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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훈민정음 해례본 이야기

설레임의 하루 2011. 10. 7. 17:08
   

 

 

훈민정음언해본 , 해례본 , 예의본 으로 나뉘어 집니다.

 

 

언해본 ( 言解本 ) 이란 ,  " 말을 번역하다"  란 뜻으로 훈민정음을 처음 만들때는 한자로 된 책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다음에 그 책을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번역한 책을 바로 언해본이라고 합니다.

 

해례본 이란 훈민정음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각 음운들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적은 책입니다.

"ㄱ"  이 어떤 소리로 발음되는지   "ㄴ , ㄷ ~ ~"  의 글자가 어떤 입모양에서 어떤 발음으로 소리가 나는지를 적은 책입니다. (안동 와룡에서 발견)

 

예의본 이란 훈민정음을 만들때에 무슨 까닭으로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세종대왕이 직접 아래와 같이 적은 책입니다

 

 

지금의 우리말로 쉽게 풀어 드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글자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이 배우고자 해도, 제대로  뜻을 담아 이루지 못하니 ,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믈 여덟자를 만들어 놓으니,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익혀 씀에 나날이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국 보 제70호로 지정되어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8월 경북 안동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국어국문학계는 일제의 굴욕 속에서 민족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중이었고, 특히 민족의 글자인 한글의 제자 원리에 대해서는 이해에 곤란을 겪고 있던 터라, 학계에 제공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런 곤란을 해소할 단서가 되어 수년 가뭄에 단비가 된 격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사의 뒷면에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처 경위에 대한 진실이 가리어져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첫 장이 연산군 때 훼손되었고, 그것이 500년 동안 고서 더미에 가려 있다가, 한 수집가에 의하여 수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러나 이 책은 본디 조상의 문헌을 소중하게 간직한 한 가문의 노력에 의하여 아무런 훼손 없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왔는데, 이 책이 외부로 빼돌려지는 과정에서 출처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첫 장이 훼손되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본디 소장되었던 장소마저 왜곡되었다. 이 결과 오랜 세월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간수해 온 당사자는 외면당하고, 문화유산을 빼돌려 훼손한 사람이 도리어 공적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그 실상과 전말을 알리어 훈민정음을 500년 가까이 소장해 온 광산 김씨 긍구당(肯構堂) 가문의 노력을 세상에 알리고, 이 책의 출처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Ⅰ. 재고 동기

필자는 20년 전 안동대학(한문학과)을 다니던 1983년 10월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 몇 사람과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의 동기생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고색창연한 긍구당이란 사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친구의 부친인 김 대중 어른으로부터 해묵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분실 경위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그때는 무심코 흘려들었다.

그리고 10년 뒤 고향 안동을 떠나 부산 동래여고에서 근무하며 우연히 훈민정음에 관한 글을 보게 되었다. 그 글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동군 와룡면 주촌에 세거하던 진성 이씨 이 한걸(1880~1951) 님의 소장본이며, 이 책으로 인해 우리 나라 국어학자들이 한글의 제자 원리를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문득 의문이 일었고, 내용의 전후 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곧바로 김 대중 어른께 편지를 내어 그 내력을 문의하였다.

그 랬더니 이 어른께서는 친절하게도 그간의 경위를 소상하게 적어 답장을 보내 주시었다.

답장을 받고는 그 동안 학계에 알려진 내용과는 다른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고, 이 사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 대중 어른의 말씀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로부터 또 10년 세월이 지난 2002년 초봄에, 한글 학회 이사인 박 지홍 선생을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관한 자문을 하였더니, 이 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고 하시며, 허 웅 회장님께 말씀 드려 볼 테니 관련 자료를 빨리 정리해 줄 것을 요청하셨다.


Ⅱ. 발견 경위에 대한 기존의 학설

학계 및 사회에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의 발견 및 입수 경위에 관한 설은 다음과 같다.

