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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고조선 유물관련글-신완순님 작

설레임의 하루 2011. 12. 6. 11:00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짚신할미 2011.12.05.   http://cafe.daum.net/mookto/GUJC/3737 

 

 

 

 배달/고조선 유물관련글-신완순님 작

필자는 우리의 고대 역사를 주로 연구하여 왔으며 우리 고대사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배달/고조선 유물 관련

글을 싣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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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계의 고대 역사를 논하면서 소위 세계 4대 문명이라 일컫는 이집트의 나일강 문명,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인더스 문명, 중국의 황하 문명 등을 흔히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 4대 문명이라 부를 만큼 문명의 영화(榮華)를 증명하는 많은 유적지와 유물 등이 위 지역에서 발굴되었으며 문자와

공예 기술 등 뛰어난 문명을 자랑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아직도 역사와 고고학계의 일부에서는 위 4대 문명이 꽃피울 시기에 우리의 선조들이 나뭇잎이나 줄기로 인체의 중요 부위를

가리고 돌도끼나 나무 막대기를 들고 들짐승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면서 움막집에서 살아가는 선사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그려놓아 이 시대의 우리 조상들을 마치 원시인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발굴되는 비파형 동검만이 위 4대 문명 몇 천 년 후에 나타난 문물로서 우리의 본격적인

부족국가의 형체를 갖춘 것으로 보고 있다.

학계의 이러한 관점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9천 년 전부터 이어온 한국(桓國)과 배달(倍達) 그리고 고조선을 이어온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감추어진 사서의 발굴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근래(近來)에는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이 시대의 문명이 세계 4대 문명보다 앞서는 뛰어난 문화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입증하기 위하여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대로 된 역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선 그 시대에 살았던 유물의 존재가 확실하게 드러나고 밝혀져야 한다.

아시아를 뛰어넘어 세계를 아우르는 실체가 있었다면 그러한 유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실체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이제는 밝힐 때가 되었다.

녹슬고 케케묵어 보이는 아래 고철덩어리를 한번 보라.



위 사진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이 한 장의 사진이 인류의 고대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 

 



위 유물은  38(통고, 높이) X 39(통장, 길이) 무게 3.3kg의 봉황의 모습을 형상화한 향로(香爐) 또는 훈로(薰爐)이다.

위 유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봉황의 전체 몸통과 봉황이 깔고 있는 원형의 받침대(?)와 향로의 뚜껑 이렇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몸통 위 봉황의 머리를 확대한 모습. 봉황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나올 것 같다 


                                    봉황 향로를 셋으로 나눈 모습 

 


                          용(龍)이 새겨진 봉황 향로 뚜껑의 모습, 가운데에 양쪽으로 용 두마리가 새겨져 있다. 


                                       뚜껑 중앙을 확대한 모습. 양쪽으로 용 두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향로 몸통에 새겨진 물고기 문양

위 유물은 언제 무엇으로 제작되어 누가 사용한 것이며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38(통고, 높이) X 39(통장, 길이) 무게 3.3kg의 용 두 마리가 새겨진 뚜껑을 가진 봉황의 모습을 형상화한 위 향로(香爐)가
세계 역사를 뒤바꿀 수 있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왜 무엇 때문에 가능한 일일까?
그 이유는 이 봉황 향로의 제작 시기와 재질 그리고 형상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비밀을 하나씩 밝혀낸다.

1. 봉황 향로의 제작 시기
이 봉황 향로를 소장하고 있는 소장자는 수십 년 동안 기원전의 고대 유물에 관련된 일에 종사해 왔으며 다수의 고대 청동기, 옥기,

도자기 등을 소장하고 있다.

유물 소장자는 이러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 봉황 향로의 부식 정도와 출토 지역 등 여러 가지 점을 감안하여 제작된 시기를

대략 4,5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정확한 탄소연대 측정을 하면 그 시기는 가감될 수 있다.

기원전 2500년경의 우리 역사를 기존의 역사 상식으로 풀이하면앞서 얘기한 돌도끼와 나무막대기를 들고 사냥과 어로활동을

하던 소위 선사시대에 이러한 봉황 향로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기원전 2500년경의 시대는 대략 치우천왕 통치 시절(BC 2707 치우천왕 등극)이후 고조선이 건국(BC 2333)되기 전의 배달국 후기

시대이다.

2. 황금봉황 향로
위 봉황 향로는 황금으로 제작되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필자가 처음 기사를 올릴 때부터 청동기 유물로 추정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다음 사진을 보자.


                                                                  봉황의 받침대 밑 부분


                                                 받침대 일부 녹을 제거한 사진. 위쪽 붉으스레 보이는 부분

                          

녹을 제거한 부분을 확대한 사진  


겉에 붙은 녹을 제거해보니 약간 붉은 색을 띤 황금 재질이 보인다.
붉은 색을 띠는 건 금(金) 속에 있던 철(鐵) 성분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산화되어 생긴 흔적이다.

