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스크랩] 단군조선 고고학 자료

설레임의 하루 2012. 1. 15. 12:57

 

 

 


[단군조선 고고학 자료]



고구려의 조상 고리족의 고등(고씨의 시조는 농업과 산업을 크게 발달시킨 신시배달국의 고신씨다)의 손자로, 21대 소태 단군천황을 군사력으로 위협하여 단군천황에 오르려 했던 수유족의 서우여를 제압하고 22대 단군천황에 올랐던 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3년 전에 조부 우현왕 고등이 귀방(오르도스)을 멸망시켰다고 했다. 

번한(고등)의 단군조선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웠던 곳이 은나라 역사인 은기殷紀 중의 녹방鹿方이다. 춘추시대에는 악방鄂方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오르도스 고원이다.  

섬서성陝西城의 녹주鹿州는 지금 부현富縣이 되었는데 bc7세기에 단군족인 백적白翟인들이 살던 곳이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中山國으로 동천하였다. 녹주鹿州는 연안延安의 남쪽 마을이었다. 이 백적인들이 bc637년에 주周나라와 통혼까지 하였고,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bc476년 이전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웠다.

중산국은 단군족의 나라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 임금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翟后였다. 그런데 적녀翟女는 귀씨鬼氏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군대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鬼方人들이다. 
 

오르도스鄂爾多斯문화의 중심인 나린탑納林塔 주개구 문화朱開溝文化가 있다. <단군세기>에서 23세 단군 아흘 임금 때에 주개周愷에서 여러 제후들이 회합했는데 혹시 주개구일 수도 있다. 나린탑은 오르도스 고원의 동부로서 황하와 가까우며 고대에는 하남河南이라고도 하였다. 탑塔은 오르도스 고원에서 마을을 의미한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오르도스 문화 스키타이 장식. 신수도, 씨름도 청동패, 와각식 청동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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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르도스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검을 북방식 양식이라고 하는데 위와 같다. 단 왼쪽의 방울장식, 사슴머리 장식, 오른쪽의 고리 장식 등은 요녕성의 법고시 정가방 만류가 유적지와 요녕성 흥성시 양가향 유적지, 하북성 청룡현 초도구 유적지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와각식 청동검은 길림시에도 나타난다. 즉 후기의 것이다.

음산 암각화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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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 암각화 모음


단군조선족이 활약했던 내몽골 음산陰山 산맥의 남쪽은 하투河套라고도 하는데 황하의 최북단으로서 산서성과 섬서성의 북단이 교차한다.
음산문화陰山文化는 암각화巖刻畵 문화다. 음산에는 수없이 많은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암각 인물화의 특징은 부엉이형 조두鳥頭 얼굴이 있다. 호두구 문화 옥기에 다량의 부엉이 옥장식이 있었다. 부엉이형 얼굴을 태양신의 얼굴로도 해석한다. 천명현조天命玄鳥 항이생상降以生商라는 은(상)나라의 전설과도 이어지며, 상나라의 청동기물 중에 부엉이잔鵂尊으로 이어진다.

은(상)인商人을 조이鳥夷족이라고 하며 상인의 시조신은 요순시대 순舜 임금인데, 순은 단군조선의 신하 유하의 아들이다. 음산 암각화의 태양도와 강소성 연운항의 태양제단 태양석의 암화가 일치하며, 이것이 동경銅鏡의 태양문, 기하문 동경으로 발전하고 옹고트의 卍자 부호로 이어진다.

아래는 번조선 제후국 낙랑국의 낙랑성 (녕성 남산근)의 청동기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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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근 유물들. 3발 제기용기 등 맨 아래는 갑골에 새겨진 쌍마 수레..
이 무렵에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 청동검 2식이라고 한다. 주로 영성 남산근과 난하에서 나온다. 청동검 끝에 동물무늬 장식을 한 것으로서 남산근과 하북, 융화 등 난하 유역에서 나오는데 수병식(獸柄式)이라 한다.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33대 단군 감물甘勿  임금은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웠다. 단군묘라고도 했다.한편 옹고트 북쪽 삼성타라三星塔羅에서 대형 옥룡이 발굴되었다. 옹우특기현의 상징이 되었는데 길이 26cm이었다.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삼성사였던 삼성타라 옥룡과 영고탑성이었던 해방영자 봉황 그릇(마한의 상징인 봉황은 bc4800년전 조보구 문화 시대 작품이다.)