세간에 알려진 최초의 설에 따르면,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1940년 8월에 의성의 어떤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안동고교에 재직하던 정 철(본명: 휘만) 교사가 1950년에 '국어국문학'에 「원본 훈민정음 보존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글에서 이 책은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살던 후촌 이 한걸 님의 세전 가보인 것으로 알렸다.

이 후, 정 휘만 님이 1954년에 '국어국문학'에 다시 쓴 「원본 훈민정음 보존 경위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김 민수 님의 '주해 훈민정음', 서 병국 님의 '신강 훈민정음', 안 춘근 님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지학적 고찰」 등에서도 대략 아래와 같이 내용을 보완하여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른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는 다음과 같다

 

1)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살던 이 한걸 님의 3남인 이 용준(1916~?) 님에 의해 본가에서 1940년 8월에 발견되었다.

그 당시 이 용준 님은 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 수학하며 김 태준('조선 한문학사'의 저자)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자기 집에 귀중한 고서가 다량으로 있다는 말을 김 교수에게 하였고, 그로 인하여 훈민정음 원본은 500여 년을 책 더미 속에 고이 묻혀 있다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2)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장하여 보존한 경위는, 진성 이씨의 선조 중에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분이 있어 세종대왕께서 상으로 하사한 것을 집안에 대대로 전하여 오다가, 연산군의 언문 탄압 때에 그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첫 장을 뜯고 뒤집어 뒷면에 다른 내용의 글을 써 두어 이 수난을 피하였다.

      3) 이 책을 발견한 후, '훈민정음 해례본'에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김 교수와 이 용준 님이 합작하여 한지를 쇠죽솥에 삶아서 그 첫 장과 둘째 장을 원본과 비슷하게 고색창연하게 꾸몄는데, 조선 미술 전람회 서예 부문에 입선한 적이 있는 이 용준 님이 안평대군의 글씨체에 장기가 있었으므로 목판본의 서체를 직접 필사하여 완성본을 이루었다.

      4) 그리고 며칠 후, 두 분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몇 권의 불경 책을 가지고 상경하였고, 김 교수는 당시 고미술품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던 간송미술관 주인인 전 형필 님에게 책을 인도하고 그 사례로 이 한걸 님 부자는 거금 삼천 원(필자 주: 당시 논 1마지기 값이 100원임.)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소개한 김 태준 교수에게는 그때 함께 구입한 불경 책과 다소의 사례금이 주어졌다.


이상의 내용이, 대체로 지금까지 학계 및 사회에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고 그것이 전 형필 님에게 인도된 경위이다.

 

Ⅲ. 기존의 발견 경위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를 전하는 기존의 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출처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의문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진성 이씨의 선조 중 여진 정벌에 공이 있어 세종대왕이 하사한 것’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이 용준님은 진성 이씨 주촌종파의 후예이다. 그의 선조 중 세종조에 여진 정벌에 공이 있는 분은 이 용준 님의 19대조이며, 퇴계 이 황 선생의 증조부인 이 정 공을 말한다.

증 손인 퇴계 선생이 쓴 「증조고비묘갈지」에 따르면, “증조부는 세종 때에 최 윤덕 장군을 따라 북쪽 오랑캐를 토벌한 공이 있어 음직으로 영변판관을 거쳐 한산․선산 부사 등 세 고을을 살았고, 세조 때 원종공신에 녹선되었다.”고 한다.

그 러나 이 정이 공훈으로 공신이 된 것은 세종 때가 아닌 세조 때이며, 이 정에 관한 어느 문적에도 서책을 하사 받았다고 적혀 있지 않다.

또한 퇴계 선생도 「묘갈지」에 다른 사소한 일까지도 자세하게 언급을 하였는데, 임금이 책을 하사한 이같이 중요한 일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더구나 진성 이씨 족보를 살펴보면 이 한걸 님 부자는 주촌종파는 맞으나 종손이 아니므로, 이 내사본을 자신의 집에 소장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2. ‘군공을 세워 서책을 하사 받았다’는 부분에 대하여

조 선 시대에 군공을 세운 공신이 임금이나 국가로부터 하사를 받는 물목은 대개 노비나 토지 또는 마필이나 비단 등이 상례였다. 그런데 서책을 하사 받았다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다.

