돌이 씻겨져내려 온통 물빛이 우유빛처럼 하얗게 빛났다고 하였다.

마침 화전(和田)은 옛날 이전(伊甸)이라하였던 곳이고 이전(伊甸)은 전설에 의하면 에덴으로 최초의 인류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한다.

그래서 이 물은 부도지에서 말하는 지유(地乳)일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였다고 한다.

 

 

에덴동산의 위치

지명의 변천.

이전(伊甸) → 우전(于窴) → 우전(于闐) → 화전(和田).

이전(伊甸)은 우전(于窴)이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후 다시 글자를 바꾸어 우전(于闐)이 되었으며, 지금은 중국의

신강성(新疆省) 화전(和田)으로 되어있다.

1994년 8월 필자(李重宰)는 상고사학회 회원들과 함께 이전원(伊甸園)을 답사한 일이 있는데, 과연 강으로 흐르는

물이 우유와 똑같은 색이었다.

이전원(伊甸園)은 고대의 낙원이라고 할 만큼 사막과 산들로 둘러 쌓인 가운데 초원이 있었다.

그리고 뽕나무와 백양나무가 울창했다. 수십 억 년 전인지는 모르나 바다나 강변처럼 돌과 자갈이 있었으며,

간혹 모래 위로는 바다에서 서식하는 조개껍질도 보였다.

본래 이전원(伊甸園)은 비단을 많이 짜고 있었으며, 누에를 쳐서 비단실로 옷을 짜는 베틀과 실을 감는 물레도

있었다.

양을 쳐서 양털로 카페트를 만들기도 했으며, 아이들은 가루 흙으로 된 푹신푹신한 길을 맨발로 다니고 있었다.

인류의 기원설을 보면 구약성서의 조자기지상조인(照自己之像造人)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神)의 설에 따르면 나에게 햇살이 비추어 사람이 만들어졌고, 바다에서는 고기가, 공중에서는 새가, 땅위에서는

각가지의 동물이 생겨났으며, 따라서 곤충들이 생겨났다고 되어있다.

사람이 만들어질 때 형상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되어 그후 많은 무리가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 26절 참고) .

 


 

 

부도지(符都誌)에 의하면 지유(地乳)는 선천(先天)시대에 천인(天人)들을 먹이고 자라게하던 신비의 젖으로

마고대성(麻姑大城)에서 처음으로 나와 궁희와 소희가, 또 네 천인(天人)과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길렀다고 한다.

후천(後天)에 와서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오미(五味)의 변을 일으키므로 천인(天人)들이 분거

(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마고성을 완전히 떠나기로 하였는데 청궁(靑穹)씨는 동쪽으로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서쪽으로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남쪽으로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고 이르러 가장춥고 위험한 땅인 북쪽 천산주(天山洲)로 가게되었다고

한다.

북쪽의 천산주(天山洲)라고한 것으로 보아 마고시대는 지금의 인도북부에 있었던것 같다. 

황궁씨가 맏 어른으로써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천산주(天山洲)로 떠나온 것이 한民族의 첫

출발이라고 생각이 들수 밖에 없다.

"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 

<부도지에서...>

라고한 부분에서는 마치 생명의 상징과도 같은 지유(地乳)가 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듯하여 씁쓸하기까지하다.

그러면 玉의 소중함은 마고성을 복본하려던 황궁氏(黃穹氏)의 유속이 전해내려오는 것이란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던 차에 흑피옥사진들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 모양들이 괴상하게만 느껴지는데 의문투성이다. 귀가 쫑긋 솟아오르고 눈이 길게 치솟아올라간 외계인 닮은 모습과 전체적으로 살이 통통하게찐 풍만한 여인의

나신, 남녀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다산(多産)을 의미 한다고한다. 그러면 저 외계인처럼 생긴 반인반수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모두 다리가 굽었을까?

이런 의문들을 뒤로 한 채 나는 흑피옥이 발견된 내몽골의 오란찰포(烏蘭察布)에서 가깝지만 바로 그 후대에

만들어 졌다고 생각되는 홍산문명을 살펴보고 그들문명을 비교해 보기로 하였다.

 

위 그림참조, 링크 참조

결론적으로 흑피옥은 정교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현대 기술에야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신석기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선 옥을 자르는 과정 부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돌을 자를 수 있는 경도가 강한 철 같은 것이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있었다면 옥보다 더 단단한 철광석이나 아니면 아주귀하게나마 철을 발명한 소수 그룹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이 장에서는 다루지 않기로한다. 

일반적으로 처음부터 조각난 옥돌을 물과 연마석을 이용하여 수 십 일간 갈아서 만든게 대부분인것 같고 구멍을

뚫은 것은 그 당시 기술로는 상당히 발달된 수준이었다고 보인다.

玉을 가공하는 기술의 발달은 은허의 부호묘(婦好墓)에서 미완성 옥기들이 출토되었으므로 하(夏) . 상(商) .