엄청난 파격이다.
돌도끼나 나무막대기를 들고 사냥을 했었을 시기에 황금으로 봉황 향로를 만들고 용을 새겨 뚜껑을 사용했다면 세상이 뒤집히고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는 대사건이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기원전 20세기 이전에 황금으로 된 유물이 여태껏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나온 일이 없기 때문이다.

3. 개천과 천손민족을 상징
이 황금 봉황 향로는 우리 민족의 개천(開天) 사상과 천손민족 사상을 상징한다.

봉황의 받침대처럼 보이는 아래에 있는 둥근 형태의 모습은 하늘의 태양이다.
하늘의 해 즉 알을 깨고 힘차게 날아오르려는 봉황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몽과 혁거세 등 우리 선조들이 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유물이다.

또한 몽골의 테무진이 징기스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유가 사흘 동안 오색의 봉황이 울어 그 상서로움을 따서 ‘징기스’라고 했다는

이유도 알만하다.

  

우리가 보통 금(金)이라고 하면 황금(黃金) 즉 Gold를 가리킨다.

고대에는 쇠붙이(금속류)의 총칭으로 금(金)이라 하였다.
<이아(爾雅) 석기(釋器)>에 따르면 금 즉 황금을 탕(璗)이라 하였고 황금 중에서 뛰어난 것을 료(鐐)라 한다 하였다.
또한 백금(白金)을 은(銀)이라 한다 하였다.
백금(白金)이란 말은 요즈음의 백금(Platinum)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흰 색의 쇠’라는 말이다.

<상서(尙書)>와 <전한서(前漢書) 식화지(食貨志)>에서 금과 은 그리고 동(銅)이 금속류의 삼품(三品)이며 금이 상품(上品),

은은 중품(中品), 동(銅)은 하품(下品)이라 하였다.
또한 적금(赤金)은 ‘붉은 색의 쇠’라는 의미로서 동(銅) 즉 구리를 가리킨다.

필자가 위 유물을 황금 봉황 향로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면 이해할 것이다.

금동(金銅)은 구리로 된 재질 위에 황금(黃金)으로 도금을 하거나 금박을 입힌 것을 말한다.
중국의 하(夏)나라를 세웠다는 우(禹)가 “구목(九牧)의 금동(金銅)으로 정(鼎)을 주조하여서(하략)”라는 구절은 <춘추(春秋)>의

어느 구절을 보아도 금동(金銅)이라 말은 나오지 않는다.

만약 다른 서책에 이러한 문구가 있었다면 “금동(金銅)으로 정(鼎)을 주조하여”라는 말보다는 “쇠와 구리로 정(鼎)을 주조하여”라는

말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기원전 2천년 전후에 중국에는 금동(金銅)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황금이나 금동으로 정(鼎)을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필자가 앞으로 언급하는 글을 읽으면 수긍할 것이다.

위 <배달 황금 용개(龍蓋) 봉황 향로(香爐)>는
기원전 2500년 전의 배달의 유물이다.
과연 이 시대에 황금으로 유물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필자는 충분하였다고 단언한다.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史記)> 권1의 주석에서 배인(裴駰)은 “치우(蚩尤)는 옛 천자(天子)였다(蚩尤古天子).”고 하며
관자(管子)는 “치우가 노산(盧山)에서 쇠를 캐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蚩尤受盧山之金而作五兵).”고 하였으며

장수절(張守節)은 “치우의 형제는 81명이며 모두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있으며 모래를 먹고 다섯 가지 무기를 만드니 도(刀).극(戟). 대노(大弩) 등이며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

蚩尤兄弟八十一人並獸身人語銅頭鐵額食沙造五兵仗
刀㦸大弩威振天下).“라고 하였다.

<삼성기(三聖紀)>에서도 치우천왕은 “신령스런 용맹함이 매우 뛰어났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아홉 곳의 야금소(冶金所)를 만들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兵器)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종합하면 기원전 2700년경에 이미 구리와 쇠를 캐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제련소와 같은 곳이 아홉 군데나 있었다.
이는 오래 전부터 금속을 주조하여 제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술과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금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금속 중에서 상품(上品)에 속하는 것이며 이를 제작하여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당 시대의 패권을

차지한 최고의 권력 집단만이 사용할 수 있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라고 하였으니 배달의 최고 통치자임이 분명하고 개천(開天)을 상징하는 봉황 향로를 제작하였으니 당연히

우리의 선조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황금 봉황 향로를 기원전 2500년 전후로 제작된 시기로 추정한다면 치우천왕 이후에 축적된 금속의 제조 가공 기술이

전해져 왔기 때문에 가능하며 천하의 패자(覇者)인 천자(天子)가 황금으로 만든 봉황 향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후에 소개할 고조선의 황금 유물도 마찬가지이다.

엄청나게 뛰어난 예술적인 감각과 조형미를 갖춘 세계 최고 수준의 휘황찬란한 고조선의 황금 유물을 소개할 예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