더구나 임금이 하사하였다면 이 영광스럽고 대단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그에 관한 기록이 남을 터이고, 이 서책에도 관련 표기가 명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사본과 관련되어, 어떤 서책이나 문헌에도 명시된 것은 없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하사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3. ‘연산군의 언문 탄압으로 첫 장을 뜯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 훈민정음 해례본'의 뜯긴 부분은 세종대왕 어제 서문과 정음의 발음 풀이 등 모두 두 장이다.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은 본디부터 한문으로 적혀 있고 글자 발음 풀이에도 정음은 몇 자만 적혀 있을 뿐이다. 언문 탄압에 뜯어 없앨 하등의 이유가 없다. 더구나 임금의 어제가 쓰인 부분이며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서책을 뜯어 버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것은 원래 소유자인 김 대중 님 집안에서는 대대로 모든 책 첫 장에 장서인(11쪽에 사진)을 찍어 놓았는데, 이 장서인을 없애기 위해 첫 장을 뜯었다는 전언이 훨씬 설득력이 높다.

4. ‘뒷면에 다른 내용의 글을 써 두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지금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 실물을 보고 조사할 수 없으나, 해례본을 살펴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뒷면에 한글로 낙서처럼 쓰인 것이 여러 장 나타나는데 무엇인가를 일정한 배열로 베껴 썼고, 또 앞면 여백 부분에 낙서처럼 쓴 한문 문장과 '대학'의 한 구절이 쓰인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이 책 몇 장의 뒷면에 쓰인 한글 가운데 서체가 다른 부분이 보이는데, 이 글씨의 출처는 김 대중 님의 증조모인 도목 배씨의 친정 집안에서 가야리 광산 김씨 집안으로 보내온 한글 사돈지로 배접을 붙여 놓은 것이다.

이 사돈지 이야기는 기존 발견 경위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주장이다. 이를 확인하면 이 원본의 소장처는 증명이 될 것이다.

5. ‘세종대왕 어제 서문의 첫 장이 없는 것을 원본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 훈민정음 해례본'의 세 번째 장의 훼손된 정도로 볼 때, 앞의 첫째 장과 둘째 장도 훼손 상태가 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세 번째 장의 책을 꿰맨 부분을 통해 보면, 앞의 두 장은 책 면의 왼쪽 밑 부분을 제외한 오른쪽 일부분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처럼 중요한 내사본은 원칙적으로 당연히 훼손된 부분에 배지를 넣어 원본을 살리면서 배지에 책 판형을 그려 넣어 복원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 방식을 취하지 않고 두 장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역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책 오른쪽 밑 가장자리에 찍힌 장서인을 없애려고 한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Ⅳ. 오백년 소장한 긍구당 종손 김 대중 님의 주장

10년 전 김 대중 어른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긍구당의 '훈민정음' 소장 내력 및 구전되는 증언들을 대략 모아 보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안동 와룡산 앞 긍구당 종손들이

500년 가까이 소장했던 종택

 

 

1. 1991년 10월 18일에 긍구당 종손 김 대중 어른으로부터 받은 답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 군이 알고자 하는 훈민정음 원본 관계는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지네. 지나간 과거사를 해명할 길이 없고 다만 애타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기억하였다가 편지하니 참으로 고맙네.

현 사회가 알고 있는 와룡면 주하동(주촌) 이 한걸 댁은 우리 셋째 고모의 시댁일세. 바로 이 한걸 씨의 삼남 이 용준 씨가 나의 고모부일세. 이 고모부 되는 이가 선전(지금의 국전)에 특선을 할 만큼 글씨도 잘 쓰고 글도 잘했네. 그러므로 조부(필자 주: 김 응수, 1880~1957)께서 (필자 주: 사위를) 사랑하여, 오시면 책방에서 마음대로 책을 보게 하였다네.