아래는 요하지역 적봉시 하가점의 상층문화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영고탑 시대의 유물들이다.

적봉시 하가점 상층문화유물-
이 곳에서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 청동검 중군 형식이라고 하는데  주로 창에 끼우는 것이다.공병식([]柄式; 구멍에 끼우는 형)이라 한다. 주로 노합하 영성 남산근에서 나오고 극시극등기, 파림좌기, 옹우특기, 우하량 북쪽까지 나온다. 영고탑 시대 유물로 보면 된다.

22대 색불루 단군천황 때에 남이藍夷의 남국藍國이 강성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여 은나라와 가까운 엄독홀掩瀆忽에 있었는데 지금의 석가장시石家庄市)로 고려된다.  석가장 동남 난성栾城이 바로 남국 위치로 고려되며 그 북쪽 고성藁城의 묘자리에서 철인 동월이 나온 것이다.

 

남이국은 본래 북경시 동북 난하灤河의 난평灤平(지도표시)에 있다가 남쪽 석가장 난성栾城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석가장 서북 영수현靈壽縣의 고성에는 훗날 주나라 때에 마물 단군과 왕실끼리 결혼하면서 중산국中山國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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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시 출토 청동인월과 청동제기

홍산옥기


여기서 철인동월과 함께 나온 유물을 살펴 보면 색불루 단군시대의 문화 양상을 알 수 있다. 의료기로서 외과 수술용 돌칼이 나왔다. 이는 수술 뿐 아니라 침구 치료가 이미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또한, 세계 최초 비단이 나왔고, 마직품麻織品이 나왔다.

 

홍산문화 옥 조각 중에도 누에를 신처럼 모시는 여인상들이 보인다. 그리고 술을 빚기 위한 양조용 효모가 대량으로 나왔다. 고성이 은나라와 가까우니 은나라 문화일 것이며, 단군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은나라 문화라면 은나라 유적지 전반에서 저와 같은 유물들이 나왔을 것이다. 단군조선의 문화이기에 지나 땅 안에서 외로운 섬처럼 세계 최초의 선진 문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3신1체 사상으로 3을 중시한 단군조선/ 단군조선 지역에 나타난 최초로 3발 달린 대형 청동기물은 떡을 만드는 시루다. 이 떡시루가 발굴된 지역은 고대 지나인들이 만리장성을 쌓고 오랑캐 땅으로 매도했으나, 현재는 고고학적으로 황하문화을 낳은 만리장성 동북 요하 상류지역 시라무렌강 부근인 천보동 天寶洞에서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서 조나 보리를 주로 농사하였을 것인데, 역시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천보동 지역은 시라무렌강 상류로서 보통 해발 1000m인데, 이 강변은 해발 700m로 일정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요나라는 이 곳에 요주성饒州城을 세웠다.

비파형 청동검이 주로 나오는 곳은 3조선 중에서 거의 번조선 영역이다. 색불루에게 황권을 빼앗기고 번한에 임명된 서우여의 번
조선은 종교의식으로서 천단天壇을 세웠는데, 소위 고인돌, 대석붕大石棚 제도가 그 흔적이다. 고인돌을 세운 건 서우여가 한반도를 다스린 마한 단군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석묘 그리고 서우여가 번조선 단군에 즉위한 후로는 단군 대신에 기자奇子 또는 천왕天王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그래서 이 때부터 기자奇子조선이라 불렀다. 그리고,흉노가 기자조선에 조공하고 신하국이 되겠다는 이유가 될 것이다.


흉노는 지나인들의 표현이고, [환단고기]기록으로는 수유족이 맞을 것이다. 고리족 색불루 단군천황으로부터 수유족 서우여가 단군천황직에 오르지 못하고 번조선 단군에 임명됨으로써 수유족은 단군조선에서 이탈하여 초원세력으로 독자세력을 형성하였고, 서우여만을 단군임금으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선우(서우여)을 중심으로 좌.우현왕제를 초원제국을 경영했다 할 수 있다. 좌.우현왕제는 색불루 이전의 단군조선의 통치제도이기 때문이다.

