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스페셜·추적

최윤덕, 조선의 국경을 세우다.

설레임의 하루 2011. 9. 4. 01:43

  최윤덕, 조선의 국경을 세우다  
방송일: 20110901  
   


 최윤덕, 조선의 국경을 세우다


 

▣방송 : 2011. 9. 1(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신성필, 이동관 PD
▣글, 구성 : 박남숙 작가

------------------------------------------------------------------------

 

조선이 낳은 최고의 성군 세종!
그가 이뤄낸 위대한 업적,
4군 6진 개척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 국경선의 완성.
그리고 세종의 북방영토 개척의 분수령이 되었던
1433년 4월 파저강 야인토벌!

조선의 1만 5천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파저강 토벌의 총지휘관, 최윤덕!
서북방의 국경선을 확립한 4군 개척의 주역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최윤덕은 낯선 이름이다.

이 땅의 국경선에 새겨진 역사,
그리고 국경선을 세운 주역, 최윤덕 조명한다!

 

■ 세종, 마침내 여진과의 전쟁을 결심하다!

 

▲ 조선시대 북방지역의 군사형세도를
  그린 <요계관방지도>

▲ <척경입비도>의 공험진 선춘령에
  비를 세우는 장면

조선 초, 국경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남쪽에는 고려 말기부터 이어진 왜구들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북으로는 여진족들이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내려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특히 여진족은 조정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여진은 고려 때는 세력이 강성하여 금이라는 나라를 세웠었고, 후에는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했을 만큼 막강한 세력! 당시에는 만주지역에 부족단위로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만큼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언제든 조선을 위협할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만큼 조선으로서는 여진족은 경계대상일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여진족의 잦은 침입으로 피해가 심각했던, 조선의 최북단 방어진지였던 경원부를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오갔을 정도! 하지만 "영토는 한 치의 물러섬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세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던 1432년 겨울,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파저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이 대거 여연에 침공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평안도 지역에서는 처음 당한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인 데다가, 침입한 세력이 조선의 울타리 구실을 하는 대가로 생활물자를 공급받으며 생활해오던 오랑캐였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세종! 여진과의 전쟁을 결심하는데...

 

■ 최윤덕이 이끈 조선의 1만 5천대군, 파저강의 여진족을 정벌하다!

 

▲ 현재의 파저강

▲ <삼재도회>에 그려진 여진족

1432년 여진의 추장 이만주는 기병 400여기를 이끌고 조선의 영토에 침입하여 조선의 백성을 살해한다. 이에 파저강 일대의 여진족을 정복할 것을 선포하는 세종. 파저강 정벌이라는 막중한 임무는 당시 평안도절제사였던 최윤덕에게 맡겨졌다. 결과는 183명의 여진족 참살, 248명의 생포, 그러나 조선의 피해는 4명에 그치는 대승을 거뒀다. 전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오랜 세월, 변경에서 여진족을 방어했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최윤덕의 작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저강의 험준한 산, 곳곳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 흩어진 부족들이 힘을 합세해 대항할 수 없게 1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기습으로 일거타진 하는 작전을 펼쳤다. 파저강에서의 승전보를 들은 세종은 곧바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전반에 걸쳐 국방 요새인 4군 개척 작업에 착수한다. 파저강토벌에는 여진족 정벌이상의 의미, 북방영토 개척이라는 세종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인데...

 

■ 조선시대에도 권총이 있었다? - 파저강토벌을 승리로 이끈 휴대용 개인화기 세총통

  

▲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에서 발굴된 세총통

▲ 조선시대 편전

세종의 북방 영토 개척은 화포의 발전에도 박차를 가하게 한다. 이때 개발된 조선시대의 신무기 세총통! 전체 길이 14센티미터, 구경은 0.9센티미터로 조선시대의 화기 중 가장 작은 크기다. 오늘날로 따지면 휴대용 개인화기, 권총과 같은 것이었다. 본래 적진에 침투하는 정찰병들을 위한 무기로 고안되었지만 이후 그 휴대의 간편성으로 기병들이 주로 사용하게 된다. 신속한 기동력이 필요한 파저강 전투의 기습작전에서도 세총통은 큰 활약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적에게 비밀이 누설될까봐 국경선 지역에서는 연습조차 금했다는 조선의 비밀병기, 편전도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최윤덕의 파저강토벌을 승리로 이끈 조선의 첨단 무기들을 만나본다.

 

■ 세종의 제갈공명, 최윤덕은 누구인가?

 

▲ 현재 압록강 경계에 세워진 비석

▲ 종묘에 배향된 최윤덕 위패

4군 개척에 큰 공을 세웠던 최윤덕은 오랜 세월 전장에서 실전을 쌓아왔던, 준비된 무장이었다. 그는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원종공신에 올랐던 무관 최운해의 자식으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전쟁터를 누비며 성장한다. 또한 세종 1년에는 삼군도절제사 신분으로 유정현, 이종무 등과 함께 대마도 정벌에도 참여했다.
파저강토벌을 승리로 이끈 최윤덕은 그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된 이후, 좌의정에까지 오른다.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최윤덕이지만, 그가 정작 한양의 조정에 머물러 있던 시간은 불과 1년도 안될 정도다. 70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대부분의 세월을 변방에서 보내면서 국경선을 정비하고 경계하는데 힘썼기 때문인데... 세종의 굳은 의지와 최윤덕을 비롯한 수많은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개척한 국경선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땅에 새겨진 역사, 국경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