그 분이 이런 점을 기회로 '훈민정음' 원본과 '김매월당집'을 가져갔네.

 

정음 원본에 앞에 두 장 없는 것은 우리 집의 책에는 앞 첫 장에 꼭 장서인을 찍어 놓네.

말짱한 책에 앞 장이 없는 것은 증인을 소멸하고자 함이 분명하고, 그리고 더 확실한 증거는 '훈민정음' 원본의 떨어져 부푼 곳에 언문 편지로 배접해 놓았네. 그 편지 내용은 우리 증조모께서 도목 배씨에서 오셨는데 도목서 우리 집으로 사돈 간에 하신 편지를 가지고 부해(책 떨어진 곳을 안으로 발라 놓은 것) 놓았다네. ……

내가 어릴 때 조부께서 서(婿)군(이 용준 씨)에게, “너 이놈! 공부한 선비가 남몰래 책을 훔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을 하지 말아라!” 하시면서 꾸중하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네. ……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이렇게 억울한 일이 발계(필자 주: 發啓)될 날이 있을까! 지금 내 심정은 책을 찾자는 것이 아닐세. 책의 출처가 우리 집이었다는 것만 세상이 알았으면 하네.

 

 

한 편, 전화를 통해서 “그 당시 이 용준이 울면서 ‘사위도 반 자식인데 너무하다’면서 석양이 지던 길을 셋째 고모를 데리고 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시며 그때 보았던 정황을 알려 주셨고,

또 당시 '훈민정음 해례본'을 두고 “장인 김 응수 옹과 사위 이 용준 간의 불미스러운 일은 그 행위가 심정적으로 괘씸하였지만 두 옹서(翁婿)간의 일로 치부되었고, 더구나 이 용준이 스승인 김 태준을 따라 월북함으로써 이 사건은 두 집안간의 말못할 일화로 남아 향중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수면 속에 잠기고 말았다.”고 하셨다.

2.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500년 간 소장해 온 긍구당 집안 내력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 광산 김씨 긍구당 가문의 장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관한, 당시 안동군 와룡면 가야리에 소재하는 긍구당은 광산 김씨가 오백 년 간 세거하여 오던 종가이다.

대대로 문한이 이어져 온 이 가문에 특별히 드러난 인물로는 국문학 작품을 다수 남긴 유일재 김 언기(1520~1588) 님의 장남 갈봉 김 득연(1555~1637) 님을 들 수 있다. 갈봉은 당대 필명이 있던 문인으로 국문 가사 「지수정가」 1편과 시조 63수를 남겼다. 본디 한글에 대한 애착과 문학적 소질을 겸비한 선비며 그의 생존시에 이 ꡔ해례본ꡕ을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 대중 어른은 갈봉의 동생 만취헌 김 득숙(1561~1649)의 14세 종손이다. 이 어른은 갈봉 김 득연의 서적과 유묵 들을 모두 보관해 올 뿐만 아니라, 현재 여러 가지 언해본과 가사 등을 소장하고 있다.

김 대중 어른의 조부 소계 김 응수 공은 안동에서 기미 만세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9인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이 의거로 안동 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치아가 모두 빠져나갔었고, 안동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구형 받아 미결수로 7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애국지사의 울분을 삭이고 있었던 그는, 오직 후진 양성에 일생을 보냈다.

그는 1934년에 자신의 셋째 딸과 같은 면 주하리에 세거하던 진성 이씨 이 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의 혼인이 이루어지자, 문재가 뛰어난 사위를 사랑하여 긍구당의 책방에 언제든지 나들게 하며 공부를 독려하였던 것이다.