지나대륙을 차지하기 전에 청나라의 수도였던 심양에서는 아래와 같은 기자奇子조선 시대 번조선 단군의 고분 발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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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 정가와자 유물.기자 서우여 시대의 복장과 청동검, 청동검 손잡이 타격석, 다뉴동경, 쌍월식 구리돈 붕朋 , 아래 청동검은 위에 있는 것임.
서우여 번조선(기자조선)의 특징적인 문화는 바로 비파형 청동검과 다뉴동경多紐銅鏡, 그리고 천단, 즉 고인돌이다. 은나라 동경은 고리가 하나인데 반하여 번조선의 동경은 고리가 둘이므로 다뉴동경이라고 한다.

 

번한의 관내인 의현義縣에서는 비파형 청동검이 6개 발굴되었고, 부신시 자도대  호두구 유지에서는 3개의 비파형 청동단검 석곽묘와 석성이 발굴되었다. 대집둔 험독성險瀆城의 서쪽 오금당에서는 청동단검 4개, 또 서쪽인 흥성시 양하향에서는 은말 시기의 환수청동도 등 청동도 4개가 발굴되었다.

 



[사료:환단고기]22대 단군 색불루(고리족KOREA족)/색불루 단군천황 초상화(김산호 화백)

소태 52년, 을미년(B.C 1286): 우현왕(右賢王-豆幕婁=번한) 고등(高登)이 죽고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이 되었다. 색불루가 왕이 되자, 마한(馬韓)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해성(海城)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소태 임검이 나라안을 순행하다가 남쪽 해성(海城)에 이르러 부로(父老)들을 모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이어 5가(五加)의 욕살들을 불러 이들과 함께 황위를 물려줄 의논을 하며 말하기를, "늙어서 부지런히 일할 수 없다." 하고 정사를 서우여(徐于餘)에게 맡기려 하였다. 이에 살수(薩水) 100리를 봉하여 섭주(攝主)로 삼고, 호를 내려 기수(奇首)라 하였다.


우현왕 색불루(索弗婁)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임검이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우현왕은 좌우 신하들과 사냥꾼 수 천명을 군사로 징집, 편성한 후 이들을 거느리고 즉위하여 제위(帝位)를 찬탈하였다.


임검은 할 수 없이 옥책, 국보(玉冊, 國寶)를 전하고 서우여의 왕위를 폐한다는 조칙을 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임검의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로서 임검은 갈 곳을 잃고 아사달에 숨어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개천(開天) 2613년(병신년): 색불루 원년, B.C 1285, 유약한 선제(先帝) 소태임검을 쫓아내고 군사혁명에 성공한 색불루는 중앙권력의 중심지를 백악산(白岳山)으로 옮겨 가려 하자, 많은 제후와 신하들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등이 임검의 조서를 받들어 이들을 설득하고 모두 복종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해 정월 우현왕 색불루(索弗婁)는 녹산(鹿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고 정식으로 쥬신제국의 제22세 대단군위(大檀君位)에 올랐다. 이 곳을 백악산(白岳山=장춘) 아사달이라 하였다. 단제는 곧 맏아들 아홀(阿忽)을 태자로 세우고, 명(命)을 내려 녹산(鹿山)을 수축(修築)하고 관제(官制)를 고쳤다.


3월, 임검이 조서를 내리기를,“선제(先帝)께서 저번에 아사달로 사람을 보내와 옥책과 국보(玉冊, 國寶)를 전하며 나라를 사양하였다. 그러니 먼저 임검이 높임을 받을지라도 이 나라 안의 모든 산천의 이름을 적은 문서는 이미 나에게 있다.하늘에 제사 드리는 예(제천의식-祭天儀式)는 나라법에 있으니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옛 규범을 따라 정성껏 공을 드리고자 하는 자는 지금 마땅히 심신을 재계하고 신역(神域)을 깨끗이 하며 제물을 정결히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임검이 날을 가려 7일 동안 재계하고 향과 축문을 여원흥(黎元興)에게 내려 주었다. 16일에 이르러 여원홍이 백두산 천단(天壇)에서 제사를 드릴 때의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소자 단군 색불루(索弗婁)는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나이다.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먼저 자신부터 그 영향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여 스스로 경건하게 하늘을 공경하며 제사하도록 하겠나이다.지금 저는 삼신(三神)의 밝은 명을 받아 넓은 은혜와 큰 덕이 삼한(三韓) 오만리(五萬里) 땅에 이미 베풀어져서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는 은혜를 함께 누렸나이다. 그러기에 여원홍(黎元興)을 보내어 삼신일체 상제의 단(壇)에 올리나이다.


