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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제 1부 잊혀진 무장독립전쟁기지 |
▣방송 : 2011. 8. 11(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글, 구성 : 최미혜 작가 ▣연출 : 임기순, 이승하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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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만주 산골 오지에 무장항일 독립전쟁기지가 건설된다.
1911년 6월 10일,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된 독립군 신화, 신흥무관학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총을 든 대한제국의 청년들, 그들은 어떻게 무장 독립전사로 키워졌나?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은 무장항일 독립운동의 거점, 신흥무관학교. 서간도에서 북간도, 만주 일대에서 잊혀져가는 흔적과 자취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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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흔적을 찾아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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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길림성 합니하의▲ 3D로 복원한 당시 신흥무관학교 모습 옛 터 신흥무관학교 중국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
여느 농촌 마을과 다름없는 이곳은 100년 전,
최정예 독립군을 길러낸 역사의 무대였다.
하지만 오랜 여정 끝에 현장을 찾은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물론 동행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허탈하고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미 중국 땅이 되어버린 그곳에 우리 역사의 현장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만주 무장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신흥무관학교 터는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참 너무하네요. 역사도 잊혀졌지만 아무것도 없으니 더 마음속에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터도 잊혀져 버렸네요” -정철승, 신흥무관학교 교장 윤기섭의 후손
“정말 사람 안사는 데 가서 (독립운동)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그런 가운데 성과를 거뒀다는 게 참 자랑스럽습니다” -이준식, 신흥무관학교 교관 지청천의 후손
오직 옛 기억을 간직한 주민들만이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어렴풋이 증명해주고 있다.
“저기에 원래 항일 무관 학교가 있었어요. 저희 할아버지도 예전에
여기에 사셨어요” -합니하 부근 ‘고려촌’ 마을 주민
<역사스페셜>은 만주 일대 현지 취재와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독립군 양성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를 총 2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
■ 1911년 6월, 옥수수 창고에서 독립군의 신화가 시작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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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한 신민회. ▲ 3D로 복원한 교실 내 부 모습왼쪽부터 이회영, 이동녕, 이동휘, 양기탁
1910년 겨울,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비밀 조직 신민회는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계획한다.
노선은 대일(對日) 무장독립투쟁, 그 무대는 중국 만주벌의 서간도.
국내에서 자행되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해 해외로 눈을 돌린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후, 신민회 간부 중 한사람인 이회영은 서간도를 둘러본 뒤 구체적인
망명계획을 세운다.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집안은 대대손손 정승과 판서를 지낸 최고의
명문가였다.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는 부귀영화 대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이국땅에 이방인으로 자리를 잡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당시의 절박한 상황은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의 자필 수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 부동산을 방매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요. 한 집안 부동산 가옥을 방매해도 소문이
자자하고 하속의 입을 막을 수 없는데다 (일제의) 조사는 심했다” 이은숙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
중국 토착민들의 경계와 일본의 감시 속에 1911년 6월,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연다.
대외적인 공식 명칭은 ‘신흥강습소’.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무관학교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숨죽이고 있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는 첫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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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청년들이 최정예 군사로 거듭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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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 생도반장 ▲ 학생들의 군사 훈련 모습 재연 원병상의 수기
교육과 훈련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산 속 연병장에서 철저한 군사 교육이 실시됐다.
“넓은 연병장에 김창환 교관의 구령 아래 주로 각개교련과 기초 훈련을
했고, 야외에서는 이 고지, 저 고지에서 가상의 적에게 공격전, 방어전 등
전쟁연습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흥무관학교 생도반장, 원병상의 수기
우여곡절 끝에 독립전쟁기지를 건설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만주의 혹독한 추위와 부족한 식량이 문제였다.
그들에겐 학교생활 자체가 투쟁이었다. 훈련을 책임졌던 교관 김창환의
일화는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짐작케 한다.
“아버님에 관한 얘기 중에, 너무 흉년이 들어서 군량미가 없으니까
동냥을 해서 학생들이 손발톱이 다 빠졌대요.
아버님께서 그것들을 실로 꿰서 칠판에 걸고는, ‘내가 이만큼 해서
너희를 공부 시키니까 열심히 하라’고, ‘우리나라를 위해서 살자’고, ‘
다같이 살자’고 하는 거니까…“ -황명수,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창환의 막내 며느리
<역사스페셜>은 신흥무관학교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농교육
사진을 통해 당시 천연 요새였던 교사(校舍)를 복원하고, 학생들의 치열하고 혹독했던 훈련 과정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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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를 맞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지청천과 김경천의 합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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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청전과 김경천 ▲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진..
신흥무관학교가 전성기를 맞아
본교를 이전한 곳이다.
1919년 5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일본군
당국과 조선총독부를 충격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군 장교 지청천과 김경천이 만주로 망명한 것이다.
국비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이들은 조선인으로서는 밟기 힘든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한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목숨을 건 망명이었다.
일본군 헌병대는 지청천과 김경천에게 5만엔의 현상금을 내건다.
김경천의 수기에서 망명을 결심한 당시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내 자신도 15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이날을 기다려 왔다” 김경천의 수기 <경천아일록>, 1919년 3월 1일 직후
생사를 건 탈출 끝에 합류한 두 엘리트 군인으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독립의 열망에 일본의 최신 군사 교육법까지 더해져 전례 없이 강한 군사전
문기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후 이들은 독립군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독립운동
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다.