3. 긍구당 집안에 내려오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계된 후손의 증언들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1) 위에서 설명을 하였지만, 김 대중 어른은 '훈민정음 해례본' 몇 장의 뒷면에 배접으로 붙은 한글 글씨는 증조모인 도목 배씨의 친정 집안에서 가야리 광산 김씨 집안으로 보내온 한글 사돈지라고 증언하고 있다. 기존 발견 경위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주장으로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2) 세종대왕 어제 서문을 이 용준 님이 썼다고 하는데, 이 용준 님이 손수 쓴 글씨가 현재 긍구당에 많이 남아 있으니, 그 글자를 대조해보면 자주 서고에 나들었음을 알 수 있고 이 용준 님의 훈민정음 첫째 장 위조 사실도 증명할 수 있다.

(3) 김 대중 어른의 조부 김 응수 공이 이 용준 님에게 평소 긍구당 책방에 나들게 하며 책을 빌려주었다는 증거로는, 현재 긍구당에 이 용준 님이 토를 달고 공부한 '맹자'가 남아 있으므로 이를 증거로 삼을 만하다.


(4) 이 용준 님이 가져간 책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김매월당집'인데, 여기에는 장서인이 찍혀 있었다.

그 장서인의 내용은 “光山后人”, “金致祥印”, “聖應家藏” 등이다. 이 용준 님이 '훈민정음 해례본' 외에 '김매월당집'을 가져갔다는 것은 새로운 증언이다.

Ⅴ. 결론

'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비록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과 훈민정음 해례의 두 편이 필사된 책이지만,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증명하고 한국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한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지대한 공헌은 한글을 애용하고 수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전해 온 문헌을 소중하게 간직해 온 한 가문의 정성으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럼에도 그러한 가문의 노력은 이제까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이 책을 통해 빛을 본 것은 다만 책을 가져간 자와 거금을 들여 고서를 수집한 수집가의 공로였고, 묵묵히 조상 대대로 전해진 문헌과 문화를 소중하게 지켜 온 사람들의 말없는 노력은 간과되어 왔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살아온 사람들이 제 조상의 문헌에 그리도 관심 없고 그리도 무심하여 왔단 말인가? 아니다. 조상들이 남긴 문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조상들이 지켜 온 말과 글을 소중하게 다듬어 가려는 사람들은 도처에 있었다. 그 한 집이 긍구당이다. 그럼에도 그 소중한 '훈민정음'을 소중하게 간직해 온 노력은 무시되고, 그 책을 남몰래 가져가서 세상에 알린 것을 공으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이러함에도 아직까지도 그 진실이 잘못 알려져 있고 또 그것을 밝히려는 노력도 없다. 이는 심히 송구할 따름이다.

이 용준 님이 서문 말미에 “便於日用耳”를 “便於日用矣”라고 오서한 것은 진실을 밝히라는 하늘의 뜻인지, 아니면 첫 장이 자신의 위서임을 알리려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양심의 결과물인지 알 길이 없다.

거듭 확인하거니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 한걸 소장본이 아니다. 이 책은 현재 경북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에 세거하는 광산 김씨 유일재 김 언기(1520~1588)의 차남 만취헌 김 득숙의 종가인 긍구당 종손들이 500년 가까이 소장해 온 보책으로서, 김 대중 어른의 조부인 소계 김 응수 옹의 소장본이 분명하다.

끝 으로, 이 책은 시골구석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한 집안에서 500년 동안 보관하며 배접을 하는 등 소중하게 간직해 온 책임을 밝힌다. 이제 이 책의 올바른 소장처와 그 발견 경위가 제대로 밝혀져서, 민족의 글자인 한글의 내력에 대한 연구 방향이 한 치의 오류가 없이 바르게 서고, 아울러 우리 민족 문화를 지극히 소중하게 보존했던 한 가문의 정성이 세상에 올바르게 알려지기 바란다.  

 

 

출처:부산동래여중 박영진교사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에서

참조:다음카페 안동와룡산 문화와 정서에 

 

출처 : 행복이 샘솟는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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