정결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오니 몸소 제물을 받으시고 묵묵히 도우시어 새 임검(壬檢)의 등극을 빛내주소서. 세세토록 삼한(三韓)이 보전되어 천만년 무궁토록 제국(帝國)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고 해마다 곡식이 풍년이 들어 나라가 부강하여지고 백성이 많아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 자신이 나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만물을 보전하는 지극한 뜻을 밝히게 하소서.” 라 하였다.

풍기문란을 단속하고 국가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금8법禁八法'을 만들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을 죽인 자들은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상한게 하는 자들은 곡식으로 갚고, 도둑질한 자들은 종으로 삼고, 소도(제단)를 훼손한 자들은 금고에 처하고, 예의를 잃은 자들은 군대에 복무케 하고, 일하지 않고 게으른 자들은 공사에 징발하며, 간음한 자들은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꾼들은 진심으로 참회하면 용서하고 훈방한다."

5월에 삼한을 삼쥬신[三朝鮮]으로 고쳤다. 신한(辰韓)을 신쥬신[眞朝鮮]이라하고 임검(壬儉)이 직접 다스리며 삼한 모두를 관할하였다. 마한(馬韓)땅을 막쥬신[莫朝鮮]이라 하여 여원홍(艅元興)에게 맡기고, 서우여(徐于餘)에게 변한(卞韓)을 맡기고 불쥬신[番朝鮮]이라 하였다.


임검이 해마다 2월이면 마한에 가서 머물면서 백성들이 근면하도록 하였으며, 곡식을 많이 바치던 폐단이 없어 졌다.


가을 9월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묘(廟)를 세우고 부왕(父王) 고등왕(高登王)께 제사하였다.


11월에 단제(檀帝)께서 순종을 거부하는 은(殷)나라의 반란을 응징하기 위하여 친히 9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은나라도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저항해 왔으므로 여러 차례 싸워 적을 격파하고 은(殷)나라 도읍을 점령하였다. 이에 은나라 왕이 항복하고 잘못을 빌어 화친할 기회를 주었는데 이들의 마음속에 거짓이 있었으므로 또 다시 크게 싸워 파멸시켰다.


이듬해 2월에는 도주하는 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하상(河上)에 이르러 승전(勝戰)의 하례를 받고 불쥬신[弁韓-卞朝鮮]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산동지역) 땅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들에게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威勢)가 크게 떨쳤다.


색불루 6년, 신축년(B.C 1280): 신치(臣智) 육우(陸右)가 아뢰기를,“ 아사달(阿斯達/당시 장춘)은 천년동안 도읍할 땅은 틀림없으나 대운(大運)이 이미 다 갔으며, 영고탑(寧古塔)은 왕기(王氣)가 서려있어 백악산(白岳山)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청하오니, 성을 쌓고 도읍을 옮기시옵소서.” 하니, 임검이 “새 도읍에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가겠는가?” 하였다.


이 해 은(殷)나라의 왕 무정(武丁)이 아사달(당시 장춘)을 방문하여 색불루 단군천황을 배알(拜謁)하고 지난 날의 반란사건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신 것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하고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조공물(朝貢物)을 바쳤다.


색불루 10년, 을사년(B.C 1276): 10월에 누런 안개(黃露)가 끼었다.


색불루 20년, 을미년(B.C 1266): 이 때에 남국(藍國)이 제법 강해져서 고죽군(孤竹君)과 함께 여러 적들을 쫓아 내고 남쪽 엄독홀(奄讀忽)을 정복하였다. 이 곳은 은나라 국경과 가까워 여파달(黎巴達)에게 군사를 나누어주고 나아가 빈(븜), 기(ゾ)를 점거하고 그 유민들과 결합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여(黎)라고 하였다.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 사니,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임검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의 남쪽지방까지 미쳤다.


색불루 36년, 신미년(B.C 1250):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임검이 잠시 영고탑(寧古塔)에 피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영고탑에 이주하여 살게 되어 동북 지방의 큰 도시가 되었다.


색불루 48년, 계미년(B.C 1238): 임검이 영웅적인 전설을 뒤에 남기고 세상을 버리셨다. 황태자 아홀(阿忽)이 뒤를 이어 황위(皇位)에 즉위(卽位)하였다.

[사료]해(광명)를 상징하는 흰색을 숭상한 부여는 황금의 나라





 

 

 

 

 

[해머리땅의 돌검은 세계 검들의 원형]

 

http://blog.daum.net/arongidarongi/11967091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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