또한 많은 한인 청년들이 만주로 모여드는 도화선이 된다.
이 때문에 신흥무관학교는 본교를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로 옮기고 두
개의 분교를 두는 등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
■ 독립군 전투사의 대승첩, 청산리 전투의 대승을 이끌어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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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승전 기념 사진
만주 일대 무장독립군의 세력이 날로 확대돼가자 일제는 독립군 진압을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만주에 출병시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에 김좌진이 이끌던 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는 당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다수 포진돼 있던 서로군정서에
도움을 요청한다.
러시아에서 사들인 체코제 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지만 무장독립군으로
교육시킬 교관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북로군정서는 독립군 양성소인 사관연성소를 마련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관들을 중심으로 실전과 같은 군사 교육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1920년 10월 독립군 전투사의 한 획을 그은 청산리
대첩의 기폭제가 되었다.
“실제로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싸울 수 있는 그런 기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런 데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겁니다”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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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제 2부 만주벌 이름 없는 독립전사들 |
▣방송 : 2011. 8. 18(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글, 구성 : 최미혜 작가
▣연출 : 이승하, 임기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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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 대한제국의 청년들!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을 맞아 망국(亡國)의 시기, 이름 석 자 남기지 못한 채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만주벌 전사들의 흔적과 자취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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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백두산 깊은 산속에 정예부대 양성을
위한 특별 군영을 마련했다.
실질적인 항일무장투쟁 준비를 위해 ‘백서농장’ 이라는 독립군 비밀기지를 세운 것이다.
사방 200리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에 위치한 백서농장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385명이 입영, 대일 무장투쟁이 대비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극한 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 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
■ 신흥무관학교 출신들,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다! |
1919년 봄, 3.1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의 함성은 국경 너머 만주벌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0년 12월, 밀양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내외 무장 항일 투쟁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조선총독부 파괴와 요인 암살, 일제의 심장부를 강타한 이들은 바로
‘의열단’이었다.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김원봉이 단장으로 추대되어 ‘5파괴 7가살’ 이라는 행동목표 아래 암살과 일제 기관을 직접 타격하여 민중의 힘을
이끌어 내겠다는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단체였다.
-독립군 부대 첫 승전보를 울리다!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항일 무장 투쟁의 첫 승전보를 타진한 봉오동 전투.
당시 독립군 부대는 대패한 일본군 지휘관인 야스카와 소좌가 기록으로
남길 만큼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독립군)은 상당히 훈련되어 700~800m 거리에서도 사격을 했고 지형을 이용한 방어가 상당하고 전투에 용감히 임함
야스카와 소좌는 독립군이 사격술과 지형지물에 능하고 전투 의지 또한
상당히 강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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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벌 항일의지를 꺾어라! - 일본군의 불령선인(不逞鮮人) 대토벌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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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락각서(天樂覺書)
날로 더해가는 독립군의 열기를 의식한 듯 일본 또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일본은 경찰과 정규군으로는 부족해 중국 산세에 밝은 현지인을 포섭하고 만주에 일렁이는 항일의지를 잠재우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에는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돼 있다.
일본 낭인 나카노가 중국 마적과 손을 잡고 만주 지역 조선인과 독립군
학살에 나선 것이다.
일본 낭인 나카노의 수기인 <천락각서天樂覺書>는 이 당시의 무참했던
살상의 진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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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승첩, 청산리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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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리 전투 승전 기념사진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한 전투상황 보고서를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령관 김좌진 사령관 부관 박영희 / 대한제국 육군 부위 출신, 신흥무관학교 교관 역임 연성대장 이범석 / 중국 운남성 육군강무학교 기병과 졸업,
신흥무관학교 교관 역임 종군장교 김훈, 이민화, 백종열, 한권원 / 신흥무관학교 졸업 제1중대장 강화린 / 신흥무관학교 졸업 제4중대장 오상세 / 신흥무관학교 졸업, 교관 역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사기록에 따르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은 1,200여 명의 전사자와 2,1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전투를 치른 결과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 훈련된 대한제국의 청년들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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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린의 부인 이정희 여사와 아들 강귀철
-독립운동가의 삶과 죽음 제작진은 부산의 한 병원에서 청산리 전투의 제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강화린의 부인 이정희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평생을 조국을 위해 살았던 강화린,
그는 1960년 어린 남매를 남겨 놓고 눈을 감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이름 없이 떠난 동료들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던 강화린.
이정희 여사는 먼저 떠난 남편의 뜻을 받드는 데 평생을 받쳤다.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세워주기를
바란다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조촐한 추모비를 세웠고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이름 없는 참전자를 찾기 위한 운동을 펼쳐왔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최후의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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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김동삼 후손들
“나라 잃은 몸이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나 죽거든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백서농장을 건립한 만주독립군의 거장이었던 김동삼은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 이감돼 복역하던 중 그곳에서 순국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해 줄 가족조차 국내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만해 한용운이 나섰다. 죽음을 무릅쓴 용기였다.
그는 자신의 거처였던 심우장으로 김동삼의 시신을 옮겨 장사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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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개설 이후 3,500여 명의 인재를 키워냈다.
이들은 청산리 전투 참전은 물론,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의열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하며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 이름 석 자 남기지 못하고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눈감은 이들.
그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혔지만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는 우리
독립군의 역사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