주(周) 시대에는 이미 옥을 다듬는 공방이 있었음을 알수 있고 이어서 秦 . 漢代에 옥공방이 있었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옥빛을 감추기 위해서 인지는 알수 없지만 검은색 염료를 입혀서 흑피옥이라고 한다.

옥에 흑피를 입히게된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도 검은색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그 이유인 듯 하다.

환태평양아시아를 놓고 볼 때 환인천제께서 맨처음 자리했던 곳이 북방을 뜻하는 壬의 자리이며 壬은 王권을

상징하기도한다. 검은색이며 물의 시대이며 흑수를 의미한다. 후천수 1과 6을 의미함으로 반드시 시작이 있을

수(數) 이다. 흑수삼위태백(黑水三危太白)이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이 두가지 사실은 흑피옥이 玉문화의 초기단계 즉, 시작단계였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해 볼수 있는 것은 반인반수상이나 다리가 굽은 것은 당대에 실존하였던 것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흑피옥의 염료성분이 최고상한년대 14,000년전 이라는 것이 거짓이 아니며 공룡이 멸종한지 오래되었지만 그

시기까지 어떤 형태로던 공룡이 살아있었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마치 아기공룡둘리 처럼 소형화된 동물이 이 지역에서 인간과 공존했으나 어느 시기에 한꺼번에 동반멸종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아니면 또 다른 가설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 것으로도 보인다.

마테오리치의 구약성서 조자기지상조인(照自己之像造人)편에 인류의 기원설 처럼

" 신(神)의 설에 따르면 나에게 햇살이 비추어 사람이 만들어졌고, 바다에서는 고기가, 공중에서는 새가,

땅위에서는 각가지의 동물이 생겨났으며, 따라서 곤충들이 생겨났다고 되어있다.

사람이 만들어질 때 형상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되어 그후 많은 무리가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 26절 참고) "

이 내용만 따른다면 반인반수 같은 에일리언 조각상도 사실은 곤충에 비교 할 수 있으며 매미의 조각상이나

독수리, 물고기 등 다양한 天 . 人 . 地 사상의 요소들을 집약한 생명체를 무덤속에 넣어두었다는 것과 남녀의

교합상을 넣어두었다는 것은 글자가 없었던 시대에 인간의 사상적 체계를 알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예컨데 陰陽이라는 것은 남녀가 부둥켜 않고 즐거운인상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외설적이고 음탕한 것이아니라 글자가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神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思想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의 의미를 넘어서는 화합과 상생과 조화와 평화의 의미가 담겨져있다고 본다.

그리고 여러가지 동물이나 곤충의 형상들은 天 . 人 . 地 사상을 표현한 것이며 그 자체가 평화롭다는 뜻으로도

보인다.

上上古時代 때 환인씨(8937 B.C)께서 천간지지역법(天干地支易法)을 만들때 天·人·地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한民族의 사상체계는 天·人·地를 기본으로한다.

그런 사상의 기조로 탄생한 것이 경천애인지(敬天愛人地)이다.

 

     <율곤선생님친필 敬天愛人地 >

 

경천애인지(敬天愛人地)의 문자적 구조는 天 . 人 . 地와 대자연의 본체사상을 도입한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 글자 속에 하늘과 인간 자연이 있고 陰 .陽 그리고 다섯 글자인 五行이 있으므로해서  경천애인지(敬天愛人地)

이글은 한民族 삼원일체(三源一體) 사상을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흑피옥문화를 해석해 봄으로서 한民族의 사상과 사유체계가 1만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과 그 유대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반직립상태의 인류가 지금은 존재하지않음으로 인해서 그들의 실존여부는 미스테리로

 남는다.

어쩌면 공룡의 발짓을 흉내 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 예로부터 아이를 업어서 키우다보니 안짱다리가 된 것인지도 모를 일 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흔적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으며 진원지로부터 멀어 질 수록 좀 더 세련된 문명을

접하게되었으므로 그들은 어느시기에 인가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홍산문명과 사해문명이 그 뒤를 이어 받았으며 흑피옥을 만든 사람들은 사라졌다.

주역에 약 6천년을 주기로 우주가 대격변을 한다는데 그들이 사라진시기가 바로 그것이던가?

1만2천년전 남태평양상에 무우대륙이 존재했었다는 고대인도 사원의 기록으로 남긴 전설을 인용하자면 마고시대와

일치하는 점이 많다. 그리고 1만2천년전을 先天이라고 보았을때 伏羲氏가 태어나게되는 6천년전은 後天이 되는

것이다.

후천시대에 伏羲氏가 龍의 화신으로 한民族史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龍의 시대가 문을 열게된다.    
 
이러한 시시콜콜한 의문도 역사의 미스테리를 풀기 위한 여한 때문에 기록으로 남긴다.

(계속)

 

이글은 현재 완성된 글이 아님으로 언제 고쳐질지 알 수 없습니다. 퍼가실 분은 고려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